명상/법정스님

2012. 4. 6. 20:0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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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 법정스님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사물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내 내면의 흐름을,
내 생각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보리달마는 ' 觀心一法 總攝諸行 ' 이라고 말했다.
'마음을 살피는 한 가지 일이 모든 현상을 거둬들인다'는 뜻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안으로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 우리는 이것을 일과 삼아서 해야한다.
모든 것이 최초의 한 생각에서 싹튼다.
이 최초의 한 생각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명상이다.

까비르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을 보러 정원으로 가지 말라.
그대 몸안에 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다.
거기 연꽃 한 송이가 수천 개의 꽃 잎을 안고 있다.
그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
수천 개의 그 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팎으로 가득 피어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안으로 살피라는 소리이다.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으라, 수천 개의 꽃잎 위에 앉아서
정원 안팎으로 가득 피어있는 아름다움을 보라.
그 아름다움을 묵묵히 지켜보라는 뜻이다.
명상은 안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안으로 충만해지려면 맑고 투명한 자신의 내면을 무심히
들여다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명상은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훈련이다.

명상은 절에서, 선방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서 겹겹으로 둘러싸인, 겹겹으로 얽혀있는
내 마음을 활짝 열기 위해서 무심히 주시하는 일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명상이라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스스로 늘 지켜보는 일이다.

다음은 사랑의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이 몸이란 무엇인가.
이 육체라는 것은 마치 콩이 들어찬 콩깍지와 같은 것이다.
수만 가지로 그 겉모습은 바뀌지만 생명 그 자체는 소멸되지 않는다.
모습은 여러 가지로 바뀌나 생명 그것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은 우주의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불멸의 영혼을 어떻게 죽이겠는가.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 ,
자기 영혼을 맑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그리고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면 죽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연꽃은 아침 일찍 봐야 한다. 오후가 되면 벌써 혼이나가 버린다.
연꽃이 피어날 때의 향기는 다른 꽃에선 맡을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그리고 연잎에 맺힌 이슬방울, 그것은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답다.
또는 비오는 날 이렇게 우산을 받고 연못가를 배회하고 있으면

후득 후득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명상은 바로 마음을 열고 '연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일과 같다.
사랑이 우리 가슴에 싹트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진정한 탄생이고 부활이다.
사랑이 우리 가슴속에서 태어나는 순간, 다시 말해 겹겹으로 닫혔던

우리 마음이 활짝 열리는 순간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사랑과 거듭남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이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 삶의 터전이다.
우리가 마음의 수양을 하고 개인의 수행을 한다는 것도 결국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서 세상에 도달하라는 것이다.
자기자신에만 멈추라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