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일/현정선원

2012. 6. 1. 00:1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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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1
원각경을 읽다가, '안이비설신의가 모두 인연소생이라서 곧 안계, 이계 등 육근,

식이 모두 환(幻)'이라는 부분에서, 

 인연생기의 중중무진 영겁이 눈속의 눈, 귀 속의 귀를 가득 채우고 있으나

변하고 변할 뿐 도무지 실체가 없으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지만 모두가 환상이구나.

환상이지만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춥습니다.


<답>
모두들 꿈속에서 '있다'고 하지만, 꿈을 깨고 보면, ― 즉 성품(性品)을 보고 나면, 일체의

형상(形相)은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간에 모두가 빈 이름 뿐이요, 실다운

건 하나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사가 몽땅 다 그렇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것도 결코 예외가 아닌 것이니,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엔 도무지 헤아리고

짐작하여, 말이나 문자로 의논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달마(達磨)는 '모른다'(不識)고 했고, 혜능(慧能)은 '알지 못한다'(不會)고 했던

것이니,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백치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 아니고, 다만 환히 알지만,

도무지 뜻을 지어서, 말이나 문자로 바꾸는 일이 없이, 마치 맑은 거울이 모든 사물을 다만

<있는 그대로> 비추되, 전혀 자취를 남기는 일이 없듯이, 그저 보고 듣는 바가 항상 맑고

깨끗하여, 뒤끝이 자취(記憶)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옛 사람이 이르기를, 「한 법도 보지 않으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니, 비로소

관자재(觀自在)라 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알되 생각 없음>(知而無念)이야말로 여래

일대 교화의 근본임을 알아야 하리니, 초심(初心)들은 모름지기 잘못 알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환화공신(幻化空身)인 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 춥고 덥고, 배고프고 목

마르고 하는 등의 ― 모든 일들은 모두 꿈속의 그것과 같아서 전혀 실다움이 없음을 분명히

깨달아서, 이 모두를 <몰록 여의면>(頓除) 이것이 바로 <실상(實相)의 해탈>이니, 달리 또

무슨 일이 있겠어요? ··· 「어떤 게 아프지 않은 겁니까?」「아야, 아야!」니라.


 

<문>2
일반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화두를 들고 깊은 선정에 들어야 참나(불성, 진여)를

발견할 수 있어서 선문답에 자유자재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선생님의 말씀은 어디에도

찾을 만한 실다운 법이 없다는 쪽으로 제가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정이니 선문답과 같은 것은 필요가 없나요?

아니면 수행의 방편으로 실천해도 되는지요?

 

<답>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은 다만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른 바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모두 이 말씀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초심(初心)들이 필히 알아야 할 것은 곧, 지금처럼 보고 듣고 하면서 깨달아

살펴 아는 이것은 의식(意識)이요, '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의식'은 <'마음'의 거울>에 비친 업(業)의 그림자요,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

고해'(生死苦海)에 빠져들게 한 원흉인데, 사람들이 이것을 아들인 줄로 잘못 알고는,

이것을 좇으면서 스스로 진로환망(塵勞幻網)에 갇힌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도 말씀하시기를, 「범부나 외도들로 하여금 모름지기 식심(識心)이 없게 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요약컨대, '마음'은 늘 그대로요, '생각'은 저절로 비어서, 약을 먹지 않아도 병은

스스로 나으리니, 허둥 허둥 찾아 헤매서 무엇하겠습니까. 그저 지금에라도 한 순간

이나마 조작이 없는 마음에 맡길 수만 있으면, 바로 부처 지혜와 다르지 않으리니,

행여라도 본래 스스로 청정한 마음을 등지고 밖으로 내닫는 일만은 지금 당장 그만둬야

합니다.


-현정선원 법정님의 법문-

 

<문>
학창시절에는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하며 세상을 향해서 자유, 정의, 진리를
목청껏

외쳐댔습니다. 이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생각한 뒤로는 드러나는 모양은 달라도 여전히

돈 等이 싫다하며 意識으로 化身, 報身, 法身을 云云하며 一心을 찾고 구했습니다.

법정님께서 “진리는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비추어 보건 데

이러한 행위도 아무 일 없는 허공에 삿대질하는 꼴임을 알아차립니다만,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여전히 과거의 습관대로 휘둘립니다.

 

<답>
많은 초심자들이 불법의 인연을 만났을 때 겪는 공통적인 방황이 있는데,··· 「불법은

<깨달을 자>도 <깨달을 바>도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여, ― 이 말의 깊은 뜻을 상당부분

수긍하면서도 ― 여전히 종전의 낡은 습관대로, 환화공신(幻化空身)인 이 육신을 <수행의

주체>로 삼고는, 이 허깨비와도 같은 육신을 달달 볶으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훌륭한 과보

(果報), 즉 <구경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애씁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되짚어 보죠. ― 불법(佛法)은 불각(不覺)을 떠나서 정각(正覺)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각자에게 구족히 갖춰져 있는 영각성(靈覺性)을 밝히는 것이 바로 불법의

요체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영각성'를 저쪽에선 '부처'라 하고, 이쪽에선 '깨달음'

이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깨달음'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미혹'

(迷惑)을 타파하고, '무명'(無明)을 소멸하는 것>으로써 '깨달음'으로 삼고, 허구한 날 말

이나 문자 속을 뒤지면서, 마치 물 속의 달 그림자를 건지듯 하는 짓을 쉬지 못하는 겁니다.

 

거두절미하고, ― 깨달음이 있으면 범부요, 깨달음이 없으면 목석(木石)과 같나니, 부처는

<깨달음이 없으므로> 범부와 다르고, <깨닫지 않음이 없으므로> 목석과는 다른 것입니다.

결국 <알되 앎이 없음>이 곧 <참 앎>(眞知)이요, <깨닫되 깨달음 없음>(無覺之覺)이 바로

<참 깨달음>(眞覺)이니, 따라서 원기인(圓機人)은 다만 생각에 즉하여 생각이 없을 따름

입니다. 요컨대, 생각 생각에 앎이 없고, 생각 생각에 머묾이 없는, 이것이 바로 '부처'의

행리(行履)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한 순간이나마 조작 없는

마음에 맡길 수만 있으면, 이것이 바로 '부처 지혜'와 조금도 다름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했던 것이니, 이것이 심요(心要)라, 초심들은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현정선원 법정님의 법문-

 

< 질문 >

'내가 없다'는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 답변 >

믿으시오. 귀향(歸鄕)하시라고,· · · 부처님 말씀이에요.

지금 누가 말합니까? 누가 묻고있어요?··· 전부 밥, 물, 공기 등등의 기운이오.

믿고 안 믿고 하는 게 우선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오? 그러니 묻는 거요,

'무엇으로써 나를 삼았는가?' 하고,· · ·

 

예를 하나 듭시다. 우리가 흔히 자동차(自動車)라고 하는데,· · · 문자 그대로라면

'스스로 움직이는 차'라는 소리요. 그럼 요는 무엇으로써 '스스로'를 삼았는가 하는

거요. 듣기에 자동차 부속품이 2만 가지도 넘는다고 합디다. 그 많은 부속품을 낱낱이

분해해서 늘어놓았을 때, 그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이 자동차를 움직이게 한 걸까요?· · ·

없소. 그 어떤 것도 자동차를 움직이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없소.

다 고만고만한 쇳덩이들에 불과한 거요. 그 쇳덩이들을 한군데 다시 쓸어모으면

움직일까요?· · · 아니오. 아주 묘하게 알맞은 상태로 인연화합 해야 비로소 '부르릉'

하고 움직이는 거요. 자, 그럼 뭐가 움직인 거요?· · · 움직이긴 움직였는데 움직인

놈이 없는 거요.· · · 그럼 움직인 놈이 없는데 어떻게 움직임이 혼자 성립되겠소?· · ·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엔 움직이는 일이란 없다'고 말하는 거요.

 

그럼 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까요? 우리는 이 지구라는 땅갈피에 달라붙어 살아

오느라고 상하, 전후, 좌우의 모든 방소(方所)가 붙박이로 되어있는 거로 여기고 있는

것뿐이오. 하지만 우리의 시각을 조금만 넓히면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소. 우리의 시각을 우주, 허공으로 넓히면 거기에

어디 동서남북이 있고 위, 아래가 있겠소? 그러한 방소가 없으니 어찌 움직임이 있겠냐

말이오. 움직인다는 말은 어느 한 지점에서 멀어져서 다른 한 지점에 가까워지는 것을

말하지 않소? 그러나 도무지 그러한 '지점'을 찍을 수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움직인다

고 할 수 있겠소?

 

여러분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면 허공조차도 없소. 전부가 우리 마음으로 지어낸

바요. 흔히 절대공간이니, 절대시간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그 허공조차도 저 망망

대해에 떠잠기는 한 물거품처럼 여러분 마음속에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업의 그림자인

거요. 여러분이 허공이라 했기 때문에 그것이 여러분에게 허공이 된 것이오. 이 마당에

'나'라는 말이 도대체 어디 붙는단 말이오.

 


-현정선원 법정님의 법문-

 

1

무염 wrote: 질문

 

법정님 더운 여름에 강건 하신지요? 항상 깨어 있는 가르침 감사 드립니다.

머리와 이론 으로는 법정님의 말씀을 이해 하는데, 경계를 만나면 도로

나무 아미 타블 입니다.저는 불교에 대한 서적만도 수백권은 족히 읽었습니다.

물론 법정님의 "그곳은 부처도 갈수 없다"는 밑줄을 쳐 가며 읽고 지금도

수십번을 되풀이 읽고 있습니다만, 읽을 때는 이해를 하는듯 하다가도

경계를 만나면 괴로워 하고, 분노 하며,미칠것 같은 상황에 처 합니다.

어차피 모든것은 공 한것이고, 아니 공 이라는, 이름도 붙을 자리가 없는줄

알면서도 도대체 여여부동 하지를 못하니 이를 어찌 합니까?

물론 여여 부동 하지 못 하는 것도 참 성품 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하루 하루가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처 자식을 거느리고 살다보니,수행자가

못된 것이 한 입니다. 저를 그냥 내버려 두지를 않습니다.

"나" 라는 의식이 미친듯이 춤을 추니 거기에 덧 들여 같이 춤추고 있습니다.

이 의식은 빈 것이고 난 적이 없습니다만, 괴로움을 어찌 하오리까?

아무것도 난 것이 없고, 허공 꽃으로 돌아가지만은, 지금의 괴로움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괴로움도 욕망에서 비롯되었겠지만, 욕망을 아무리 버리려고 하여도

의식이 버리지를 않습니다. 이 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이 없을 까요?

또, 아내와 헤어 지려고하니, 그 동안의 정이 새록새록 솟아 나와서 밤 잠을

설칩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요?

저는 모든 것은 빈 것이고, 비었다는 이름조차 붙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괴로움만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이 괴로움을 말끔히 씻어 주시기 바랍니다.

과연 의식으로 이해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걸까요?

이 의식이 언제나 조용하여 바다처럼 고요 할까요? 

 

법문

 

영리한 의식(意識)으로 헤아리건, 날카로운 지혜(知慧)로 이해하건 만겁(萬劫)에

변함이 없는 당신의 영성(靈性)과 무슨 상관이겠어요?

맑은 거울에 인연 따라 명암(明暗)이 엇바뀌어 비추지만 거울의 <비추는 성품>

이야 어찌 변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범부들이 제 마음의 성품이 본래

변함이 없는 줄 알지 못하고, 즉 심성(心性)이 상주(常住)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변함 없는 <마음의 거울에 비친 그림자>(意識)를 제 마음인 줄 잘못 알고

이것을 좇으면서 헛되이 간과(干戈)를 맞대고 근진(根塵)과 음·계(陰界)를 함부로

건드리면서 견문풍(見聞風)에 나부껴 그 마음이 조금도 자유롭지 못한 겁니다.  

 

모름지기 만법이 성품이 없음을 철저히 깨쳐서, 이 몸과 마음과 이 세상이 몽땅

꿈과 같고 환(幻)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 살피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

몽땅 공적(空寂)하여 이 세상은 끝내 티끌 하나 움직인 조짐조차 없겠거늘,

다시 고락(苦樂)이 어디에 붙겠어요?

어리석은 범부들이 눈에 가리움이 사라지지 않아서 늘 마음 밖에서 법을 보아,

피차(彼此)를 세우기 때문에  항상 각관(覺觀)의 가시에 찔려서 고(苦)를 짓는 겁니다.  

모름지기 무생(無生)의 이치를 철저히 깨쳐서, 지금 면전(面前)에 보고 있는

모든 존재가 남김 없이, 실은 내 마음의 거울에 비친 허망한 <업의 그림자>

(業影)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봄으로써 다시는 바깥의 사물을 반연(攀緣)하고

분별(分別)하는 짓을 지금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현전하는 모든 사물이 법마다 참되고 법마다 여(如)하여,

이야말로 참 부처가 여여한 것이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어요?

 

 

현정선원 법정님의 법문

 

 

 

 

나를 지키는 것이 남을 지키는 것

 

스승의 어깨 위에 긴 대나무 막대가 세워지면 ,

두 제자가 그 꼭대기에 올라가 묘기를 부립니다.

수없이 반복하는 묘기이지만 오늘 따라 두 제자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

 

"스승님,저희들이 떨어져 죽거나 다치는 일은 스승님의 어깨에 달렸습니다.

실수 없이 잘 보호해주십시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

 

"나도 너희들을 보호해야겠지만, 내 평생 쌓아온 이 묘기의 인생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것은 너희들 손에 달려 있다 .

너희들도 나를 잘 보호해야 한다 .

각자 가 실수 없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남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이용범(소설가)

 

 

 

 

길에서 만난 두 왕

 

옛날,어느 왕이 마차를 타고 암행을 하다가

좁은 시골길에서 다른 마차와 마주쳤다.

암행 중임을 깜박 잊은 왕은 당연히 상대방이 비켜나기를 기다리며,

얼른 양보하지 않는 앞 사람에게 따지듯 물었다 .

 

"너는 누구냐?'

"나는 왕이다 ."

"내가이 나라의 왕인데 ,너도 왕이라면 어느 나라를 다스리느냐?"

"나는 내 자신을 다스리는 왕이다 ."

".....!"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보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자가

더 훌륭하다고 합니다 .

수많은 유혹들이 나에게 손짓하는 세상,

오늘도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는 왕'의 자리에서 쉽게 비켜서지 맙시다.

 

- 이정우(군승법사)

 

 

Ong-Heya 옹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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