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산스님 법어 법문
선 수행은 머릿속으로만 이해하는 개념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 얼마나 학위를 많이 가졌느냐에 의존하지 않는다. 선 수행은 지식이나 명석함과는 다르다. 선 수행은 직접적으로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본 성품을 깨닫는 것이다. 선이 말이나 단어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니 때로는 ‘반지성적’(anti-intellectual)이라고 꼬집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선이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고 해서 말이나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말과 단어 이전에 먼저 ‘마음공부’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과 단어를 어떻게 우리의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쓰느냐 하는 것이다.
즉, 어떻게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쓰느냐 하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기 전 우리의 본 성품을 깨달은 후에야 말과 단어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공부를 해나가는 데에는 네 가지 방법, 즉 문(門)이 있다.
첫째는 간경문(看經門)으로 경전을 읽으면서 마음을 깨달아 가는 것, 둘째는 염불문(念佛門)으로 염불을 통해 마음을 깨달아 가는 것, 셋째는 진언문(眞言門)으로 진언을 외워 마음을 깨달아 가는 것, 넷째는 참선문(參禪門)으로 참선을 통해 마음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물론 참선이 마음공부의 지름길이긴 하지만 경전을 읽고 진언을 외우고 하는 것 모두 진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단지 문자에 집착하면 경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글을 보는 것에 되고 염불에 집착하면 소리와 이름, 모양에 집착하게 된다. 진언이나 참선 모두 마찬가지이다. 참선을 할 때도 참선에 집착하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본 성품을 깨닫는 것이다.
나라마다, 문화마다 먹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배가 부르냐 하는 것이다. 마치 달을 보려 하는 사람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해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떤 것에도 집착해선 안 된다.보리수나무 아래서 본성을 깨달은 부처님은 그 후에 많은 설법을 하셨는데, 그것을 기록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경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그러나 경전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어떤 교리나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경전을 읽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말과 단어에 집착하지 않고 경전을 읽으면 경전은 우리 수행에 도움이 된다. 그럴 때라야 경전은 우리의 신념을 강하게 하고 우리 인식을 보다 넓고 크게 만든다.
생각 이전의 마음으로 경전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고 따지고 집착하고 원하면 경전은 곧바로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수행 정진’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관념·신념·철학 모든 것을 벗어 내려놓아라. 심지어 부처조차도 내려놓아라.
경전에 나와 있는 말에 집착하는 것이 가장 나쁜 ‘불교병’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지니고 순간순간 오직 중생을 도울 뿐이다.
경전을 읽되 한 단어에도 집착해선 안 된다. 오직 수행, 수행하라. 오직 모를 뿐! 진언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매일 절에 가서 ‘관세음보살’이니 ‘옴 마니 반메훔’을 왼다.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이나 ‘옴 마니 반메훔’에 집착하면 안 된다.
더군다나 진언을 외면서 뭔가를 바라서도 안 된다. ‘관세음보살님이 돈을 벌어다 주시겠지.’ ‘관세음보살님이 행복을 가져다 주시겠지.’ ‘관세음보살님이 내 아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주시겠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진언을 외면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이것은 오직 ‘나’ ‘내 가족’만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뭔가 바라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행은 참 수행이 아니다.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는 수행은 결국 ‘장애’를 만드는 것이니, 그것은 고통의 바다에서 우리를 구해 주지 못한다. 생과 사를 끊어놓지 못한다. 진언을 욀 때 항상 우리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지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자꾸 나로 하여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외게 만드는가?’
이런 큰 의문을 가질 때 진언 수행은 진정한 수행이 될 수 있다. 모든 생각을 끊고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 이전의 우리 본성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진언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과 물음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참선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선 수행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먹고 마시고, 서 있거나 누워 있고, 테니스를 치는 모든 일이 선 수행에 포함된다. 선 아닌 것이 있는가?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선 수행에 대해 자기만의 관념을 가지고는 이것에 집착한다. 남전 스님은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라고 하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남전 스님이 하신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변명거리로만 사용하고 수행 정진을 게을리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선 수행이 아주 어려운 육체적 수행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군대식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방석에 한 자세로만 앉아 전혀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믿는 것이다.
내 제자 중 한 사람은 일본에서 선 수행을 했는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움직이지 않아야 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다리의 고통을 참을 수 있느냐에 따라 깨달음을 얻는 정도가 다르다’고 하는 스승의 말에 따라 수행을 하다 두 다리 근육이 마비되었다.
이는 옳지 않다. 그것은 모양과 괴로움에 집착하는 것으로써, 자세에 집착하는 수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위대한 중국의 선사인 마조(馬祖) 스님은 젊었을 때 아주 열심히 참선 수행을 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선방을 떠날 줄 몰랐다. 잠자기 위해 눕는 일도 없었다.
어느 날 마조의 스승이 찾아왔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보시다시피 참선 정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부처가 되고 싶습니다.” “오! 아주 훌륭하구나.”
잠시 후 스승은 아무 말 없이 뜰로 나와 벽돌 조각과 기와 조각을 서로 갈아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마조 스님은 참을 수가 없었다. “스승님,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아니, 어떻게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든다고 하십니까?” “참선으로 부처가 되겠다는 것이나 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는 것이나 똑같지 않느냐?”
순간 마조는 할 말을 잃었다. “스승님, 제 수행에 잘못이 있으면 가르쳐주십시오.” “수레를 끄는 말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채찍으로 수레를 치겠느냐, 아니면 말 잔등을 때리겠느냐?” “당연히 말 잔등을 때려야지요.” “참선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수레는 너의 몸이고 말은 너의 마음이다. 본성품을 깨닫고 진정으로 네 마음을 찾고 싶으면 몸을 다그치지 말아라.”
이 말에 젊은 마조는 큰 깨달음을 얻어 훗날 스승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다. 이처럼 수행에도 방향과 물음이 중요하다. 진정한 선(禪)이란 몸이 앉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앉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특별한 자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일본 선방에서는 앉은 자세에서 나오는 어떤 강렬한 에너지를 얻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어떤 때는 고함을 지르게 하기도 한다. 고함소리가 약하면 수행이 약하다고 다그친다. 그런 방법은 참선에 대한 어떤 관념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참선이 아니다. 무엇이든 집착하면 문제가 생긴다. 참선은 그야말로 긴장을 푸는 것이다. 참선을 특별하게 만들지 말라. 참선 수행을 특별하게 만들면 마음에 장애를 만든다.
부처님은 살아 계실 때 오로지 법에 대해서만 말씀하셨다. 경전을 가르치지도, 특별한 진언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저 법을 듣고 집에 돌아가서 참선을 했다.
나무나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아 했다.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자기의 본성품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과 그의 첫 번째 제자들이 가르침을 얻어 보존하고 우리에게 전해 준 것들이다.
만약 불교 수행을 하고 싶다면 어떤 말이나 단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어떤 기술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문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단계이다.
불교의 개방성과 보편성은 붓다가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진리를 선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간 적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붓다는 진리를 독단적으로 소유 하고 있다고 생각 하지 않았다.
붓다는 진리의 창조자가 아니라 발견자 였다는 점이다.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 하든 출현하지 않든 현상의 본성 현상의 규칙적인 형태나.
조건성 으로서의 연기법은 존재 한다.
이를 여래가 발견 하고 이해하고 드러내 보이고 가르쳤다
「상응부경」여래가 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연기의 진리는 존재 하는 것이다.
진리는 누구나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설사 불교를 만날 인연이 없었든 이도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될수 있다.
........./동대 이용표 교수 의 불교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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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가장 보편성의 종교다.
빈부 귀천 지위 고하를 막론 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진리의 발견이다.
이 보다 솔직하고 진실한 가르침이 있는 가.?
그래서 「천상천하 무여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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