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수공양(廣修供養)-널리 바치고 섬겨라

2012. 6. 22. 21:0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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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나를 사랑하시어] 광수공양(廣修供養)-널리 바치고 섬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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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그리움을 공양드리던 어느 날, 예전에 보현행원품에 광수공양원이 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 행원품에 공양원이 있었지...행원품은 공양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원품 광수공양원 부분을 읽어 내려가던 나는 법공양에 이르러 크게 놀란다. 그때까지 나는 법공양이라면 부처님 또는 선지식들의 법문 내용이 적힌 책을 무료로 나눠 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행원품에서 말하는 법공양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선남자야, 모든 공양 가운데는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 되나니


이른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 잘하는 공양[如說修行供養]이며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공양[利益衆生供養]이며


중생을 섭수하는 공양[攝受衆生供養]이며


중생의 괴로움을 대신 받는 공양[代衆生苦供養]이며


선근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勤修善根供養]이며


보살업을 버리지 않는 공양[不捨菩薩業供養]이며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不離菩提心供養]이니라.



경에 의하면 법공양은 무엇보다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 잘하는 게 그 첫째였다.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 잘하는 것이 공양이라...그렇게 생각하면 일체의 수행법이 법공양 아닌 것이 없다.


오늘날의 불교계에선 수행법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는데 대체로 자신들의 수행법만이 수승하고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일이 많은 것 같다. 관법하시는 분은 관법이, 화두선하시는 분은 화두타파 이외에는 수행이라는 이름조차 부치시질 않는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경허 큰스님 이후 우리나라 불교가 그렇게 흘러왔고 현재 산중에 한 소식 하신 큰스님들께서도 대부분 그러하시니 대중은 그런 견해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불교입문 이래 화두선이 최상인 줄만 알고 가슴에 와 닿지 않고 풀리지 않는 화두를 들고 적지 않게 고생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부처님 말씀대로 하면 다 법공양인 셈이라, 수행의 우열을 따져 무엇하겠는가. 그저 내 자성 부처의 명령(?)에 따라 어느 수행이든 하면 되는 것이니 이제부터는 참선, 염불 등 무슨 수행을 해도 부끄럽지 않을 일이로다...



두 번째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법공양이라...그렇다면 이것 역시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조금 손해 보고 남이 이익을 본다면 그는 이익 봐서 좋고 나는 법공양해서 좋고...내가 지금 하는 사업이 잘 되어 직원 더 고용하고 월급 더 주면 그것도 이익중생이니 열심히 일해 사업 잘 되게 하는 것도 법공양이 되는구나.


그러므로 직업윤리에 대해 더 걱정할 필요도 없겠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야 찾아보면 얼마든지 나올 일이니 그래, 이거 하나도 안 어렵겠다, 언제 한번 해 보자.



세 번째는 중생을 섭수하는 것이라...중생의 괴로움과 상처를 다 안아 주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니, 이것 또한 한번 해 볼 만한 일이었다.


모든 중생을 다 안아 주는 이 법공양은 중생의 어떤 허물도 덮어주고 상처받고 넘어진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이니, 맹세코 내 주위 모든 분들에게 이 섭수중생공양 한번 잘해 봐야겠구나.



네 번째는 중생의 고통을 대신 받아 주는 것인데, 이 말은 너무 엄청난 가르침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공양은 다 하겠지만 이 대중생고공양은 감히 하겠습니다 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중생공양을 하자면서 남의 고통을 몰라주면 되느냐. 그건 위선적이다라고.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남의 고통을 대신 받아 줄 능력이 아직 없다.


물론 버스 간에서 노약자에게 자리 양보하는 것도 고를 대신하는 공양이라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만 남의 고통을 대신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과 자기 희생을 요하는 것이라 아직은 감당할 힘이 내게는 없다.


남이 죽어야 할 자리에 내가 대신 죽는 것이 이런 공양인데 나는 이런 일을 견뎌 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정신박약아만 골라 양자를 받아들인다거나 자신의 재산을 몽땅 털어 노인 봉양하시는 분들을 보면 내 스스로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런 일들은 아직 나로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렇지만 이 공양도 언젠가는 내 입에서 하겠다는 소리가 나오리라 생각되니, 내 원이 자라고 내 법공양이 꽃을 피우는 날 언젠가는 이런 원이 발해지리라 믿는다.



다섯 번째는 선근을 부지런히 심는 공양이니 이 또한 당장 할 수 있는 공양이었다.


지난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웃들과 나쁜 인연을 많이 맺어 왔던가. 복을 짓고 좋은 인연을 많이 지을 일이다. 본래 좋은 인연 나쁜 인연이 없는 것이지만, 또 그렇게 구분할 수도 없고 구분해서도 아니 되지만 여하튼 자꾸 좋은 인연을 지어 나가려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좋은 인연은 멀리서 지으려 들지 말고 바로 우리 주위에서부터 지어 나가야 하니,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어머니 좋은 아버지, 그리고 좋은 사위 좋은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 직장에서도 좋은 상사 좋은 부하가 되면 온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울 것인가.


좋은 인연을 맺어 나가기에도 우리 인생은 충분치 못하다. 그 아까운 시간에 하물며 악연을 지을까 보냐. 우리가 밭에다 씨를 뿌리면 다 싹이 돋지는 않는다. 그 중 일부가 싹이 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니 선근도 이와 같다.


선근의 씨앗이 무수히 뿌려진 뒤에야 비로소 몇 개가 발할지니, 앞으로는 선근만 심어 나갈 것이로다.



여섯 번째는 보살의 일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보살의 일이란 무엇인가?


중생의 번뇌를 없애 주고 보리심을 심어 주는 일이다. 모든 악업에서 중생을 보호하고 선업을 심어 주며 무명의 어둠을 없애 주고 육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모두 보살의 직업(?)이 아닌가. 옳지, 부지런히 보살의 길을 닦아 나가야겠구나.


끝으로, 보리심을 잃지 않는 것이 법공양이니, 언제나 수행할 때 반드시 보리를 이루겠다는 마음을 잊지 않을 일이로다.


본래 맑았던 그 마음, 모든 부처님을 나오게 했던 그 근본 자리를 잊지 않을 것이니, 그것이 바로 보리심을 떠나지 않는 공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원을 잊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원이란 우리 보리심을 밝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법공양 일곱 가지는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행원품에서 말하는 법공양이란 결국 형상을 떠난 것이었다.


형상을 떠나 우리의 본성을 밝히는 일체의 행위가 바로 법공양이요 부처님 기쁘게 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법공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 어떤 것도 부처님의 공양구가 아님이 없다.



부처님은 언제 기뻐하시는가. 중생이 제 모습을 활짝 꽃피울 때 기뻐하신다. 마치 운동 선수가 시합에서 그 동안 쌓은 기량을 활짝 발휘할 때 감독이 기뻐하는 것처럼 중생이 그 본 모습을 활짝 발할 때 부처님은 기뻐하시는 것이다.


번뇌 망상에서 모두 떠나고,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을 긍정과 감사로 맞이하며, 가수는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농부는 논밭에 열심히 씨를 부리고, 어부는 바다에서 그물을 드리우고 근로자는 공장에서 힘차게 기계를 돌릴 때 세상은 모두 평화롭고 부처님은 기뻐서 춤을 덩실덩실 추실 것이다.


부처님이 이처럼 기뻐하시는데 부처님이 기뻐하실 일을 안할 까닭이 없다. 옳지 부처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한번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처음 법공양을 접한 날, 엄청난 충격 앞에 혹시 내가 법공양 해석을 잘못 하지는 않았나 하고 다시 한 번 문맥 앞뒤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러나 틀림없었다. 별로 있지도 않은 한문 실력이었지만 틀림없이 그 일곱 가지가 법공양이었던 것이다.


광수공양원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행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가슴 에이는 그리움이 일 때마다 그저 부처님 명호 부르며 바치기만 하던 것이 부처님께 매일 아침 원을 공양드리는 것으로 발전한다.


부처님 제가 반드시 광수공양 하겠습니다 하고 공부하기 전 아침마다 발원드리는 것.


그러나 사실 나는 어떤 원을 공양드려야 할지도 몰랐으니, 애초에 내게 원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이 없으니 행이 없고, 행이 없으니 과(果)가 있을 턱이 없으니,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나는 맨날 요 모습 그대로일 뿐.



다만 광수공양원을 보고 나서 궁리 끝에 법장 비구나 약사 부처님처럼 나도 부처님께 멋있는 원을 세워 공양드려야겠다 라고 생각했으니, 원을 세우는 일이 바로 보리심을 잃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먼저 남은 생에 부처님께 무엇이든 공양 한번 원 없이 하겠다는 원을 세운다.

 

-보현선생님의 ‘님은 나를 사랑하시어’에서, 불광출판사 刊

 

원글;[님은 나를 사랑하시어]제3장 행원의 노래_다시 만난 행원;광수공양(널리 바치고 섬겨라).

 

[신영복의 그림 사색] 기다림

 


평원을 달리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한동안 달린 다음에는 말을 멈추고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며 기다립니다.

영혼을 기다립니다.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라 합니다.

 

질주는 영혼을 두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영혼을 빠뜨리고 달리고 있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자기의 이유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산책하다가
지팡이로 버섯 하나를 가리킵니다.

‘얘야 이것은 독버섯이야!’


독버섯으로 지목된 버섯이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쓰러진 그를 부축하며 친구가 위로합니다.

비바람 불던 날 그가 보여준 따뜻한 우정을 이야기했지만

쓰러진 버섯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친구가 최후의 한마디 말을 건넵니다.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버섯인 우리들이 왜 ‘식탁의 논리’로

우리를 평가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유(自由)는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길 마음

 

 

 

 

 

도로는 직선이기를 원하고 고속이기를 원합니다.
길은 곡선이기를 원하고 더디기를 원합니다.

도로는 속도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이며

길은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경작되는 인간의 원리입니다.


도로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이라면

길은 자기 자신이 목표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어떤 가치의 하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직선을 달리고 있지만

동물들은 맹수에게 쫓길 때가 아니면

결코 직선으로 달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아름다운 길이어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보람찬 시간이어야 합니다.



 

 

청년시절

 

 

 

 

 

 


한 사람의 일생에서 청년시절이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아무리 성공한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꿈과 이상을 불태웠던

청년시절이 없다면 그 삶은 실패입니다.

 청년시절은 꿈과 이상만으로도 빛나는 시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청년들에게는 청년시절이 없습니다.

가슴에 담을 푸른 하늘이 없습니다.

부모님들은 아이엠에프와 금융위기 때 실직하였고

지금은 수험 준비와 스펙 쌓기 알바와 비정규직이라는

혹독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진리와 희망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부정한 정치권력과 천박한 상업문화를 배워야 하고,

우정과 사랑을 키우기보다는 친구를 괴롭히거나 친구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며 좌절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뿌리가 사람이고, 사람의 뿌리가 청년시절에 자라는 것이라면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사회의 비극입니다.

그 사회가 아무리 높은 빌딩을 세우더라도 꿈과 이상이 좌절되고

청년들이 아픈 사회는 실패입니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사랑 / 홍난파 곡,James Galway,Flute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