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 앓으니 보살이 앓는다.

2012. 7. 14. 12:2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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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중생이 앓으니 보살이 앓는다.

 

 

▣ <<스님~ 불교 수행법 너무 많아 혼돈이 옵니다.>>

 

어느 날 어느 불자님으로부터 신행 상담메일이 왔습니다.

“절에 가면 가는 절마다 왜 수행하는 방법이 다르며, 스님마다

자신의 수행법이 최고라고 하니 너무 혼돈스럽다.”고 했습니다.

 

“ 스님, 어떤 절에 가면 관음기도를 해야 좋다하고, 어떤 스님은 참선이

제일이다. 기도란 그 효험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하십니다.

또 어떤 절에 가니 지장기도 참회를 해야 좋다하고.

또 어떤 스님은 아미타불 정진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또 어떤 법사님은 위빠사나가 좋다고 하고요.

또 절수련이 최고라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기독교처럼 간단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스님 전 지금 불교가 무언지 혼란스럽습니다.

또 어떤 스님은 근본경전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지

대승경전은 뒤에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하니 도대체

불교가 왜 이렇게 복잡한가요?”라고 불만을 털어 놓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지금 위 불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불자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데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문제만이 아니라 삼국시대부터 있어온 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역사적인 특징에서 기인 한 것입니다.

 

 

◇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불교가 변천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부처님의 심법을 중시하는 선종, 또 염불수행을 중시하는 정토종,

남방불교의 위빠싸나, 근본불교를 중시하는 종파 등 그 뿐만 아니라

티벳의 밀교의 영향으로 의식과 진언을 중시하는 종파 등이 난무하니

가히 처음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제경(四諦經)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 범부들은 여러 가지 별개의 진리에 각자 집착(執着)해서, 자기 것은 옳고 다른 사람 것은 그르다 비난한다. 그리하여 이런 고집 때문에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타고난 소경이 코끼리를 보는 것에나 비길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가장 뛰어난, 죽음도 싸움도 대립이 일어나는 일도, 전도(顚倒=뒤집어지는)함도 없는 성제(聖諦=성스러운 진리=사성제 )의 지혜를 나타내고자 하여, 이를 설한다.”

 

 

그렇습니다.

불교를 수행하는 방법이 무엇이든지 그 목적이 중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설한 부처님의 최초의 가르침이 사성제(四聖諦=성스러운 네 가지 진리)입니다.

이것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기초로 하여 설하신 진리의 법문입니다.

 

 

 

● 따라서 근본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또는 어떠한 수행법이든 그 속에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성제(四聖諦)와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그리고 인과의 법칙이란 진리의 말씀이 있으면 그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의 말씀을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진리의 말씀을 벗어나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법문(法門)의 대요(大要)는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부처님께서 위없는 깨달음을 여신 후 48년간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 법문(法門)의 대요(大要)는 안심법문(安心法門)에 있습니다.

 

안심법문(安心法門)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는 사는 그 자체가 고해(苦海)입니다.

 

 

◇ 왜 사는 자체가 고해(苦海)인가? 그것은 인간자체의 생각이나 행동이 모두

우주의 도리에 잘 맞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생고가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우주의 도리에 맞아

이에 따르면 사람이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 부처님은 무상(無常)즉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과법(因果法) 즉 연기법(緣起法)을 설하셨습니다.

 

또 그 사람의 수준에 맞는 많은 대기법문을 많이 하셨습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에게는 선업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는 법문을 하셨고,

수준이 높은 사람은 모든 번뇌를 다 여의고 청정한 마음을 지녀 해탈을 하도록 설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수많은 제자들이 아라한의 과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당시는 지금과 같은 혼란이 없었습니다.

 

 

불교의 방편도 시대변천에 따라 변화해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방편 법문도 결국 세상의 변화에 함께 변천되어 갔습니다.

부처님 입멸 후 원시불교는 계율 자구 하나하나, 교리하나하나를 따지고

또 많은 사람들을 포교하기보다 자신의 해탈에 더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아직 스리랑카나, 미얀마, 태국, 라오스 등 남방불교에 남아있습니다.

 

 

또 부처님 입멸 후 불교가 너무 사변적이고, 수행승단 위주로 흐르자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대승불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인도 북부를 거쳐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여러 가지 경전이 중국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화엄경을 주로 공부한 사람은 화엄종을 세우고, 법

화경을 주로 공부한 사람은 법화종을 세우고,

또 달마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새로 생긴 선종(禪宗)은

“교종은 가치가 없고 오직 참선만이 가치가 있는 불교의 진수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인데, 중국의 각 종파가 국내에 산발적으로 들어오게 되니, 불교의 수행법이 극히 다양하고 또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원효의 회통불교(會通佛敎)는 이러한 혼란을 해결했습니다.

 

신라시대에 이미 불교의 수행방편이 100가지나 넘어 아주 혼란하였는데,

이 혼란한 내용을 일심으로 회통한 분이 바로 원효스님이십니다.

 

원효스님은 하나의 주의주장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원효스님 일심(一心)이라는 바다와 같은 넉넉한 마음,

우리 모두가 한 뿌리라는

대자 대비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불교의 각 종파나 다양한 주의 주장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항상 긍정하지도 항상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론소에서

 “ 여래가 설한 바 일체의 교법은 일각(一覺)의 맛에 들지 않음이 없다. 일체 중생이 본래 일각이었지만, 다만 무명으로 말미암아 꿈 따라 유전하다가 모두 여래의 일미(一味)의 말씀에 따라 일심의 원천으로 마침내 돌아오지 않는 자가 없음을 밝히고자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 불교의 목적은 뭇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하는 것이고, 그 깨달음이

“ 한결같은 맛(一味)이며 길이다. 갈라진 온갖 지류도 끝내는 바다에 이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원효는 모든 불교 종파 대립은 중생의 마음으로 어느 일면 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그 근원을 찾아 일심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다 통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통불교(會通佛敎)입니다.

 

◇ 원효이후 통일신라시대 불교는 어느 정도 회통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신라 말 고려 초에 중국으로부터 선종(禪宗)이 들어오고,

또 동시에 교종도 들어오게 되니 다시 한 번 대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5교 9산입니다.

즉 교종 5개 선종 9개가 서로 자신이 옳다 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 혼란을 또 회통한 분이 바로 고려 말 불교의 중흥조이신 태고 보우선사입니다.

 

 

 

 

오늘날의 혼돈 상태를 회통(會通)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본 침략을 받은 한국 불교가 해방이 되면서 다시 혼란의 상태로 빠져버렸습니다.

지금도 선종을 강조하는 종단의 큰 스님들은 공공연히 참선만이 유일한 부처가 되는 길

이며, 다른 기도나 염불은 허무맹랑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또 중국 정토종의 영향을 받은 정토를 신봉하는 종단에서는 염불만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하게 극락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남방 불교를 공부한 일부 스님들은 위빠싸나의 위력을 주장하고,

또 법화경을 신봉하는 종단에서는 관음신앙 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근 근본불교를 공부한 소장파 스님들이 대승불교는 아예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극단적인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 종단에서 자신의 종단이 가장 부처님의 길을 가는데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일반 불자들은 더욱 혼란하고 나중에는 불교전체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 이미 1,400여 년 전에 원효대사는

<불교의 목적은 뭇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들게 하는 것이고, 그 깨달음이

“ 한결같은 맛(一味)이며 길이다. 갈라진 온갖 지류도 끝내는 바다에 이르기 마련이다.”

모든 불교 종파 대립은 중생의 마음으로 어느 일면 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므로, 그 근원을 찾아 일심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다 통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 인도 근대사의 성자라고 불리는 간디는

“진리는 하나이다. 그런데 그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마치 높은 산을 올라가는데 길이 여러 갈래가 있듯이 하나의 길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집(我執)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법집(法執)에 해당된다.

 

 

불자여러분~

 

●사제경(四諦經)에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봅시다.

 

“ 범부들은 여러 가지 별개의 진리에 각자 집착(執着)해서, 자기 것은

 옳고 다른 사람 것은 그르다 비난한다.

 그리하여 이런 고집 때문에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타고난 소경이 코끼리를 보는 것에나 비길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가장 뛰어난, 죽음도 싸움도 대립이 일어나는 일도, 전도(顚倒=뒤집어지는)함도 없는  

 성제(聖諦=성스러운 진리=사성제 )의 지혜를 나타내고자 하여, 이를 설한다.”

 

 

 

◇ 지금 우리나라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회들의 목회자들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대전광역시에 모 교회의 간판에 <대전시 성시화 본부>라는 섬뜩한 글귀가 있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치 중세 십자군 전쟁을 상기해 보는 글귀 같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슬로건을 걸고 그들에 항거하는 민족이나 국가들을 야만인 내지 사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 최근 몇년내 극렬 기독교인들이 밤에 강남의 봉은사 법당에 들어와 난동을 피우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 이렇게 이교도들이 호시탐탐노리고 있는데, 불교 내에서 “선종이 최고다. 교종이 최고다, 정토종이 최고다. 위빠싸나가 최고다. 남방불교만 불교다”라고 하면서 서로 자신의 종파의 주장만을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기독교가 이 지구상에서 인류를 구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고 떠들어대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 이 시대에 이 민족이 살길은 이 종교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이 시대에 불교가 살길은 종파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 “ 중생이 앓으니 보살이 앓는다.”

 

◇ 우리는 “중생이 앓으니 보살이 앓는다.”라는

인도 유마거사의 법문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고통의 내용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나라고하는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또한 이기주의의 병 때문입니다.

 

 

◇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 환자입니다.

    이기적인 병에 걸린 환자입니다.

    이제 출가 수행자부터 이 병을 치유해야 합니다.

    내 종단, 내 종파, 내문중이라는

    이기적인 병을 치유하지 않고서

    어찌 중생들의 병을 치유하겠다고 하겠습니까?

 

 

 

▣ 이기주의 반드시 극복해야

    출가수행자나 각종 종단 종파 스님들께 삼가 큰 절 올립니다.

    이제 내 종단, 내 종파, 내문 중만을 위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제 화합하고 단결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 재가불자님들에게도 큰절 올립니다.

    재가불자님도 부처님이 되실 분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족 간에 이웃 간에 그리고 불자님들 간에도

    서로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행복을 위해서 이기주의는

    반드시 극복해야할 과제입니다.

 

 

 

◇ 끝으로

   보살의 길을 가기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설하셨습니다.

 

 

● 우리의 병든 마음을 다스리는 길은

   다 같이 이 사무량심(四無量心)의 마음을 가져봅시다.

 

 

   자비희사(慈悲喜捨)의 마음이란

“ 우리는 모두 우주의 한 뿌리에서 나왔으며

   누구나 불성(佛性)을 가져있으므로 평등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나 물질에게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자심(慈心)이다.”

 

“ 우리는 한 몸이므로 남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면

불쌍한 마음으로 그 고통을 들어주려고 하는 마음이

바로 비심(悲心)입니다.

“ 우리는 한 몸이므로 남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희심(喜心)입니다.

“ 마음을 편안을 위해서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며,

나라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마음이 바로 사심(捨心)입니다.

 

 

◇ “중생이 앓으니 보살이 앓는다.”라는 유마거사의 명제가

   “중생의 병이 다 나을 때 비로소 보살의 병도 다 낫는다.“라는

    화두가 되어

    우리 불자님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