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을 송불하라/종범스님 

2012. 8. 10. 13:3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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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을 송불하라/종범스님

 

 

南無西方大敎主 無量壽如來佛 나무서방대교주 무량수여래불
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我等與衆生 當生極樂國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同見無量壽 皆共成佛道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 아미타불을 송불(誦佛)하고 독불(讀佛)하라 " 

                                            - 종범 스님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일상생활과 아미타불’이다.
일상생활이라고 하면 매일매일 되풀이되는 생활인데,

좋아하고 싫어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꿈을 갖고 때론 절망하는 등의 모습이 백년전이나 천년전이나 비슷하다.

흥망성쇠, 희로애락하는 모습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같은 모습인 것이다.

모든 걱정의 중심을 보면 죽음과 연결이 되어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가르침 중에 불교를 얼마나 깊이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을 정도로 배워야 깊이 배운 것이다.’고 하였다.

옛 선인들은 ‘그것으로 생사를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정도로 공부를 하지 않고 그냥 본 것, 들은 것, 생각한 것만으로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혼비백산(魂飛魄散)하게 된다.
그러므로 임종시에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간다고 하였는데,

임종시에 열 번을 부를 정도면 생사를 대적할 힘이 있는 것이다.

그 정도가 되려면 평소에 열심히 닦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태어난 존재이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죽음을 맞이할 때 얼마나

넉넉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한용운스님의 기행문에 보면 만주를 지나다 총탄을 맞았다고 한다.
총탄을 맞는 순간 평소에 외우던 팔만대장경이 간 곳이
없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진실하게 닦았느냐, 깊게 닦았느냐 하는
내용이 있는 말이다.

우리가 아미타불이라 할 때,
아미타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인데,

수명이 한량없고 광명이 한량없다는 뜻이다.

시식(施食)할 때에 보면

“불신장광(佛身長光) 상호무변(相好無邊)  

금색광명(金色光明) 변조법계(遍照法界)”

부처님의 몸이 길고 넓어 아니 계신 곳이 없으며 상호가 끝 닿는 곳이 없고

금빛광명이 온 우주를 두리 비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이 계시지 않는 곳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량수 무량광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매일 걱정속에 쌓여 지내는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참다운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법장(法藏)을 여는 세계이며 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 할 때, 불(佛)이란 부처님이요,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시므로 무량수각(無量壽覺) 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또 육십화엄경(六十華嚴經)에 보면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이라는 말이 있는데,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량수불을 무량수심(無量壽心)이라고도 할 수 있고,

무량수생(無量壽生)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중생이 무량수중생(無量壽衆生)이더라는 것이다.

이 말은 죽음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오래 살다 죽어도

무량수라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죽음은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입으로 아미타불을 말하지만

죽음을 늘 걱정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희안한 일이다.

무량수가 될려면 죽음이 없어야 하고, 죽음이 없으려면

난 것이 없어야 한다. 태어나면 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이다.

난 것이지만 난 것이 아니고, 죽는 것이지만 깊이 보면

죽는 것이 아니다.

조견(照見)을 하면 모두가 불생불멸이고

불생불멸은 무량수 무량광이다.

무량광을 적광(寂光), 대광(大光) 이라고도 하는데,
적광은 고요한 빛을 말함이고,

대광이란 비추는 곳이 있고 비추지 않는 곳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비추는 때가 있고 비추지 않는 때가 있는 것이 아닌 큰 빛을 말한다.

또 합하여 대적광(大寂光)이라고도 한다.

햇빛이나 불빛은 그늘이 있기 마련이지만 아미타의 빛은
그늘이 없고 밤낮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량수 무량광 속에 살고있지만 그것을 보지 못한다.

쓸데없는 걱정과 망상으로 인해서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집에서 잠이 들었어도 잠을 자는 동안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곳에서 자더라도 잠을 자는 동안에는
좋은 곳 인줄을 알지 못한다.

음식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입에 있을 때에만 알 뿐 삼키고

나면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망상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항상 무량수 무량광의 아미타 속에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송불(誦佛)하고 독불(讀佛)하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마음으로 하는 정도가 되어야
염불(念佛)이라고 하는데,

읽고 외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염불을 하고 깊이깊이 들어가면 아미타불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염불도 참선하는 것과 같이 강조를 많이 하는 것이다.

시식을 할 때에 하는 게송(偈頌)이 있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

염도념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아미타불은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에 이것을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말고 간절히 잊어버리지 말라.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부르고 있는지

부르고있지 않은지도 모를 경지인 무념처(無念處)에 도달하면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등 육문에서 광명이 발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음과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량수 무량광 속에 살고있기

 때문에 형태가 사라지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빛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므로 깊이깊이 관찰해서 깨달아야 한다.

깊이 보지 않고 미리 두려워하고 겁내는 것을 망상이라 한다.

일상생활에서 아미타불을 만나지 못할 때 온갖 걱정이 생기데,

이것이 중생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여기서 조금 더 공부하다 보면

시간이 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지루함을

느끼면 공부가 되지 않는다. 공부의 특징이 시간이 모자라는 것이다.

시간이 없음을 경험하는 것이 공부의 힘을 얻어가는 첫번째 단계이다.

오랜 시간 공부를 하였지만 잠깐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고 스스로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즐거울수록 시간은 짧게 느껴지는 것이다. 행복할수록 시간은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루하다는 것은 생각이 많고 번뇌가 많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죽음이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어야 한다.

공부를 할 때에 생각하는 것인지 보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상념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환경이 바뀌면 달아나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면 그런 생각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런 생각이 사라지도록 환경이 조성되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주인이 아니라 손님인 것이다.

마음도둑을 주인으로 잘못 알아 그것을 최고로 알고

매달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심하면 번뇌중의 심한 번뇌인 광증이라 한다.

생각이 아닌 실제로 보는 것을 조견이라 하고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을 정견이라 한다. 불생불멸을 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진하면 죽음이 없는 세계를
보게 된다.
죽음이 없는 세계를 보더라도 죽음에 대한 걱정을 너무 많이
해왔기 때문에

그 습기(習氣)가 남아있다.

그 세계를 보긴 했지만 순간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정진을 하게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다.

이 단계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보려 전도몽상을

멀리 여의였기 때문에 전혀 느껴지지 않게 된다.

다음의 단계로는 자비가 성숙하여 화현(化現)하게 된다.

불신(佛身)으로 제도할 사람은 불신을 나타내어 제도하고,

보살신(菩薩身)으로 제도할 사람은 보살신을 나타내어 제도하고,

성문신(聖聞身)을 나타내어 제도할 사람은 성문신을 나타내어 제도하는 것이

화현이다. 몸을 자유자재로 화현하는 단계가 최상의 성불이다.

선에서는 이 단계를 능생능멸(能生能滅)의 단계라 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보고 다음으로 전도몽상을 버려 망상이 일체 없게 되고

다음으로는 뜻대로 능히 날 수 있고 능히 죽을 수도 있는 단계인 것이다.

이정도 되어야 공부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불생불멸만 알면 체(體)는 얻었지만 용(用)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능생능멸까지 가야 생사자제(生死自除)할 수 있는 것이다.

생사가 없는 것을 아는 정도로는 모자라는 것이다.

공부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므로 스스로의 공부가 어느 정도까지 와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일념으로 정진하면 무엇을 하더라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느끼지 못하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지루함을 느낀다면 아직 공부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때 이미 일념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며, 비로소 무량수를

보고 불생불멸을 보게 되는 것이다.

죽을 때나 살 때나 헤어지거나 만날 때나 일체의 근심걱정이
사라진 경지이면

체는 얻은 것이고, 다음으로는 죽고 싶으면 죽고, 나고 싶으면 나는

능생능멸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선에서는 생사가 없음을 체험하는 단계를
체무생사(體無生死)라고 하여 생사가

없음을 체험하는 단계라 하였다. 하지만 이로도 부족하므로 더 정진하여

용무생사(用無生死) 즉, 생사가 없음을 활용하는 단계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화현이 자제하시어 분신으로 제도가 될 사람은

즉시 분신으로 화현하여 제도를 하시는 것이다.

남자의 몸이 필요하면 남자의 몸으로 화현하여 제도하고,

여자의 몸이 필요하면 여자의 몸으로 화현하여 제도하는

극치의 단계에 계시는 것이다. 그까지 갈 때 까지 서원을 하여 닦아야 한다.

도둑이 들어왔을 때 또는 손님이 들어왔을 때 그에 매달려 있다보면

도둑이나 손님은 온 목적이 다하면 떠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미혹하면 그것이 진짜인줄 알아 매달리곤 한다.

그러므로 도둑과 손님에 속아 흔들리지 말고 꾸준히 공부해서

능생능멸, 화현자제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하면 생사속에서 생사를 대적할 뿐만 아니라 생사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기본이 신심(信心)인데,

신심은 바로 예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불교의 기본적인 예배방법으로는 합장례(合掌禮),

투지례(投地禮), 고두례(叩頭禮), 접족례(接足禮) 등이 있다.

그리고 마음으로 본다면 귀명례(歸命禮)를 하여야 한다.

귀명례의 첫째는 공경례(恭敬禮)이다.
목숨 속에는 눈, 코, 귀 등 온 몸이 들어있는데
목숨을 돌이켜 예배한다는 뜻이다.
두번째는 일심례(一心禮)로 온 목숨은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눈으로 보는

생각이나 귀로 보는 생각등의 육경(六境)을 한 마음으로 돌이켜 하는 것이다.

원효스님께서는 “귀명례란 온 몸을 다 기울여

공경스럽게 하는 것이며 일심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을 만나기 위해 들어가는 관문인 것이다.

이 관문을 지나 능생능멸하고 화현자제 한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심으로 예경하고, 일심으로 염불하고,

일심으로 좋은 인연을 지어나가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