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청화큰스님

2012. 8. 10. 13:4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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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청화큰스님



저희들이 출가해서 맨 처음에 받는 계가 사미십계입니다.

사미십계 가운데 여섯 번째가 불좌와고광대상(不坐臥高廣臺上)인데, 출가수행자는 청정한 생활을 해야 하므로 마땅히 자기 분수에 넘는 높고 또는 넓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저 산간 토굴에 있는 중이 이와 같이 자기 분수에 넘는 높은 자리에 앉고 보니, 마치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듯한 모양으로 굉장히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인연에 따라서 이와 같이 할 수 없이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열반경에, 여러 가지 말씀이 많이 있으나 그 가운데 사자후결정설(獅子吼決定說)이라. 사자후는 부처님의 참다운, 조금도 에누리 없는 일승법문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의 가장 수승한 법문 가운데서 결정적으로, 조금도 오류가 없는 그러한 법문이 사자후결정설인데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여래상주무유변역(如來常住無有變易)이며 상주도량(常住道場)하시고 상전법문(常轉法門)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항시 계시면서 조금의 변역도 없는 것이고, 우리가 불법을 성취하는 도량에 항시 머물러 계시며, 모든 중생이 다 본래면목을 성취하는 성불의 법문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장엄스러운 우리 불자님들이 모이는 좌석뿐만 아니라 산간이나 마을이나 또는 하나의 싸움판이나 어디에나 부처님은 항시 계시면서 언제나 최상법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우리하고 떠나서 멀리 계시는 것인가?

부처님은 우리를 떠나서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부처님은 가득 차 계시며, 또한 우리가 안 보이는 공간에도 가득 차 계십니다. 그렇게 계시면서 우리 중생의 오염된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청정미묘한 법문이 항시 계시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제한된 업장에 가리워져서 미처 못 듣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와 같이 서원이 충만된 우리 불자님들, 우리 소중한 법우님들을 대할 때 감격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이 자리는 이렇게 평온스럽고 아늑합니다마는 한 발 나가면 정치싸움, 경제싸움 또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싸움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불자님들이 세상에 계시는데, 왜 사회는 이와 같이 혼란스러운 것인가?

현재 통계 낸 것을 보면 기독교인구, 불교인구, 이슬람인구, 또는 대종교인구, 유교인구 등 모두가 6,000만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다 종교를 믿고도 나머지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분열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깊이 자기성찰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이건 불교이건 또는 무슨 종교이든지 간에 모두가 사람사람끼리의 화합, 또는 고도한 도덕률을 내세워서 인간의 평화와 정의를 말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런 종교인들이 꽉 차고 종교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이와 같이 혼란스럽습니다. 이는 어째서 그러는가? 각기 자기정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 분석도 하고 비판도 합니다마는, 우리가 흐린 시냇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제아무리 중류나 하류에서 이래저래 방편을 다 쓴다 하더라도 흐린 물이 맑혀지지가 않습니다. 흐린 시냇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저 상류에 올라가서 상류근본을 다스려야 합니다.

중국의 황하를 중간에서 아무리 애를 써서 제방을 쌓고 별 짓을 다한다 하더라도 황하물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 상류에서 계속 토석 또는 누런 물이 흘러 내려오니 황하물을 조금도 맑힐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도 여러 가지 정신적인 시도, 이데올로기적인 문제, 가지가지 종교의 덕목설, 도덕설등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이 사회가 혼란스러움을 면치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른바 인간의 근본악, 기독교식의 표현으로 말하면 원죄, 근본원죄말입니다. 인간의 근본문제, 근본무명을 다스리지 못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저는 우선 근본악, 인간의 근본무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근본무명과, 근본무명을 어떻게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인가? 그러한 문제를 요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인간적인, 상대유한적인 여러 가지 시도가 많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해서는 사실 상대에 그쳐버리고, 불교의 말로 하면 윤회에 그쳐버리고, 참다운 해탈이라든가 참다운 인간의 행복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가사 니이체같은 분은 초인을 내세워서 인간의 악을 제도하고자 애쓰고 또 싸르뜨르같은 분은 ‘실존은 휴머니즘이다’라고 말해서 역시 인도적인 말을 내세웠지만 그런 것으로 해서는 인간사회는 제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각기 철인들이나 종교인들이 가지각색의 말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근본악 문제, 인간성에 원래 갖추고 있는 번뇌문제, 근본무명을 제도 않고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를 이끄는 분들이 모두가 그 근본인간성문제, 그런 가장 기본적인 철학문제를 무시하고서 정치를 말하고 경제를 말하면 혼란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도리입니다.


부처님경전에 보면 사인관세(四人觀世)라는 네사람의 차원 따라서 인간의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맨 처음에 가장 낮은 차원의 사람들은 일반 중생의 세상을 안락스러운 처소로 봅니다. 인간은 행복스러워야 하고 음식도 잘 먹어야 하고, 기왕이면 옷도 화려하게 입어야 하는 등 인간의 의식주에 관해서 화려를 추구하고 안락을 추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그런 것이 일반 범부의 심경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조금만 거기에 어긋나면 반발도 하고 비관도 합니다. 인간은 안락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그저 잘 먹고 잘 살다가 쾌락을 만끽하고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기왕이면 명예나 어떤 것이나 남보다 앞서야 하겠다는 굳은 집념을 가진 분들은 모두가 인생의 목표를 안락이라는 데에다 세우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조금 더 올라가서 불교에서 말하는 소승들은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소승은 인간을 과학적인 범위 내에서 보기는 보더라도 근본을 다 못보고 인간을 고()로, 고통으로 봅니다.

어째서 고()인가 하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은 과거 전생을 무시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과거 전생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금생에 자기생명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 자기생명의 근원인 전생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전생을 부인하면 인과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형태가 금생 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은 분명히 과거 전생이 있습니다. 따라서 금생 생명은 과거 전생에 지은 대로 받습니다. 과거 전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정도로 밖에는 우리가 선근이 부족했기에 이렇게 인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올 때부터 그런 제한된 고통을 우리가 안 겪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사, 많이 닦아서 천상에 올라갈 때는 나올 때부터 고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천상중생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 안에서 고생하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중생들은 고통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 더 올라가서 극락중생들은 화생을 합니다. 극락에 관해서도 우리 부처님을 믿는 분들 역시 눈에 안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부인도 합니다만 극락세계도 역시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다만 극락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그런 차이문제인 것이지 극락의 실존적인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극락중생들은 화생, 한 생각 자기 마음으로부터 마음만 청정하면 그냥 순식간에 태어납니다. 따라서 극락중생은 나올 때 생의 고통이 없습니다. 생의 고통이 없으므로 거기에 따르는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든가, 인간보다도 못한 중생은 응당 피할 수 없는 생과 늙음과 병과 죽음의 고통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품은 굉장히 깊이가 있고, 무한하기 때문에 유한적인 어떤 것을 준다 하더라도, 이런 한계상황을 인간의 성품은 절대로 만족을 못 취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이 불성으로 하나가 되기 전에는 언제나 불만스러운 것을 면치를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본래 불성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구하는 것은 역시 무한을 구합니다. 행복도 지혜도 다 한계 없는 무한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은 복력이, 인간된 제한성이 그와 같은 무한의 복력을 다 채울 수가 없습니다. 채울 수가 없기에 불안스럽고 좌절을 하고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 할 때에 인생은 소승이 보듯이 정말 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모르고, 아직은 안 죽어봤으니까 죽음의 고통도 모릅니다만 누구나 늙어야 하고 아파야 하고 결국은 시일이 되면 가고 맙니다. 마땅히 생각해 보면 생각해 볼수록 그러한 제한된 인간이 고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고()라고 생각할 때는 웬만한 것은 참을 수가 있는 것인데 인생을 쾌락이라고 규정을 세운 사람들은 조금만 고생스러우면 못 참습니다. 본래 인간은 응당 쾌락스러운 것인데 왜 고통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소승들이 깊이 과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인생은 다 고통입니다. 안락스러운 것 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순간찰나고 또 그 근원은 모두가 고()에서 연원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보다 한단계 올라가 보살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사인관세(四人觀世), 이것은 우리 중생이 인간을 어떻게 보는 것, 또는 소승이 어떻게 보는 것, 또는 보살이 보는 것, 또는 가장 본래면목 본래인간자리에 들어간 부처가 보는 것, 이 네차원에서 인간을 보는 견해를 지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보살이 본다 할 때는 우리 인생이나 모든 것을 텅 빈 공()으로 봅니다.

내 생명,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고 또 하늘의 성수(星宿)와 뭇 산천(山川)이 있는데 왜 이것이 공()인가?

공()이라는 문제를 우리 불교를 믿는 분들은 굉장히 어렵게 생각을 하고, 이 관문을 잘 못넘어섭니다. 그러나 텅 빈 공()이라는 관문을 못 넘어서면 인생의 고액을 면할래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니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오온법(五蘊法)이라는 것은 물질과 정신 즉, 우주만유의 모든 현상에 있는 모든 존재가 오온법 아니겠습니까. 인간과 일체존재가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다 비어있음을 비추어 통찰해야만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고를 떠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박학다식(博學多識)하더라도 인생 모든 존재가 비었다 하는 본래적인 투철한 견해가 없으면 인생고는 못 떠납니다.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도 자기 개인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또한 가정적으로 불화스러운 것도 모두가 다 텅 비었다 하는 공()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 불교인들이나 현대인들의 중대한 과제가 있습니다. 한사코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하는 공()을 넘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째서 공()인 것인가? 분명히 있는데 왜 공()인 것인가? 가장 정밀과학이라는 현대 물리학에서도 분명히 물질을 분석해 들어가면 나중에는 텅 비어버린 에너지만 남는다는 것을 증명했지마는, 배운 사람도 역시 공() 그러면 잘 납득이 안 갑니다. 그런데 하물며 부처님 당시에 그런 무식한 때에 공()을 말해본 들 어떻게 누가 잘 알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 법문도 초기에는 쉬운 것부터,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이와 같이 중생의 업장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차원 실존차원에서 생각할 때는 텅 비었습니다. 왜 비었는가? 용수보살이 지으신 중론(中論)에 보면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因緣所生法 我說卽是空)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연따라서 생겨난 법은 모두가 다 곧바로 공()이다.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즉시공(卽是空)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도 역시 분석한 뒤의 공()이 아니라 색즉공(色卽空), 물질이 바로 공()입니다. 다만 그런 견해의 차이가 업장에 가려있고 무명을 못 떠나는 우리 중생이 생각을 할 때엔 명명백백히 있지마는, 성자의 우주의 본 실상을 볼 수 있는 청정안목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명명백백히 바로 공()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도 인연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인과 연이 잠시 합해서 순간도 머물지 않는 것이 일체현상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의 원자구조를 보건 분자구조를 보건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본다할지라도 어떠한 것이든 모두가 잠시 합해져서 순간찰나도 머물음이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만법유전, 만법이 모두가 다 운동하고 있습니다. 만법이 다 순간찰나도 머물음이 없이 운동하고 있는데 어떠한 존재도 고유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자기얼굴이 잘났다고 하더라도, 순간찰나 앞과 순간찰나 뒤와의 얼굴이 같지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이 차이를 못 볼뿐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역시 그때그때 신진대사가 되어서 구세포(舊細胞)는 죽어지고 새로운 세포가 나오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것을 못 느끼니까 내 창자는 항시 그대로인 창자다. 또는 막 태어난 나와 오십이나 육십 먹을 때의 나는 똑같다. 이와 같이 생각하지만, 사실은 같지가 않습니다.


모든 물질을 구성한 원자구조는 불확정성 존재이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일정한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그런 원자가 모여서 원소가 되고, 또 원소가 모여서 각 분자구조가 되고, 그런 것이 모여서 이루어진 물질이 일정하니 고유한 상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사 전자현미경으로 본다고 할 때, 잘난 자기 몸뚱아리나 자기 얼굴 등 어떤 것이든 모두가 하나의 산소나 수소 등 각 원소가 빙빙, 결합되어서 운동하고 있습니다. 엄격히 따지면 이것밖에 아닌 것인데 우리는 고유한 자기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는 엄격한 실존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가 우주의 실상에 입각한 것입니다. 조금 더 차원이 높은 법문, 낮은 법문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본뜻은 모두가 다 실상에 입각해서 우리 중생을 실상까지 이끄는 법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자기 개인적인 갈등 혹은 어떠한 조직체의 갈등이나 반목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이 나라는 존재,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해진 존재이기 때문에 사실은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으니 내 소유나 자기에 딸린 권속이 자기의 것이라고 고집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버지 되는 책임을 망각하고 어머니 되는 자기위치를 떠나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인연 따라서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자기성불을 도모하고 자기 권속의 성불을 도모하고 자기 벗의 성불을 도모하고 일체중생의 성불을 위해서 우리가 모든 힘을 다 바친다 하더라도, 우리의 바른 인생관 바른 가치관만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본래는 텅 비었다 하는 본래적인 실상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부처님은 어떻게 보실 것인가?

사실은 보살이 텅 빈 공()으로 본다 하더라도 공()으로 보는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것이 못됩니다. 다만 현상적인, 우리 중생이 보는 그것만 비었다는 것이지 아무 것도 없는 그 때는 허무만입니다.

부처님이 본다고 생각 할 때는 그때는 유심(唯心)입니다. 이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몸도, 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금도 다이아몬드도 이것이 다 오직 마음입니다. 이것 역시 우리 중생들은 납득이 안가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서 다 마음일 것인가? 이렇게 천차만별로 많은 불자님들이 모여 계신데 왜 이분들이 모두가 다 마음일 것인가? 그러나 분명히 이것도 명명백백히 마음입니다. 삼계유심이요 만법유식이라. 비단 이 경계뿐만 아니라 천지우주가 다 마음뿐입니다.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삼계 모두가 다 식()뿐입니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란 말이나 만법유식(萬法唯識)이란 말은 똑같은 뜻입니다.

이 자리는 참선공부를 열심히 많이 하신 분도 계시고 여러 훌륭한 지성적인 분도 많이 계시리라고 믿습니다만 가사 우리가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보신 안목을 우리 안목으로 하지 못하는 한에는 참선이라고 말을 못 붙이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모두가 다 오직 마음뿐이다 하는 유심(唯心)을 꼭 잘 느끼셔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개인적인 갈등도 쉬고 참선공부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어째서 모두가 다 마음인가 하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살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가 다 텅 빈 공()입니다. 공(), 여기까지는 현대 물리학도 역시 다 증명을 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물질은 결국은 끄트머리 가서는 다 에너지만 남아버립니다. 알맹이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고 알 수 없는 그 무엇이고 결국 보다 미세한 데에 가서는 -,+ 라는 전하도 없고 또는 물질이라는 질량이 없습니다. 질량이 제로(0)이고 전기적인 대전관계도 제로(0)이기 때문에 물질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정밀과학인 물리학이 증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물리학이 저 에너지가 되어버리는, 에너지가 무엇인가 하는 그 소식을 다 알면 좋은데 물리학은 거기까지는 다 모릅니다. 어느 학문도 어느 종교도 물질이 텅 비어버리는 그 자리를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알고 있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뿐입니다. 이것은 우리 불교인들이 아전인수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역시 명명백백한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사회에서 가장 궁금한 문제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또한 물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물질과 인간성의 상관성은 무엇인가? 이것도 궁금해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사람의 본성이 무엇인가, 물질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또는 물질과 정신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것만 알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다 풀려버립니다.

그런데 천만다행히도 부처님법문은 이 문제가 다 풀려있습니다. 풀려있는데 우리 불자님들이 잘 믿지를 않고 또는 공부를 않기 때문에 여실히 못 느끼는 것입니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라. 어느 것 하나 틀림이 없이 부처님말씀은 처음도 옳고 중간도 옳고 마지막도 옳습니다. 여법하단 말씀입니다. 또 부처님뿐만 아니라 마하가섭이 증명하고 아난존자가 증명하고 용수가 증명하고 달마가 증명하고 육조혜능이 증명하고 그 뒤에도 굉장히 많은 분들이 다 증명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분들은 일생을 가장 철저히 산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계행청정해서 자기 몸뚱아리는 중생을 위해서 다 바치겠다는 분들 아닙니까! 그런 분들이 사심없이 자기평생을 통해서 증명을 한 이런 길이 호리(豪釐)도 거짓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처 거기까지는 다 알지 못하고 증명을 못한다 하더라도 우선 믿기라도 분명 믿어야 하겠습니다.


만법이 다 물질이 텅텅 비어있지마는 텅텅 비어있는 저쪽이 무엇인가? 가사 원자력가운데 들어있는 그 무시무시한 기운을 보십시오. 핵분열에서 나오는 기운이 원자폭탄 아니겠습니까? 핵융합으로 나오는 기운은 수소폭탄이고 말입니다. 그런데 현미경을 안통하면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그런 미세한 존재가운데 들어있는 무시무시한 힘을 본다고 생각할 때에 저 에너지로 되어버리는 그 자리가 아무 것도 없는 자리라고 생각 할 수 없습니다.

비록 물질은 아니라 하더라도 에너지만 되어버리는 그 자리, 물질은 텅 빈 그 자리가 무시무시한 그런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에너지만 되어버리는 그 자리, 순수한 그 자리, 물질이 아닌  그 자리를 부처님께서 ‘일체만법이다, 만유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이렇게 성겁이 되었다가, 우리 중생이 살다가 다시 파괴가 되어서 텅 비어버리는 때가 분명히 옵니다. 이것은 지금 물리학이 증명합니다마는 분명히 천지우주는 각 성수(星宿)나 은하계나 다 파괴되어 텅텅 비어버립니다. 텅텅 비어버리는 그 자리가 되어도 역시 에너지는 남습니다.

순수한 생명은 남는 것입니다. 순수한 생명 그것이 불심(佛心)입니다. 그것이 마음인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다 일체존재의, 일체 모든 물질의 근원이 에너지만 남거니,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공이요 공즉색이라. 물질은 바로 에너지요, 에너지는 바로 물질이라는 등식이 성립이 안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에너지 가운데 무한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인연이 합해지면 다시 천지우주가 성겁으로해서 형체가 나옵니다. 그래가지고서 무수무량의 각 중생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생각해본다 하더라도 정말 부처님을 생각하고 남을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는 이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기기묘묘합니까! 기기묘묘한 중생들이 이렇게 나온다고 생각 할 때에 에너지 가운데 들어있는 그 힘은 무시무시한 무한의 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에서, 번뇌를 녹여버린 성자의 경계가 아라한과인데 그 아라한과를 성취한, 나유타 아승지겁에 해당하는 많은 수의 성자가 모여서 무량세월을 두고 그러한 불성 즉, 마음에 들어있는 공덕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능히 헤아릴 수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비도 원만하고 지혜도 원만하고 능력도 원만하고 행복도 원만한 그런저런 공덕들을 우리 같은 중생들이 헤아릴 때는 한계가 있겠습니다만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통달무애(通達無碍)한 아라한과를 성취한 도인들이 무량무수가 모여서 부처님 가운데 들어있는 즉 불심 가운데 들어있는 공덕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능히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이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마음이 보입니까? 마음이 보일 수가 없습니다.

혜가스님이 달마스님한테 가서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거두어서 밝혀 주십시오.” 달마스님께서 “그러면 그대 마음을 가져오너라.”

혜가가 제아무리 자기마음을 더듬어보아도 자기마음이 처소가 없습니다. 자기마음이 자기심장에 있는 것 같지 않고, 발에도 있지 않고 자기 손에도 있지 않고 자기 등뒤나 자기 앞에나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마음이 어디에도 없지마는 결국 분명히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더위잡을 수 없는 하나의 영지(靈智)에 불과한 것인데, 영지(靈智)도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명명백백히 에너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끝도 가도 없는 자비와 지혜와 일체공덕이 다 갖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공덕을 열반경에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합니다.

한도 끝도 없는 마음 공덕이지만 이러한 범주로 해서 우선 체계를 세우면 상락아정이란 말입니다. 항상이거니 그때는 영생불멸해서 생사를 떠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죽고 살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생사를 떠나있습니다. 낳음도 원래 없고 죽음도 원래 없습니다. 그저 몸 따라서 몸이 죽어지면 이 몸뚱아리 쓰다가 낡아지면 옷 벗어버리듯이 벗어버리지만 우리 마음 우리 생명자체는 죽지 않습니다. 거기다 업을 지어 놓으면 업에 따라서 다른 몸을 받게 됩니다.


즉, 이와 같이 부처님이 보신다고 생각 할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 다 심심미묘한 마음뿐인 것입니다. 청정무비(淸淨無比)한 마음, 우주에 가득 차 있는 마음, 은하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런 은하단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마음뿐입니다. 하늘에 총총한 무수억 별도 모두가 다 마음뿐입니다.

청정무비한 마음세계에서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툴 뿐인 것입니다. 지구나 화성이나 금성이나 모두가 다 청정무비한 마음세계, 순수에너지는 마음세계에서 인과의 법칙 따라 그때그때 잠시간 모양을 나툴 뿐입니다.

몇억 년 또는 몇십억 년 몇백억 년 되면 지구도 허물어지고 각 별도 허물어집니다. 지금 물리학이 이것 역시 다 증명을 했습니다.

블랙홀이라. 나중엔 하나의 에너지가 되어서 그냥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에너지의 작용따라 다시 대폭발이 일어나서 그때는 우주가 생겨난단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지금 천문학이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모두를 다 안락스럽게 보지마는 사실은 안락스러운 것이 아니고, 조금 더 나아가서 과학적으로 보는 소승이 볼 때는 우주를 고()로 봅니다. 그러나 우주를 고()로 보는 것도 역시 현상적인 관찰뿐인 것이지 본래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현상의 본래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보살이 볼 때는 우주가 텅 비어있습니다. 반야심경사상이라든가 금강경사상은 보살이 보는 우주가 텅 비어있다는 색즉공(色卽空)입니다. 우리가 공()을 말한다 하더라도 분석한 뒤에 다 쪼개가지고서 공()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같으면 사람 그대로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공()을 생각 할 때에 석공(析空)이라, 분석한 뒤의 공()을 보고 석공이라 합니다.

분석치 않고 사물 그대로 바로 보면 즉공(卽空)이며,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것이 즉공인 것입니다. 다만 무명심이라든가 삼독심, 즉 탐욕심이나 분노심이나 어리석은 마음의 어두운 중생이 볼 때는 분명히 다 있지마는, 삼독심을 떠나고 무명심을 떠나버린 성자가 볼 때는 명명백백히 다 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육조혜능스님의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와 같이 보살이 볼 때는 텅 비어서 본래무일물 즉, 물질이란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나 죄나 악이 붙어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근본에서 보면 다 이런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렇게 못 봅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보다 적극적으로 천지만물을 그대로 보는 부처님의 실상견, 다시 말하면 불안청정(佛眼淸淨)이라. 부처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천지우주가 다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심즉불(心卽佛) 곧 마음이 바로 부처이므로 천지우주는 부처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존귀해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어야 비로소 존엄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문을 떠나서 우리 중생이 생각하는 상대유한적인 인간의 가치차원으로 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존엄이라는 것은 위도 없고 아래도 없고 가장 존귀해야 존엄이라고 붙일 것인데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했다, 인간이 죽어지면 아무 것도 없는 허무다, 인간은 이렇게 불법을 좀 믿기는 믿지마는 그렇고 그런 것이다’ 이런 정도로 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울 수가 있는 까닭은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비록 지금 현재는 고()만 느끼고 인생고(人生苦)만 볼 수 있는 소승경계 밖에는 안된다 하더라도 또는 아직은 미숙해서 인생안락(人生安樂)이다 하는 의식주만 최고로 알고서 거기에 몰입하는 이른바 물질지상주의자 경계밖에 안된다 하더라도, 우리 견해만은 ‘인간은 바로 보면 본래가 마음뿐이다. 본래가 오직 부처님이다. 사람만 부처님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바로 보면 다 부처님뿐이다.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님뿐이다. 천지우주는 부처님 생명이다.’ 이렇게 느껴버리고서 자기를 그 자리에 맞추고자 하는, 자기 스스로가 그와 같이 부처님이 되고자 하는 간절한 서원을 세우고 믿고 행하는 데에서 비로소 인간은 존엄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야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 비길 수가 없는 것이지 상대유한적인 인생관으로 해서는 존엄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남하고 화합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우리세대의 시대적 과제로 지금 남북통일을 간절히 희구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통일을 시킬 것인가. 각기 자기들 입장과 위치에 따라서 가지각색의 이론이 나오겠지요.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상대적인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는 완전한 통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거창한 남북통일문제가 아니더라도 사람끼리의 화합도 역시 근본적인 인간해석, 바른 가치관이 없이는 참다운 화합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참다운 벗이 되고 참다운 아내가 되고 참다운 아버지가 되고 참다운 불자가 되고, 어떠한 입장에 있던지간에 가장 최선으로 자기 생명을 살리는 것은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 즉, 다시 말하면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가르침을 모르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불교만의 가르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시 마태복음서에 보면 예수님한테 사마리아인들이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신의 아들이라 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우고 장담하지마는 누가 그것을 본 적도 없는 것이고, 혹은 우리가 증명하지 않는데 당신 홀로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어떻게 믿을 것이냐’고 예수님한테 따져서 얘기합니다. 그 때 예수님 말씀이 ‘나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 나는 내 생명이 어디서 온 줄을 알고 내 생명이 어디로 갈 곳을 알고 있으며, 또한 제한된 내 몸뚱아리인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있는 하느님이 말을 한다. 따라서 내가 한 말, 이것은 하느님이 증명하고 천지진리가 증명하거니 공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어도 성자라 하면 비단 예수뿐만 아니라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노자나 어느 분이든지 간에 모두가 다 천지우주의 진리에 입각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인입니다. 우주의 본 바탕을 모르면 성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자라는 것은 인간의 본래생명 우주의 본질을 알아야 성인인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제아무리 내세워 보아도 자본경제라는 것은 역시 모순구조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범부끼리 서로 경쟁을 하여 자기사업이 보다 더 잘 되게하고 또 자기가 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려고 합니다. 우리 범부라는 것은 그런 것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자유경쟁적인 걸로 해서 이북이 그냥 승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북은 어떤가.


공산체제는 어느 면으로 해서는 그야말로 경제면의 공정을 기한다 할지라도 번뇌를 못 떠나버린 일반중생이 다시 말하면 아상(我相)을 미처 못 떠나버린 사람들이 제아무리 공정(公正)을 기한다 해도 참다운 공정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 너무 통제를 많이 하면 그때는 가장 소중한 인간의 자유를 훼손시킵니다. 따라서 이북적인, 김일성 주체주의 그것으로 남한까지 전부 다 포섭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남한이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즉 남한주의도 이북이 승복을 못하는 것이고 이북의 주의도 역시 남한이 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적당히 이북의 좋은 점, 이남 좋은 점, 자본주의 자유사회 좋은 점 또는 통제경제의 좋은 점, 이것저것 섞어서 절충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이런 것 역시 임시에 불과할 뿐 중생이 만드는 것들은 완전무결한 화평이나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든 이데올로기를 다 넘고 모든 주의를 다 넘어서 가장 기본되는,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타당한 진리에 입각해서, 저 높은 자리에서 사방을 다 보고 말입니다. 진리의 궁극에서 진리의 기본에서 이북도 보고 이남도 보고 그 높은 자리에서 비판해야지 같은 레벨정도로 해서, 일반 중생 차원에서는 상대편의 좋은 점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일반 중생들은 바이블(Bible)에도 말씀한 바와 같이 자기 마음에나 자기 눈에는 서까래같은 번뇌가 있는데 남의 눈에나 남의 가슴에 있는 조그마한 티끌같은 것에만 관심을 둔단 말입니다.

내가 범부이고 내가 아직은 성자가 못되는 정도에서는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범부는 자기 스스로 자기 번뇌 떼는 데에 열중해야 합니다.

정말 양심이 있다면 범부인 한에는, 성자가 못된 사람들은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먼저 자기 안목을 맑히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남의 장점과 단점도 보일 수가 있는 것이지, 자기 번뇌 어두운 사람들은 남의 장점도 볼 수가 없고 단점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번뇌 없이 청정한, 맑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볼 것인가,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거니 미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남을 사랑해라 원수를 사랑해라 하지마는 맑은 안목, 본래의 안목에서 볼 때는 원수도 없고 미운 사람의 씨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못 보니까 원수가 있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 다시 말하면 시냇물이 혼탁할 때에 시냇물을 맑히기 위해서는 저 상류, 인간의 근본악, 인간의 원죄를 다스리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성자나 현자나 철인이나 다 그 자리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그걸 잘 안 믿습니다.

각 무수한 성인들이 우리한테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말씀하신 우주의 도리를 지키면 굉장히 쉬운 것인데 잘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락이라는 것이 오욕을 마음대로 누리고 풍족한 물질에 있다고 말을 하고, 산간에서 고행하고 아주 검소한 생활은 무슨 재미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의 도리를 잘 모르시는 말입니다.


불가에서 공부할 때에,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해서 우리가 맑아지면 우리한테 어떤 현상이 있는가 하면 리생희락지(離生喜樂地)라.  우리 중생의 경계를 떠나서 맑은 경계에 들어가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중생이 느낄 수 없는 참다운 법락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느끼는 낙()은 속락(俗樂) 즉, 상대유한적인 안락인데 정말 공부를 깊이 하면 속인적인 오욕락을 떠나서 영원적인 영생불멸의 법락(法樂)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그런 법락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염불도 열심히 하고 참선도 열심히 해서 공부를 하다 보면 그때는 자기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법락이 나오는 것입니다. 법락이 한 번 나오면 법락은 후퇴가 없습니다. 법락을 모르니까 불교를 믿는다 해도 부처님 법에 어긋난 짓도 많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공()이다라고 느껴져야만이 비로소 법락을 느낍니다. 따라서 법락을 한 번 느낀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자기만을 위한 봉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모두를, 남을 위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남북의 화합과 통일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어떠한 물질이라든가 제한적인 하나의 주의를 떠나서 그야말로 상대를 떠난 절대주의, 영원적인 차원에서 보아서 우리가 취사선택해야지 그냥 같은 차원에서 본다 할 때는 결국 다툼을 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시 미봉책으로 그때그때 합할지는 모르지만 그럴 경우 결국 하나마나 다시 혼란스럽게 되고맙니다.


오직 문제는 근원적으로 고차원(高次元)에서 가정(假定)을 떠난 무가정(無假定)의 원리(原理)에서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의 지혜는 어떤 것인가?

부처님께서 우주와 인생을 보신 것이 유심관(唯心觀)입니다. 모두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모두를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모두를 부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곧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마음을 잘못 쓰면 굉장히 더럽기도 하고 아주 비겁합니다. 그렇기에 달마스님께서도 ‘마음을 찾기가 가히 어렵구나. 마음을 좁히면 옹졸하기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가고 마음을 넓히면 마음 넓기가 삼천대천세계 천지우주를 다 포섭해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좁은 쪽으로 보면 천지우주가 다 마음뿐이거니 바늘만 아니라 먼지나 하나의 소립자나 어떤 것이든 모두 마음이 들어가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천지우주가 마음뿐이니 마음 밖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마음보다 더 넓은 것도 없고 마음보다 더 작은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쁜 것도 마음보다 더 나쁜 것도 없습니다. 잘못 쓰면 결국은 가장 나쁘단 말입니다. 젊은 세대는 미처 못 느낍니다마는 6·25사변 때 저희 같은 세대는 사람끼리 서로 죽이고 죽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상당히 많이 배운 사람들, 어떤 경우는 남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분들 역시 그 상황에서는, 별로 죄가 없는 사람을 장작이나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평소에 나쁜 사람이 아니었는데 상황 따라서 마음의 동물성이 발동되게끔 환경이 되면 굉장히 나쁜 짓을 많이 합니다. 잘못 되면 사람처럼 싸움 좋아하고 남 배신 잘 하고 잔인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본성은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부처 아니겠습니까!


부처라는 이런 고귀한 차원을 유물론자는 알 까닭이 없습니다. 김일성이 주체주의를 말합니다마는 그 주체는 유물론에 입각해서 모두가 물질이고, 역사의 발전이라 하는 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든가 그러한 것으로 말해왔습니다. 이런 것으로 해서는 인간성의 본질을 알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이 소중하다 인간성의 본래면목이 부처다 하는 여기까지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인간성을 보다 더 추구하는 분들, 인간성의 존엄성을 내세우고자 하는 분들이 그런 유물론자의 굴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자본주의 구조 역시 굉장히 모순이 많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응당 우리가 과감히 시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몸뚱아리가 내 것이 아닌데 내가 갖는 재산 내 회사 모두가 내 것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임시간 관리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가 보다 더 잘되기 위해서 남을 희생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북의 진정한 통일을 위해서도 역시 시기가 언제 오려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부처님의 사상, 모든 것을 바로 보는, 근원에서 보는 사상을 갖는 우리 불자님들이 차근차근 수가 불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더디 오건 빨리 오건간에 보다 확실한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현대 과학에서 미처 모르는 정도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과학은 다만 상대유한적인 물질세계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불교는 형이하학적인 물질 세계도 다 알고 또 물질보다도 훨씬 근원적인 에너지세계 그런 무형적인 세계를 압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형이하학적 물질세계 또는 형이상학적 정신세계를 다 통틀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물질세계만 겨우 분석하고 거기에서 콱 막혀있는 과학이 보다 더 생생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물질세계가 아닌 정신세계, 순수에너지세계, 에너지에 포함되어 있는 무한광명세계를 알아야합니다. 이걸 모르고서는 과학이 보다 더 효과적으로 발전을 못 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도 과학이 보다 더 생생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교와 같은 종교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사실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다종교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만 하더라도 우리 불교인들이 2,000만이라고 합니다마는, 너무 과장된 말로 생각이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불교인들 2,000만보다 더 많겠으므로 종교인구 통계수치를 합치면 우리 한국인구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딘가는 과장이 있으리라 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우리가 종교인구를 생각해 볼 때 한국을 비롯한 세계 불교인구가 거의 10억쯤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구도 불교보다 더 많은 10억 이상쯤 되고 중동을 중심으로 해서 이슬람교도 역시 거의 10억보다 많든가 적든가 하고 그리고 또한 몇백종의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는 하나의 철두철미한 신앙체계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종교가 가장 좋다고 치켜세우고 확신을 가질 것입니다. 확신도(確信度)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기신앙을 위해서는 서슴없이 남을 배격하고 편견을 내세웁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중세기에서 기독교의 십자군원정, 또 영국과 프랑스의 30년 전쟁을 보면 모두 종교가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 지동설을 부르짖다가 화형에 처한 부르노와 같은 중세기 철인을 봅니다. 이렇게 평화나 정의를 위주로 하는 종교 밑에서 도리어 그런 잔인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처럼 고도로 발달된 시대에 있어서 우리 인간은 다시 비참한 짓을 안할 것이다, 남북전쟁은 다시 없을 것이다, 세계인들은 1차나 2차 대전 같은 무시무시한 전쟁을 안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것은 모양은 꽤 화려하고 찬란스럽습니다마는 인간성 자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 진전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기회만 되면 다시 전쟁도 하고 무시무시한 싸움이 일어납니다. 우선 이란과 이라크의 7년 전쟁 보십시오. 같은 이슬람교도인데 7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펼쳤던 것입니다. 왜 그런가? 이것은 법집(法執)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견해가 옳다는 독선적인 법집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만일 양편이 다 법집을 떠나서 정말 이슬람사상이 철두철미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 불교를 보십시오. 벌써 파가 몇 파입니까? 저 같은 사람은 감히 부끄러워서 불교의 이야기를 할 엄두도 못 냅니다마는 하여튼 무슨 종파 무슨 종교이든지간에 이와 같이 분파되고 분열된 상황을 보십시오. 과연 종교가 필요한 것인가? 종교의 상황을 볼 때 정의감에 불타는 분들은 종교의 무용론(無用論)을 펼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불교도 문중대립으로 얼마나 추태를 많이 보입니까. 이런 것 역시 다 부처님 법을 떠나서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법집을 못 떠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 불법뿐만 아니라 일체종교가 모두 다 법집을 떠나서 울타리를 헐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불교인의 경우에 아집(我執)이라 하는 나()라는 관념은 제법공(諸法空)이다 하니까 대강 떠나지마는 법집을 못 떠나니까 각 종파가 대립해 싸우는 것입니다.


아함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라문이 부처님께 가서 “당신은 괴로움 또는 근심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말씀이 “무엇을 잃었기에 내가 괴로워하고 근심할 것인가?” 하셨습니다. 부처님 안목에서 본다고 할 때는 잃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인데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 그 바라문이 다시 “당신은 기뻐할 것이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 부처님께선 “무엇을 얻었기에 내가 기뻐할 것인가!” 하셨습니다.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 다 원만구족하게 갖추고 있으므로 사실 잃음도 없고 새로 다시 얻음도 없습니다. 행복은 우리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이므로 나한테 있는 본생명이 일체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부처이므로 새삼스럽게 우리가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잘못봐서 헛보는 것이지 바로 보면 그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어 버리면 또는 부처가 되는 과정에서도 한없이 무량법락(無量法樂)이 있으며, 모든 문제를 근본 본질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잃음도 없고 또는 얻음도 없이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의 독선을, 법집을 떠나버리면 나와 남의 한계가 없고, 좋다 궂다 하는 시비가 있을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승찬대사가 신심명(信心銘)에서 ‘지도무난(至道無難)이오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이것은 지극한 도는 어렵지가 않다, 다만 중생의 섣부른 상대적인 지식 가지고 옳다 그르다 모두 시비분별하니까 어려운 것이니,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이라’ 미워하고 좋아하는 그런 관념만 떠나버리면 훤히 틔어서 천지우주가 다 부처뿐이란 말입니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 이것이 우리 번뇌의 시초입니다. 우리 눈이 어두워지는 시초가 무엇이냐 하면, 원래 본래면목이 청정미묘한 불성인데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면 그때는 그것이 무명심이 됩니다. 따라서 ‘단막증애하면’, 미워하고 좋아하는 것만 떠나버리면 ‘통연명백이라’, 천지우주가 오직 청정미묘한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그 자리가 쉽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우리가 그 자리에 가려고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본무이(道本無二)라, 원래 도()라는 것은 둘이 아닙니다.


예수나 공자나 노자 같은 분들이 성자가 아니라면 석가모니 마음하고 다르겠지만 성자라고 할 때는 부처님 가르침과 둘이 아닙니다. 성자라는 것은 우주의 본바탕, 인생과 우주의 본진리를 보고서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위대한 분들이 물론 역사적 배경 따라서 약간의 표현은 다르고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중생의 그릇 따라서 설법하는 여러 가지 방편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 줄거리, 우주의 본바탕, 인생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같은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도 마음을 가다듬어서 기독교의 요한복음서나 마태복음서 또는 누가복음서의 구절을 보십시오. 물론 부처님 가르침같이 철저한 것은 안됩니다마는 그래도 역시 중요한 법문은 같습니다. 따라서 그 같은 것을 궁극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 아귀다툼하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공연히 힘의 낭비일 뿐입니다. 한 세상 살다가는 인생, 몇십년 살다마는 인생, 정말 부처님만 믿어도 오히려 짧은 세상입니다.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우리가 오랫동안 성불의 길을 닦아 나가야하는 것입니다. 성불의 길로 나아가기만에도 우리 인생은 너무나 짧습니다. 이런 짧은 동안에 기독교나 유교나 모두가 근본은 불교와 같은 것인데 우리가 무슨 필요로 공연히 비방하기 위해서 힘을 낭비합니까?

따라서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마땅히 아집 곧 나라는 집착을 떠나고, 또는 내 종교만 옳다하는 자기관념상 즉 법집을 떠나버린다면 각 종교의 울타리나 벽은 저절로 무너지고마는 것입니다. 또 앞으로 종교는 그래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종교무용론이 나오기 십상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본래 부처다, 본래 부처니까 그냥 내가 한 생각 돌이키면 곧장 부처가 되겠지, 이렇게 부처경계를 너무나 안이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마는 역시 부처님 공부하는 가장 지름길, 그야말로 가장 성불의 정문이라 하는 것은 참선 아니겠습니까? 참선을 우리는 성불의 정문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모두가 다 참선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를 믿는 분들도 어느 분들은 염불이나 주문은 하기 쉬운데 참선은 어렵다 하고 처음부터 참선에 대해서 굉장히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참선같이 쉬운 것은 없습니다. 참선의 별명(別名)이 안락법문이라, 즉 안락스럽단 말입니다. 어째서 안락스러운가 하면, 참선하면 몸도 개운하고 좋아져서 생리건강에 좋고 또한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마음도 개운하고 또 자기 분위기도 고요해집니다. 우주의 도리에 안 따르면 참선이 못됩니다. 참선이란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므로 누구한테나 참선은 좋습니다. 가사, 우리가 관세음보살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은 저만큼 어딘가에 계신다, 계시다가 열심히 염송하면 우리를 도와주겠지. 이렇게 생각할 때는 염불은 되어도 참선은 못됩니다. 이것이 무엇일까, 저것이 무엇일까, 그런 의심하는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할 때라도 우리가 그냥 상대적인 문제나 의심하고 있으면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 자리를 분명히 추켜들어야 합니다. 불심자리를 안떠나야 비로소 참선이 됩니다.


보조국사 어록의 돈오(頓悟)라는 대목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니까, 무한의 공덕이 본래 갖추어 있고 그 공덕이 부처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딱 느끼고서 참선해야 돈오(頓悟)라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돈오라는 것이 지금 여러 가지 논쟁거리가 됩니다마는.

따라서 부처라 하는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 자리를 분명히 느끼고서 그 자리를 안 떠나려고 해야 선()인 것입니다.

가사, 관세음보살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을 저만치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천지우주의 자리,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인데 천지우주의 부처님자비가 관세음보살이다, 부처님지혜가 문수보살이다라고 느낄 때는 그것이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좋아서 하느님을 부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천지우주가 모두 부처님뿐이다, 이렇게 느끼고서 하느님을 부르면 참선이 됩니다. 우리 마음이 현상적인, 유한적인 문제를 떠나서 절대적인 본래면목에다 우리 마음을 머물게 하고 안주(安住)를 시킨다면 모두가 참선이 됩니다.


더 완벽히 말하면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거니 바로 참선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지우주의 그 도리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참선이란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여묘포서(如猫捕鼠)라 합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조금만 한눈 팔면 쥐가 하도 잽싸니까 도망가고 맙니다. 집중해서 노려야만이 쥐가 도망 못가고 고양이한테 잡히게 됩니다. 그와 같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천지우주가 부처 아니라는 생각이나 나와 남이 따로 있고 분별시비하는 생각을 다 털어버리고서, 모두가 다 무량공덕을 가진 부처뿐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한 눈 팔지 않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과거 전생에 지은 버릇, 금생의 버릇이 굉장히 많아서 자꾸 마음이 빗나갑니다.

그 때는 여계포란(如鷄抱卵)이라,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안 듯이 말입니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부화할 적에 21일 동안을 제대로 안아야 하는데 사흘정도 안다가 그냥 훌쩍 떠나버리면 계란이 병아리가 못 됩니다. 21일동안을 진득하게 참고 참아야만이 병아리가 나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래 부처인데도, 즉 계란이 병아리가 될 수 있는 힘이 다 갖춰 있는데도 참아야 하듯이, 어미닭이 계란을 품듯이 한 눈 팔지 않고 부처님 자리를 지켜서 염념상속(念念相續) 이어가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천지우주가 다 부처다 하는 것은 일상삼매(一相三昧)에 해당하고 그러한 일상삼매, 천지우주가 다 부처뿐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은 일행삼매(一行三昧)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천지우주가 부처뿐이라는 생각을 계속적으로 이어가는 일행삼매를 또한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하는 것이 이른바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 즉, 오염되지 않은 수행이라 합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시비를 가리고 또는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다는 생각을 괜히 해대면 그것이 오염된 수행인 것이지 무염오수행이 못 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범부라 하더라도 역시 참선할 때는 적어도 내가 부처가 다 된 셈치고 해야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별 차이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천지우주는 조금도 차이가 없는 부처님이므로 부처님을 안 떠나고서, 잘나도 부처님 못나도 부처님 넘어져도 부처님입니다. 죽으나 사나 옆을 보나 뒤를 보나 모두 다 부처님뿐입니다. 따라서 그 생각을 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선()이 됩니다. 즉 본래면목을 안 떠나는 것이 선()인 것이고 그래야 오염을 떠난 무염오수행입니다. 무염오수행이 되어야 그때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라는 생각을 딱 해야 비로소 돈오(頓悟)인 것이고 말입니다. 물론 이론도 더러 있을 수가 있으나 그 생각을 안 떠나고 수행을 해야 돈수(頓修)란 말입니다. 이것이 정통적인 해석인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생명의 광명이기 때문에 대일여래(大日如來)라, 우주가 바로 대일여래입니다. 또한 우주의 생명이 나한테 똑같이 다 들어있습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거니, 너와 나와 우리가 둘이 아니거니, 일체존재는 다 간격이 없이 불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지우주가 부처님의 광명뿐이거니, 비로자나불이라, 광명변조 즉 광명이 두루해 있다는 말입니다.

비로자나불을 우리말로 풀이하면 광명변조입니다. 에너지 광명이 우주에 꽉 차 있습니다.


물질의 근원에는 광명만, 불성광명만 충만해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 광명을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도인들은 모두 그런 광명을 보고, 자기생명과 자기 모두와 광명과 하나가 딱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무아무소유(無我無所有)라, 나와 남이 없고 또 내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무아미타불이라.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무량광불, 부처님의 광명이 우주에 충만해 있어 무량광불입니다. 그 가운데는 행복이나 여러 가지 가능성이나 안락 모두가 충만해 있기에 환희광불입니다. 기쁨과 환희가 충만해 있습니다.

광명과 행복과 환희가 우리 자성, 우리 인간의 본성 가운데 가득 차 있습니다. 인생은 그것 뿐인데 우리가 잘못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치를 하나 또는 경제를 하나 또는 학교스승이 되나 어떤 지위에 있든지간에 인생의 본래면목자리를 딱 느끼고서 그 자리를 안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원의 차원에서 봐야지 그냥 중간쯤 되는 데에서 본다면, 같이 어우러지고 같이 시야비야하고 맙니다.


우리는 순간찰나도 영원의 차원에서, 불성차원에서 문제를 조감하고 반조해서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행동 하나를 모두가 성불하기 쉽듯이 말입니다. 우리 이웃을 모두가 성불로 이끄는 것이 우리 불자의 보살행이 되지 않겠습니까.

천지우주는 바로 무량광불입니다. 대일여래입니다. 천지우주는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된 비로자나불입니다.

우리 역시 그와 같이 똑같은 아미타불인 것이고 우리 자비는 관음보살이고 우리 지혜는 문수보살입니다. 조금도 간격과 틈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야만이 인간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하늘 아래나 하늘 위에 가득 차 있는, 더 나을 것이 없는 가장 고귀한 인간의 존재입니다.

이렇게 해서 금생에 한사코 성불하십시요. 우리가 성불할 때에 우리 이웃도 정화가 될 것이고 우리 사회도 정화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 이것으로 마칩니다.


<1989년 3월 19일 KOEX 대강당에서 서울 금륜회 창립법회시 법문내용입니다.>

 

 

 


 

 

말씨도 꽃씨처럼  고우면 꽃이 핍니다 / 이채

 

 

 

 

 

 

 

꽃씨처럼 말씨도 고우면 꽃이 핍니다

 

말씨가 고운 사람은 마음씨도 고와

누구나 좋아하고 어디서나 환영받습니다,

 

 

어께를 부딪치거나 발을 밟아도

 

살며시 웃어주는 풀꽃같은 미소로

 

작은 관심 작은 베려에도

 

고마움을 잊지 않는 감사의 꽃으로

 

 

길을 묻는 그대에게

 

차근차근 일러주는 친근한 꽃으로

 

없는 말은 지어내지 말고

 

있는 말도 가려서 하고

 

같은 말도 곱게하면

 

나도 모르게 꽃처럼 아름다운 꽃마음이 되지요,

 

 

어떤 이유로 다투거나 화 날 때에도

 

속상하고 짜증 날 때에도

 

씨가되는 말은 하지 않기로해요

 

씨가 되는 말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아

 

오해의 불씨 원망의 불씨

 

미움의 불씨가 될수 있으니까요

 

 

꽃씨처럼 말씨도 고우면 꽃이 핍니다

 

 

 

한 알의 씨앗이 한아름 꽃을 피우듯

 

한마디의 말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사랑의 꽃 향기를 전할때

 

우리 사는 이 땅은

 

웃음꽃 만발한 행복의 꽃동산이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