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그림자'업'수미산을 넘다/혜원스님

2012. 9. 8. 06:2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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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법칙 / 혜원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제 4 화 : 마음의 그림자'업'수미산을 넘다
청정한 마음이 한 번 구르니 황금은 빛을 더하는데 무수한 사람들 빛을 쫓다 넘어지네 그 빛 남의 것 아니건만 밤낮으로 따로 구하니 하루하루 고단함이여! 업장은 수미산 처럼 쌓이고, 윤회의 물레방아는
멈추지 않네.
마음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고 헀습니다. 오직 마음뿐임을 믿는 것이 진정한 부처의 종자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의 그림자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있는 이 이웃과 아주 오랜 동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놈은 심술도 잘 부리고,화도 잘 내고,욕심은 날밤을 새워도 그칠 줄 모릅니다. 웃고 울고 모난짓을 잘 하고,어느때는 자비스런 적선도 하려 들고, 우쭐대기를 좋아하지만 감동이 넘치면 바다와 같은 아량이 넘치기도 합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업(業)"이라는 친구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말 보다 더 많이 듣게 되는 불교의 감초, 아니 뜨거운 감자 아닐까 합니다. 업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업은 허공처럼 모양과 빛깔이 없습니다 . 만질 수도 없고 묶어놓을 수도 없지만,시시때때로 우리의 마음에 간섭을 하고 있으니 그냥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업에 관한 단어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업장,업력,업풍,업권,업식,업보,업해 등 한결같이 부정적인 말들입니다. 이러한 업이 어떻게 생겼는지 속시원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업을 알려면 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일체 모든 것을 만드는 창조주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일체유심조인 마음은 본래 광명(光明)그 자체입니다. 광명이란 밝음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런 빛이 아닙니다. 꿈 속에서 보는 빛이 색깔있는 빛이 아니 듯,마음의 광명이라는 것도 어떤 색으로 나툰 빛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빛이란 밝게 아는 것,즉 지혜(智慧)를 의미합니다. 그 지혜가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광명이라 이름지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밝음 즉 지혜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는 상태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일컬어서 본래의 마음,태초의 마음,위음왕불(威蔭王佛)이전의 마음, 즉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무명은 어둠도 밝음도 아닌'본래 있는 그러한 마음'을 말합니다. 이'무명(無明)'이 바로 업의 근원입니다 이 무명을 쌍암쌍명(雙暗雙明)이라고도 하는데, 한 티끌 묻어 있지 않은 청정한 마음은 가장 순수한 어둠이자 또한 가장 순수한 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무명(본연한 마음)이 한 번 그 지혜의 능력을 굴리면 빛이 되고, 그 능력을 거두면 어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은 마음의 손등과 손바닥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있는 그러한 마음 스스로가 바로 지혜이자 능력인 것입니다. 청정법신(淸精法身) 비로자나불은 바로 이러한 마음을 말합니다. 이제 업이 생기는 과정을 알아 보겠습니다. 이 무명(마음)이 한 번 지혜의 능력으로 빛을 발할 때, 마음은 스스로 이 빛을 보고 즐깁니다. 그러다 그 빛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다가 취하게 되고, 취할려는 마음이 애착이 되면서, 이 빛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심이 생깁니다. 탐심이 극에 달하면 이로 인해서 마음에 어떤 경계가 생기고, 그 경계를 밖에서 온 것인양, 실재 있는 것인양 착각하는 탐심이 지속되고 거듭 반복되면 어느새 모양(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경계에 떨어진 마음은 청정한 자신의 본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그리고 끝없이 윤회를 거듭하면서 경계를 쫓고, 수 없이 많은 경계를 쫓는 다른 마음들과 서로 다투고 돕고 주고 받으면서 이제 완전한(?) 형상(形像)을 만듭니다. 이것이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기고,이 우주(宇宙)가 생긴 최초의 원인입니다. 업이란 이렇게 근본마음을 잃어버린 청정한 마음이 탐심(貪心)이라는 원인(源因)인을 양분삼아 과보(果報)라는 결과를 나타내는 힘을 말합니다. 업은 그 자체가 없지만 감싸고 도는 안개처럼 마음의 작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업이 한 번 결정되면 좀처럼 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의식주는 물론 희노애락애오욕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좌지우지합니다. 인간관계가 꼬이는 것도 마음을 옥죄고 있는 사람들의 업력(業力)이 서로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업은 마음이 짓는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의 거의 모든 부분에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업을 짓는 과정을 여러분은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말입니까? 바로 꿈을 꾸면서 마음의 능력이 어떻게 펼쳐지고 거두워지는지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 속에서 보는 빛은 빛이 아닙니다.꿈 속의 어둠은 어둠이 아닙니다. 그것이 실재하는 빛이라면 여러분은 꿈을 깨고도 그 빛을 봐야 하지만 꿈을 깨고나면 빛도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좋아하고 싫어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욕심내는 등의 온갖 일을 다 합니다. 단 5분을 꾸는 꿈속에서 한 달,아니 1년의 긴 시간을 여행하고 돌아 오기도 합니다. 꿈꾸는 단 5분의 시간에 마음은 수 많은 업의 세상을 건립한 것입니다. 다만 꿈속에서 짓는 업은 내 마음이 만든 세계이므로 과보는 없습니다. 꿈을 꾸는 것도 마음이 꿈을 펼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스스로 무궁무진한 능력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고 믿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좋아하고 애착하는 마음으로부터 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마음이 스스로 펼쳐 놓은 지혜의 빛을 바깥 경계로 알고 쫓다가 지금 이 몸에까지 온 것입니다. 중생(衆生)이란 청정한 본래의 마음을 등지고 사는 무리란 뜻입니다. 부처에서 중생으로 떨어진 원인인 탐심(貪心)의 마음이 바로 업의 시발점인 것입니다. 그 탐심이 반복되어 관념(觀念)을 이루고,이러한 관념이 반복되면서 굳어진 습관(習觀)이 업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다 나쁘다,더럽다 깨끗하다,그리고 이익이다 손해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십니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각으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단순해지면 정신이 맑아지고 생체리듬이 원활해서 병(病)이 없어집니다. 몸의 병이란,마음이 중심을 잃고 갈팡질팡할 때 다른 업력이 뚫고 들어오는 과정입니다. 죽음이란 ,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이 스스로 지어 놓은 업보(業報)에게 백기를 들고 항복한 결과입니다. 생각의 필름이 돌아가는 길목을 잘 살펴 보십시요.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도 짓고있는 업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업이란 형체가 없습니다.마음을 따라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 그림자에 밟혀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요. 행복하게 살아도 부족할 시간이 업에 의해서 100분의 1로 줄어들었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나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십시요. 그리고 밖을 보는 마음의 눈을 스스로의 마음을 향해 맞추십시요. 마음을 돌이켜서 보는 놈을 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이렇게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 실체는 무엇인가?" "업으로 고통받기 이전의 나는 누구인가?" 성급하게 결론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요. 단정짓지도 마십시요. 다만 나를 찾고자, 나를 알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바라 볼 뿐입니다. 이 간절한 물음이 계속되도록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십시요. 세상에 대한 관심을 이제 이 마음의 근원을 찾는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본래 내 마음은 더러움에 물든 적 없습니다. 생각으로 복잡하지도 않았습니다. 업으로 고통받은 일도 없었습니다. 찬란한 광명일 뿐입니다. 붙잡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음이 스스로 쉬어집니다. 창공의 새처럼 자유롭습니다. 그렇습니까? 부처님은 3독(三毒)이라 하여 탐진치(貪嗔痴)를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불자라면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얘기입니다. 탐진치는 업을 키우고 살찌우는 거름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마음을 왜소하게 만들고 몸을 병들게 하는 독(毒)입니다. 근본의 마음은 본래 업에 물든 적 없고,근본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명제에 분명해야 합니다 전도된 삶을 청산하겠다는 굳센 의지가 없다면 수행은 고행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기도를 하든 참선을 하든 주력을 하든 청정한 본래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정한 본래의 마음으로 귀향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마음의 업을 없애는 지름길이자 최후의 길입니다. 부처님이 보여 주신 깨달음은, 초지일관해서 마음의 근본성품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귀코혀몸뜻으로 지어 온 수 억겁의 업을 어떻게 다 없앨 수 있겠습니까? 없애는 업보다 짓는 업이 훨씬 더 많습니다. 잡초를 박멸하려면 돌로 눌러놔서는 어렵습니다. 눌린 잡초는 언젠가는 다시 뚫고 올라 옵니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업을 없애려면, 업이 비롯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근원에서부터 다스리지 않으면 어떠한 처방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의 뿌리를 벗어나서 나무가지나 붙드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다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복(祈福)을 구하는 수행은 서리위에 눈을 더하 듯, 업의 수레바퀴를 더 굴러가게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업은 눈덩이와 같습니다. 눈덩이가 자꾸 구르고 구르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을 이루고 모든 생명을 덮어버리듯, 마음의 애착에서 시작한 업은 어느새 수미산을 덮고도 남습니다. 새해에는 업에 굴복하는 인간의 삶이 아니라 업을 조복받는 정진의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자성의 청정한 빛 보고싶은가? 하늘의 보름달 둥글고 처마끝에 고드름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