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

2012. 9. 8. 06:3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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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

〈152〉문익법안 선사 ⑩ - 큰 법은 말하기 어렵다

 

 

 

法眼 因見俗人 携兒到 問之不語 乃有頌云

兒年八歲 問不解語 不是不語 大法難擧

白雲端云 不是不語 大法全擧

 

법안 선사는 어떤 세속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다니므로

그 아이에 대해서 물어도 말을 하지 않아서 이에 게송을 지었다.

“아이의 나이가 8세가 넘었는데 물어도 말을 할 줄 모르니

이것은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큰 법을 드러내기 어려운 것이로다.”

백운수단 선사가 말씀하였다.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큰 법을 온전히 드러낸 것이로다.”

 

강설 : 8세 먹은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법안 선사와

백운 선사의 견해를 달리한 내용을 이끌어 왔다. 법안 선사는 아이가

큰 법에 대해서 드러내기 어려워 말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고,

백운 선사는 아이가 말을 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큰 법에

대해서 온전히 드러낸 일이라고 한 것이다.

진리란 말을 통해서 표현할 수도 있으며 말을 통해서 오히려 진리와

멀리하게 하는 일도 있다. 묵묵히 있는 일도 진리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묵묵히 있으므로 오히려 진리를 감춰버리는 경우도 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말을 해도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되고 묵묵히

있어도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되지만,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말을

해도 진리를 방해하고 묵묵히 있어도 진리를 방해한다. 진리가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고는 사람에 있는 것이지 말을 하고 안하고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 용제소수 선사 ① - 수천 생을 위배하다

 

紹修山主 第三度入嶺 地藏乃曰 此者 特爲和尙

從汀洲恁來 喫盡艱辛 涉歷許多山嶺 有什向處

地藏云 涉歷許多山嶺 也不惡 師不薦 至夜

床前侍次云 某甲百劫千生 曾與和尙 違背

此來 又値和尙不安 地藏起身 將杖 卓向面前云

只者箇也不背 師從此省悟

 

소수 산주가 세 번이나 설영 땅에 들어가서 지장 화상을

참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특별히 화상을 위하여

정주로부터 이렇게 와서 고생을 많이 겪으면서 허다한

산과 재를 지나왔습니다. 어떤 좋은 점이 있습니까?”

지장 화상 말하였다.

“허다한 산과 재를 지나왔으니 또한 나쁘지 않도다.”

소수 산주가 알지 못하더니 한 밤에 이르러 평상 앞에서 시립하고 있다가 

 

   
 

저는 백겁 천생을 일찍이 화상으로 더불어 위배하였는데

여기에 와서 또 화상을 만나 불안합니다.”

지장 화상이 몸을 일으켜 주장자를 가지고 그의 면전에 우뚝 세우고 말하였다.

“다만 이것은 또한 위배하지 않았느니라.”

소수 산주가 여기에서 깨달았다.

 

수많은 그물눈 있어야 그 가운데 인연 ‘닿아’

 

강설 : 소수 산주란 용제산의 소수(龍濟紹修) 선사다. 지장 화상과의

특이한 대화를 통하여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지장 화상을

친견하려 세 번이나 설영이라는 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교통마저

불편한 시절에 먼 길을 걸어서 세 번이나 선지식을 친견하려 간 그

행각이 도에 대한 지극한 마음을 말해준다.

지장 화상이 그 일을 겨우 “산을 넘고 재를 넘어 찾아온 일이 나쁘지 않다”

라고 했을 뿐이다. 그 말에는 깨닫지 못하고 밤이 되어서야 평상 옆에

있다가 유정물인 사람은 위배했으나 무정물인 주장자는 위배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깨달음이란 언제 무슨 인연으로 다가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존은 무수한 방편의 그물을 쳐 놓고 있다. 어느 그물에

어떤 고기가 걸려들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기가 그물의 한 개의 눈에 걸려든다고 하여 한 개의 그물눈을 바다에

쳐 놓을 수는 없다. 수많은 그물눈이 있어야 그 가운데 인연이 있는 곳에

걸려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수많은 방편도 그와 같다.

 

 

[불교신문 2746호/ 8월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