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4. 23:4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큰스님과의 대화】청화스님(곡성 성륜사 조실)
일채 존재는 한 생명체
부처와 나 둘 아님을 믿으세요
출·재가 막론하고 계율지켜야
*약력
·1923년 生
·1947년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
·40여년을 토굴수행 장좌불와 정진
·85~95년 곡성 태안사 조실
·95~99년 美 팜스프링 금강선원 주석
·현재 곡성 성륜사 주석
기본적인 출가수행자의 계율이 오후불식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밤에 취침할 때까지
눕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다 묵언하면서 하루 한끼니만 먹는 일종식으로 일체 눕지
않고 참선하며 앉아서 잠을 자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40여년 지켜온 선승 청화스님
(곡성 성륜사 조실).
보통사람의 눈에는 고행으로 보이는 그 생활이 편해서 그렇게 살아왔을 뿐이라는
스님은 이제는 몸뚱이도 쇠약해지고, 앉으나 서나 공부에 망상도 별로 나올 때가
아니고 해서 원칙은 세워놓고 있으나 고집하지는 않고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안거와 포교로 3년을 보내고 성륜사 조선당(祖禪堂)에서 주석하고 있는
스님을 만나 살아있는 자들에게 영원한 물음인 생명의 실상과 우주과학시대 한국
불교의 향방에 대해 들었다.
─21세기는 시간의 속도를 짐작하기 어렵고 과학만능의 치달음 속에서 무섭게 변한다는
고백을 하며 살게됩니다. 이같은 우주 과학시대의 참다운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지요.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없는 종교는 맹인이다.’ 이 말은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더라도 합리적인 도리에 입각하여 믿어야 하지, 불합리
한데도 분별없이 전통적인 권위나 인습적인 법집(法執)을 답습한다면 참다운 종교가
못됩니다.
아집 법집을 여의는 것이 참다운 과학이요 진정한 종교입니다. 이런 과학정신이 기본이
되어서 현대물리학이 나온 것 아닙니까. 또 아인슈타인은 ‘우주적 종교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종교는 불교다.
또한 현대과학이 결(缺)하고 있는 것을 메꾸어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불교다’고
말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불교를 진정으로 아는 분이라고 봅니다. 우주 과학시대의
종교는 철학을 날줄로, 과학을 씨줄로 서로 보완하고 조화하는 체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종교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심에 대해서 들려주시지요.
▲신심(信心)은 마음을 활짝 열고 천지와 나와 둘이 아니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반야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물질은 곧 의식이요 생명이므로 지구도
태양도 다같은 생명이며 태양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요, 또 대세지보살과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입니다. 그리고 지구는 이대로 바로 지장보살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가르침을 조그마한 자기 생각으로 좁혀서는 안됩니다.
원융무애한 생명을 구분짓고 가로막는 망념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삼천대천 세계가 바로
부처님이거니 5척남짓한 이 몸뚱이에 들어있는 의식만 생명이 아니라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한결같이 다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못 열려서 나로 보이고
너로 보이고 남으로 보이고, 그 무엇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기복불교의 폐단으로 우선 꼽는 것이 일신의 안위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불교적인 행태이기도 하지않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인 모양(相)만 보기 때문에 그 모양만 실상 실제인 것이고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인간을 보세요. 남자같이 생기고, 또는 여자같이 생기고,
잘 나고 못나고 하는 그런 현상적인 상만 사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의 밝은 지혜로 볼 때는 사실 그런 상은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상은 본래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번뇌에 가리어서 없는 것을 있다고 봅니다.
현상적인 모든 것은 사실상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고유한 것은 절대로 없습니다.
상대 유한적인 인간의 업장으로 갇혀있을 뿐입니다.
─종교는 생명의 문제에 직결된다고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참 생명은 어떤것입니까.
▲생명은 어떻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본래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무슨 모양이 있습니까. 자취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자취가 없고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러한 다른 동물의 생명도 자취가 없습니다. 나무 같은 상, 풀 같은
상만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서 보이는 것이지 그러한 나무나 풀도 역시 생명
자체는 조금도 자취가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 생명 자체는 우리 인간의 몸 속의 신장에나 또는 뇌 속에만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몸 전체에 생명이 가득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이나 물이나 흙이나 모두가 다 생명이 거기에 충만해 있습니다.
이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생명이라 하는 우주의 실상 그 생명은 바로 우주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무량 무변하게 충만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 우주라는 것은 사실 생명 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내 생명 네 생명이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김 아무개한테 있는 생명이나 박 아무개한테 있는 생명이나 똑 같은
생명입니다. 이런데서 우리가 업을 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명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생명은 우리의 마음이요 중생이요 부처입니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 우리 마음이나 중생이나 또는 부처나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 이것은 무슨 원리나 또는 가치나 그런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부처님 그럽니다. 따라서 천지 우주가 오직 동일한 생명이므로 성품은 모두
같은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참다운 불자이며 최상의 공덕인 것입니다.
우리 생명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자리입니다. 우리 생명에는 자비나
지혜나 일체 공덕이 다 들어 있습니다. 행복도 들어있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생명을 낭비하는 것은 손실을 떠나 큰 잘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더욱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되는데요.
▲우리 중생의 허물이 무엇인고 하면 모양 이것은 가짜이고 허망한데 그것을 구하다가
우리 소중한 인생이 다 판나 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집에 살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
살겠습니까. 부자면 부자된 만큼, 감투가 높으면 높은 만큼 공부에는 손해입니다.
또 중생의 망상 가운데 주의할 것은 무슨 일을 했으면, 자기 능력으로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연이 합해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어느 개인의 개별적인 자기
능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관자는 있습니다. 인연이 합해지면 잠시간
무엇이 이루어지고 인연 화합이 안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뿐인 것이지요.
─생명은 모두를 갖추고 있고 무한한 것이라면 죽은 영가에 대해서도 궁금해집니다.
특히 불자들이 가장 많이 동참하는 기도가 영가천도일 것입니다. 더구나 영가천도에
대해 교계에서는 ‘청화스님 신드롬’이 일 정도로 도력을 보여주시고 계신데요.
▲천도의식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생명은 본래
부처이고 부처로 되어야합니다. 설사 어떤 상황이라도 부처가 됩니다.
그런데 극락세계 가는 것을 모르고 죽은 사람은 저승길이 어두워 헤매게 됩니다.
금생 60~70년동안을 몸뚱이와 의식을 같이해 살았을 때 닦았으면, 본래적인 마음과
하나면 우주와 화합돼 극락에 갈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미처 업을 못녹인 습관성으로
업식이 남아 있습니다. 업식이 당분간 존재하면 괴롭습니다.
개나 돼지 등 짐승처럼 생활하면 업식이 흘러 그대로 갑니다.
그래서 그 업식으로 헤매는 영혼을 타일러서 인도하는 것이 천도의식입니다.
금생에 못닦은 미혹된 영혼을 천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귀신을 천도하는 데는
청정도량인 절에서 바른 계행으로 조심조심 청정히 하는 것이 의의가 큽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절에서 하는 것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고인의 위패를 적고 향을 피운뒤 업식을 소청해도 좋습니다.
“영가시여 부처님 가피력으로 나오라”고 해서 <반야심경><법성게> 등을 독송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가들에게 인연생으로 왔다가 인연생으로 간 것이고 따라서
누구도 원망해서는 갈 곳을 못간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독경하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선불교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는데, 중국이 공산화된 지금
우리나라는 선불교의 종주격임에도, 세계적 조류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스님께서는 미국에서 3년여 머무시기도 하셨는데요, 세계적 흐름에
부응키 위해 우리 불교가 어떻게 가야 하겠습니까.
▲승가 생활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는 인간의 진정한 생활 표본입니다.
승가 생활의 근본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무아 무소유 생활 아니겠습니까.
달마스님 때부터 6조 혜능스님 때까지를 순수한 선시대 이른바 순선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의 법문을 가장 중요한 권위로 의지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안심법문입니다. 이 가르침을 선양하고 진작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은, 우주의 도리대로 본래 내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다고 분명히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내 집이나 내 소유물이나 내 절이나
내 종단이나 이런 것도 본래가 없다고 생각해 버리면 참 편합니다. 자기 문중이나
절 때문에 애쓰고 싸울 필요도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승단이 바르게 서고 이 법향이 세계로 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선수행도 한국불교 교단사를 돌아보면 교학을 가르쳐서 선(禪)의 갈래 즉
깊고 얕음을 안 후에 참선을 시켰습니다. 교에 따라 원만하고 합리적인 도리에 따라
실천했던 것입니다. 간화선만이 최고라는 바짝 마른 논리는 위험한 일입니다.
간화선이 한국불교에 수승한 위치로 훌륭한 참선수행법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짚어보면, 임제종 간화선은 종파분별이 극에 달했던 중국 송나라때
분열상의 한 종파로서 고려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조선조 배불정책으로 더 이상
중국과의 교류가 단절된채 오늘날까지 내려온 참선법입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원나라를 거쳐 수백년을 각기 소견으로 분열되다가 마침내
명나라때 가서 하나의 도로 종합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간화선 묵조선 염불선 등
고하가 있는 것도 아니요 우열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하는가 하는 그 자세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본래적인 자세만 여의지
않고 본체를 여의지 않을때는 다 그대로 수승한 대승법이요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 달마스님때부터 6조까지는 이런 이름도 없이 오로지 마음공부만 했습니다.
부처님 법을 범부소견으로 무엇이 옳네 그르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불교가 수행의 중요성을 찾고 회귀하고 있는 흐름 속에서 깊이 성숙해야 할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불자들에게 가장 부족한 점은 삼매에 못드는 것입니다. 이는 불자가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에게 다 해당된다고 보겠습니다. 현실이 바쁘고 복잡하지만, 반드시 가야하고
또한 자신도 모르게 가게 되는 것이 성불입니다.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을 뿐이지 꼭
성불하게 됩니다.
세상을 돌아보면 전쟁 지진 등 별별 일이 다 일어나도 차츰 좋은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언젠가는 다다르게되는 성불의 길에 가장 지름길이 참선입니다.
유일한 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선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수행에 진전이 없는 것은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명상에 들어야 욕계가 보이고 초월하게 됩니다.
탁수를 가만히 두면 맑은 물만 뜨는 이치와 같습니다. 고요히 맑히고 또 맑히라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주석하시는 이곳 조선당(祖禪堂) 법당은 아주 특이하게도 부처님 고행상을
모셔놓았습니다. 스님께서는 40여년 힘든 고행을 하신 선사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듯한 형형한 눈빛이 수행의 무게를 짐작하게 합니다.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스님께서 하신 고행을 권하시는지요.
▲고행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율이 마음닦기 알맞은 것이어서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고 오히려 제대로 못해서 안타깝지요. 마음과 몸이 둘이 아닌데 몸을 그렁저렁 두면
게을러지기 십상입니다.
몸으로 계행 청정해야 하는데 남 눈에는 고행으로 보이는 모양이나 내게는 온몸이
시원스러울 정도로 편한 생활방식입니다. 장좌불와를 해보면 눕는 것보다 정삼각으로
앉는 자세가 가장 편합니다. 일체 여래의 상징적인 모습이 가부좌입니다.
망상이 일지않고 마구니가 봐도 피합니다. 그러나 어거지로 하면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됩니다. 개별적으로 알아서 해야할 일이지요.
다만, 부처님 계율만은 도덕적인 윤리로써재가 출가자 모두 지켜야 합니다.
출 재가자를 막론하고 계율을 지키면 선신이 북돋아주고 악신이 물러갑니다.
결코 ‘나는 혼자다’는 생각을 마시기 바랍니다.
위영란 기자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들
길을 걷다 문득 생각나는 사람에게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어
시원껏 이야길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가끔씩 타인에게 활짝 열어 나를 보여주고 싶고, 보여준 나를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 지는 것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누군가에 대한 기대로 마음 졸이고 애닳아 하고 안타까워 하며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정열들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은 할 수 없지만 '언젠간 해보리라' 맘 먹은 일들이
하나 둘 내 안에 소망으로 쌓여가는 것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거울 저편의 퉁퉁부은 얼굴과 짝짝이 눈, 입 언저리의 작은 흉터까지
이뻐 보이는 그런 기분좋은 아침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내 안에 아직도 살아 숨쉬며 꿈틀대는 꺼지지 않는 꿈들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간간히 찾아오는 무료함과 그로 인해 절실히 느끼게 되는
일의 소중함들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가지고 싶은 것 많더라도 욕심의 무게를 측정할 줄 알며
정량을 초과하지 않을 줄 아는 지혜를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매일아침 눈뜰 때 또다시 새로운 하루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아는 낙천적인 우리의 모습들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힘겨움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일터로 향하는 일상의 시작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사소한 것들에서도 난 행복해라고 느낄 수 있는 열려있는 마음들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돌이켜보니, 행복이라 이름 붙인 그 모든 것들로 오늘도 행복한 하루...
또 다른 오늘을 준비하는 지금 이 시간...
그렇게 준비하는 오늘 역시 행복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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