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염불을 해야 하는가? (금강불교 천일 염불정진 회향법문)

2012. 9. 14. 23:5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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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염불을 해야 하는가? (금강불교 천일 염불정진 회향법문)

 

                                                                        법문: 원인스님

 

 불자님들!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염불정진으로 평생 신도들을 교화하신 청화 큰스님의 염불선을 수행하시는

여러 신심 있는 불자님들과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서 같이 공부하게 된 것을,

산승은 매우 기쁘게 생각 합니다.

 

산승도 오래전에 청화 큰 스님과 인연이 조금 있었습니다.

옛날 태안사 계실 적에 제가 인사드리고 나서 말세에는 염불수행이 모든 사람들의

근기에 부합되고, 모든 불자들이 수행하는데 가장 좋은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정말 좋아하셨습니다.

마치 먼 타지에서 고향의 동지를 만난 듯 기쁜 표정을 지으셨는데, 여러분들을 보니,

새삼 그때 청화 큰스님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고 있습니다.

 

스님 세 사람과 같이 가서 절을 하니까, 꿇어 앉으셔서 절을 받으셨습니다.

너무나 겸손하시고 인자하신 그 모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청화큰스님 법향이 서려있는 금강카페에 산승도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처음 카페에 가입인사 남겨놓은 속에 그 말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금강 불교는 청화큰스님의 교화를 받은 염불 수행자들의 모임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 계신 분들 염불 수행법을 잘 아시겠지만 천일 염불정진

회향을 위해 이렇게 오셨으니 산승도 오늘 염불에 대해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1969년도 가을 여기 수도암에서 행자생활을 할 때 지금 대구에 계시는

법경노스님께 초발심자경문을 배웠습니다. 그때 법경 노스님께서 초발심자경문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염불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행자 때부터 염불수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습니다.

부처님께서 극구 염불수행은 찬탄하셨고, 말세중생들이 마땅히 귀의 할 곳이다.

이렇게 하시면서 나에게도 염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 은사스님께서는 너는 참선을 해야 된다고 하시니, 조금 혼동이 되기도

했지만, 은사 스님의 말씀을 존중해야 되기 때문에, 강원을 졸업하고는 바로 선방에

들어가서 열심히 정진을 했습니다.

 

참선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는 염불수행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금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참선을 위주로 경우에 따라 염불도 해보고, 주력도

해봤는데, 염불 수행은 참 미묘한 수행이라고 항상 생각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정토 삼부경에서 자세하게 염불수행의 이치를 잘 밝혔으며,

인도의 용수 마명 보살님이 염불을 강력하게 주장하셨고, 또 마명보살이 지은

대승기신론에도 여러 가지 교리적인 관법수행을 말씀하시고, 끝에는 이것은 일반대중들이

공부하기가 어렵지만 염불수행은 모든 수행자들의 근기에 부합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중국에서는 선사들이 염불을 참 많이 가르쳤습니다.

옛날 중국의 혜원스님은 중국에서는 염불수행 결사를 지어 기초를 만드셨고,

그 분 이후에 수많은 스님들이 염불수행을 가르쳤는데, 그중에서 특히 아미타부처님의

후신이라고 칭송되는 영명연수선사는 법안종에 제 5조 법인을 받은 분인데 그분의

염불 법문은 대단히 뛰어납니다.

 

특히 그 중에서 염불 사료관은 만수만인거(萬修萬人去)라고해서 염불은 만 사람이

닦아서 만 사람이 공덕을 입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부분은 아주 염불 수행을 중국

선종에다가 접목시킨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 이후 중국에서 육조스님 때부터 간화선 수행법이 있었는데, 그 전에는 달마선이라

해서 묵조선이 쭉 내려왔습니다.

육조스님에게 남악선사가 찾아오니까, “이렇게 온 것이 무슨 물건인고?”

하니, “모르겠습니다.” 하니까... “가서 참구를 해라.”

 

그래서 8년간 화두 참구 끝에 화두를 타파하고, 다시 와서 똑같이 질문하니까,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니,

 “그대가 이미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도다.” 하면서 인정을 했습니다.

남악선사 밑에 마조스님이라고 유명한 도인이 나와서 중국 선종의 꽃은 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조스님은 남악선사를 만나기 전에, 무상선사라고 하는 도인에게 전통선과 염불수행을 전해 받았습니다.

 

처음 달마대사가 전한 수행은 마음 한 법 관하는 것이 모든 법을 거둔다.”라는

관심수행법, 즉 묵조선 이었습니다. 육조에 와서 다시 화두 참구하는 간화선이

유행하다가 송나라 시대 때부터 간화선의 폐단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간화선에 의리가 일어나면 공부가 어긋나는데 각종 선에 관한 서적이 나오므로 어렵게

공부하지 않고 의리선만 키우다 보니까, 정안 종사는 안 나오고, 의리선에 의지하는

종사가 끝도 없이 배출이 되어, 가짜 도인이 너무 많아 선의 순수성이 사라지고 각종

선의 문제점이 생겨나게 되었든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선종도 이와 유사한 형태 속에서 도인은 나오지 않고 문제점은 많아지니

그때가 오늘날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중국 명, 청 시대에 대표적인 큰 스님인 감산 덕청선사 라던가, 철오선사, 주굉선사, 이런 분들은 간화선으로 학철 대오를 했지만, 간화선을 버리고 염불선을 주장하게 되므로 중국의 말기에는 거의 간화선은 없어져버렸습니다.

 

오늘날 현재 중국이나 홍콩, 대만은 전부 염불수행 뿐입니다.

이렇게 염불수행이 유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간화선의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인도, 중국, 우리나라의 대 도인들이 왜 염불수행법을 찬양 했을까요?

염불은 상, , 하 근기가 모두 닦을 수 있는 완전무결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염불이 중국에서 묵조와 간화가 사라진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때 중국 대만에서 한국의 전통선종인 간화선을 도입하기 위해 선원을 열었으나

몇 철 못가 철거하고 말았습니다.그리고 다시 대만은 염불수행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염불수행에 가장 공이 큰 분이 원효대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염불에 대해 많은 글을 썼고 염불수행도 열심히 했습니다.

정토삼부경에 대한 종요를 지었고, 유심안락도라는 책에는 도솔천과 극락세계를

비교한 그런 내용인데, 거기에서도 염불을 굉장히 중요시 했습니다.

 

사실 원효대사라고 하면 한국 불교의 가장 대표적이고, 인도, 중국, 우리나라, 일본

합쳐서도 원효대사만큼 불교계에 업적을 남긴 분도 드뭅니다.

원효대사의 지혜는 부처님과 다름이 없을 정도로 안목이 출중했습니다.

그리고 의상대사는 스스로 백화도량 발원문을 짓고 열심히 관음염불을 했습니다.

 

신라때 발징화상은 건봉사에서 천명을 모아 염불만일 수행회를 결성하여 간절하게

염불하여 천명이 모두 정토왕생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나옹화상은 부처님의 화신이라고까지 칭송받는 큰 도인인데, 염불을

많이 주장했습니다. 보조국사도 염불 요문을 지어 염불수행을 가르쳤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서산대사, 사명대사 뿐만아니라 조선시대에 가장 염불수행이

왕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산대사는 정말 대단한 수행력을 갖춘 분인데, 아마 신라, 고려, 조선 이 세 시대를

통해서 수행력으로 따지면 서산대사가 단연 최고라고 할 만한 대 도인 입니다.

서산대사는 한번 밥 먹고 들어가면 석 달을 밥도 안 먹고 숨도 안 쉬고, 그대로 깊은

삼매에 들어갔다가 석 달 후에 깨어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산대사는 신통력이 있었습니다.

 

서산대사에게는 선가귀감이라는 대표작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구석구석에 염불수행을

아주 간절하게 밝혔습니다. 그리고 시에도 염불수행을 권장한 글이 보이기도 합니다.

선가귀감은 참선하는 수행자를 상대로 한 법문이라 오늘날 까지도 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의 교과서 같이 기준이 되는 글인데, 왜 염불을 극구 주장했을까요?

거기 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이 법이 말세가 되어서 모든 경전이 없어지더라도 내 신통력으로 나무아미타불 이 여섯 자는 백년을 더 머물게 해서 중생을 제도하게 하겠다.” 라는 말씀이 경에 있습니다.

그만큼 이 염불수행은 말세 중생들한테 가장 적합한 수행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원효대사는 부처님 돌아가신지 1300년 지나서 태어나셨고, 또 원효대사가 돌아기신지도 1300년 됩니다.

 

불기 2556년이므로 거기 80년을 보태면, 2630년이 됩니다.

2600년 역사 속에서 원효대사는 딱 그 중간 지점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원효대사의

염불수행법을 교화한 이후로 우리나라에 계속해서 끊임없이 염불 수행자들이 나왔습니다.그리고 해인사라든가 전국의 명성지 즉 옛날 전통 도량에 보면, 옛날 스님들이 바위에다가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글자를 적은 게 많이 있습니다.

 

해인사도 입구에 보면, 그런 게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위에 나무아미타불 글자

써놓은 거 보면, 경치에 빼았겼던 마음에서 다시 염불을 상기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염불을 잊었다가도 그 글씨를 보는 순간 다시 염불을 생각 할 수 있고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해 주고자 하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로 써 옛날 스님들이 염불수행을 얼마나 강조했고 또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염불만일회를 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염불수행을 하는데 참으로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저는 요즈음 세상에는 염불수행이 맞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염불선은 묵조선의 장점과 간화선의 장점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미묘한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달마대사가 마음 한법 거두는 것이, 일체 만법을 다 거둔다.”라고 했는데,

바로 아미타 부처님 명호 속에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우리의 절대성의 본래심을

드러내는 도리가 있기 때문 입니다.

 

아미타라는 것은, 산스크리트어인데, 그걸 해석하면 무량수라 번역하고 무량광이라고도 합니다. 무량수라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수명이다. 또 무량광은 헤아릴 수 없는 광명이라는 뜻입니다. 무량수는 시간성을 초월했다는 뜻이고, 무량광은 공간성을 초월했다는 뜻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자리는 우리들의 본래면목 뿐 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라는 말은 곧 우리의 자성광명이라는 뜻이 됩니다.

때문에 우리의 본래면목, 청정한 불성자리를 그대로 아미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미타불 부르는 것은, 곧 내가 나의 본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본래면목인 불성의 이치에 입각하여 염불하면 그것이 곧 최 상승 염불이고

실상염불이라 하는 것입니다.그리고 만일 최 상승 염불을 한다면 곧 그것이 조사선과

조금도 다름없는 최 상승선이 됩니다.

 

상근기는 우리의 본래 실상자리에 근거한 염불을 하기 때문에 실상 염불이 되고,

그것은 화두타파 한 도인들이 보림 할 때 이와 같은 염불을 합니다.

화두를 타파하면 본래 면목을 깨우치고 본래면목을 깨우치면, 바로 모든 것이

자성 아님이 없으므로 일체행이 모두 자성을 돌아보는 것이고 부처를 염하는 수행이

되므로, 옛날 영명연수선사라든가 중국의 역대 큰 도인들이 화두타파를 하고 염불을

했던 것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면, 그 명호 속에 무량한 공덕과 지혜가 있는데, 그 공덕과

지혜를 수용하면서 하나가 되니까,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는 경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염불은 만법을 거두는 수행이라 하는 것입니다.

 

중국 송나라 시대에 대혜선사는 묵조선을 무기사선이라고 배척 했습니다. 간화선에서

묵조선을 배척한 요인은 관조가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쉬어가라는 말만 따르다 보니

무기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공부에 뚜렸한 주제없이 묵이 관조(黙而 觀照)가 잘 되지 않으므로 병페에 떨어질 위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공부의 주제가 없이 마음을 관하자니 마음이 쉬지 않고 마음을 관 할 수 없고 마음 쉼을 강조하니 관조가 확실하지 않으므로 무기 사선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염불선은 마음을 관하는 주제(나무아미타불)가 분명하니 저절로 관조가 이뤄지고 끊임없는 염불 속에 마음이 쉬어가니 저절로 적묵을 이루게 됩니다. 이 때문에 염불은

정혜쌍수요 지관등지라 할 수 있으며 바르게 정진하면 저절로 쌍차쌍조가 되어

염불삼매에 들어가게 됩니다.

 

묵조에서 바르게 관조하려면 마음이 쉬지 않으면 도저히 될 수 없는 공부입니다.

이 때문에 간화선은 일어나는 번뇌를 무시하고 오직 강렬한 화두를 통해서, 의심을

하게 되고, 그 의심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게 하자는 것이지만 마음이 쉬지 않고는

 결코 바른 진의가 일어날 수 없으며 억지로 의심을 일으켜 봐야 사구선이 되고 병통만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제 조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간화선 수행은 대단히 부작용이 많아서

묵조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염불 수행은 어떤 형태이든 수행에 부작용이 없고 설사 거꾸로 공부한다고

해도 잘못되지 않으므로 영명선사는 만 명이 염불해서 만 명이 모두 공덕을 입는다고

말하는 것이며, 역대 부처님과 큰 도인들도 권장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염불 수행자들은 염불하는 이 순간 부처님과 하나 되는 가장 완전한 수행에

큰 자부심을 가져야하며 따라서 널리 사람들에게 권장하여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간화선은 공부의 주제를 가지고 강력한 의심을 일으켜 무명을 빠른 시간에 소멸시킨다는데 특징이 있지만 바르게 공부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단점이 될 수 있는데 염불은

공부에 주제가 뚜렷하면서 의심이 아니라 묵조의 장점인 관조가 되므로 마음이 격렬하지 않고 곧 바로 불심과 고요히 하나 된다는 것에서 어떤 수행보다도 종합적이면서 가장

완전한 수행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화선과 묵조선은 최상근기 수행이라 마음이 쉬지 않고는 도저히 공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염불선은 바로 묵조선과 간화선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단점은 없으므로

가장 완전한 공부라 하는 것입니다.

간화선은 강렬한 의심을 통해서 지혜를 연마하다 보니 굉장히 날카로워 덕이 없어지고

만법을 부정하다 보니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도리어 강화되는 경우가 생겨 좀처럼 타인을 인정하지 않고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원력과 신심 보살행 공덕심 불심 등이 없고

냉정한 성격으로 바뀌는 마음의 부작용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번뇌를 다스리기가 쉽지 않으므로 마음 쉬는 공부가 더욱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큰 문제예요 그러나 묵조선은 또 마음 쉬는 공부가 강조 되다보니까 사람이

차분해지고 안정은 되는데, 혼침과 무기에 잘 떨어져 고목 사선이 되기도 합니다.

간화선은 선혜 후정이라 바르게 간화선을 닦지 않으면 공부가 정상적으로 될 수가 없고,

염불은 선정 후혜라 삼학을 차례로 잘 닦아 나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염불은 묵조선의 장점과 간화선의 장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염불은 모든 근기가 부작용 없이 닦을 수 있는 참으로 미묘한 수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산승은 여기서 염불수행을 많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이미 염불하시는데 모두 선근이 많은 분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대는 지식이 충만된 사회이므로 선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래서 선정을 앞세우는 수행이 절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염불을 하면 부처님 명호 속에 깊은 뜻이 있어 저절로 불심이 생겨나고 덕이 생겨

모든 일이 정상적으로 바뀌어져 갑니다.

 

그래서 염불은 절대 긍정을 전제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선종도 처음에는 절대 부정이지만, 결국은 절대 긍정으로 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선종의 궁극적 뜻이기 때문에 선에서도

 마음이 곧 부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긍정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므로 절대 부정은 절대긍정으로 통하게 됩니다.

 

무량수경에 이런 말이 나오죠.

시심시불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다.”

그러므로 마조스님이 주장한 즉심즉불과 같은 말입니다.

염불은 절대 긍정입니다.

 

염불하는 이놈이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믿고 들어가야 됩니다.

만일 부처님과 내가 둘이 된다면 생멸법이 되니 바른 염불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구염불이 됩니다. 때문에 염불에도 활구가 있고, 사구가 있습니다.

생멸염불을 하면 사구염불이고, 활구염불이 되려면 무생멸염불, 즉 방편 염불이 아닌

실상염불을 해야 된다는 거죠. 염불하는 그 놈을 돌이켜 비춰야 됩니다.

그것을 능엄경에서도 간단하게 밝혔죠.

듣는 놈을 돌이켜 들으라.”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법문이란 아미타불 부르면서 부르는 그 놈을 돌이켜서 들으면

바로 자성을 듣는다고 하는 법문입니다.

그게 바로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부르는 그놈을 돌이켜서 본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돌이켜 비추는 것을 쌍조라 그래요. 비추되 비추는 상이 없으니 묵과 조가

동시에 쌍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 속에 작용을 하게 되면 쌍조가 되는 것입니다.

쌍차와 쌍조, 그것을 동시에 닦아가는 것을 염불수행이라는 거죠.

그리고 염불할 적에 염불 일념이 염염상속 해야 합니다. 즉 아미타불 부르는 그 일념이

지속되는 게 그게 바로 선정 입니다.

 

그 다음에 아미타불 부를 적에 그 부르는 놈을 돌이켜 보는 게 비춤 입니다.

그러면 쌍차 쌍조를 동시에 닦을 수 있는 수행이 염불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실상 염불입니다.

실상염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염불하는데 바로 본원의 실상에 입각해서 염불을 하면 그것이 실상염불이고

현상을 따라 바깥경계로 흐르면 하근기 염불이 되지만 그렇게 해도 마침내 염불의

수승한 공덕의 바다로 들어가게 됩니다.

 

혹 어떤 사람은 유심정토 자성미타이므로 극락세계는 마음속에 있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매우 잘못된 말입니다.

유심정토 자성미타라는 말은 근본을 떠나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현재

사바세계가 이 한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바세계가 없다고 하지 않듯이 현실세계는 이치세계를 벗어나지 않았고 이치세계는 현실세계를

떠나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토인 극락세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모든 경전에서 설 했으며 용수 마명,

원효, 서산등 역대도인들이 한결같이 극락세계는 사실적으로 있으니 누구나 발원하고

염불하면 정토에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심정토 자성미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가요. 그것은 부처님의 세계가

바로 우리 마음속에서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자리에서 본다면 불국토는 마음속에서 구현되지 않고 이뤄질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가지고 접근하면 이해가 안 됩니다.

만일 공부가 조금 되어서 나고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를 알면 저절로 수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염불과 선이 궁극에는 같다는 것이 바로 이점 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환이지만 육도를 말하듯이 정토 또한 불, 보살 원력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바세계는 인정하면서 극락세계는 인정을 못하는가요.?

선근이 빈약하면 정토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게 되고 따라서 악업의 방해를

받기 때문입니다.

경에서는 극락세계가 분명하게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에게 거짓된 말이 있을 수 없으니 정토를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부처님은 여어자(如語者), 실어자(實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

불망어자(不妄語者),라 했습니다.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관 무량수경에 분명히 정토 십육관이 있지 않습니까?

거긴 분명히 극락세계를 십육관을 통해서 여실하게 관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인데 어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불자가 부처님의 말은 거부하고 부처님 법을 손상하면 참으로 박복하고 불행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 사람은 말하기를 극락세계가 있다면 우리 마음속의 정토와 어떻게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데, 도에 입각해서보면 전혀 상충되지 않고 그대로

다 같은 말이 됩니다.

 

다만 우리가 미혹에서 볼 적에는 둘로 나누는데, 실상에 입각해서보면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리에서 극락세계와 이치에서 유심정토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은 상중하 근기대로,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해야 됩니다.

하근기에게 실상염불을 가르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불심을 키워가지 못하게 됩니다.

서산대사같이 삼매에 들어가는 분은 극락세계를 갔다 올 수 있습니다. 그러고 염불삼매에 들어가면 전부 극락세계에 갔다가 아미타 부처님한테서 직접 법문을 듣고 올 수 있습니다.

 

근래에 어떤 분은 염불로써 몽중일여까지 들어가기도 합니다.

몽중일여에 들어가면 극락세계에 갔다 올 수 있습니다.

염불삼매는 계, , 혜 삼학을 갖추어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번뇌를 가지고는 장애를 받으므로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불삼매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일심으로 염불해야 합니다.

근래 중국에 허운화상의 제자인 관정법사가 극락세계에 유체로써 갔다가 아미타불

친견하고 법문까지 듣고 온 기록이 극락세계유람기입니다.

 

산승이 수도암 주지할 때 극락세계유람기를 수백 부를 찍어서 나누어 준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조금 남아있으니 종무소에 가면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불자님들 아미타불 천일 정진 회향을 축하하며

앞으로도 일념으로 꾸준하게 염불해서 좋은 성취 있기를 바랍니다.

 

                                성불하십시오!

 

간단하게 질문 받겠습니다.

제가 오늘 법문한 것 중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으면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불자님들 선근이 참 많습니다.

이 말세에 염불수행을 하는 사람은 다 복 받은 사람입니다.

정말 이렇게 좋은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선근 없이 안 됩니다.

근래에 자운화상께서는 염불을 평생을 하셨거든요.

 

길을 다니면서도 계속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염불하시면서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편안하게 열반하시고 광명이 나는 사리가 나왔습니다.

염불을 속으로 할 적에는 나무 자를 빼고 그냥 아미타불만 반복해서 부르면 훨신 쉽고

집중이 잘 됩니다. 그리고 소리를 낼 적에는 나무를 붙여야 됩니다.

그러면 육자 염불에 리듬이 생겨 염불이 더욱 신심이 납니다.

 

중국에서는 염불을 음악처럼 합니다.

염불 소리를 내면 나무 자를 붙여서 천천히 해야 됩니다. 빨리하면 힘이 들어서 금방

지쳐버립니다. 속으로 염불 할 때는 다소 빠르게 아미타불 이 넉자염불을 하면 집중이

잘 될 것입니다.

 

나무라는 말은 부처님 이름이 아니라 귀의한다는 뜻이므로, 이미 우리는 본래

불성자리와 하나가 되어있는데 귀의할 곳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나에게 귀의 할 것은 없잖아요. 그래서 속으로 염불 할 때는 아미타불넉자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관정법사께서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아무리

너희들이 영리하고, 선근이 있다 해도 이회염불을 하지 않고는 염불삼매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두 번 부르고, 두 번 듣는 것, 한사람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두 번 부르면, 옆에 사람이 듣고 그 사람이 두 번 부르면 다시 두 번 부른 사람이 듣는 염불에는 망상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산승이 몇 년 전에 영주 대승사에서 염불도량을 세웠는데, 그때 이회염불과 오회염불을

시행해 보았습니다. 산승이 목탁을 치고 두 번 염불을 하면 신도들은 듣고 신도들이

두 번 염불하면 나는 목탁만 치고 두 번 듣기를 반복하는 수행은 힘들지 않으면서

집중이 잘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회염불이란 염불에서 고저장단과 음악적 리듬을 가지고 끊임없이 염불하는 걸

오해염불이라 하는데 그때 오회염불과 이회염불을 녹음한 것을 카페에 올려져 있을

것입니다.

이회염불은 집안에서 혼자서 있을 때 테이프나 CD, 또는 인터넷에 염불을 틀어놓고

두 번 듣고 두 번 부르면 망상 없이 염불할 수 있습니다.

 

이회염불을 여럿이 하게 되면 집중이 잘되고, 오래하면 저절로 이근원통이 되어 의식은

잠들어도 염불은 계속 되므로 염주는 계속 돌아가게 됩니다.

이처럼 염불은 좋은 공부이니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질문

이렇게 염불 수행이 좋은데 선방의 스님들은 왜 계속 간화선을 하는 겁니까?

 

대답

원래 참선과 염불이 나란히 전해 오다가 약 오 육백년 전부터 참선이 쇠퇴하고 염불과

화엄선이 유행 했는데 조선말 경허스님으로부터 다시 간화선이 중흥되어 염불을

하시(下視)하는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에는 화엄선이나 간화선이 매우 철학적이고 조사선 특유의 강력한 수행법이 많은

수행자들에게 어필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염불 수행자들은 조선말과 일재시대에 오회염불 위주로 징과 북을 치면서

염불하니 노스님들과 노 보살들만 정토왕생만 바라보고 염불하게 되니 지식인들과

젊은 스님들은 고리타분하게 보고 멀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다 염불수행이 유심정토 자성미타라는 참선과 다름없는 실상염불을 외면하고

오로지 칭명염불만 가지고 정토왕생만을 바라고 염불 하므로 지식사회에 철학성을

갖지 못한 것이 그 시대에 외면 받게 된 요인이라 생각합니다.

 

요즈음 다시 염불이 참선의 대안으로 뜨게 된 것은 염불은 참선의 부작용을 해결해

주기 때문이며 근래 많은 큰 스님들과 지식인들이 옛 고승들의 염불선을 발췌하여

가르치므로 염불선의 철학성과 수행의 완전성이 어느 수행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요즈음 다시 염불수행이 중흥되어 가는 것입니다.

 

염불수행의 역사를 살펴보면 염불선이 중흥하려면, 참선을 통해 확철 대오한 도인보다

염불 수행으로 삼매에 들어간 도인이 많이 나오던가 아니면 칭명염불과 동시에 실상염불선이 많이 유전하면서 동시에 과거 염불이 전성하든 시대의 많은 자료들을 발굴하여 대중에게 가르치면 염불이 크게 중흥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조선말부터 실상염불은 외면하니 자연 안목 있는 도인들이 나오지

못하고 전부 알맹이 없는 껍데기 염불만 하므로 젊은 사람이나 지식인들에게 외면당하게 된 것입니다.

 

산승이 어린 시절에도 절마다 염불도량이 선원보다 많았고 염불하는 노스님과

노 보살이 참 많았어요. 그래서 선종의 스님들은 유치하게 보고 밖으로 부처를 찾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자연히 염불하는 분들이 선종의 종지와 부합되도록 염불선이

나오게 되었으며 오늘날 염불선은 참선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종지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염불에 목탁을 치는 것은 화음을 맞추기 위해 괜찮은데 북 치고, 장구치고 염불하는

것은 조금 속스럽게 보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 염불이 평가절하 되고 무시 받게 되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염불수행자 가운데 아주 틀축한 인물이 나와야 되요.

예를 들어 용수 마명 같은 도인이든가 영명연수, 서산대사, 원효대사 이런 분이 나오면

염불은 최상의 위치를 갖게 되죠.

그런데 요 근래 염불수행이 많이 지위가 올라갔어요.

왜냐하면 간화선에서 특출한 인물이 나오지 않는데다 문제점이 드러나다 보니까,

간화선 하는 분들이 염불수행으로 많이 가고 어떤 사람들은 위빠사나를 수행하기위해

남방 불교국가로 많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염불은 공부의 주제가 있기 때문에 간화선의 대안이 되는데, 위빠사나는 그냥

묵조선하고 비슷해서 간화선의 대안이 되기는 좀 어렵다고 생각 합니다.

위빠사나의 핵심은 알아차림이고 묵조선의 핵심은 알아차리는 놈을 다시 관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는 소승선이라하고 묵조선이나 간화선을 조사선이라 해서 최 상승 공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염불이 최 상승이 되려면 염불하되 염불하는 놈을 관조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염불선이라 하고 실상염불이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염불이 선종의 이치와 부합되면 완전무결한 수행법으로 비교할 것이 없게 됩니다.

때문에 영명 연수선사께서 선과 염불이 결합하면 인간과 천상에 최고가는 스승이 된다 한

것입니다.

 

염불은 수행에 있어 참으로 다양한 방법이 있어 다양한 근기에 맞게 닦아갈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단정히 앉아서 속으로 아미타불을 끊임없이 부를 수 있고, 소리 낼 수도 있고

참구염불도 할 수 있고 묵조염불도 할 수 있으며 염불 위빠사나도 있습니다.

행주좌와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닦을 수 있는 것이 염불이며, 어떤 공부든 염불과

 접목이 되어 좋은 수행이 됩니다.

 

그래서 상중하 근기가 다 수행 할 수 있는 공부가 염불이라는 것입니다.

산길을 가다가 무서우면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소리 내서 하면 귀신들이 십만 팔천리로

도망을 갑니다.

염불을 하면 몸에서 밝은 광명이 뻗쳐서 잡귀가 침범을 못하게 됩니다.

이미 영가가 붙은 사람도 염불을 오래하면 영가가 해탈하게 됩니다. 이런 말이 있죠.

사람은 경우에 달렸고 귀신은 경문에 달렸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염불하면 귀신은 도망가게 됩니다.

 

귀신한테 경우 따져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경우 따지는 귀신이 어디 있어요.

막 사람한테 달려와서 괴롭히잖아요. 그런데 염불하거나 경을 읽어봐요, 귀신들이

무서워하죠. 그러나 귀신 앞에서 반야심경이나 염불을 외우면 효과가 아주 좋습니다.

불교의 목표는 부처가 되는 것인데, 염불은 이 몸 그대로 염불하는 순간 부처가 되는

공부입니다.

 

일초직입여래지라 한번 뛰어서 바로 부처 될 수 있는 방법은 염불이라 할 수 있으며,

번뇌를 가지고 부처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염불입니다.

부처님 명호를 외우면, 곧 그 순간 아미타불이 되고, 내가 중생심을 가지면 중생이 되고, 염불을 하면 바로 부처가 됩니다.

 

염불이 지속되면, 진실한 부처가 되고, 만일 지속하지 못하고 중생심을 일으키면,

어느 날 순간적으로 부처가 되었다가, 갑자기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염불을 지속적으로 해서 마침내 영원하고 진실한 부처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팰릭스님이 올린 그림-  오른쪽 네모를 크릭하면 전체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은 모든 권세를 침식, 정복한다.

 

시간은 신중히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포착하는 자의 벗이며

 

때가 아닌데조급히 서두는 자에게는

최대의 적이다.

 

_플루타르코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