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투시(前生透視) / 성철스님

2012. 9. 15. 00: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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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투시(前生透視)

                       성철스님


  인과 문제에 대해 가장 큰 업적을 쌓은 사람은 미국의 에드가 케이시 Edgar Cayce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전기(傳記)도 많이 나와 있는데 사람들은 그를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기적인'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행하는 기적은 이런 것입니다. 남의 병을

 

진찰하는데 환자의 주소와 이름만 가르쳐 주면 수천 리나 멀리 떨어져있어도 그 사람의 병을 모두 진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찰하여 처방을 내고 병을 치료 해주면 다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치료한 사람은 무려 3 만 명이 넘습니다.   그는 미국 뉴욕에 앉아서 영국 런던에 있는 귀족들을 진찰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의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진찰할 수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구가 영국 런던에 갔는데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케이시에게 물어봅니다.   그의 답을 듣고서 바로 런던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케이시의 말이 모두 맞았습니다.


  이런 신기한 투시력을 가진 케이시가 병을 진찰하다 보니  병이 전생에서 넘어오는 것이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전생을 꿰뚫어보는 힘이 있어 환자의 전생에서 병의 원인을 찾는 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교도였습니다. 예수교에는 전생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의 종교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병을 치료하는 것을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학자들이 종교와 학문과는 다르다고 그를 설득하여 이것을 학문적으로 끝까지 조사해 보자고  의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하는 것은 그만두고, 전생 조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2,500명의 전생을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죽음(1947년)뒤에도 버지니아 비치 Virginia Beach에서는  그의 원거리 진찰과 전생투시에 대한 수많은 기록을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많은 책들이 발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능력의 비밀]과 [윤회의 비밀], 이 두 권은 공산국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번역되었습니다.  에드가 케이시의 전생투시에 의해 전생과 금생과의 인과를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고 사는 부부인데도 그 사이가 무척 나빠서 그 전생을 알아보니 서로가 원한이 맺힌 사이였습니다.  거꾸로 내외간에 잘 지내는 사람을 알아보니  전생에 아버지와 딸 관계이거나 혹은 어머니와 아들 관계였습니다.  "그럴 수가 있을까?"하겠지만 우리들이 몰라서 그렇지 본래 인과란 그렇게 맺어지는 것입니다. 숙명통(宿命通 ; 전생의 일을 환히 아는 능력)을 하여  전생을  환히 들여다 볼 수 있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다만 우리들이 업장은 두텁고 눈이 어두워 이해가 가지 않으니 곤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때에 현대의과학자들이 연구한 전생과 윤회 및 인과에 대한 좋은 자료를 소개하면 부처님 말씀을  믿고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키가 작은 난장이입니다. 그 사람의 전생을 알아보니 부처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아만이 많아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면 내생에는 키 작은 과보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남을 올려다보아야하고 남은 자기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왔듯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와 인과는 현대의 과학적 자료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대소승의 천경만론(千經萬論) 가운데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믿으면 그만이지, 캐논이든 스티븐슨이든 그런 과학자가 무엇이라고 그들이 수집한 자료를 인용하여  새로이 윤회를 설명하려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운허(耘虛)스님은 올해 연세가 여든아홉입니다. '운허스님'하면 전국적으로 다 아는 큰스님 아닙니까?   한글 대장경 역경 사업을 주관하신데에다,  학식으로나 덕행으로나 두루 존경받는 어른입니다. 그 스님께서 몇 년 전에 백련암에 오셨는데,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내가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경전에 대해 박식하시고 역경 사업에서도 큰일을 하시는데, 그러면 전생을 믿으십니까?"

"허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안 믿을 수 있습니까?"

"안 믿을 수 있는가라고 말씀하실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확실히 믿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글쎄요, 부처님 말씀에 분명히 전생이 있다고 하셨으니 믿기는 믿지만, 명확하게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

경전에 대해 그렇게 뛰어난 학식을 지니고 있고  수행도 잘하시는 분이 '믿기는 믿지만 명확하게 이해는 안 된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양심입니다.  그래서 스님께 [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을 드리며 한번 읽어보시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대학생 수련대회 때 대학생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봉은사(奉恩寺)의 운허 큰스님께서  법문(法門) 때에 하시는 말씀이 해인사에 가서 [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을 얻어 와서  읽어보니  얼마나 좋은지 여러 차례 권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학자의 양심입니다. 운허스님은 나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 분입니다.   그런 점잖은 스님이 아니라면 내가 대중 앞에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분명히 윤회와 전생을 말씀하셔서 믿기는 믿지만 이해는 가지 않았는데, 브라이드 머피 사건의 전생 기록을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 학생들을 모아놓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 뒤에 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 직접 물어보았더니 과연 '그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시에는 잘 받아들여 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 보기로 근대 천체물리학에서 가장 중대하고도 큰 발견인 지동설(地動說)이 처음 주창되었을 때를 들 수 있습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지구는 고정되어  가만히 있고 해가 지구의 주위를 돈다고 하는 천동설(天動說)이 기독교 교리로 확립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 Copernicns가 지동설을 주장하자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습니다.


"땅이 움직이다니, 그러면 물이 모두 엎질러질 것 아닌가?"

"사람이 거꾸로 허공 속으로 떨어져버릴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의심을 품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반박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동설은 그때까지의 기독교 교리에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는데,  가장 먼저 희생당한 사람은 후스Huss라는 종교개혁가였습니다.

 

그 무렵에 천주교에서 가장 큰 신학자이면서 또한 과학자요 철학자였던 브루노Bruno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도 지동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처음에 지동설을 주장하다,  사형에 처한다는 바람에, 입을 다물고 자기의 주장을 꺾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용기 있는 다른 학자들은 그래도 그것을 주장 하였으며, 브루노도 또한 지동설을 끝까지 주 장하였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교황청으로서는 큰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천주교의 대표적인 성직자가  지동설을 주장하고 나서니 큰일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브루노를 불러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지동설을 버리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랬으나 브루노는 변함없이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분형(焚刑)이다 !"

"아무리 분형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결국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나무십자가에 매달려 불에 태워 죽이는 분형(焚刑)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도 그의 사람됨이 훌륭하여 사람들은 그를 죽이기가 아까왔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지동설만 취소하면 살려주겠노라고 몇 번이나 권유하였지만, 그는 끝끝내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분형에 처하는 날, 나무 십자가에 붙들어 매어 놓고 불을 붙였습니다.  발밑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을 때 브루노에게 십자가를 들이대며 말했습니다.

"회개하라 ! 지동설을 취소하면 살려줄 터이다." 이에 브루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


브루노는 결국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지동설은 타 죽지 않고 뒤에 과학적으로 증명됨으로써  영구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새로운 주장이나 이론은, 아무리 옳은 것이어도, 당대에 널리 이해받지 못하여 박해도 받고  죽기도 하고 바보 취급을 당하기도 하는 둥 온갖 수모를 받기 마련인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설도 도를 닦아  숙명통을 얻기 전에는 전생이 있음을 우리 중생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행히도 요즈음에 정신과학이나 초심리학 같은 분야에서 연구가 진일보함에 따라  여러 방면에서  증명되고 있으니, 보기를 들면,  첫째가 전생기억으로 스티븐슨 씨가 무려 2,000 건 이상의 사례를 발표하였고, 둘째는 전생회귀로 브록샴테이프나 캐논 보고서가 그것이며,  셋째는 전생투시로 에드가 케이시에게서 볼 수 있는데,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윤회에 대해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생이 판명됨으로써, 그것을 금생과 맞추어 보면, 인과가 있는지 없는지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전생에 지은 그대로 금생에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에드가 케이시도 2,500명의 사례를 조사해 보았더니 전생과 금생이 인과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인과(因果)를 부정하겠습니까?


이리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전생이 있다.  윤회가 있다,  인과가 있다 하는 것이  정신과학의 발달로 객관적인 사실로서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이 우주의 진리를 다 깨달은 부처님께서 윤회를 말씀하셨으니 그것을 믿으면 그만입니다. 캐논이나 케이시 같은 과학자의 이야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의 연구결과를 보기로 이야기한 것은,  부처님께서 이미 삼천여 년 전에 모두 말씀하신 것인데, 현대과학이 이제야 그것에 가까이 오고 있음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제 문제는 영혼이 있고,  인과에 의해 윤회를 한다고 하니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대로 받고 말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전생에 잘못했으니 금생에 받아야 할까? 그것이야 당연하지요.  그러면 내생에는 어떻게 될까?  그것이야 뻔하지, 내생에는 불행하게 되지.


아무리 착하게 하려 해도 자꾸 남을 해치게 되고  또 그것을 받아야 할 테니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과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도둑질하고,  살인도 하고,  거짓을 일삼고 등등으로 온갖 짓을 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예사입니다. 그러나 인과가 있음을 확실히 알면 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


불교의 근본 목표는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영원토록 영원토록 계속해서 윤회를 하여  영원토록 상주불멸인데,  불교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물을 지도 모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어떻게 윤회를 하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이란 악업은 많이 지어도 선업은 많이 쌓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되어 업을 짓고, 윤회를 하고, 업을 짓고, 고(苦)를 받고 하지만, 그러나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법을 따라서 수도를 하면 결국에는 자성(自性)을 깨쳐서 생사해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윤회도, 인과도 모두 벗어나 대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스님, 불교에서는 윤회가 있다고 하는데,   윤회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왜?"

"죽고 나면 끝이라고 하면 무엇이든 해서  우선 편하게 살겠는데, 내생이 있고 인과가 있다고 하니, 겁이 나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있어야지요?"

"글쎄, 나도 인과가 없고 내생이 없었으면 좋겠어.  아무리 잘한다고 애써도 잘못하는 것이 더 많을 터이니,  그리하여 내생에 고를 더 받을 터이니,  인과가 없으면 좋겠어.  그런데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내생이 없으면 좋겠다고 말한다고 없어질까?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해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게 할 수가 있을까? 그럴 수가 없지."



지금까지 영혼이 있다, 윤회가 있다, 인과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으니, 이제부터는 해탈의 길,  대자유의 길, 성불(成佛)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가을 사랑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 입니다.

 

 

 

 

 

 

 

 



 

 

 

 

 

 

 

가을사랑 /신계행 

     

 

★JUL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