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14. 23:5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삶은 완전하다-지금 행복하라 / 법상스님
불성(佛性), 신성(神性)이 있다는 말은 곧 나와 부처, 나와 신이 하나란 뜻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하나란 뜻이다.
일체 모든 존재가 하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것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중생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부처로써, 신으로써 완전한 하나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신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사상이야말로
인류의 오랜 성자, 현자, 선각자들과 모든 종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내가 상대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도울 때 사실은 나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도우면서도
도왔다는 상을 낼 필요가 없는 이유가 상대방과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으며 내가 나에게 밥을 보시했다고 하지 않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한 것은 사실은 내가 나에게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상 없이 보시하라, 무주상 보시하라,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그것은 바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한다는 윤리적인 지침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다면 당연히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불성과 신성이란 것은 부처님의 성품, 신의 성품 그 자체라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이나 신은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꽉 차 있고, 완전하며, 온전한 분들이다.그렇기에 사실은 불성과
신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라는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그렇기에 사실은 보시해도 한 것이 아니다.
너도 완전하고 나도 완전하며, 너도 풍요롭고 나도 풍요로운데
무엇을 주고 받을 것이 있는가!
주고 받았다 한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에너지의 이동일 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거나, 주어서 대단하거나 주지 못해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말은
‘이렇게 하라’는 윤리 규정이거나, 명령이 아니라
그저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나온 가르침인 것이다.
불성이 있다, 신성이 있다는 말은 곧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부처가 신이 불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하고 충만하다.
그렇기에 불성과, 신성과 다르지 않은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써 더없이 완벽한 존재이다.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완전하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 세상 자체가 완전하다는 의미다.
이 세상의 본 바탕, 근원은 이러한 완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완전성을 이루고 있는 힘이 바로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다.
즉, 이 세상은 완전한 사랑의 에너지, 둘이 아닌 완전한 자비, 동체대비
그 자체인 것이다. 추상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란 희망의 약속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의 생생한 현실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완전한 부처란 말인가? 내가 어찌 신이란 말인가?
그건 너무 엄청난 이야기이며, 또한 너무 불경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다. 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진실로 말씀해 주셨고,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도 같은 말을 해 왔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모두가 부처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제해야 할 중생이 따로 없다고 하셨다.
그러한 진실된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믿지 못할까?
왜일까?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내 스스로 ‘나쁘다’고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판단과 분별작용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무분별의 중립적인 현실에
끊임없이 판단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는 것일 뿐이다.
본래는 완전한 자비의 불성이고, 완전한 사랑의 신 그 자체만 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악마, 사탄, 마왕 파순이 우리를 꼬셔서
지옥으로 빠뜨린다고? 그렇지 않다. 악마도 사탄도 마왕도 없다.
사랑 밖에 없는 완전한 우주법계 어느 곳에 마왕이나 악마, 사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신과 사탄이 싸운다는 것은 순전한 상징일 뿐이고, 부처와 마왕 파순의 싸움 또한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상징한 것일 뿐이다.
사랑의 신이 세상을 창조한 근원이라면 어찌 사탄이나 악마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순전한 인간의 상상이거나, 상징이었을 뿐이다.
내 바깥에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악마나 사탄은 없다. 완전한 허구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며,아상이고, 에고라는 허상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즉 내면의 번뇌, 욕망, 집착, 화, 어리석음, 아상인 것이다. 악마는 바로 아상이며 에고다.
사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과 판단이다. 마왕은 바로 탐욕과 화와 번뇌이다.
즉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나, 상황이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외부적인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내 스스로 만들었다. 나의 판단과 해석이
그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왔을 뿐이다.
남부러워하는 한 좋은 직장의 중역 간부가 찾아와 말한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조금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자니 진급을 못 할 것 같고,
진급을 하자니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렸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시냐고.
지금 자신의 삶이 대체적으로 행복한가 하고.
과거에 생각했던 행복을 지금 이루었는가 하고 여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그러고 보니 자신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처음에 오르고자 했던 자리에 지금은 이미 와 있고,
벌고자 했던 정도의 경제력을 지금 누리고 있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 하며
행복해 하고,자식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적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행복의 삶이
어느 샌가 벌써 실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다. 왜 몰랐을까?
여전히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진급도 더 해야 하고,
자식들도 더 잘 뒷바라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족하고 더 필요하고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조차 여전히 그 행복을 누리기는 커녕
더 높은, 더 많은, 더 큰 목적을 향해 내달리고자 하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이미
찾아 온 행복을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곤 한다. 행복은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추구는 죽을 때 까지 끝없이 계속되지만 누리고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걷어 차면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가.
누리는 것을 더 많이 누릴 때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이 누리도록 해 준다.
반대로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만 할 때 세상은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준다.
진실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할 것인가? 누릴 것인가 아니면 추구할 것인가.
삶이란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누리고 느끼며 만끽해야 할 무엇이다.
주어진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삶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본래부터 완벽했고, 완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추구하고 빌고 욕망할 때 존재 본연의 완전성은
사라지고 결핍과 부족과 실패가 창조되고 만다.
사실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필요하다고 욕망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행복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행복을 누릴 때 바로 그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환상일 뿐이다.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행복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조건’이라는 것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보라.
부처는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는다. 신은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만약 무언가를 얻어야지만 그 때 가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성과 신성의,
우주법계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완전성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부처도, 신도 우주 법계도 언제나 완전하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하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으며, 실패로 인한 괴로움도 없고, 실패 자체도 없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이유는아직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 나 자신에 대해서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생각이 모든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한 현실이 창조된다.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현실이
창조된다는 화엄경의 준엄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 그것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또한 내가 바로 당신이고, 우주이며, 존재 자체이다.
그리면 그린대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토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토대의 생각을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실패할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나는 근기 낮은 수행자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완전하다’ ‘나는 풍요롭다’ ‘나는 행복 그 자체다’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실패라른 것은 없다. 삶은 언제나 성공적이다’라는 데 둘 것인가.
전자의,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음의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성공해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현실을 그려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곧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 필요하다는 생각의 본질에는 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것이 창조된다.
사실은 바로 그 토대의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다.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은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토대는 어떤가?완전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하고
삶의 모든 순간이 그대로 성공이며 나와 너가 모두 부처요 신이라면 어떨까?
완전한 존재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벌 것도, 바랄 것도,
욕망할 것도 없다.언제나 충만한 행복과 만족과 풍요로움과 평화가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그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으며,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환상도 없다.그저 매 순간 순간 완전함을 누릴 뿐이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완전성이 창조된다.
아니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언제나 완전했으며 완벽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고,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 본연의 고향,완전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귀의, 귀향!
이 말은 상투적이거나,형이상학적이거나,뜬구름 잡는 말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적이기만 한 말이 아니다.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완전하다고 외치라.지금 이 자리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라.
완전하고 풍요롭다면 내 돈이 아까워서 상대방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한한 풍요로움이란 우주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것이다.
내가 아까워하고, 축적하고, 적다고 생각하게 되면 바로 그런 궁핍과 결핍의
결과가 만들어질 뿐이다.
넉넉하고 풍요롭다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모든 이를 두려움 없이 도우라.
그 마음에 우주 근원의 에너지인 풍요와 완전성이 깃들게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풍요의 토대 위에서 돕게 된다면
도우면 도울수록 더 많은 풍요가 당신을 찾아 올 것이다.
완전히 행복하다면 무언가를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미래에 오게 될 행복을
꿈꿀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완전무결한 행복이라고 외치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것이 바로 완전한 행복임을 알아차리라.
넘치는 행복 그 자체인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행복을 흩뿌릴 수밖에 없다.
나처럼 타인도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복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내 삶에 실패란 없다.언제나 삶은 완전하며 성공적이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실 또한 사실은 성공이고,실패라고 보이는 상황 또한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성공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내 삶과 결부시키지 말라.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패가 곧 성공이다.
내 삶은 언제나 성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라.
현실의 상황에 대해 성공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지 말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운 현실을 창조하지 않는다. 언제나 성공만을 창조해 낸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하나가 되려고
아래로 흐른다
물은 합치려는 의지로 흐른다.
돌부리에서, 가랑잎 틈새에서 스며 나온 물은
흐르다가 바윗등이 줄기를 갈라놓으면 옆으로 비켜서 만나고
둑을 쌓아 막으면 틈새로 새어 나와 다시 만난다.
그렇게 만나고 합쳐서 강이 되어 흐르고
강물은 다시 합쳐 바다에서 하나로 된다.
물소리는 서로가 그리워서 울부짖는 외침이다.
그리움 끝에 만난 물줄기인지라 포구에 다 와서는
웃음 짓는 만월을 띄우고 흐른다.
물의 여정은 하나로 되어 가는 과정이다.
나뭇가지는 자라면서 갈라지지만 물은 갈수록 합쳐진다.
하나가 되려고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기 때문이다.
류영국 / 소설가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은 없다
어느 날 부처님은 연인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그러자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가리키며
제일 사랑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은 잠시 후 침묵을 깨고 말했습니다.
“아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자신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고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에 지나지 않느니라.”
- 김원각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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