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5. 15:4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인과법(因果法)
부처님께서는 이 법칙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즉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는 것이고,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인과의 법칙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삼척동자도 다 알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법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여기에 깨달을 무엇이 더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인과의 관계가 생각보다는 훨씬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어떤 원인은 결과로 즉시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원인은 수 십년 혹은 수 백년이 지난
후에야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원인과 결과의 진행이 기계의 작동처럼
시간의 선후관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원인이 결과 속으로
다시 투입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는 복잡하게 여러 가지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과의 법칙이 복잡하다고 해도 자연의 변화에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에는 의지
(意志)가 들어있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과는 다릅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따라서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러한 의지가 담긴 행위를 인(因)이라 부르지 않고 업(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업에 따라 받는 결과를 보(報)라고 합니다.
인간이 선업을 짓게 되면 선보를 받고, 악업을 짓게 되면 악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의지를 갖고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서 그 과보(果報)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기 스스로가 짓는 만큼 자신이 받는 것이지,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이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면,
개인이나 사회의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지,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법을 가르쳐서
그 법을 우리가 깨달아 바르게 살게 하신 분입니다.
연기법(緣起法)
다음으로 인과의 법칙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인연화합(因緣和合)의 법칙’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에 치즈가 있다고 합시다. 우유가 발효되어
치즈로 변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우유를 냉장고에 보관하면 우유는
그대로 우유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유가 유산균과 만나 서로 어울려서 발효가 되면
치즈가 생겨납니다.
이때에 우유를 인(因)이라 하고 유산균을 연(緣)이라고 합니다. 우유와 같은 일차적인
원인을 인(因)이라 하고 유산균과 같은 이차적인 원인을 연(緣)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두 원인이 결합해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인연화합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점을 알게 됩니다.
즉 우유가 유산균과 같은 발효조건을 만나지 않았다면 치즈는 생겨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이 치즈는 치즈과자라든가 치즈피자, 치즈햄버거를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처럼 치즈는 우유와 유산균의 화합에서 나온 결과이지만 다시 치즈는 치즈햄버거의
원인이 됩니다.
치즈로 예를 들어보았으나, 사실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서로서로 밀접하게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물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이처럼 서로 관계를 맺고 의지하면서 끊임없이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물의 관계를 ‘상의상관(相依相關)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는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 끝임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인과의 법칙, 인연화합의 법칙, 상의상관의 법칙을 통틀어서 ‘연기법(緣起法)
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생겨나려면 이것과 저것이 서로 어울려야 생겨나고, 또한 어떤 것이 사라지는
것도 결국 이것과 저것이 어울려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연기의 이치를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으며,
이것이 생기면 저것도 생겨나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홀로 독립된
영원한 것은 없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변하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은 이와 같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물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끊임없이 생겨나고, 잠시 머물다가는 변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없지요. 어떤 물질이나 현상도 적절한 환경에서는
나타났다가 다시 그 환경이 바뀌면 그에 따라서 물질이나 현상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 깨닫는 것은 바로 이 연기의 법칙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탐ㆍ진ㆍ치의 삼독이 무명의 뿌리라고 하는데 이 중에서 치(痴), 즉
어리석음은 바로 이 연기법을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은 곧 우주의 모든 현상이 나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한 톨의 쌀알이 생겨나는 것을 보십시오. 한 톨의 쌀알 속에는 농군들의 노력의 땀이
서려있는가 하면, 여름날의 햇빛과 바람이 담겨있고 천둥과 먹구름과 빗방울이 들어있습니다.
온 우주가 힘을 기울여야 쌀 한 톨이 여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가 들어 있는 쌀을
먹고 살아갑니다. 나는 바로 온 우주와 둘이 아님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나와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이웃에 사랑을 보내고, 모든 사물에
사랑을 보냅니다. 이 끝없는 사랑이 자비입니다.
자비는 불교의 인간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윤리입니다.
불교의 목표인 인격의 완성이라는 것도 사실은 나와 이웃이 마치 손과 발이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서로 뗄 수 없는 동일체라는 것을 깨닫고 무한한 자비를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나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본다.”고 가르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무현금無絃琴 / 송광섭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1545-1611)의 작품으로 전해지는「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가 있다. 아슬한 바위 벼랑에 걸터앉은 선비가 그윽한 달빛 아래 먼 산을 바라보며
무상한 듯 초월한 듯 거문고를 타고 있는 그림이다.
그의 훤히 벗겨진 이마와 뒤통수에 걸린 숱이 없는 머리로 짠 쥐꼬리 만 한 상투로
보아 연륜의 무게가 묻어난다.
화면에 풍기는 분위기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허사가 된 젊은 날의 꿈,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 아니면 바라고 살고자 했던 세상에 대한 허망한 회한을 거문고에 얹어
타고 있음직하다.
누가 그림을 ‘소리 없는 시(無聲之詩)’요 시를 ‘소리 있는 그림(有聲之畵)’이라 했다던가.
그러나 마음을 열고 이 그림에 빠져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월하탄금도」에는
분명히 소리가 있다.
숲 속에 달빛 번지는 소리, 거문고 소리, 거문고 타는 선비의 소매 깃 스치는 소리,
그리고 뒤에 쭈그리고 앉은 사동이 찻물 끓이는 소리...
환청이 아니라 마음의 귀가 열려 들리는 청아한 소리들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가 타는 거문고에는 줄이 없다. 무현금無絃琴인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이 가지고 놀았다고도 하고, 이규보李奎報도 어루만지며 즐겼다는 줄이
없이도 스스로 소리 냈다는 악기...
그래서 이 그림 속 거문고는 악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인지도 모른다.
若言琴上有琴聲 (약언금상유금성)
放在匣中何不鳴 (방재갑중하불명)
若言聲在指頭上 (약언성재지두상)
何不于君指上聽 (하불우군지상청)
만약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
갑 속에 두었을 젠 어이해 안 우는가.
그 소리가 손가락에 있다고 한다면
그대의 손끝에선 어째서 안 들리나.
그의「금시琴詩」에서 소동파蘇東坡도 거문고 소리가 정말로 어디서 나는 것인지를
찾고 있다. 결국 거문고 자체도 탄자彈者의 손끝도 아닌 거문고와 손가락의 어울림으로
듣는 이의 마음에서 난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人이 解讀有字書로데 不解讀無字書하며 知彈有絃琴이로데
不知彈無絃琴하나니 以跡用하고 不以神用이면 何以得琴書之趣리요.
세상 사람들은 고작 有字書나 읽을 줄 알았지 無子書를 읽을 줄 모르며,
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았지 無絃琴은 뜯을 줄 모른다. 그 정신을 찾으려 하지 않고
껍데기만 쫓아다니는데 어찌 琴書의 참맛을 알 도리가 있겠는가?)
무자서無字書와 무현금無絃琴의 ‘껍데기만 쫓아다니’다가 빈 행간의 ‘참맛’을 놓치는
허행을 꼬집는『채근담菜根譚』(「자연의 섭리」편 제8장)의 지적이다.
이 책에 나오는 무현금과 무강적無腔笛에 대한 다음 구절들도 같은 맥락으로
마음에 새겨 음미할 일이다.
笛以無腔爲適 (적이무강위적)
琴以無絃爲高 (금이무현위고)
젓대는 구멍 없음이 좋다 하고
거문고는 줄 없음을 높다 한다. (제53장)
素琴無絃而常調 (소금무현이상조)
短笛無腔而自適 (단적무강이자적)
꾸밈없는 거문고는 줄이 없어도 항상 고르고
짧은 젓대는 구멍이 없어도 항상 즐기노라. (제68장)
송대宋代의 이학자理學者 소옹邵雍은「관물론觀物論」에 이르기를,
<무릇 관물이라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마음으로 보지 않고 이치로써 보는 것이다.
천하 사물은 이치를 담지 않은 것이 없고, 성性이나 명命이 없는 것이 없다.>
라고 하였거니와 관물이 미학의 경계로 넘어와 관화觀畵에 물아物我의 구분이
사라져 만화명합萬化冥合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림 속 무현금의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하지 않을까 한다.
* 남한강 상류 탄금대彈琴臺 못 미쳐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강나루의 옛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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