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거든 그저 죽기로 참구하라/혜암스님

2012. 10. 12. 23:0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728x90

 

 

 

 

모르거든 그저 죽기로 참구하라/혜암스님

 

                   

                          시자(侍者)가 여쭙되, “무엇이 중노릇 잘하는 것입니까.” “공(功)들임이 깨침이요,

깨침이 곧 공부(工夫)며 공부가 곧 중노릇이니라.” 때는 갑자년 시적(示寂)을 코앞에

두신 해, 스님이 다음과 같이 설했다.

네가 공부를 물으니 참으로 큰일이로구나.

몇 십 년 중노릇하였다는 것이 다 무엇을 위함이더냐.

허구한 세월 염불했으니 부처님 명호를 외우기 몇 천 번일 것이며,

경전을 살펴보았다 하더라도 손에 대지 않은 부처님 책이 없을 터이거늘.

 

송장의 손도 아니고, 짐승의 발바닥도 아니거늘 어찌하여 근본 취지를

여의고 여전히 미혹(迷惑)하여 공부하는 방법을 묻는다는 말이냐.
이 모든 것이 제 성품을 여의고 믿음이 없는 까닭이니라.

 

알았다는 생각이 있으니 남 앞에서는 도인처럼 행세하고 잘 훈계하여

타이르되 열심히 기도하고 참선하라 말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부끄럽거나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귀로는 비록 수천 번을 듣고 익혀 입으로 술술

 

지껄이나 정작 내 자신은 알지 못하는 터이라 이 어찌 계를 깨고 부처를

죽임이 아닐 것이냐. 마음속으로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러하다고 여기고는

저와 남을 속이는 간악(奸惡)이요 망어(妄語)이기 때문이니 결국 정신 잃고

 

사는 술에 취한 인생이니라. 남을 탓하기 일쑤요 원망으로 사니 세상이야

그렇다 치겠거니와 자신의 생사(生死)는 해결을 보았더냐.
처음 중이 될 때에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지금도 아느냐.

 

안다면 그 때 그렁저렁 세월 보내며 시은(施恩)이나 축 내리라 다짐하였더냐.

그러나 이 중에도 가장 무서운 병통(病痛)은 자굴(自屈)하여 신심을 잃는 일이다.

스스로 중생이라 불러 공부에 게으르거나 스스로 부처라 불러 무사도인

(無事道人)임을 자처하고 무위도식하되 이것이 본분사라 말하며 작은 일에

짜증내고 참구하지도 정진하지도 않는 이.

마구잡이로 혼자 살며 대중과 더불어 화합도 못하면서 일신(一身)의 안녕만

꾀하는 이가 어찌 승가(僧家)의 사람으로 가당키나 하리오.

 

 

 

 

 

마구니의 법으로 청정도량을 더럽힌 것이니 오역죄(五逆罪) 보다도 무섭고

무거우니라.수행이 무엇이더냐.

초조 달마대사께서도 이르시되, 가르칠 것이 있어 가르치고 배울 것이 있어

배우면 모두 죽음이라 이는 마구니의 법이요 불법은 아니라 하시지 않던가.

 

그러므로 알라. 제 스스로 제 성품을 닦는 일이거늘 어찌하여 사사오욕

(四蛇五慾)으로 제 마음의 보배를 삼아 망령되이 살아가면서 허튼 재주나

익히고 글자에나 집착하리요. 네 마리의 뱀이란 사대(四大)가 아니니

눈.코.귀.혀라는 뱀이니라. 다섯 발 앞의 것을 빈틈없이 먹어치우니

 

오보사(五步蛇)이며, 등 푸른 소라 모양의 귀신 굴이니 청라사(靑螺蛇)이며,

붉고 짧으나 날름거리며 온갖 것을 다 먹어치우니 적향사(赤鄕蛇)이며,

아귀처럼 먹거리를 좇아 갈아먹는 전간사(剪看蛇)이니라.

 

모두 경에 있는 말씀이거늘 한 번 그르치매 모두 따라다니며 그르치고 함부로

살펴보지도 않고 무슨 큰 지식인 냥 떠들고 다니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화두가 공안이니 혀 한 번 잘못 대면 죽음을 면키 어렵다.

 

더불어 살면 그대의 생명이려니와 잃고 헤매면 곧 죽음이라 제불조사의

말씀이거늘 어찌하여 가벼이 여겨 죽기로 살피지는 않고 알음알이로 조업을

자초한다는 말이냐. 부처님 법은 멀리 있지 않으니 부디 방일하지 말고

본참(本參) 공안으로 돌이키라. 무엇이 본참 공안인가.

천 만년을 공부하고 정진하여도 제 마음-부처가 문제다.

제 마음이 곧 부처인 줄 다 알지만 정작 다그쳐 물으면 다시 모르는 것이

마음이요, 부처이다. 그리하여 마음이라 일러도 옳지 않으며 마음이 아니라

일러도 옳지 않다. 그렇다면 부처님 법을 마음이라 이르지도 말고 마음이

아니라고 이르지도 말고 어디 한번 일러보라!

부처를 믿는다, 부처를 본다, 마음이 부처라 말하나, 이는 부처님도 말한 적

없는 일이거늘 뉘 있어 스스로 부처라 스스로 깨달은 이라 자처하랴.

듣지 못하였느냐. 단지부회(但知不會)면 곧 견성(見性)이라 하시니

 

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회득(會得)하지 못하는 줄만 알라 하시니

무엇이 회득하지 못하는 이것인가. 처음부터 하나도 모를 것이 없다지만

천만년 세월을 허비하더라도 깨닫는 이 마음 이 도리는 알 길이 없다.

부처가 달리 이 마음 여의고 없으나 이 마음으로는 부처를 알 길이 없다.

조주께서 이르시되 널판때기 이빨에 털이 났다 이르시니 그 의지가 무엇인가.

이 ‘판치생모(板齒生毛)’ 화두는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치로 따져 해설하거나 사량(思量)하며 지식의 부산물 정도로

아니 참으로 어리석도다. 모르거든 죽기로 참구(參究)하라.

어찌하여 스스로 두문불출하고 들어앉아 조주의 한 말씀 판치생모 화두의

의지를 타파하고자 도우나 선지식을 더불어 탁마하지는 않고 신통한

 

공부법을 찾아다니는 것이냐. 안되면 만다는 식의 안이한 태도로는 마침내

염부에서 이력을 물을 때 구구한 변명거리조차 찾지 못하고 필경

지옥에 떨어지게 되리라.

 

왜인가.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어서 선당(禪堂)에 급히 돌아가 살피고 또 살피라.

이 까닭에 간화(看話)라 일컫는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