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2. 09:3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습득은 언제나 늘 함께 미소짓네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세 번 울리고 사방을 둘러보신 다음 말씀하셨다.
시회대중이 여러 곳에서 모여들었으니 무슨 일을 닦기 위해서인가.
개개인이 마음을 밝혀 불조의 혜명을 잇고 지혜와 자비를 응용하여
보살의 크나큰 서원을 행하기 위함이니 참으로 모두가 사자새끼로다.
만약 사자새끼라면 어금니와 발톱을 드러내어 위의를 나타내어 보여라.
그렇지 못하면 들여우의 무리에게 잡아 먹히게 될 것이니, 일러 보아라.
대중은 어떻게 하여야 이를 면할 것인가.
대중이 말이 없자 잠시 있다가 이르시되,
해가 동산 위에 떠오르니 日出東嶺
그 빛이 대지를 삼키고 光呑大地
칼을 뽑아 허공에 휘두르니 擲劒輝空
들여우의 자취가 사라지도다 野狐滅跡
할을 한 번 하시고 이르시되
뛰어난 위덕이 법계에 두루하니 巍然威德遍法界
삼세의 고금에 안 미치는 곳 없다 三世古今無不到
꽃 지는 삼월의 잠에서 깨어보니 落花三月睡初醒
달마와 석가도 지난 밤 꿈이로다 碧眼黃頭皆昨夢
사자의 굴 속에는 다른 짐승이 없으니 으르렁대는 한 소리에 시방이 진동하여
들여우나 도깨비는 간담이 떨어져 땅에 없어진다.
전단나무 숲에는 잡초가 없으니 향기로운 바람이 온누리에 두루 퍼지며
신령하고 미묘한 지혜와 복덕은 중생들을 널리 이롭게 한다.
분명하게 뛰어난 용모는 해와 달이 빛을 잃고,
갖가지로 드러난 모양은 하늘과 땅이 그 빛을 잃어버린다.
문수와 보현이 오더라도 서른 방망이를 때릴 것이요,
모든 하늘과 정령이 오더라도 서른 방망이를 때릴 것이며,
뜻이 맞는 벗이 오면 한자리에 앉아 바리때를 씻고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리라.
게송을 읊으시되,
한산을 어디선들 만나지 못하리오 寒山何處不相逢
습득은 언제나 늘 함께 미소짓네. 拾得隨時呵笑同
들여우 따라가며 코끼리를 찾지말라 大象不從野干覓
웃고 보니 보전 속의 자재로운 왕이로다 笑看寶殿自在王
주장자를 세 번 울리고 법상에서 내려 오시다.
- 구산 큰스님 1969년 4월 15일 하안거 법어
( 구산선문 그대로 옮겼습니다. ‘들여우 따라가며 코끼리를 찾지말라’는 의역인
것 같습니다. 잘된 번역입니다. ‘큰 코끼리는 원래 들여우가 구하는 것을 따르지
않는다’가 직역입니다.
들여우가 무섭다고 사자새끼가 들여우를 따라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어금니와 발톱을 드러내어 위의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 우리가 모인 인연도 만난 이유도 불자(佛子)이기 때문입니다.
법화경 비유품에 사리불의 고백이 있습니다.
‘저는 예로부터 주야로 스스로를 책망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처님으로부터
일찌기 듣지 못하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모든 의심과 후회를 끊고 몸과 마음의
크나큰 평안을 얻었습니다. 오늘에 이러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진정한 아들임을. 부처님의 입으로부터 새로 태어났으며(從佛口生),
부처님의 진리에 감화하여 새로 거듭났으며(從法化生)
마침내 부처님의 진리를 나누어 갖게 되었습니다(得佛法分).’
* 부처님의 아들로 부처님의 딸들로 우리는 존재합니다.
하여 부처님께선 우리를 ‘좋은 집안의 아들이여(族性子, 善男子)’라고 부르셨습니다.
30년 전의 10대 재벌 가운데 오늘까지 10대 재벌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몇 개 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아들로 태어났어도 잘못 크면 어느 날 들여우의 새끼로 바뀌어버린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자새끼는 사자새끼로 살아야 합니다.
들여우의 위세에 눌려 잡혀 먹는 한이 있더라도 어금니와 발톱을 드러내어 위의를
보여야만 합니다.
그 위의는 스스로를 천하의 모든 것 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데서 비롯됩니다.
'스스로를 소중히여김' 저는 그 행위를 내마음의 확장공사라고도 표현해 봅니다.
천하를 담으려면 천하만큼 마음을 넓혀야 하고 법계를 담으려면 온 법계만큼
그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아무리 아까와도 벽은 끊임없이 허물어져야 하고,
아무리 아프더라도 껍질은 언제나 벗어져야 합니다.
모두 내 정성과 아픔이 담긴 벽이고 껍질입니다.
그러나 아까워하며 머무르는 순간 들여우의 새끼가 되어 버립니다.
* 길을 가다가 어떤 이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선생님 도에 관심이 없습니까. 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어이 총각, 길 위에서 길 걸어가는 사람에게 길에 대해서 논하자니....
자네는 지금 허공 속에 서 있는가’ 라고 대답해 준 일이 있습니다.
더 일러줄 말도 있었는데 한참이나 얼떨떨해 하길래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부처님의 아들로 우리는 이미 길 위에 걷고 있습니다.
걷는 모양을 시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걷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 어떤 불교학자가 말했습니다.
‘불교의 역사는 끝없는 이단의 역사이다. 그것은 불교의 생명력이기도 하다.’
모든 불전을 부처님의 금구옥설로 이해했던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였습니다.
원효도 육조도 지엄도 천태도 불전이 역사적으로 성립되었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역대 조사들 모두 마찬가지였지요.
오로지 부처님의 금구옥설로 받아들여 교판이라는 형식으로 정리하여
부처님 진리의 요점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현대불교학의 최대의 성과는 불전의 역사성을 밝힌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역대의 제선지식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수록 그들은 더욱 빛납니다.
그렇게 한계지어진 상황 속에서도 저리도 훌륭하게 본질을 꿰뚫고 있었음에
오히려 존경과 감탄을 더할 뿐입니다.
어떤 눈밝은 이가 부처님의 진리를 짜임새있게 정리하면 그 다음 못난 제자들은
그것에 자신의 깜냥대로 먹칠하기 시작합니다.
잘한다고 한 짓이 스승을 욕되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그 가르침은 껍질만 남고 생명력을 잃습니다.
다시 눈밝은 이가 나와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형식으로 부처님의 뜻을 밝힘니다.
그리고 한참 뒤 새로운 눈밝은 이가 나타납니다.
시대와 장소를 따라 늘 새로운 형식으로 본질을 밝힌 것 그것이 불교의 역사이면서도
모든 불보살들의 가피력의 드러남이기도 합니다.
* 문수와 보현이 오더라도 서른 망방이를 때릴 것이라 했습니다.
스승은 그러하지 않았는데 제자는 족보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스승의 마음은 자유로왔지만 제자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림 속의 떡으로 배를 채우려한 어리석음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제 스승 높이려 남종선에서 북종 혜능을 선사답지 못하게 묘사한 것은
학계의 공인된 연구결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못난 제자들의 허물일 뿐 육조의 위대함은 더욱 더 드러나고 있습니다.
육조단경의 뻘밭에 육조라는 연꽃은 더욱 빛나고 있습니다.
제 깜냥의 문수와 보현의 모습으로라도 제 스승을 빛내려한 제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스승의 서른 방망이를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의 탈을 쓰고 와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이 맞는 벗이 오면
한자리에 앉아 바리때를 씻고 마주 앉아 차를 나눌 것입니다.
* 우리 모두 부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이곳에서 담론을 나누기도 합니다.
길을 걸으며 남의 걸음걸이를 탓하지 마십시다.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이 경전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지난 세월의 일이라면
누구나 경전과 어록을 볼 수 있게 열린 세상이 오늘의 사정입니다.
가르침이 활짝 열려있는데 마음씨는 오히려 옛보다 더 닫쳐 있다면
역대 선지식의 슬픔을 어떻게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 부처님이 오면 예불을 드립시다.
그러나 권위와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부처의 탈이라면 마음에서 과감히 지워버립시다.
한없는 사랑으로 그가 정신차릴 것을 축원하며 그로 인하여 내 마음에 일어났던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부처의 탈이라는 중생과 그로 인해 일어났던 내 마음의 중생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기도하거나 닦아야 합니다. 그것이 살부살조(殺父殺祖)입니다.
구산스님의 서른 방망이가 굳이 뒤쫓아가서라도 꼭 때려주라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마음의 확장공사 시시처처에서 쉬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이라 감히 표현해 봅니다.
* 구산스님 말씀하십니다.
한산같은 도인을 어디선들 못만나리오.
습득이도 항상 옆에서 미소짓고 있는데...
제 모습 잃거나 위세에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자꾸나
모두들 풍성한 보배집의 주인들이 아닌가
* 큰스님께 누가 되지 않을까 저어됩니다.
원컨데 눈밝은 이 있다면 지체없이 서른 방망이를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 석주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는다
신이 어떠한 장난을 친대도
사랑을 피할 길은 없다 .그냥도 오고
누구 말대로 교통사고처럼도 오는 것이다 .
사랑은 ,신이 보내는 신호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게 한다 .그것도 신이 하는 일이다 .
죽도록 죽을 것 같아도 사랑은 남아
사람을 살게 한다 .
-이병률의<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중에서-
Symphony No.1 in C minor, Op.3 'The Bells of Zlonice'
드볼작 / 교향곡 1번 '즐로니체의 종'
*사랑은 신의 영역입니다 .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자 명령입니다 .
사람끼리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이지만
그 사랑은 신의 영원한 작품입니다 .
그러므로 ,사람은 비록 떠나도
사랑은 남는 것입니다 .
-고도원의 아침편지-
'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 > 제불조사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굴하지 않는자 만이 가피와 하나가 된다 /지광스님 (0) | 2012.12.28 |
---|---|
올바른 공부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자유(自由)를 얻는 것 /숭산스님 (0) | 2012.12.21 |
초조에서 육조까지... (0) | 2012.11.02 |
욕심이 일어나는 원인은? / 서암스님 (0) | 2012.10.26 |
남을 위하면/서암스님 (0) | 2012.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