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공부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자유(自由)를 얻는 것 /숭산스님

2012. 12. 21. 13: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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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스님 법어 법문

 

    20.오래 전에 내가 미국에서 머무를 때 병원에 입원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 곳에 있는 많은 의사들이 몸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명상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주치의가 이런 종류의 명상을 하면 심장이 빨리 회복될 것이라고 말해주어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해도 심장 박동이 비정상적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치료하는 데는 통상 2~3개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명상을 하여 1주일만에 회복되었고, 의사들도 매우 놀라며 기뻐하였습니다. 의 사들이 말하기를 많은 의사들이 명상을 선호하는 것은 무엇보다 환자들의 건강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몇몇 의사들이 명상에 대하여 좀 더 깊이 배우기를 원하고 따로 약속을 정해서 내 병실을 찾아 왔기에, 선(禪)을 조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몸을 치유하는’ 명상은 일종의 집중요가명상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이런 명상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올바른 공부는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요가명상은 여러분의 몸을 쉬게 하고 건강하게 해줍니다. 어떤 요가 수행자들은 조용한 곳에 앉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만으로도 백 년 혹은 천 년의 장수를 누리기도 합니다.
    이렇듯 수명을 연장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결국엔 모두 죽고 마는 것입니다.
    올바른 공부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자유(自由)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삶과 죽음이 있지만, 참된 자기(自己)에게는 삶과 죽음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된 자기를 찾는다면, 한 시간이나 하루 또는 한 달 후에 죽는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몸을 치유하는’ 명상만을 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몸에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의 몸이 죽어버릴 때 이런 종류의 명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런 종류의 명상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이런 종류의 명상은 올바른 공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올바른 공부를 한다면, 어느 때 병이 들어도 OK, 고통을 겪어도 OK, 설사 죽는다 하여도 OK,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순간 순간마다 청정한 마음을 지키면 어디에서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얼마나 믿습니까? 다른 이들은 얼마나 돕고 사십니까?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물음입니다. 참다운 마음 공부는 여러분이 자신의 참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내 옆의 침대를 쓰는 이에게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이는 훌륭한 직업, 좋은 가족, 멋진 아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그를 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었지요.
    그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그런 이해가 그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래서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禪)이란 이런 ‘아무 것도 없는, 바로 그 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무심(無心)의 마음을 증득(證得)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일까?’라고 물어 보아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말로써 답변을 한다면, 그것은 단지 생각일 뿐입니다. 당신은 아마 “나는 의사입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환자와 함께 있으면서 “나는 훌륭한 의사이다.”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환자의 상태를 감지할 수 없게 되는데, 그것은 당신이 자신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란 그저 이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병원에 있던 그 환자의 경우처럼, 이해한다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만약에 모른다면, 모르는 채 곧바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모르는 마음은 생각을 끊어 버립니다. 그것은 생각 이전입니다. 생각 이전에는 의사도, 환자도, 그리고 하느님도, 부처님, ‘나’도, 언어(言語)도, 아무 것도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우주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심(無心)이라 부르기도 하고 원점, 본래의 자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하느님이나, 우주적 기운, 희열이나 적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이 말들은 그저 가르치기 위해 쓰는 말일뿐입니다. 무심(無心)이란 언어 이전입니다.
    선(禪)이란 무심을 증득하는 것이고, 무심한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무심을 쓸 수 있을까요? 무심을 대자비의 마음으로 만드십시오. 무(無)란 ‘나’라는 생각과 장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마음을 일체 중생을 위해 행하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무심은 생겨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참다운 마음 공부를 한다면 이 무심은 강해지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백히 지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끊어낸다면 당신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은 거울과 같아집니다. 순간 순간 당신은 올바른 상황을 지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만일 ‘나 - 나의 - 나를’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환자와 하나가 된다면, 비로소 환자를 도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사가 가족과 함께 할 때에도, 아버지의 마음을 100퍼센트 지닐 수 있다면 가족을 위한 최선의 일이 무엇인지 확연히 알게 됩니다. 이렇게 즉여(卽如)할 뿐입니다.
    청산(靑山)은 움직이지 않는데
    흰 구름 제 스스로 오가는구나
    의사들은 선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모두 수행에 정진하기를!
    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곧바로 나아가 무심을 증득하고, 무심을 써서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제도해 주시길 빌어 마지않습니다.
    21.우리는 이미 진리의 세계에 살고 있다. 만물은 공하므로 모든 것이 이미 완벽한 길이다. 이것을 지적으로 혹은 학문적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수행을 통한 어떤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실제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절대이고 경계가 없으며, 나의 모든 행동이 순간순간 중생을 향한 큰사랑과 자비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사실, 본래 ‘나’라는 것은 없으므로 다른 중생을 위한다는 말조차 틀린 말이다. ‘나’와 ‘남’의 경계가 없는 것이니 말이다.
    그 길에는 생각도 없고 고통도 없다. 아무 것도 방해하는 것은 없다. 이렇게 되면 순간 순간의 할 일이 명확해진다. 순간 순간의 모든 행동은 진리이며 완벽하게 다른 중생의 고통과 닿아 있다.
    “어떻게 내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도와줄 수 있을까?”
    이것이 진정한 인간의 길이며 완벽한 길이며 진리의 길이다.
    이런 자비 어린 행동은 어떤 관념이나 특별한 행동이 아니다. 본래 그 자체이며, 이것이 보살의 길이다. ‘나’라는 것은 본래 없기 때문에 중생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며 그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다. 나는 단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자대비심’, 위대한 사랑과 자비를 가진 마음, 즉 절대의 길이다.
    이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자.
    먼저 우리는 모든 것이 똑같이 우주의 실체이며 기본적으로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다음 이 우주 만물의 수많은 이름과 모양이 공하므로 ‘나’라는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중도이며 진리의 길, 바른 길이다.
    여기서부터는 어떤 법칙, 어떤 이름, 어떤 모양이든지 모두 진리여서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런 무애(無碍)의 마음을 얻으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있는 그대로 진리이며 부처의 행동이다.
    순간 순간의 행동이 모든 존재와 사물과 함께 나누는 우주적 본질에 닿아 있다. 더 이상 ‘너’와 분리된 ‘나’는 없다. 이미 우리의 행동은 대자대비이다.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대승불교의 주요 가르침 중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과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떻게 모든 것이 공한데 그게 진리란 말입니까?”
    아주 좋은 질문이다. 답은 쉽다. 집에 가서 거울을 한번 봐라. 거울 속엔 아무 것도 없다. 완벽하게 공하다. 거울 앞에 붉은 종이를 갖다대면 붉은 종이가 나타나고, 하얀 종이를 갖다대면 하얀 종이가 나타난다. 산을 갖다대면 산이 나타난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비출 뿐이다. 붉은 종이를 치우면 거울에는 더 이상 붉은 종이가 없다. 오로지 그것을 비출 때만 상(像)이 나타난다. 맑은 거울은 언제나 완벽히 공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것도 아무런 장애 없이 비춘다. 모든 것은 이 공한 우주라는 거울 앞에 서 있는 그대로 왔다갔다하며 비춘다.
    아무 것도 덧붙이지도, 빼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나, 거울에 비친 상 역시 ‘공(空)’하므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마음은 이렇지 못하다. 마음의 거울에 붉은 것을 갖다대면 우리 역시 붉은 것을 비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붉은 것을 치운 뒤 하얀 것을 갖다대면 우리 마음의 거울은 여전히 ‘붉은 것’을 ‘생각’하고 있다.
    ‘붉은 것보다는 하얀 것이 낫지 않을까?’혹은 ‘다음에 다시 붉은 것이 나타날까?’ 혹은 ‘지금 앞에 있는 하얀 것은 좋지 않아. 붉은 것이 더 좋아. 아니야, 하얀 것이 더 좋아… 아, 잘 모르겠다’하고 ‘생각’한다.
    하얀 것이 앞에 있지만 우리 마음은 언제나 그것을 ‘제대로’ 혹은 ‘그대로’비추지 않는다. 다른 것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처럼 언제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 아주 강한 욕심이나 집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다른 사람을 위해 자비롭게 행동하는 대신 이 세상의 좋고 나쁨에 집착한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모든 것이 공해서 결국 모든 것이 같다는 깨달음을 얻 으면 우리 사는 삶은 모두 중생을 위해서 사는 삶이며,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비심은 저절로 나온다.
    대보살의 삶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모두 부처이다. 만물이 ‘공(空)’하여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우리 삶은 모두 중생을 위한 삶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삶이다.
    자비심은 저절로 나온다. ‘나’가 있으면 욕심이 나오고 모든 것과 내가 분리된다. 그러나 ‘나’가 사라지면 분리는 일어나지 않는다.
    참선 수행을 통해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자비로운 대보살의 행동은 저절로 나타난다. 반야심경에 나오듯 ‘얻을 바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다.’ 순간 순간 중생을 돕는 일만 있을 뿐이다.



    그림 / 쟝 레온 제롬 (Jean Leon Gerome.1824-1904)이 그린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피그말리온 효과 (Pygmalion Effect) 옛날 키프로스에 한 조각가가 살았답니다. (어떤 사람은 왕이었다고도 하던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그의 이름은 피그말리온이었어요. 그는 세상의 여자들에게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고 아무 여자도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만한 아름답고 사랑스런 여인을 조각하기 시작했지요.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아주 아름다운 조각품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조각이 완성되고 나서 그는 그만 그 조각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고... 하루종일 그 조각만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의 아픔에 시달리던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神殿)을 찾아가 자신의 사랑을 이루게 해 달라고 부탁했고... 정말 터무니없는 소원이었지요. 그렇게 공허한 소원을 빌고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슬픔에 젖어서 자신이 만든 조각을 꼭 끌어안았습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안타까워하며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항상 차디차기만 했던 조각이 오늘따라 왠지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잠시 후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습니다. 그러자 한 가닥 따스한 기운이 그 조각의 입술을 통해 온 몸으로 스며들더니 체온이 느껴지는 것이었죠. 피그말리온은 기쁨에 넘쳐 그 여인상을 꼭 끌어안았고 잠시 후에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그의 가슴에도 느껴졌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조각이었던 그 여인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하더군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결국 그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겁니다.
      피그말리온 효과 (Pygmalion Effect)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더욱 더 잘 하는 동기를 제공하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 (Pygmalion Effect) 라고 하지요. 교육학에서는 이 보다 더 좋은 교육방법이 없다고도 합니다. 칭찬, 격려, 신뢰, 인정, 애정, 사랑, 긍정, 확신,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변화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조각 작품에 혼을 불어넣는 마음으로...

     

    들리는 노래 < Message Of Love>는 돈 베네치가 '피그말리온 효과'를

    염두에 두고 만든 곡이라 합니다.

    노래를 들으며 지금 우리가  바라는 꿈, 소원 , 열망, 등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염원을 해 뜻하는 바 이루어 보시기 바랍니다..

     

    < Message Of Love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