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체험법문 /무사인

2013. 1. 11. 10:3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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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체험법문 1 /무사인

 

 

 

 

(아래 글 ①에서 ⑥까지는 2003년 3월에 無事人거사님이 어떤 분과 대담하는 도중에 질문에 답한 것이고, ⑦에서 ⑨까지의 내용은 2010년 4월에 그 뒷 이야기를 부가한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하셨는지 저희들이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① 저의 그때 상황이 박사과정에서 선불교를 공부하면서 선(禪)을 주제로 하여 박사논문을 써야 한다는 그런 마음의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이라고 하는 것은 책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스승님을 그 당시에 우연한 계기로 만나서 그 회상에서 공부를 했죠. 아마 제 기억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그 분에게 갔었던 것 같아요. 가면 『원오심요』니, 『서장』이니, 『임제록』이니 『육조단경』이니 하는 그런 어록을 내놓고 설법(說法)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 당시 스승님은 부산대학교 앞에서 하숙집을 하고 계셨어요.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셨는데, 처음에 그 분의 회상에 나가서 그 분을 만나보니까 그냥 할아버지인데도 뭐라 할까, 불신감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여튼 그 당시에는 그 분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는 판단 같은 것을 내릴 입장은 아니었고, 그냥 제가 선에 대하여 목이 마른 상황이었어요. 선에 대해서 저는 아무것도 공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절이나 선방이나 이런 곳에 가본 적도 없었고, 스님들을 만나본 적도 없었고, 아니 솔직히 대학원에서 선을 전공으로 삼기 전까지는 선에 대하여 읽은 책도 거의 없었습니다. 

대학의 철학과에서 동서양의 철학을 대강 훑어 보았지만 모두가 잘 짜여진 이론의 체계이고, 현재 내가 목말라 하는 그 무엇에 대한 해답을 주진 않더군요. 그래서 불교가 나의 목마름에 대한 해답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대학원에서는 불교를 공부했습니다. 불교의 역사 그리고 초기불교, 소승불교, 대승불교의 교리를 공부하며 석사과정을 보내면서, 결국 선이 내 목마름을 실제로 적셔줄 살아 있는 불교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뒤 여러 가지 선에 대한 안내서나 선어록 등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전달하거나 해석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선 그 자체를 알고 싶은 의문과 목마름은 더욱 커져 가기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스승님을 만난 것입니다. 학문이 아닌 선을 직접 가르치고 계신 분을 처음 만난 거지요. 그러니까 저로서는 그냥 선에 대해서 목이 말라 있는 그런 상황이었으므로, 이 분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보이니까 이 분에게서 공부를 하면 되겠다 안 되겠다 하는 그런 판단 자체를 아예 안 했어요. 안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생각 자체가 안 일어나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그냥 설법을 한번 들어보니까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고, 모르니까 졸리기도 하고, 따분하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나 달리 어디를 가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에, 어쨌든 스승에 대한, 처음엔 스승이란 그런 생각조차도 없이 그저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였는데, 그 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저도 모르게 생겼던 것 같아요. 처음 대하는 순간에 '아, 이 분에게 무언가 있구나!'라는 그런 느낌을 저도 모르게 받았는지도 몰라요. 
여하튼 저는 선을 실제로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원하고 있었는데, 그런 기회가 아주 쉽게 학교 바로 앞에서 왔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절에 나가는 것을 좀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스님이라는 존재와 예법 같은 것에 대해서 부담이 있더라고요. 그러나 이 분은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시니까 아무 부담이 없었죠. 그래서 그냥 부담 없이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질문을 해본 적도 없었고, 그 분도 저한테 이런저런 말을 건넨 적도 없었습니다. 그냥 뒷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아 듣고 있었을 뿐이에요.

 

 

② 어쨌든 공부를 해보자는 심정으로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렇게 시간이 한 몇 개월 지나니까 참 가기가 싫어지더라구요. 왜냐하면 그 법회라는 것의 분위기가 익숙한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리고 법문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영 모르는 이야기였고... 그렇지만 마음속에 어떤 신뢰는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에 분명히 무언가 있긴 있다. 뭔지 모르지만 여기서 내가 이것을 다 캐내어 보고, 그러면 내 나름대로 판단이 설 것이고, 그때가 되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또 공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여기에서 캐내 볼 만큼 캐내 보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스승에 대한 신뢰감이랄까? 어쨌든 그 분을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습니다. 분명히 이 분이 뭔가를 알고 계시는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 분이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싶다는 그 생각밖에 없었어요. 특별히 마땅하게 다른 데 갈 곳도 없고 해서 계속 거기를 다녔죠.

하나 기억나는 것은, 같이 공부했던 도반들과 가끔씩 공부가 끝난 뒤에 학교 앞의 찻집을 찾아 차를 마시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분들이 말씀하시길, “여기에서 끝을 내어 보아라.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다.”라고 격려를 하시더군요. 이 격려에도 상당히 힘을 입었던 것 같아요. 일반 사회생활에서 만난 그런 인간관계가 아니라 도반이라고 하는 그런 인간관계는 또 다른 어떤 정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참 편하고 좋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공부를 모르니까 공부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입을 다물고 항상 듣는 입장이었죠. 그냥 앉아서 무조건 듣기만 했어요. 모르니까 질문도 못 하겠더라고요. 무조건 아무 질문도 없이, 좋다 나쁘다는 그런 판단도 없이, 그냥 듣기만 했어요. 저는 그런 기질이 좀 있는 거 같아요. 뭐냐 하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을 완전히 내 손아귀에 쥐고서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곰처럼 묵묵히 매달리는 그런 특성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자세로 매달렸던 거죠.
그러다 몇달이 지나니까 같이 공부하러 갔던 후배 대학원생이 공부가 좀 됐다고 하면서 스승님하고 대화도 하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존심도 상하고, 그렇지만 겉으로는 그 후배를 격려도 해주고, 칭찬도 해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나도 반드시 해낼 것이다.”라는 오기랄까, 자신감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기대도 있었고...

그러면서 또 일년 정도가 흘렀던 것 같아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가면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겁니다. 가끔씩 졸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어떤 변화가 오느냐 하면, 처음 몇 개월 동안에는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되어 몸이 뒤틀려서 삼십분도 못 앉아 있고, 밖에 나가고 싶고 그러던 것이 시간이 좀 지나니까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거예요. 말하자면 훈습이 되어서 그 분위기가 익숙해지고 좋아지고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즐겁게 법회에 참석하게 되더라고요. 거기에 앉아 있으면 편하고, 앉아 있을 동안에는 뭔가 조금씩 세속적인 번뇌망상 같은 것들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좌우간 편안하더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법회가 없어도 시간만 나면 스승님을 찾아가는 겁니다. 심심하면 갔죠. 일주일에 몇 번씩 가서 법회도 듣고 도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하면서, 회상에서 스승님과 접촉을 자주 가졌죠.
그래도 여전히 공부는 막막하였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화두(話頭) 드는 것을 한 번 시도해 보았는데, 저는 화두를 정말 하루도 못 들겠더라고요. 하루가 뭐야, 한 시간도 채 못하고 짜증이 났어요. “이렇게 하여 무슨 공부가 되겠나?” 하는 의문이 생기고... 지금 이렇게 목이 마른데 애써 화두를 든다는 것이 당장 나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지금의 이 목마름을 가시게 해 줄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수행(修行)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그것이 해답을 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몇 년 간 목마름에 발버둥치며 도달한 결론은, 내가 의식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도 안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끈질긴 의식이라는 감옥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의식뿐이었거든요. 결국 모든 손을 놓아 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목마름에만 맡겨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은 마른데 손 쓸 방법은 없고, 그러니까 오로지 설법의 회상에 그저 의존한 것입니다. “하다 보면 어찌 되겠지...” 하는 기대만 가지고, 법회에 참석하는 그것만 믿고서 그냥 그렇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던 겁니다.

 

③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뭔가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확실하게 잡히지 않으니까 자신감도 없고, 막막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잡힐 듯 말 듯 할 때도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믿었어요. “하면 되겠지... 죽기 전에는 되겠지...” 하면서(웃음)... 그러면서 학교 공부는 조금 밀쳐놓고, 책보는 것도 당분간 접어 두고, -책이 보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냥 법회에 참석하고 그 분위기에 젖어서, 오로지 이 공부에만 매달려 있었어요. 그 기간이 몇 개월인가 꽤 된 것 같은데, 그때 제가 더욱 분명히 느낀 게 뭐냐 하면, “내가 의식적으로 공부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구나! 어쨌든 내 자신의 힘으로는 이것은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내 힘으로 해낸다는 것은 포기해 버렸고, 그냥 “되겠지...”라는 희망만 가지고 법회에 열심히 참석을 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벌써 이 헤아리는 생각이 나오면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버리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볼까, 저런 식으로 공부를 해볼까?”라는 식의 공부에 대한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어요. 공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 헤아리는 마음이 그 순간부터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공부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그냥 법회에만 무조건 참석을 한 거예요. 스승님에게만 의존하면서 법회에만 참석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포기를 하고, 그냥 법회에 의지를 했던 겁니다. 
법회에 참석하는 동안에는 거기에 푹 빠져 있고 집에 돌아오면 마음속에는 항상 그 갈망이 상처처럼, 하나의 부담으로 자리하고 있으니까 늘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거지요. 법문을 듣는 것은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을 이해하는 건 나에게 공부가 아니었어요. 그냥 그 법회 분위기에 푹 젖어서 그 분위기 속에서 의식이 아닌 그 자리에 젖어 들어가는 것을 원했던 거지, 제가 머리로 말을 이해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거든요. 말이라는 것은 학교에 다니면서 너무도 많이 익혀 왔고, 저는 그러한 말의 구속이 싫었고, 공부는 말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법회 자리에서도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의 내용은 항상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몇 번 들으면 똑같은 말이기에 더 들을 것도 사실 없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말을 들으러 가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말 아닌 이것에 빠져 들어가고 거기에 내 가슴이 열리기를 원했던 것이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간절하게 가슴이 열리기만을 원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말엔 관심이 없었어요. 
사실 저도 지금 여기서 설법(說法)을 하고 있지만, 말하는 내용 자체는 항상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내용인데 이해를 못하니까 계속 가슴만 답답했었죠. 말하자면 동일한 송곳으로 계속 가슴을 찌르고 있었지만 가슴에 구멍이 나지 않았던 거예요. 송곳은 언제나 동일하니까 “어떤 송곳으로 나를 찌르는가?” 하는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④ 그렇게 가슴이 열리기만을 바라고 앉아 있었는데, 어느 여름 날 스승님께서 법문을 시작하신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말씀하시길, “선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선이다!”라고 하시며,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톡톡 치시는 거예요. 그 순간 꽉 막혀 있던 게 마치 순간적으로 섬광처럼 눈앞에서 싹 스쳐 지나가는 그런 식이었어요. 싹 하고 스쳐 지나가는데, “어, 그래 이거!” 하고 탁 통하더라고요. “아, 결국 이 분이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이 전부 이것이구나!” 마치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이 분 이야기가 다 녹음되어 있었지만 그 녹음이 여태까지 한 마디도 풀려서 들리지 않았는데, 그 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니까 그 녹음 되어있던 것들이 싹- 하고 다 풀려서 들리는 식으로 소화가 다 되어서 내려가 버리는 거예요. 마치 엉클어져 있던 녹음테이프가 풀리면서 빠져나가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순간적이니까, 그 당시에는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도 안 했습니다. 어쨌든 그 후부터는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더군요. 그러고 나서도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은 알아듣겠는데 그래도 여전히 의심 하나 없이 확고부동하고, 가슴이 딱 안정되고, 아무 문제가 없이 되었느냐 하면, 그런 게 아니에요. 여전히 모든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불안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러면서도 그 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나니까 점차점차 조금씩 조금씩 자꾸자꾸 시원해지더라고요. 

그 후 어느 날인가 혼자 집에서 책을 보다가, 그 구절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온 세계는 전부 신의 은총이다.”라는 구절을 보는데 이번에는 온몸에서 열기 같은 게, 갑자기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온몸에 전율이 스쳐 지나가는 그런 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아! 아! 그래그래.” 하면서 정말 온 세계가 축복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 식의 경험들이 몇 번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가슴 속에서 “아, 이놈이구나! 내가 그토록 갈구하고 갈망했던 게 바로 이놈이구나!”라고 하는 것이 점점 더 뚜렷하게 확인되더군요. “이놈이구나! 이런 게 있구나!” 그런데 그것이 확인될 때의 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밑바닥이 없는 텅 빈 허공 속에 발을 딛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아주 강렬하여 모든 힘을 그 속에 다 가지고 있는 무엇 같기도 하였습니다. 뭔가 뚜렷이 잡히는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이 다 해체되어서 아무런 갈등이나 분별이 없는 심연(深淵)같았어요. 나중에 제가 원자로(原子爐) 같다는 비유도 들곤 했는데, 좌우간 뭔가가 있어요. 거기에 의지해 있으면 잡생각이 안 일어나고 안심이 되고 안정이 되는 반면, 생각을 따라가면 항상 불안한 거예요. 생각을 따라가면 불안하고, 흔들리고, 떨리고 그렇더라고요. 그러나 불덩이와 같은 거기에만 의존하면 안정이 되고, 안심이 되고, 마치 엄마 품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포근함과 안정감이 있어요. 거기에 의지하고 있으면 여러 욕망이나 감정이나 생각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하여튼 그런 게 있더라고요.

하지만 그 당시엔 그게 뭔지 뚜렷하지는 않고, 막연하게 그놈이 항상 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 확인의 느낌 속에서 안심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그것이 나와 확실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죠. 아직까지는 목이 마르고, 그립고, 미흡한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그놈과 하나가 되어 있으려고 하는 그 욕구밖에 없었어요. 그런 시간이 몇 년이 지난 것 같아요. 그놈에 대한 느낌이 어떨 땐 강하게 왔다가 어떨 땐 희미하게 되었다가, 주기적으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어떨 땐 아주 강하게 내가 정말 흔들림 없는 그 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 어떨 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⑤ 그렇지만 스스로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또 어떤 점이 남았느냐 하면, 삼매(三昧)에 빠지는 버릇이 생겨 있더군요. 삼매가 뭐냐 하면 잠시 혼자 있는 시간들, 쉬는 시간에 의자에 앉아 있으면 어떤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게 있어요. 그걸 우리가 공(空)이라고 그러는 거 같은데,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푹 빠져드는 겁니다. 그렇게 깊이를 모를 허공과 같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면 아무 생각도 없고 욕망도 없고 한없이 편안한 거예요. 아무리 피곤할 때도 앉아서 십분만 그렇게 빠져들고 나면 마치 오랫동안 수면을 취한 것 같은 상쾌함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한 재미에 한동안 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삼매에 빠진다는 것은, 빠져 들어갈 때가 있고 빠져 나올 때가 있기 때문에 그것 역시 기복(起伏)이 있는 거죠. 공부에 아직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자기가 비록 맛을 보고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말하자면 법의 맛에 취해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 후에 불교신문에 『서장』과 『임제록』을 강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찾아오시는 분들과 더불어 공부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깨어나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 남과 더불어 공부를 공유한다는 이것이 저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도를 하다 보니 제 공부의 부족한 점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계속 보완이 되어 나갔지요. 저로 말미암아 새로 깨어나는 경험을 하시는 분들에게 제가 도리어 배우기도 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들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는 분들은 하나 둘씩 깨어나는 경험을 하시고, 저와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저는 더욱 이 자리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⑥ 그러면서도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씩은 스승님의 법회(法會)에 참석하여 설법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법회를 들으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모든 의식이 천천히 하나의 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더니 마치 욕조 바닥의 마개를 빼면 물이 물빠지는 구멍으로 모여 들어 쏙 하고 빠져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깨끗해져버리듯이, 한 점으로 모인 의식이 쏙 사라져 버리고 전체 허공이 한 점이 되어 버리더군요. 나타나는 모든 것이 다만 이것일 뿐, 다른 것은 그 가능성 조차도 사라져서 없어요.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나 가벼워 졌습니다. 아무런 무게도 느끼지 못하겠어요. 전혀 힘이 들지 않아요.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일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평범할 뿐이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되질 않아요. 어긋나고 싶어도 어긋나지지가 않는단 말이예요. 훨씬더 편안하고 자유로웠습니다.

예전에 삼매에 빠져들곤 할 때에는 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고, 어떤 경계가 다가오고 하면 삼매 쪽으로 피했거든요.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대상들은 별 문제가 아니었어요. 어떤 경계가 제일 심한 거냐 하면 감정적인 문제, 사람이죠. 사람이 제일 안 떨어져 나가는 경계더라고요. 사물은 문제가 안 돼요. 사람은 감정적으로 서로 공감을 하고 교류를 하기 때문에, 상대가 공부가 된 사람이면 상관이 없어요. 공부가 된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통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되는데, 공부가 안 된 사람을 대할 땐 그 사람하고 나하고 아무런 유대관계가 없으면 괜찮은데, 인간적으로 여러 가지 정이 있고 이렇게 되면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하더라고요. 그 관계란 부모, 형제, 친구, 제자 그런 인간관계들이죠. 공부가 된 사람들 사이에선 부담이 없는데,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친구라든지 동료, 제자 등, 정을 주고, 마음을 열어 놓고 교류한 사람들을 대할 때는 옛날의 세속적인 정(情)으로 쉽사리 이끌려 가버리는 거예요. 그 경계가 정말 안 떨어져요.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디로 피하느냐 하면 빨리 혼자 있으려고 하고, 혼자 있으면 삼매 속으로 빠져들면서 자유롭게 되곤 했었어요. 계속해서 나는 이 자리에 있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이죠. 

그런데 한 점이 되는 이 체험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어요. 어떠냐 하면, 그러한 삼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언제나 다른 것이 없어요. 훨씬더 자유롭게 된 것이지요. 공부를 한다는 그런 생각도 없고, 그저 평소의 일거수일투족이 다른 것이 없고, 이것뿐이라는 생각 조차도 없었어요. 이 한 점이 되는 체험을 비유하여 말하면, 흰 백지 위에 조그마한 점이 하나 있는데 연필을 쥐고 위에서 그 점 하나를 정확하게 찍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수없이 옆으로 빗나가겠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정확하게 딱 찍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연필을 떼지 않는 거죠. 딱 고정시켜 버리는 거죠. 또는, 전기선을 연결할 때 플러스, 마이너스 연결선이 서로 빗나가기만 하고 잘 안 맞다가 어느 순간 정확하게 딱 맞는 때가 오죠. 그러면 계속 불이 켜지죠. 그런 식으로, 그래서 계합(契合)이라고 하는데, 이 자리는 아주 작은 점 같지만 딱 들어맞으면 흔들림 없이 고정 되어버리는 자리가 있어요. 거기에 딱 들어맞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이제는 감정이라든지 그런 모든 경계가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해요. 피하고, 피하지 않고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 것들이 다가와도 이제는 주위만 맴돌지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못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많이 자유롭고 많이 편안해진 거죠.

 

달리 손 쓸 일이 없어요. 그냥 평소대로 생활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거지요. 그것뿐이지 특별하게 법이란 게 없어요. 그야말로 손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생각 가는 대로 그렇게 그저 살고 있을 뿐이었죠.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깨달음의 체험법문 2 /무사인

 

⑦ 내 자신이 이만큼 자유롭게 되고 선원의 일도 여러 가지로 바쁘고 하자 스승님의 회상에 공부하러 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원을 열고난 2,3년 뒤에는 스승님의 회상으로 공부하러 가는 일은 그만두고 가끔씩 시간이 날 때에 들러 인사만 드렸습니다. 이제는 스승에게 의지함 없이 나의 길을 스스로 한 발 한 발 나아가야 하겠다는 내면적 욕구도 있었고, 내 자신의 공부는 내 스스로가 완성해야지 언제까지나 스승의 영향 아래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장성한 자식이 독립하여 자기의 길을 찾아간다고 하여야 할까요? 

 

한편 선원을 열어 놓고 또 신문에 글도 쓰고 하여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인지 종종 마음공부하시는 분들이 찾아오셔서 대화를 요청하곤 하였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저의 공부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공부를 드러내 보이시고 저는 제 공부를 드러내 보이면서 서로 탁마하고 공부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지요. 여러 부류의 공부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어떤 분은 분명하게 외도(外道)의 길에 서 있었고, 어떤 분들은 저와 같은 길에 서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서 저는 제가 분명히 세속에서 해탈하여 얽매임 없고 머묾 없고 흔들림 없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아직은 해탈한 자리의 힘이 세속의 분별과 시비의 힘을 압도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는 못함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마치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처럼 좀 더 강하고 확실하고 흔들림 없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선지식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네 공부가 높으냐 내 공부가 높으냐 하고 겨루어 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그 순간 내면에서 시비심과 승부욕이 일으나는 것을 보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공부에 방해가 될 것만 같았기에 그만두었습니다. 이렇게 싹이 올라와 자라고 있는 내 공부가 아무런 방해 없이 순수하게 본래의 성품에 따라 자랄만큼 충분하고 완전히 잘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또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하게 판단이 서지 않아서 애매한 부분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찾아오는 분들을 만날 때에도 그분들의 공부의 큰 테두리가 옳은 길에 있는지 그른 길에 있는지는 분명히 판단이 되었지만, 미세한 부분에 들어가서는 공부가 어느 정도로 완성되어 있는지를 잘 판단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물론 나의 공부가 그렇게 미세한 부분까지 초점이 정확히 맞아 있는 것이 아니었던 까닭에, 나의 눈도 그렇게 미세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온갖 것들로부터 많이 자유롭고 또 언제나 흔들림 없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바른 공부의 길에 들어서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아직 스스로의 힘과 능력이 부족함 또한 분명하게 느꼈던 것입니다.
또 입으로는 분명 여법(如法)하고 앞뒤가 맞는 분명한 말을 자신만만하게 하면서도 마음속은 그렇게 자신만만하지 못하고 무언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도 하였습니다. 이전보다는 많이 자유로와졌다고 하지만 역시 아직 육체와 마음의 감각이나 의식을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많이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육체가 있고 마음이 있어서 그 장애에 걸려 있었죠. 특히 어쩌다 욕망에 끄달릴 경우나 가족이나 친지 등 사람들에 끄달릴 경우에는 언제나 자신의 공부가 아직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루에 일정한 시간은 혼자만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을 여전히 좋아하였습니다. 집안 식구들이라든지 친지들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존재였으므로 집에서도 가능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⑧ 그 당시에는 선원이 금정구 남산동에 있었는데, 저녁에 연산동 토곡에 있는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지하철을 동래역에서 내려, 온천천 강변 산책로를 따라 한 시간 정도 혼자 걸어서 집으로 오는 것을 즐겼습니다. 물론 평소에 부족한 운동을 겸하는 산책이기도 하였지만 혼자서 냇가 산책로를 걸어가는 것은 또한 공부의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홀로 이 자리, 이 법과 함께 걷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법의 즐거움에 취하여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겼다고나 할까요? 산책로 주변의 풍경이나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내 마음 자리, 이 법의 자리와 마주하며 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몇 년도인지 기억은 없습니다만, 지금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저는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 있고자 하기 때문에 내가 언제 어디서 무슨 체험을 했는가 하는 것들은 생각하지도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지금의 이 이야기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공부에 대한 믿음을 주리라는 기대 때문에 억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혼자 법에 젖어서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산교라는 무지개다리 밑을 지나는데 문득 마음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마음이 없으지니 법의 자리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허공처럼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육체는 여전히 이전처럼 걷고 있고, 보고․듣고․느끼고․생각하는 것도 이전과 다름이 없었지만, 육체든 감각이든 느낌이든 생각이든 모두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과 같아서 아무런 걸림도 장애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로소 정확히 초점이 들어맞고 틈이 사라져서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없고 법이 없으니 모든 경계에도 대상에도 전혀 걸림이 없고 끄달림이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도착하여 아내와 아이들을 보아도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전혀 성가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너무나 자유로왔습니다. 사람들도 없고 나 자신도 없고, 마음도 없고 세계도 없었습니다. 공부니 법이니 하는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상쾌하였습니다. 마음이 없어짐으로써 비로소 모든 구속에서 해방이 되더군요. 사실 그 이전에는 늘 바로 (손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이 자리에 깨어 있긴 하였으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이나 마음에 부딪히는 경계들이 언제나 성가신 것이었고 극복의 대상이었습니다. 장애가 있고 걸림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마음이 없고 보니 사람도 없고 세계도 없고 진리도 없고 공부도 없고 깨달음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티끌하나 걸릴 것이 없어요. “산하대지에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방거사의 말이나, “깨달음을 얻는 부처가 없는데 또 무슨 깨달음이 있겠는가?”라고 하는 경전의 말을 비로소 알겠더군요.
그 이후에는 경전의 말이나 선사(禪師)들의 말이나 아무런 걸림 없이 보는 족족 저절로 소화가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애매했던 구절들도 이제는 그냥 술술 수긍이 되니 감탄도 절로 나왔습니다. 누가 공부에 대하여 말하면 그 세밀한 부분까지 판단이 되었습니다. 이른바 세간에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선사들의 실제 살림살이가 어떤지도 알아보겠더군요. 거위왕은 우유와 물을 섞어 놓으면 물은 버리고 우유만 마신다는 말이 와 닿았습니다. 육조스님의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말씀, 금강경의 “얻을 법이 조금도 없다.”는 말씀, 반야심경의 “얻을 것이 없기 때문.” 또는 “장애가 사라진다.” 또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말씀, “만법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씀, “중도(中道)는 무주(無住).”라는 말씀,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이라는 말씀, “어리석은 사람은 바깥 경계를 없애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을 없앤다.”는 말씀 등이 모두 참으로 평범한 말이더군요. 어느 때에는 어떤 책에서 “만약 세계가 둘이 아니라면 바로 지금 눈앞의 일이 모두 진실이다.”라는 구절을 보았는데, 이 말도 크게 공감되며 감동이 일었습니다. 또 마조어록에 있는 “서 있는 곳이 곧 진실이고, 발길 닿는 곳마다 주인공이다.”라는 구절이나, “중생이라고 마음이 작은 것도 아니고 부처라고 마음이 큰 것도 아니다.”라는 구절도 진실하게 와 닿았습니다. 또 대혜가 서장에서 말한 “어리석음도 헛된 망상이요, 깨달음도 헛된 망상이다. 헛된 약을 가지고 헛된 병을 치료함에 병이 나아 약을 치우면, 여전히 다만 옛날 그 사람일 뿐이다. 만약 따로 사람도 있고 법(法)도 있다면, 이것은 삿된 외도(外道)의 견해이다.”는 구절도 분명하게 와 닿았습니다.

 

 

⑨ 2005년 가을부터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대혜보각선사어록』 30권을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동안 보아 온 한국 간화선의 행태에 많은 의문점이 있었으므로, 간화선의 창시자가 말하는 선(禪)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 대혜종고의 어록 전체를 번역하는 일을 맡았던 것입니다. 3년 이상이 걸린 힘든 번역작업이었습니다만, 대혜의 어록을 통하여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간화선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들 가운데 의문을 가졌던 문제들의 답을 모두 얻을 수 있었습니다만, 그것 보다는 대혜가 법과 방편을 보는 안목(眼目)을 접한 것이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혜를 통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이 무엇이고 불교의 방편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유식학(唯識學)에서 말하는 “일체유심(一切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든지, 『원각경』에서 말하는 “세계도 깨달음도 꿈과 같고 환상과 같다.”라든지, 『유마경』에서 말하는 “법(法)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알 수도 없다. 만약 보고․듣고․느끼고․안다면, 이것은 보고․듣고․느끼고․아는 것일 뿐, 법을 찾는 것이 아니다.”라든지 하는 말들도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대혜의 가르침과 대혜가 인용한 경전과 조사의 말씀들은 제가 깨달은 것을 입증해주는 증거이기도 하였습니다. 대혜의 어록을 통하여 저는 저의 깨달음과 안목을 미세하고 세밀하게 다듬었습니다. 

특히 화엄경을 읽다가 앙굴리마라가 임산부 집에 탁발간 공안을 소화시킨 뒤에 대혜가 말하기를 “참된 금강권(金剛圈)이란 바로 자기의 마음임이 밝혀져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라는 구절을 보고 대혜의 선이 어떤지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시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나를 속이고
내가 나에게 속았구나.
내가 나의 감옥이요
내가 나의 해탈문이로다.

내가 없으니 세상도 없고
세상이 없으니 속임도 없다네.
내가 없으니 감옥도 없고
내가 없으니 해방도 없도다.

온갖 일들이 여전히 일어나지만
하나의 일도 일어난 적이 없다네.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니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로다.

 

마음 밖으로 벗어나려고 하므로 마음은 감옥이고, 마음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므로 마음은 감옥입니다. 내가 나를 속이고 내가 나에게 속습니다. 내가 나의 감옥이고 내가 나의 해탈문입니다. 문득 마음이 사라지면 안도 없고 밖도 없고, 나도 사라지고 감옥도 사라져서 걸림이 없습니다. 티끌 하나라도 마음이라고 할 무엇이 있다면, 아직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다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함에 어떤 물건이 있어서 장애가 되겠습니까?
이처럼 마음도 없고 세계도 없다는 깨달음 뒤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 깨달음을 더욱 확신하게 되고, 더욱 힘을 얻게 되고, 더욱 세밀하게 되고, 더욱 자신만만하게 되고, 더욱 눈이 밝아져서 무엇을 보더라도 의심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이라 할 것도 없고 법이라 할 것도 없으니, 둘이니 둘이 아니니 하는 말도 필요가 없고, 깨달음이니 어리석음이니 하는 차별이 없고, 부처라 할 것도 없고 범부중생이라 할 것도 없고, 티끌먼지 하나 걸릴 것이 없습니다. 

법이니 마음이니 나니 타인이니 하는 온갖 것들은 아직 깨달음이 원만하지 못하여 생긴 그림자입니다. 마치 여름날 정오에 곧은 막대기를 태양을 향하여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막대기가 조금만 기울어져도 그 모습이 그림자로 생겨서 차별되는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대기가 정확히 태양과 일치하면 그림자는 사라지고 온통 태양의 밝음이 있을 뿐 어떤 차별되는 물건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정확히 계합되면 둘이 없습니다.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고, 나도 없고 세계도 없습니다. 변함없이 이전처럼 생활하지만 나도 없고 세계도 없습니다. 나도 없고 세계도 없지만, 당장 앞에 드러나는 보고․듣고․느끼고․아는 일들은 너무나 생생합니다. 생생하면서도 앞도 없고, 뒤도 없고, 안도 없고, 바깥도 없고,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습니다. 사물 하나하나가 마음이니 사물과 마음에 차별이 없고, 사물과 사물에 차별이 없습니다. 마음이 따로 없고 경계가 따로 없고, 경계가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경계입니다. 사물사물이 마음이고 마음마음이 사물입니다. 사물도 없고 마음도 없어서 마음에도 막히지 않고 사물에도 막히지 않습니다. 대혜의 선이 다만 이러할 뿐이고, 역대 조사의 선이 다만 이러할 뿐이고, 부처님의 법이 다만 이러할 뿐입니다.

박훈산 거사님이 저를 깨달음의 문으로 안내하신 첫 번째 스승이시라면, 대혜의 어록은 저의 공부를 증명해주고 온갖 의문을 해소시켜주어 공부를 세밀하게 갈고 닦아 준 두 번째 스승이었습니다. 이 몸을 낳은 이는 부모님이지만, 이 마음을 드러낸 이는 스승님들입니다. 부모님의 은혜가 태산 같다면, 스승님의 은혜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無事人 거사님과의 대화(200333일)

 

 

질문1.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 자세로 공부에 임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2.

제가 항상 하고 싶었던 공부를 찾는데 젊은 시절을 다 보냈습니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교수님을 다행히 만났습니다. 너무 늦다는 생각에 초초하기도 하고, 또 절에 가서 스님들처럼 평생 공부해도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제부터 공부를 하더라도 제가 원하는 만큼 공부의 어떤 성취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가능한 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질문3.

제가 이런저런 책도 읽고 법문도 듣고 해서 마음이 곧 부처라는 걸 생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는 조금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건 보이지도 않고 그렇기에 제 가슴에 실질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직접 맛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한 지, 가장 기초적인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4.

공부를 하다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혀서 눈물만 날 때도 있는데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질문5.

교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하셨는지 좀 저희들이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질문6.

그럴 때 교수님께서는 이제 마음의 주인이 되었다는 그런 표현을 쓸 수도 있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에는 저 자신이 내 마음의 노예로 이끌려 다닌다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을 알지 못하는 한은 마음의 노예라는 그런 생각은 어떠한지요?

 

질문7.

하나만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보통 일상생활을 하면서 수행방편에 관한 문제인데, 보통의 경우에는 항상 화두를 챙겨야 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이런 식이 있고, 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도 있는 문제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할까 하는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이 마음공부에 있어서 바른 길이라고 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처음 공부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 자세로 공부에 임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나,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인 사람이나 마음가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가짐은 결국 공부에 대해서 얼마나 갈증을 가지고 있는가, 얼마나 목이 말라 있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죠.

비유를 들면, 젖먹이 어린애가 엄마한테 젖 달라고 우는 것 같은 그런 심정, 어린애가 생각으로 헤아리고 계산해서 젖 달라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저 배가 고파서 우는 거죠. 그런 것처럼 이 공부도 내가 머리로 '뭘 어떻게 해야 되겠다' 이런 의도적인 것이나 의식적인 것,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배고픈 어린애와 같은 그런 절실함이 중요한 것이거든요. 이 공부가 이렇게 저렇게 좋으니까, 그런 이유가 있고 그래서 그런 이유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그런 계산적인 발심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어린애가 배고프듯이, 그냥 배가 고픈 겁니다.

공부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라고 해도 좋고, 뭐라고 딱 꼬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냥 배가 고픈 겁니다. 그런 식으로, 진실로 배가 고프면 멀지 않아서 반드시 응답이, 거기에 대한 반응으로서 진실한 자리가, 공부의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거죠. 무슨 이치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우리 삶에 있어서 아주 상식적인 원리죠. 그런 원리지, 무슨 이치가 있어서 그 이치에 따라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 그런 것이 아니에요.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공부라는 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니, 대단히 중요한 것 정도가 아니라 공부의 전부입니다. 마음가짐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공부가 아주 짧은 시일에, 어떤 사람은 6일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3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하다는 거죠.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으면 수십 년을 해도 항상 수박 겉핥기예요. 공부가 안 된다 이겁니다. 늘 그냥 그 상태죠. 그런 사람들을 보면 자기 스스로 마음가짐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모르고, ?뭔가 방법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온갖 여러 가지 방법이나 사람을 찾아서, 이런 방법도 써보고 저런 방법도 써보고 사람도 만나보고 하는 거죠.

그런데, 그건 머리에서 나오는 계산이기 때문에 안 맞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젖먹이 어린애가, 아직까지 머리로 계산할 줄 모르는, 그저 배가 고프니까 젖 달라고 우는 그런 순수함! 계산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그런 배고픔, 목마름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공부는 되는 겁니다.

 

본래면목의 응답이란 것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본래면목이란 것은 우리에게 이미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갖추어져 있는 것이 왜 드러나지 않느냐? 그것은 우리들의 계산, 의식적인 헤아림 때문에 안 드러나는 것입니다.

첫 질문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느냐고 하셨는데 정말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공부의 전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소용이 없어요. 방법이란 것은 어떤 방법을 쓰든 별 상관이 없어요.

기도를 해도 좋고, 절을 해도 좋고, 화두를 하든, 뭘 하든 상관없어요. 제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제일 좋아요. 어떤 방법도 취하지 않는 게... 왜냐하면 그런 방법이란 것에 잘못 매여 들어가면 그런 방법이 주는 어떤 일시적이고 조작적인 효과에 매여가지고 그것들이 공부인 양 착각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방법은 없는 게 좋습니다. 다만 진실로 목이 마르다고 한다면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 자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 둘러간다거나 어떤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바로 즉각 그 자리에 바로 드러나는 게 이거거든요. 그 어떤 무슨 깨져야 될 껍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버려야 할 번뇌나 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의 진실한 존재, 자기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니까,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 자리에서 즉각 드러나는 것이지 특정한 방법을 통해서 갈고 닦아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직 필요한 것은 의도적이고 의식적인 헤아림이 아니라, 진실하고 꾸밈없는 정말 절실해서 피할 수 없는 그런 발심입니다. 그런 목마름, 배고픔, 그것이 이 자리를 문득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작이자 끝이죠.

공부를 10년 동안 해온 사람이나 하루를 한 사람이나 이 자리를 모르면 조건은 똑같은 겁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알거나 모르거나 이지, 십년을 해온 사람이라고 해서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에요. 십년을 해왔든 하루를 공부했든, 진실한 목마름, 진실한 배고픔, 이것 하나만 갖추어지면 멀지 않아서 그 자리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이렇게도 생각해요. "나는 정말 공부를 하려고 발버둥을 많이 쳤다. 그래서 나는 발심이 되어 있다. 정말 나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도 왜 안 되느냐" " 내가 뭔가 방법이 잘못된 게 아니냐" 이렇게 질문할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볼 때 그분은 아직 방법을, 요령을 찾고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배고픔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정 배가 고픈 사람은 요령을 찾을 겨를이 없어요. 정말 배가 고프면 눈이 뒤집어지거든요.

쟝발쟝이 눈앞의 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진열장을 깨고 빵을 훔쳐 먹을 만큼 그런 배고픔! 그 상황에서 '내가 유리창을 깨고 빵을 훔쳐 먹으면 처벌받을 텐데...'라는 그런 계산이 나온다면 아직까지는 배가 덜 고프다는 거죠. 진정 배가 고프다면 요령을 계산하는 그런 생각이 떠오르질 않아요. 그냥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일 뿐이지...

이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될 텐데 하면서... 헤아리고 따지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은 배가 덜 고픈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할 때는 '나는 정말 공부가 하고 싶은데...'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따져 보고 헤아려 보고 있다면 진정 배가 고픈 게 뭔지를 아직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 배가 고프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그만큼 절실해야 되는 겁니다.

 

 

깨달음의 체험법문 4 / 무사인

 

질문 2

 

제가 항상 하고 싶었던 공부를 찾는데 젊은 시절을 다 보냈습니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교수님을 다행히 만났습니다. 너무 늦다는 생각에 초초하기도 하고, 또 절에 가서 스님들처럼 평생 공부해도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제부터 공부를 하더라도 제가 원하는 만큼 공부의 어떤 성취라고 할까? 이런 것들이 가능한 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 공부를 하려고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하면서도 아직 이 자리를 만나지 못해서 초초하다 하시니 이제 상당히 배가 고플 만큼 고픈 겁니다. 아직도 그 배고픔을 채우지 못하고, 목마름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하시니까 보기에 안타깝기도 합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초초할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우리 속담에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이다.' '공부가 될까?' 하는 그런 걱정도 이해는 됩니다만, '내가 원하는 만큼 공부가 될까 안될까'라는 계산을 하고 계시는 걸 봐서는 한편으로 아직 충분히 배고프지 않다는 그런 느낌도 들거든요. 어쨌든 또 이런 말도 있잖아요? 죽기 직전이라도 이 공부에 눈을 뜨고, 이 맛을 보면, 죽음이 다르다고 하듯이, 나이에 상관없이 이 맛을 보고자 하는 그런 간절함만 있으면 그걸로 맛을 보는 것이고, 그리고 맛을 보고나서 얼마만큼 더 공부에 깊이 들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그 뒤의 문제죠.

 

우선 이 공부의 맛을 보는 게 첫째 일이니까, 연세가 그만큼 드셨다니 더 초초하고, 더 절박하고,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정말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하듯이, 도구가 좋은 게 없더라도 맨손으로라도 진흙물을 파야 될 그런 절박함을 느끼신다면, 이제까지 공부가 하고 싶어서 계속 찾아 다니셨다고 하니까, 간절한 심정으로 공부에 매달리시면 오래지 않아서 공부의 맛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공부의 맛을 본 뒤의 공부는 그때 가서 상황에 따라서 하시면 되는 것이고, 우선은 죽기 전에 꼭 이 공부의 맛을 봐야 되겠다는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다른 계산이나 헤아림 없이 그냥 한결같이 이 공부에 대한 목마름 하나에만 의지를 해서 공부를 하시면 머지않아 좋은 결과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질문 3 

 

제가 이런저런 책도 읽고 법문도 듣고 해서 마음이 곧 부처라는 걸 생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이론적으로는 조금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건 보이지도 않고 그렇기에 제 가슴에 실질적으로 와 닿는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직접 맛볼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한 지, 가장 기초적인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항상 자기 마음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그 맛을 못 느끼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밥을 먹을 때를 생각해 보시면 돼요.

밥을 먹으면서 순수하게 항상 밥의 맛에만 취해있으면 그 밥맛을 아주 미세한 맛까지 다 느낄 수가 있는데, 밥을 먹으면서 밥 먹는 것이 아닌 다른 곳에 생각이 가 있고 관심이 가 있으면 밥맛을 모르는 겁니다.

밥을 안 먹고 있는 게 아니고, 마음을 내가 맛보고 있지 않는 게 아니고, 맛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 맛을 못 느끼고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맛을 보고 있지 못 하니까 맛을 봐야 된다는 게 아니고, 맛을 보고 있다는 이 사실을 실제로 자기가 자각을 하는 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마음공부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밥을 안 먹고 있으니까 밥을 먹기 위해서 밥을 지어서 입에 넣고 하는 그런 행동이나 해야 될 일이 있는 게 공부는 아니다 이겁니다.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다른 데 관심이 있고, 다른 것을 보고 있고, 다른 곳으로 가 있는, 그걸 망상이라고 합니다만, 그 망상을 끌어다 지금 눈앞의 밥 먹고 있는 여기에 가져오면 되는 것이에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내가 하고 있는, 거기에다 계속해서 관심을 두는, 관심을 둔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늘 항상 지금 이 순간에 내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 그러면서도 그것은 경계의 변화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경계라고 하는 것은 항상 왔다 갔다 하며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마음이라고 하는 놈은 무상하게 변하는 경계 그 가운데에서 항상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가 경계를 맛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경계를 맛보고 있는 걸로 착각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경계, 저 경계, 눈앞에 나타나고, 머리 속에 나타나고, 우리 감각 속에 나타나고 있는 경계들을 항상 순간순간 맛보면서 지나간다고 알고서 계속 그런 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마치 밥을 먹고 있으면서 다른 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그런 경계가 왔다 갔다 하는 가운데에도 한결같이 변함없이 왔다 갔다 하지 않고 늘 눈앞에 또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 이게 말하자면 우리가 항상 맛을 보고 있는 마음이거든요. 늘 눈앞에 또렷하고, 생생하고, 부정할 수 없고, 분명한 이것! 왔다 갔다 하는 모양이 아닌 이것!

지금 우리의 상황이라는 게 영화를 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 영화 화면이 지금 왔다 갔다 하면서 변하고 있는데, 영화 화면은 오색찬란한 빛으로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변하지만 한결같이 거기에는 빛이 있거든요. 밝음이 있다 이거예요. 그 밝음이란 게 뭐냐 하면 화면은 다양하게 바뀌고 있지만 이리저리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대로 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런 말 가운데 의식적으로 '그래, 이거야!' 하고 거기에 멈춘다면 아직까지는 그 문 앞까지 와 있는 겁니다. 안으로 쏙 들어온 것은 아니거든요. 그 자리에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모양을 따라가지 않고, 경계를 따라가지 않고, 지금 눈앞에서 화면이 바뀌고 있는 와중에 변함없이 그 화면을 보고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를 듣다가도 그 놈이 몰록 탁! 하고 잡히면 거기가 하나의 관문이에요. ! 하고 넘어가면 이런 말 저런 말이 갑자기 사라져 버려요. 이런 말도 저런 말도 없어! 없으면서 단지 뚜렷하고 분명하게 밝을 뿐입니다.

변함없는 게 있어요. 그런 경험이 필요한 거죠. 마음을 맛본다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항상 마음을 맛보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그 맛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의 맛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지금까지 느껴왔던 맛은 마음으로 인해서, 이 마음을 가지고 다른 허깨비를 쫓아다니며 맛본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알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주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경험해 놓고 보면 자기가 결국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그것이지만 경험하기 이전에는 이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상상할 수가 없어요. 어쨌든, 이렇게 저렇게 생각으로 '이런 경험일 것이다'라는 어떤 상상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맛을 보아야 해결되기 때문에 오로지 맛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가짐 하나를 가지고, 지금 항상 눈앞에서 또렷하게 맛보고 있다는데, 영화 화면같이 끊임없이 지나가는 이 가운데에서 자기의 존재, 나라는 존재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것을 한번 잘 살펴보시면 그런 와중에 몰록 계합할 수가 있습니다.

 

런데 그 계합되는 것이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서 아주 강렬하게 확 올 수도 있고, 아주 미미하게,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게 쓱 지나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왔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어쨌든 자기 존재를 확인해내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마음을 맛본다는 이야기를 붙이는 겁니다.

사실은 마음을 맛보고 나면 그런 이야기 자체가 생각이 안 납니다. 마음을 맛본 사람이 '내가 마음을 맛보았다.'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동안에는 아직까지 밥을 먹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밥을 먹는데 밥맛이 정말 좋을 때는 '이 밥이 맛이 있구나!' 이런 생각도 안 일어나죠. 허겁지겁 먹기 바쁘죠. 그것과 같은 거죠. 마음을 정말 맛보면 마음의 맛에 푹 빠져 들어가서 이런 저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거지 ', 지금 내가 이렇게 마음을 맛보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깨달음의 체험법문 5

 

4

 

공부를 하다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꽉 막혀서 눈물만 날 때도 있는데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될지 말씀을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

 

 

- 어찌 보면 그건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된다'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분노죠. '나는 왜 해도 해도 안 되는가?'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자기의 힘이 부족한 것에 대해서 절망스럽기도 하고,

분노가 일어나기도 하고, '이 공부가 왜 이렇게 어려운가?' 그래서 아마 눈물이 날 수도 있겠죠.

잘못해서 그런 분노나 억울함에 끄달려 가면 병이 될 수가 있습니다. 공부는 사실 그렇게 힘든 게 아닙니다. 늘 가벼운 마음으로 해야지 너무 부담을 가지고 하면 할 일도 못합니다. 평소의 경험으로도 알 수 있지만, 똑같은 일을 하는데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면 제대로 못해요. 자기 자신이 지쳐버립니다.

'이것은 천 명, 만 명, 백만 명 중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그런 위대한 일이다' 하는 부담스런 생각을 가지지 말고, '이건 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쉬운 일이다'라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부담 없이,

그러나 진실하고 절실하게, 가볍고 부담 없지만 얼마든지 진실하고 절실하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자세로, 즐겁게 해야 됩니다. 부담을 가지고 하니까 그렇게 억울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받고, 힘이 드는 겁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이 나온다는 건 힘이 들어서 그런 겁니다. 힘들게 하시니까 오히려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못해내고 있는 겁니다. 힘들게 하지 마시고 즐겁게 반드시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벼운 마음으로 하시는 게 좋아요.

처음으로

 

5

교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하셨는지 좀 저희들이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저의 그때 상황이 박사과정에서 선불교를 공부하면서 선()을 주제로 하여 박사논문을 써야 한다는 그런 마음의 부담을 안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이라고 하는 것은 책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스승님을 그 당시에 어떤 계기로 만나서 그 회상에서 공부를 했죠.

아마 제 기억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그 분에게 갔었던 것 같아요. 가면 <원오심요>, <서장>이니, <임제록>이니 <육조단경>이니 하는 그런 어록을 내놓고 설법(說法)을 하시곤 했습니다. 그 당시 스승님은 부산대학교 앞에서 하숙집을 하고 계셨어요.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셨는데, 처음에 그 분의 회상에 나가서 그 분을 만나보니까 그냥 할아버지인데도 뭐라 할까, 불신감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여튼 그 당시에는 그 분에 대하여 이러니 저러니 하는 판단 같은 것을 내릴 입장은 아니었고, 그냥 제가 선에 대하여 목이 마른 상황이었어요. 선에 대해서 저는 아무것도 공부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절이나 선방이나 이런 곳에 가본 적도 없었고, 스님들을 만나본 적도 없었고, 아니 솔직히 대학원에서 선을 전공으로 삼기 전까지는 선에 대하여 읽은 책도 거의 없었습니다.

 

대학의 철학과에서 동서양의 철학을 대강 훑어 보았지만 모두가 잘 짜여진 이론의 체계이고, 현재 내가 목말라 하는 그 무엇에 대한 해답을 주진 않더군요. 그래서 불교가 나의 목마름에 대한 해답을 주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대학원에서는 불교를 공부했습니다. 불교의 역사 그리고 초기불교'소승불교'대승불교의 교리를 공부하며 석사과정을 보내면서, 결국 선이 내 목마름을 실제로 적셔줄 살아 있는 불교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뒤 여러 가지 선에 대한 안내서나 선어록 등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들은 단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전달하거나 해석하고 있을 뿐이었으므로, 선 그 자체를 알고 싶은 의문과 목마름은 더욱 커져 가기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스승님을 만난 것입니다. 학문이 아닌 선을 직접 가르치고 계신 분을 처음 만난 거지요. 그러니까 저로서는 그냥 선에 대해서 목이 말라있는 그런 상황이었지, 이 분이 어떤 사람이고, 그래서 보기에 어떻게 보이니까 공부를 하면 되겠다 안 되겠다, 그런 판단 자체를 아예 안 했어요. 안 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생각 자체가 안 일어나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그저 그냥 설법을 한번 들어보니까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고, 모르니까 졸리기도 하고, 따분하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나 전 달리 어디를 가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에, 어쨌든 스승에 대한, 처음엔 스승이란 그런 생각조차도 없이 그저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였는데, 그 분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저도 모르게 생겼던 것 같아요. 처음 대하는 순간에 ', 이 분에게 무언가 있구나!'라는 그런 느낌을 저도 모르게 받았는지도 몰라요. 하여튼 내가 선을 실제로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원하고 있었는데 그런 기회가 아주 쉽게 학교 바로 앞에서 왔기 때문에 좋았습니다.

 

저는 오히려 절에 나가는 것을 좀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스님이라는 존재와 예법 같은 것에 대해서 부담이 있더라고요. 그러나 이 분은 하숙집 주인 할아버지시니까 아무 부담이 없었죠. 그래서 그냥 부담 없이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질문을 해본 적도 없었고, 그 분도 저한테 말을 건네서 이러쿵저러쿵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뒷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아 듣고 있었을 뿐이에요.

어쨌든 공부를 해보자는 심정으로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렇게 시간이 한 몇 개월 지나니까 참 가기가 싫어지더라구요. 왜냐하면 그 법회라는 분위기가 익숙한 분위기도 아니었고, 그리고 법문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영 모르는 이야기였고...

그렇지만 마음속에 어떤 신뢰는 있었던 것 같아요. 여기에 분명히 무언가 있긴 있다. 뭔지 모르지만 여기서 내가 이것을 다 캐내어 보고, 그러면 내 나름대로 판단이 설 것이고, 그때가 되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또 공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여기에서 캐내 볼만큼 캐내 보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스승에 대한 신뢰감이랄까? 어쨌든 그 분을 한번도 의심해 본 적은 없습니다. 분명히 이 분이 뭔가를 알고 계시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 분이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싶다는 그 생각밖에 없었어요. 특별히 마땅하게 다른 데 갈 곳도 없고 해서 계속 거기를 다녔죠.

하나 기억나는 것은, 같이 공부했던 도반들과 가끔씩 공부가 끝난 뒤에 학교 앞의 찻집을 찾아 차를 마시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그분들이 말씀하시길,'여기에서 끝을 내어 보아라.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올 것이다'라고 격려를 하시더군요. 이 격려에도 상당히 힘을 입었던 것 같아요. 일반 사회생활에서 만난 그런 인간관계가 아니라 도반이라고 하는 그런 인간관계는 또 다른 어떤 정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참 편하고 좋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공부를 모르니까 공부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입을 다물고 항상 듣는 입장이었죠. 그냥 앉아서 무조건 듣기만 했어요. 모르니까 질문도 못 하겠더라고요. 무조건 아무 질문도 없이, 좋다 나쁘다는 그런 판단도 없이, 그냥 듣기만 했어요.

 

저는 그런 기질이 좀 있는 거 같아요. 뭐냐 하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을 완전히 내 손아귀에 쥐고서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곰처럼 묵묵히 매달리는 그런 특성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자세로 매달렸던 거죠.

그러다 몇달이 지나니까 같이 공부하러 갔던 후배 대학원생이 공부가 좀 됐다고 하면서 스승님하고 대화도 하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자존심도 상하고, 그렇지만 겉으로는 그 후배를 격려도 해주고, 칭찬도 해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나도 반드시 해낼 것이다'라는 오기랄까, 자신감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기대도 있었고... 그러면서 또 일년 정도가 흘렀던 것 같아요.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가면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겁니다. 가끔씩 졸기도 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어떤 변화가 오느냐 하면, 처음 몇 개월 동안에는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되어 몸이 뒤틀려서 삼십분도 못 앉아 있고, 밖에 나가고 싶고 그러던 것이 시간이 좀 지나니까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거예요. 말하자면 훈습이 되어서 그 분위기가 익숙해지고 좋아지고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즐겁게 법회에 참석하게 되더라고요. 거기에 앉아 있으면 편하고, 앉아 있을 동안에는 뭔가 조금씩 세속적인 번뇌 망상 같은 것들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좌우간 편안하더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법회가 없어도 시간만 나면 스승님을 찾아가는 겁니다. 심심하면 갔죠. 일주일에 몇 번씩 가서 법회도 듣고 도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하면서, 회상에서 스승님과 접촉을 자주 가졌죠. 그래도 여전히 공부는 막막하였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화두(話頭)드는 것을 한 번 시도해 보았는데, 저는 화두를 정말 하루도 못 들겠더라고요. 하루가 뭐야, 한 시간도 채 못하고 짜증이 났어요.

'이게 무슨 공부가 되겠나?' 하는 의문이 나오고... 지금 이렇게 목이 마른데 애써 화두를 든다는 것이 당장 나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그렇다고 지금의 이 목마름을 가시게 해 줄 무슨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수행(修行)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그것이 해답을 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사실 몇년간 목마름에 발버둥치며 도달한 결론은, 내가 의식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도 안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끈질긴 의식이라는 감옥 밖으로 탈출하고 싶은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의식뿐이었거든요. 결국 모든 손을 놓아 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목마름에만 맡겨 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목은 마른데 손 쓸 방법은 없고, 그러니까 오로지 설법의 회상에 그저 의존한 것입니다.

 

'하다 보면 어찌 되겠지...' 하는 기대만 가지고, 법회에 참석하는 그것만 믿고서 그냥 그렇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차차 뭔가 손에 잡힐 듯 말 듯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확실하게 잡히지 않으니까 자신감도 없고, 막막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렇더군요.

잡힐 듯 말 듯 할 때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믿었어요.

'하면 되겠지... 죽기 전에는 되겠지...' 하면서(웃음)... 그러면서 학교공부는 조금 밀쳐 놓고, 책보는 것도 당분간 접어 두고, 책이 보기 싫어지더라고요, 그냥 법회에 참석하고 그 분위기에 젖어서, 오로지 이 공부에만 매달려 있었어요. 그 기간이 몇 개월인가 꽤 된 것 같은데,

그때 제가 더욱 분명히 느낀 게 뭐냐 하면, '내가 의식적으로 공부를 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구나! 어쨌든 내 자신의 힘으로는 이것은 절대로 안 되는 거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내 힘으로 한다는 것은 포기해 버렸고, 그냥 '되겠지...'라는 희망만 가지고 법회에 열심히 참석을 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면 벌써 머리라는 놈이 팽 돌아가면서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싹 가 버리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공부를 해볼까, 저런 식으로 공부를 해볼까?'하는 식의 공부에 대한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어요. 공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면 머리라는 놈은 그 순간부터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공부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그냥 법회만 무조건 참석을 한 거예요. 스승님에게만 의존하면서 법회에만 참석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포기를 하고, 그냥 법회에 의지를 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쭉 지내고 있었는데, 대개 도반 분들은 각자 녹음기를 가지고 계셨고 저도 처음에는 녹음을 좀 했었죠. 그런데 저는 녹음해서 듣는 것들이 좀 체질에 안 맞더라고요.

왜냐하면 눈앞에 스승님이 직접 계시지 않으니까 생동감이랄까? 그런 게 부족한 것 같았어요. 하여튼 그런 걸 보면 저는 참 게으른 편이에요. 공부를 할 만한 그런 자질이 부족하다고도 볼 수 있는데, 녹음기를 사 놓고 녹음도 몇 번 안 하고 치워버리고는 그냥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겁니다.

다른 분들은 매일 녹음을 해서 듣기도 하고 그랬었는데 저는 그런 것도 저런 것도 안하고 그냥 앉아만 있었어요. 법회에 참석하는 동안에는 거기에 푹 빠져 있고 집에 돌아와서는 마음속에는 항상 그 갈망이 상처처럼, 하나의 부담으로 자리하고 있으니까 늘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거지요.

 

테이프를 듣는 것이 저에게는 머리로 이해하게 되고, 말을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말을 이해하는 건 나에게 공부가 아니었어요. 그냥 그 법회 분위기에 푹 젖어서 그 분위기 속에서 의식이 아닌 그 자리에 젖어 들어가는 것을 원했던 거지, 제가 머리로 말을 이해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거든요.

말이라는 것은 학교에 다니면서 너무도 많이 익혀왔고, 저는 그러한 말의 구속이 싫었고, 공부는 말이 아니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어요. 법회 자리에서도 스승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의 내용은 항상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몇 번 들으면 똑같은 말이기에 더 들을 것도 사실 없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말을 들으러 가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말 아닌 이것에 빠져 들어가고 거기에 내 가슴이 열리기를 원했던 것이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간절하게 가슴이 열리기만을 원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말엔 관심이 없었어요. 사실 저도 지금 여기서 설법(說法)을 하고 있지만, 말하는 내용 자체는 항상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내용인데 이해를 못하니까 계속 가슴만 답답했었죠. 말하자면 같은 송곳으로 계속 가슴을 찌르고 있었지만 가슴에 구멍이 나지 않았던 거예요.

송곳은 동일하니까 '이런 송곳으로 나를 찌르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가슴이 열리기만을 바라고 앉아 있었는데, 어느 여름 날인가 스승님께서 법문을 시작하신지 몇분 지나지 않아 말씀하시길,

 '선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것이 선이다!' 하시며,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톡톡 치시는 거예요. 그 순간 꽉 막혀 있던 게 마치 순간적으로 섬광처럼 눈앞에서 싹 스쳐지나 가는 그런 식이었어요. 싹 하고 스쳐 지나가는데,

', 그래 이거!' 하고 탁 통하더라고요. ', 결국 이 분이 여태까지 이야기한 것이 전부 이것이구나!' 마치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이 분 이야기가 다 녹음되어 있었지만 그 녹음이 여태까지 한 마디도 풀려서 들리지 않았는데, 그 때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니까 그 녹음 되어있던 것들이 싹- 하고 다 풀려서 들리는 식으로 소화가 다 되어서 내려가 버리는 거예요. 마치 엉클어져 있던 녹음테이프가 풀리면서 빠져나가듯이 말이죠. 그런데 그것은 순간적이니까, 그 당시에는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도 안 했습니다.

 

어쨌든 그 후부터는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알겠더군요. 그러고 나서도 이 분이 하시는 말씀은 알아듣겠는데 그래도 여전히 의심 하나 없이 확고부동하고, 가슴이 딱 안정이 되고, 아무 문제가 없이 되었느냐 하면, 그런 게 아니에요.

여전히 모든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불안하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러면서도 그 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나니까 점차점차 조금씩 조금씩 자꾸자꾸 시원해지더라고요.

그 후 어느 날인가 혼자 집에서 책을 보다가, 그 구절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온 세계는 전부 신의 은총이다.'라는 구절을 보는데 이번에는 온몸에서 열기 같은 게, 갑자기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면서 온몸에 전율이 스쳐 지나가는 그런 묘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 ! 그래.' 하면서 정말 온 세계가 축복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 식의 경험들이 몇 번 있었어요. 그리고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가슴 속에서 ', 이놈이구나! 내가 그토록 갈구하고 갈망했던 게 바로 이놈이구나!'라고 하는 것이 점점 더 뚜렷하게 확인되더군요.

'이놈이구나! 이런 게 있구나!' 그런데 그것이 확인될 때의 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밑바닥이 없는 텅 빈 허공 속에 발을 딛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아주 강렬하여 모든 힘을 그 속에 다 가지고 있는 무엇 같기도 하였습니다.

 

뭔가 뚜렷이 잡히는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이 다 해체되어서 아무런 갈등이나 분별이 없는 심연(深淵)같았어요. 나중에 제가 원자로(原子爐) 같다는 비유도 들곤 했는데, 좌우간 뭔가가 있어요. 거기에 의지해 있으면 잡생각이 안 일어나고 안심이 되고 안정이 되는 반면, 생각을 따라가면 항상 불안한 거예요.

불안하고, 흔들리고, 떨리고 그렇더라고요. 그러나 불덩이와 같은 거기에만 의존하면 안정이 되고, 안심이 되고, 마치 엄마 품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포근함과 안정감이 있어요. 거기에 의지하고 있으면 여러 욕망이나 감정이나 생각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움을 느꼈습니다. 하여튼 그런 게 있더라고요.

하지만 그 당시엔 그게 뭔지 뚜렷하지는 않고, 막연하게 그놈이 항상 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고, 그런 확인의 느낌 속에서 안심이 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그것이 나와 확실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그런 느낌은 아니었죠. 아직까지는 목이 마르고, 그립고, 미흡한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그놈과 하나가 되어 있으려고 하는 그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런 시간이 몇 년이 지난 것 같아요. 그놈에 대한 느낌이 어떨 땐 강하게 왔다가 어떨 땐 희미하게 되었다가, 주기적으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어떨 땐 아주 강하게 내가 정말 흔들림 없는 그 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 어떨 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면서 화두를 모아 놓은 <무문관>을 쭉 봤는데, '이것뿐!'에서 거의 다 소화가 되더라고요. 다만, '덕산탁발화(암두밀계)' 하고 '오매일여', 이 두 가지 화두는 아직 완전히 소화가 안 되었죠. 그 후 시간이 쭉 지나면서 이런 책도 보고 저런 책도 보고 하였어요.

암두밀계는 소위 말후구(末後句) 화두인데, 말후구란 것은 말이 끝난 뒤에 남아 있는 한 마디 말입니다. 한편 최초구(最初句)란 것은 아직 입을 열기 전에 있는 한 마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문수경>이란 책을 보는데,

'최초구나 말후구나 같은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더군요. 그것을 보는 순간에 말후구가 확 소화가 되더라고요. '이렇게 간단한 것을 가지고 내가 속았구나!' 그렇게 넘어갔고, 그 다음에 '오매일여'는 참 못 넘어가고 있었는데, 인도인인 마하라지의 <아이 앰 댓>이란 책을 보다가 '나의 존재'를 언급하는 어떤 구절에서 소화가 되더군요.

말후구와 오매일여가 소화되는데 한 일 년 걸린 것 같아요. 역시 우리는 화두 전통이기 때문에 화두가 소화되지 않으니까 공부에 자신이 없었는데, '오매일여'란 화두가 소화되고 나니까 흔들림이 없어졌어요.

더 이상 화두니 소위 지금까지 나온 공부에 관한 책들을 보았을 때 이제 의심이 없는 거예요. 다 소화가 되는 것이죠.

 

그러자 이제 박사논문의 가닥이 잡히더군요. 그리하여 달마에서 임제까지의 선사상과 공부를 연구하여 <중국 조사선의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논문은 뒤에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장경각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아직 공부가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또 어떤 점이 남았느냐 하면, 삼매에 빠지는 버릇이 생겨 있더군요.

삼매가 뭐냐 하면 잠시 혼자 있는 시간들, 쉬는 시간에 의자에 앉아 있으면 어떤 알 수 없는 심연 같은 게 있어요. 그걸 우리가 공()이라고 그러는 거 같은데,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푹 빠져드는 겁니다. 그렇게 깊이를 모를 허공과 같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면 아무 생각도 없고 욕망도 없고 한없이 편안한 거예요.

아무리 피곤할 때도 앉아서 십분만 그렇게 빠져들고 나면 마치 오랫동안 수면을 취한 것 같은 상쾌함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재미에 또 꽤 오랫동안 빠져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삼매에 빠진다는 것은, 빠져 들어갈 때가 있고 빠져 나올 때가 있기 때문에 그것 역시 기복(起伏)이 있는 거죠. 공부에 아직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자기가 비록 맛을 보고 그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말하자면 법의 맛에 취해 있는 것다고나 할까.

 

그 후에 불교신문에 <서장><임제록>을 강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찾아오시는 분들과 더불어 공부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깨어나도록 이끌어 준다는 것, 남과 더불어 공부를 공유한다는 이것이 저의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지도를 하다 보니 제 공부의 부족한 점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계속 보완이 되어 나갔지요. 저로 말미암아 새로 깨어나는 경험을 하시는 분들에게 저는 도리어 배우기도 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들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는 분들은 하나 둘씩 깨어나는 경험을 하시고, 저와 경험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저는 더욱 그 자리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씩은 스승님의 법회(法會)에 참석하여 설법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법회를 들으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모든 의식이 천천히 하나의 점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더니 마치 욕조 바닥의 마개를 빼면 물이 물빠지는 구멍으로 모여 들어 쏙 하고 빠져나가 버리고 모든 것이 깨끗해져 버리듯이, 한 점으로 모인 의식이 쏙 사라져 버리고 전체 허공이 한 점 그대로가 되어 버리더군요.

나타나는 모든 것이 다만 이것일 뿐, 다른 것은 그 가능성 조차도 사라져서 없어요.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나 가벼워 졌습니다. 아무런 무게도 느끼지 못하겠어요.

전혀 힘이 들지 않아요.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일들은 너무나 당연하고 너무나 평범할 뿐이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되질 않아요. 어긋나고 싶어도 어긋나지지가 않는단 말이예요. 너무 편안했습니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 언제나 그럴 뿐입니다. 지금의 제 상황이란 이래요. 예전에 삼매에 빠져들곤 할 때에는 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고, 어떤 경계가 다가오고 하면 삼매 쪽으로 피했거든요. 여기서 경계란...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대상들은 별 문제가 아니었어요.

어떤 경계가 제일 심한 거냐 하면 감정적인 문제, 사람이죠. 사람이 제일 안 떨어져 나가는 경계더라고요. 사물은 문제가 안 돼요. 사람은 감정적으로 서로 공감을 하고 교류를 하기 때문에, 상대가 공부가 된 사람이면 상관이 없어요.

공부가 된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통하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되는데, 공부가 안 된 사람을 대할 땐 그 사람하고 나하고 아무런 유대관계가 없으면 괜찮은데, 인간적으로 여러 가지 정이 있고 이렇게 되면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게는 잘 안 되더라고요.

그 관계란 부모, 형제, 친구, 제자 그런 인간관계들이죠. 공부가 된 사람들 사이에선 부담이 없는데,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나, 친구라든지 동료, 제자 등, 정을 주고, 마음을 열어 놓고 교류한 사람들을 대할 때는 평소 고정적인 관념이 있단 말이죠.

그래서 옛날의 세속적인 정으로 쉽사리 이끌려 가버리는 거예요. 그 경계가 정말 안 떨어져요.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디로 피하느냐 하면 빨리 혼자 있으려고 하고, 혼자 있으면 삼매 속으로 빠져들면서 그것을 극복하곤 했었어요.

계속해서 나는 이 자리에 있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거죠. 그 당시에 그런 상황들은 제가 공부가 부족한 탓이었죠. 그러나 지금 상황은 어떠냐 하면, 그러한 삼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언제나 다른 것이 없어요. 공부를 한다는 그런 생각도 없고, 그저 평소의 일거수일투족이 다른 것이 없고, 이것뿐이라는 생각 조차도 없어요.

 

마치 어떤 느낌이냐 하면, 흰 백지 위에 조그마한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을 연필을 쥐고 위에서 그 점 하나를 정확하게 찍으려면 처음에는 그것이 잘 안 되거든요? 수없이 옆으로 빗나가겠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정확하게 딱 찍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연필을 떼지 않는 거죠. 딱 고정시켜 버리는 거죠. 또는, 전기선을 연결할 때 플러스, 마이너스 연결선이 서로 빗나가기만 하고 잘 안 맞다가 어느 순간 정확하게 딱 맞는 때가 오죠. 그러면 계속 불이 켜지죠.

그런 식으로, 그래서 계합(契合)이라고 하는데, 이 자리는 아주 작은 점 같지만 딱 들어맞으면 흔들림 없이 고정 되어버리는 자리가 있어요. 거기에 딱 들어맞는 경험을 하게 되니까 이제는 감정이라든지 그런 모든 경계가 나를 흔들어 놓지 못해요. 피하고, 피하지 않고 그런 것도 없어요. 그런 것들이 다가와도 이제는 주위만 맴돌지 나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못하더라고요. 그러니까 한없이 편한 거죠.

달리 손 쓸 일이 없어요. 그냥 평소대로 생활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거지요. 그것뿐이지 특별하게 법이란 게 없어요. 진리가 없어요, 마음이라는 것도 없고, 본래 자리라는 것도 없어요. 그냥 생활이에요. 생활! 특별히 공부라고 할 것도 없고, 경계가 다가오니 어디에 의지한다. 이런 것도 없어요.

 

그야말로 손 가는 대로, 발 가는 대로, 생각 가는 대로 그렇게 그저 살고 있을 뿐이죠. 요즈음은 찾아오시는 사람들과 더불어 일주일에 몇 번씩 어록이나 경전을 읽으며 그곳에 있는 모든 말씀이 전부 지금 눈앞의 이것 하나를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하며 함께 공부하는 것으로 재미를 삼고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가 나타나지만, 언제나 다만 눈앞의 이것뿐이죠. 지금껏 한 말은 다만 이 한 마디일 뿐입니다.

 

- 무사인

 

 

 

 

 

깨달음의 체험 법문 7 /무사인

 

 

 

8-1

 

 

 

알고 싶어 하는 간절한 그런 마음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요?

 

 

 

- 그렇죠. 그것밖에는 요구되는 게 없습니다. 외면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서 돈, 가족, 명예와 같은 그런 것들을 어느 정도 갖추고 살아도, 그런 것에 대한 관심보다도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랄까, 내 삶의 가치는 이런 데 있는 게 아니고 그것은 내 스스로의 내면에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욕망 같은 것. 그래서 삶에 있어서 돈을 버는 것이라든지, 명예나 가정사와 같은 세속적인 가치라는 게 별로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고, 뭔가 내면적인 가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평소에 가진 사람이 이것을 할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그저 지식에 그치고 말지요. 말하자면 수박 겉핥기밖에 못하는 거죠.

 

저 같은 경우는 특히 사춘기 이후로 진실한 나는 누구인가하고 질문을 했었는데 그 시기에는 답을 못 내리고 흐지부지 넘어가서는 대학 생활을 하고,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까 생각할 수 있는 여건들이 못 되어서 이런저런 흐름들에 휩쓸렸던 것 같아요. 뭔가를 이루기 전에는 그것을 바쁘게 추구하다가 그것을 이루고 난 뒤에는 허전한 거예요.

계속 똑같은 패턴으로 뭔가를 따라가야 하는 불완전한 상태가 이어지더라고요. 결론적으로는 '진리라는 것은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지금껏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확실하게 이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니까 반신반의 한 거예요. 진짜 그런 것이 있는 것인가도 싶고... 그런 갈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아직까지 믿음이 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 우리의 세속사란 것이 이렇죠. 이번 일만 끝나면 그래도 내가 행복해지고 만족스럽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일에 뛰어들어서 온 정력을 다 바치는데 그 일이 끝나고 난 뒤에는 그 순간에는 끝낸 기쁨이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냥 그대로예요.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 말고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는구나 이러다 보면 금방 말씀하신 대로 '무엇을 해도 그냥 마찬가지네, 인생 살아가는데 뭐 특별한 게 없구나' 하면서 그렇게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포기하면서도 좀 불안한 거예요.

 

- 포기하지만 불만족스러운 것은 사실이에요. 만족스러워서 자기가 그만 둔 것은 아니니까... 불만족스럽지만 어떻게 그것을 만족스럽게 못하니까 포기하는 것이죠. 그런 인생사 모든 문제들의 궁극적 해결이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아무리 명예를 높이 추구해서 정상에 올라가도 거기서 전부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거기서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이 만족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밖에서는 찾을 수가 없구나.’ 이런 생각은 있었던 것 같아요.

 

- 내면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보통 예술, 철학, 문학 이런 쪽으로 대체적으로 관심을 가지거든요. 그것이 내면인 양 착각을 한다구요. 무슨 철학적인 탐구를 해서 대단한 이론을 습득한다든지, 문학이나 예술 같은 것을 통해서 인간 심리나 인간 삶의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들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 인생을 전부 이해한 듯이 착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글을) 쓰고 나면 그것을 안 본단 말이에요. 보기가 싫거든요.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아니지, 할 때는 탐구욕에 빠져서 하지만, 하고 나면 허전하죠. 왜냐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기가 알기 때문에 안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서 그만큼 채워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거예요. 실력이 없어서...

 

- 예술이나 철학은 그 작품성이나 이론성에 있어서 완결이란 건 없습니다. 없는데 우리는 완결을 기대하지요.

 

그렇죠! 항상 그런 갈증을...

 

- 뭔가 완성이 있는데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완성에 못 다다른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늘 노력하는 그런 식이죠.

 

언젠가는 진짜 뭔가 나올 거라는 생각으로...

 

- 그렇죠. ?언젠가는 되겠지...? 하면서... 그런데 왜 그것은 완결이 있을 수 없느냐 하면 인간이 조작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이죠. 만들어 내기 때문에 아무리 높이 쌓아도 100층을 쌓으면 101층이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식으로 끝이 없어요.

 

정말 그럴까요? 진짜?

 

- 만들어 내는 것은 그렇죠. 생각해 보세요. 이치는 간단한 거예요. 인간이 예컨대 뭔가를 30년 간 만들어 왔다면 31년을 만든 사람은 30년 만든 사람보다는 더 많이 만들어 낸다구요. 만약에 인간이 80, 100, 200년 산다면 그 만들어 내는 양이나 깊이는 당연히 다르겠죠.

결국은 목숨이 다해서 끝나는 거지 그것을 다 못 만들어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모자라서라기보다는 시간이 없는 거예요. 거기엔 완성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천년을 살아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은 끝이 없는 거죠. 자기 스스로는 나름대로 완결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후에 뒤돌아보면 완결이란 게 있을 수 없죠.

 

왜 인간은 그렇게 사는 걸까요?

 

- 그렇게 끊임없이 추구를 할 수밖에 없는 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대부분이 다...

 

- 대부분이 아니고 100% 다 그렇죠. 그러니까 그것이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저주받은 겁니다. 선악과를 먹은 그때부터 시작됐거든요.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중생의 출발점이죠.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럴 수밖에 없다...

 

- 그렇죠. 그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특징이죠. 인간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밖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존재를 보지 못해요. 바깥을 본다구요. 모든 육체적 기관이 다 바깥을 보게 되어 있거든요. 거기에 따라서 의식도 항상 바깥을 보게 되어 있어요. 감각을 통해서 습득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자꾸 뭔가를 그려낸단 말이죠. 그것이 우리 의식의 기본적인 메카니즘이죠.

 

감각을 재료로 자꾸 만들어 낸단 말씀이죠?

 

- 그렇죠. 끝없이... 의식의 메카니즘이 그렇잖아요. 인간이라는 어떤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우선 육체적인 감각에 바탕해서 생명을 유지해 가고 살아가면서 의식 자체가 그런 쪽으로 따라가는 거예요. 따라가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촉하고 하면서 그걸 바탕으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하면서 살아가니까, 전부 이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그런 차별되는 대상들을 조합하고 짜 맞춰서 그림을 만들어 내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위 세계관이라는 게 전부 그런 거잖아요. 그 속에서 뭔가 좀더 조화롭고, 좀더 바람직하고, 좀더 그럴 듯한 그림을 그려내는 게 소위 말하는 철학이고, 예술과 같은 인간의 문화적인 활동이거든요.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 인간 사회를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배운 바의 가치관에 따라서 보면 부조리하지요? 그런 부조리한 사실이 뭔지 모르지만 불만족스럽단 말이죠. 그래서 그것을 만족스런 상태로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만족스런 상태로 만들 것이냐?

예컨대 지금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듯이,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 불만족스런 대상을 계속해서 내가 조절하고, 통제하고, 변화시킴으로 해서 그것을 만족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하냐 이겁니다. 내 방 하나 정도는 아마 내 마음대로 꾸미고 바꾸는 것이 가능할 거예요. 그런데 우리 가족만 해도 그게 안 됩니다.

일단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세계를 바꾸겠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인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바깥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내 생각을 바꿔야 될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합니다. 외부적인 어떤 대상들을 내가 조절해서 만족스럽게 만드는 게 불가능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으니까, 결국에 내는 마지막 답이 뭐냐 하면 자기의 생각을 바꾸는 거예요. 말하자면 외부적인 환경이 바뀌지 않으니까 내가 그 환경에 적응을 하는 거죠. 그러나 적응을 하려고 하면 나를 포기해야 하고 거기엔 여러 가지 고통이 따라요. 여전히 불만족스러움은 남아 있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그것도 해결책은 아니에요. 우리 인생의 문제라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종교에서 내놓고 있는 해결책은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외면적으로든 내면적으로든 해결하고자 하는 그 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버려야 돼요. 그렇지만 불합리한 상황에 적응하라는 말은 아니에요. 버리되 뭔가 탈출구가 있을 거라는 그 간절한 희망만은 버리지 말라 이겁니다.

내가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지만 나는 이것을 해결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가슴앓이를 하게 되는데 그런 상황에 부닥쳐서 그 상황이 어느 정도까지 무르익어 가면 거기서 저절로 해결책이 나와요. 그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간절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해결책은 내 의식 위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결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혀 예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결책은 나와요. 갑자기 나를 짓누르고 있고 내가 짊어지고 있던 모든 짐들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는 식으로 한꺼번에 해결되는 겁니다.

 

그런 해결책을 바라는 간절함 하나만으로 가능한 겁니까?

 

- 그것밖에 없어요. 방법은. 그럼 그냥 일상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그 해결책이 뭔가??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건가요?

 

- 간절함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여러 모로 찾아다니게 되죠. 간절함은 있지만 가만히 있으면 답답하니까... 이런 선원에도 오게 되고, 책도 보게 되고, 어디 훌륭한 스승이 있다고 하면 찾아가 묻기도 하고...

 

하지만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시지는 않잖아요?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 사실은 줄 수가 없어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거거든요. 남이 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 해결책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자기 존재에 대한 경험인데, 자기 존재를 자기가 가지고 있지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결국 외부적으로 이리저리 방황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를 몰라서 그런 거예요. 자기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누가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가 확인하는 방법밖에는 없는 거죠. 이제까지는 밖으로만 쫓아다녔으니까 이제는 내면 쪽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유도해 줄 수 있는 것이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역할이죠.

 

불경 말고도 예컨대 성경 같은 경우에도, 모든 경전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 , 똑같죠. 금방 말씀드린 이런 내용이에요. 결론적으로 전부 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쓰여 있는 말만 본다면, 불교에서 흔히 부처님 말씀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어리석은 중생들이 달은 못 보고 손가락만 본다고 말하듯이, 대체로 거기 쓰여 있는 말만 보고, 손가락만 보고는 그 말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못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런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책만 보고 기독교가 이런 거구나, 이슬람이 이런 거구나 하면 전부 손가락만 보고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달을 보고 싶은데, 그게 참....

 

- 달을 보고 싶으시면,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에요.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자기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오랜 세월, 내 인생을 투자한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조급하게 하지 마시고 천천히 하면서도 간절함을 가지고 하시되, 믿음을 가져야 돼요.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라고 안 될 이유가 뭐가 있나? 그런 믿음. 마치 높은 산을 올라가는 자세로 앞만 보고 한 발 한 발 올라가야 되는 겁니다. 옆에 누가 얼마만큼 올라왔는지 볼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면 힘이 빠져 버려요. 앞만 보고 계속 가다보면 길만 보이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앞이 확 트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 순간이 와요. 그때까지는 그렇게 가야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남이 읽는 글 한 줄만 듣고도 깨쳤다던데요...

 

- 그 사람은 이미 그런 식으로 오랜 세월을 온 겁니다.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랫동안 기본 자세를 갖춘, 말하자면 준비된 사람은 한번만 찔러줘도 돼죠. 줄탁동시(?琢同時)란 말도 있잖아요? 달걀이란 게 갑자기 부화하지 않잖아요. 시간이 지나고 적당한 조건이 되어야 부화하는 거지...

 

저는 처음에 좀 오해를 한 거예요. 되는 사람은 금방 되고 안 되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아닌가...

 

- (웃음)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예컨대 달걀을 냉장고에 두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부화가 되지 않잖아요? 안 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는 겁니다.

 

 
 
 

희망은 깨어 있네/이해인




나는 늘 작아서
힘이 없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운데
그래도 괜찮다고
당신은 내게 말하는 군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망이라고
내게 다시 말 해주는
나의 작은 희망인 당신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숨을 쉽니다
힘든 일 있어도
노래를 부릅니다
자면서도
깨어 있습니다

 

 

 

 

- 낭만이 흐르는 피아노 연주곡 모음 -
 01. Ikuro Fujiwara  -  konya wa uml no youni 02. Steve Raiman  -   Waterfall ( Raining Ver )
03. Ernesto Cortazar  -  Tears 
04. Yiruma  -  Kiss the rain
05. Andre Gagnon  -  Un Piano Sur La Mer  06. Chris Spheeris  -  Eros ( Raining Ver )
 07. Georges Delerue  -  Farewell My love08. 김윤 -  Remember
09. Praha  -  Past Love 10. Bandri  -  Gold Wings

     

     

     

    깨달음의 체험법문 8 / 무사인

     

    8 -2

     

    책이나 뭐 그런 자극을 받을 만한 것을 추천해 주실 수 있으세요?

     

     

    - 볼만한 책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무 책이나 보면 안 됩니다. 좋은 책은 사실 몇 권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보통 책이란 것은 사람의 사념에서 나오잖아요. 사유에 의해서... 그것은 결국 사유로 이끌어 준다고요.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책 쓴 사람에게 익숙해지거든요? 사념으로 쓴 책은 사념만 연습시켜 주는 거니까 결국 이 자리에 오지 못하고 계속 엉뚱한 길만 가는 겁니다.

    사념에서 쓴 책 말고 이 자리에서 쓴 책을 봐야 하는데, 이 자리를 경험한 사람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를 경험한 사람이 사념을 끼워 넣지 않고 제대로 이야기한 게 많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은 이 책, 저 책 많이 보지만 그것은 다 사념 연습만 할 뿐이지 실재 자리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그럼 평소에 여기에 관련된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것이 이 공부를 하는 데 도움이 됩니까?

     

    - 책을 읽고서 지식으로 이해한 것이 (공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 상관이 없어요. 그러면 책을 읽되 지식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뭔가 있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읽으면 도움이 되죠.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는 그것이 도움이 되고 지식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제일 적절한 예는 꿈 깨는 것을 생각해 보시면 돼요.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어서 그만 깨고 싶다. 세상 살아가는 게 지금 악몽이다. 불만족스런 꿈이니까 깨고 싶다. 그래서 꿈속에서 꿈을 깨려고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여 다리를 꼬집기도 하고, 고함을 질러 보기도 하면 꿈에서 깨느냐? 못 깨죠. 그것 자체가 꿈이거든요. 어떤 방법을 써도 깨어나지 않는데, 그 악몽 속에서 답답함이 극에 달하면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게 된다구요. 눈이 탁 떠지는 거죠.

     

    그런데 시작은 그러한 해결책이 반드시 있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그런 간절함도 생기고 그럴 것 같아요. '그런 게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가지면 마음 자체가 단단해지지 않잖아요? 진짜 그게 확실하게 있다는 믿음이 있으면 찾으려고 할 텐데....

     

    - (웃음) 100% 확실한 믿음은 오직 스스로 확인해봐야 생기는 겁니다. 이미 수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여러 경전에도 그런 말이 있지만 그 어떤 사람, 어떤 경전도 나를 100% 믿게는 못 하더라, 나는 100% 믿어야 이 공부를 하겠다, 누가 진짜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줘야 나는 공부하겠다... 이렇게 한다면 가능성은 없는 거죠. 왜냐하면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럼 뭐 인연이 닿아야지...

     

    - 맞아요. 스스로가 마음이 동해서...

     

    모든 만물에 마음이니, 불성이니, 신이니 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잖아요. 동물에게도 있다고 그러고... 모든 만물에 그것이 스며있는 건가요?

     

    - 스며있는데, 그게 개개의 사물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확인해 놓고 보면 그것 아닌 게 없는데 확인하기 전에는 과학적인 탐구처럼 관찰, 실험 이런 식으로 궁구하고 궁리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밖을 봐서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나를, 내 안을 봐서...

     

    - 내 안을 본다는 것도 사실은 정확하게 맞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본다는 것도 벌써 나를 대상화시켜 버렸거든요. 대상을 봐서는 안 되는 겁니다. 요컨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앞의 찻잔을 들어 보이며) ?이 컵의 본성이 뭘까? 여기에 도가 있다고 그러는데...? 이런 식으로 탐구를 하는데, 이 컵의 본성이 뭘까? 여기에 도가 있다고 그러는데...? 하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이 일,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이 일이 컵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냥 이 일이 어디서 일어나고 이 일이 뭔가를 알면 그것으로 되는 거예요. 그거거든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은 대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이란 것은 스스로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서 자기의 존재가 확인될 뿐이죠 따지고 보면 내가 존재하니까 이 컵도 있는 거거든요.

     

    제가 살아오면서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다 변하는데 가장 변하지 않는 게 뭔가 하고 생각해 보니까, 이 생생한 것, 이 의식, 살아있다는... 왜 나이가 들어서도 젊었을 때 감정 못지않게 사랑을 느끼고 이런 것들이 살아있다고 하잖아요? 그게 십분 이해가 되는 게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이것만 변하지 않는 건가? 그런 생각도 하게 되더라구요.

     

    - ?그래 살아있다는 이것만 안 변하고 다른 것은 다 변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개념적으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있음'이 진짜로 뭐냐? 개념적으로 파악한 것이 아닌, 살아있다는 게 도대체 뭐냐 이것을 직접적으로 확인을 해봐야죠.

     

    그것을 확인해야지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겠네요?

     

    - 그렇죠. 일거에 해결이 되죠. 문제 자체가 본래 없었던 겁니다.

     

    그러면 보통 지금 내가 살면서 힘들어하는 부분이 어떤데 거기에 대한 해결방법을 알려 달라 이런 이야기를 해봐도 소용이 없겠네요?

     

    - 그것은 전부 증상에 따른 치료법이지, 근본적인 치료법은 아닙니다. 내 스스로가 뭔가 계속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면서 상대방에게 이 물결을 좀 잠재울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바깥에서 불어오는 외부적인 바람이야 차단해 줄 수 있겠죠. 하지만 자기 스스로가 일으키는 물결은 스스로가... 그런데 스스로가 잠재워야 한다고 하는 것을 잘못하면 그야말로 좌선처럼 고요하게 가만히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수가 있는데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의식이란 놈은 절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의식은 물과 같거든요. 물은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반드시 거기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유동성이 물의 본성이죠.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외부의 자극 없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흘러가는 물처럼 그렇게 여러 가지 인연을 만나면서 살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반드시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고요히 앉아서 마음이 잠잠하게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은 증상에 따른 치료법이에요. 마치 물을 그릇 안에 담아서 뚜껑을 닫아 놓은 것과 같아요.

    물이란 것은 본래 흐르는 게 본성인데...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방안에 처박아 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만 있으라면 되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 수는 없거든요. 물하고는 달리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망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일어나는 그 자체가 본성이니까 일어나는 것을 붙잡아서 못 일어나게 하겠다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체험하신 분들도 (망상이) 일어나긴 일어날 거 아니에요.

     

    - 다 일어나죠. 사람인데...

     

    그럼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특히나 즐거움보다 고통이나 난처한 상황이나 이럴 때...

     

    - 그런데 그 차이는 말로써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체험한 사람이나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나 다) 같이 (망상이) 일어나지만 안 일어난 것과 똑같아요. 일어나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과 똑같다구요.

     

    괴롭지 않다는 그런 말인가요? 그런 것을 못 느낀다는 말인가요?

     

    - 일어남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별로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죠. 물이 마구 흔들리지만 그것이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단 말이죠.

     

    느낌은 항상 고요한 상태인가 보죠?

     

    - 그렇죠. 항상...

     

    - 항상 안정이 되어 있고 고요하죠. 마구 말을 하고 있어도 항상 고요하죠.

     

    죽음도 그럴까요? 죽음 앞에서도? 아니면 타인의 죽음이나...

     

    - 그렇죠. 늘 담담하죠. 그 효과는 말로써 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죠. 그것은 맛보기 전에는 맛본 이후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맛을 보면 좋으니까 파고들려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좋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셔야지... (웃음)... 지금이 힘드니까...

     

    - 이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가지고 있던 그런 힘듦은 가벼워지죠. 그런 모든 힘듦이 가벼워져요.

     

    다른 것보다도 사람 앞에서 제일 약해지는 것 같아요. 타인을 항상 의식하면서 타인 중심으로 살아와서 그런지...

     

    - 맞아요. 사물보다도 늘 사람이 나를 괴롭게 하죠. 사람에게 우리가 많이 흔들리죠. 사람으로 인한 흔들림이란 것은 워낙 뿌리가 깊기 때문에 이것을 체험한다고 해서 금방 그렇게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서서히 없어지지만 어쨌든 그것도 가벼워집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훨씬 자유롭게 됩니다. 부담스럽지 않게 돼요.

     

    자유가 그립죠.

     

    - 자유의 진정한 맛을 모르니까 우리는 좀더 멋지게 매달리려고 하지... (웃음)

     

    맞아요. 그것(창작)도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방편이 되겠다 싶어서 했는데, 하는 동안은 잊어버릴 수가 있는데 끝내고 나오면 똑같은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 고민이 있으면 일에 몰두하라고 하잖아요. 일에 몰두할 동안에는 잊어버리니까... 그런 것은 잊어버리는 거지 해결된 것은 아니에요. 그게 바로 대증요법이거든요. 어린아이들 주사 맞을 때 주사가 아프니까 엉덩이를 때리잖아요? 다른 데 신경을 쓰게 하면 주사의 아픔을 모르니까... 대개가 다 그런 식이라구요. 그런 것은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죠.

     

    (한숨을 쉬며) 그러면 하나밖에 없네요. 답답한 마음...

     

    - 그래서 자기 스스로가 그 갑갑한 마음, 간절한 마음을 안고 설법도 듣고, 평소에도 나름대로 고민도 하고 이런 상황에서 지나다 보면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변해갑니다. 마치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하듯이 서서히 변해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탁 하고... 병아리가 되는 것은 일순간인데 그전에 오랫동안 서서히 변해 온 겁니다.

     

    선생님께서 아까 설법하시다가 어떤 비유를 들어 한 5분 '그겁니다' '그겁니다' 하시면서 말씀을 자꾸 반복하셨는데 그 순간 뭔가 찌릿 하는 게 있더라구요. 몸으로 느끼는 어떤 그런 것도, 내가 기존에 생각해 왔던 것과 다르니까 몸이 그런 것도 느끼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그런 것도 일종의 좋은 신호인가...

     

    - 하여튼 공부란 것은 밖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남들이 볼 때는 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몰라도 자기는 항상 그게 고민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생활 원만하게 하면서, 겉으로는 별로 안 드러내면서 자기는 이것이 고민거리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안 그러면 공부한다는 핑계로 사회생활 제대로 못합니다.

     

    신경을 써야 하는데, 사회생활을 하다보니까 잊어버려요. 그런 의문을 좀 잡고 있으려고 해도 순식간에 휩쓸려서 잊어버리게 돼요.

     

    - 잡고 있다기보다도 스스로 고민이 되면 잊혀지지가 않죠. 그런 상황이 되어야 해요. 의식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은 공부라고 하기엔...

     

    선생님께서는 항상 똑같은 이야기, 한 가지만 말씀을 하시는 거잖아요. 그런 것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나 보죠?

     

    - 그렇죠. 이야기를 들어서 말귀를 알아듣는 게 아니죠. 일종의 눈치를 주는 거죠. 그러면 자기 스스로가 조금씩 변화가 되는 거죠. 말귀를 알아듣는 거야 몇 번 들으면 알 수 있죠. 사람이 변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잘 안 변해요. 말은 금방 이해하는데 그 사람 자신은 말 따라 그렇게 변하지 않거든요.

     

    그런 점은 있더라구요. 처음에 모를 때는 막 끄달려 살다가, 꿈같은 거다, 이 현실이, 내가 보기엔 생생한 것 같은데, 꿈같은 거다, 실재가 아니다 하니까 어떻게 보면 생활하는 게 편해지는 그런 것도 있어요. 이 모든 게 사람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란 말을 듣고 난 후하고 그 전하고...

     

    - 그렇게 해서 편해지는 그것 자체가 사실은 의식의 장난인데...

     

    그렇죠. 그것도 의식으로 의식을 제압하는 건데... 그래도 편해지더라구요.

     

    - 그렇죠. 그렇게만 하더라도 조금은 편해지죠. 하지만 그것 같고는 안 되는 거죠. 대개 마음공부라고 하면 그 정도 수준에서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고 말거든요. 그래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뭔가 좋은 점이 있을 거라고 바라서 이 공부를 해도 안 되겠군요?

     

    - 뭘 기대를 해서도 안 되고, 자기가 그냥 여기에 아무 조건 없이 목말라 해야 되는 겁니다.

     

    처음엔 내가 나를 괴롭히고, 사람 만나면 힘들고, 이런 것을 좀 해소하는 방법이 뭔가를 묻고 싶었는데 부끄러워서 못 물어 보겠네요. 그게 아닐 거라는 것도 알았는데...

     

    - 대증요법은 아닙니다. 그런 대증요법이야 일반적인 상담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대답해 주는 거죠.

     

    오로지 그 진리가 뭔가 그것 하나를 갖고...

     

    - 그냥 아무런 조건 없이 목말라 해야되지 어떤 조건을 달고 하면 반드시 그쪽으로, 잘못된 방향 쪽으로 가게 됩니다.

     

    진리가 뭔가 이것 하나... 진짜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까?

     

    - (웃음) 이것 하나만 알면 다 해결됩니다. 내 존재는 단일한 것이지 복합적인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너무나 복잡한 것 속에서 살아서 그런지 단순한 것은 의심스럽거든요?

     

    - (웃음) 그게 우리의 병이죠. 도덕경에도 보면 공부는 손지우손(損之又損), 자꾸자꾸 덜어내서 텅 비워버리는 거다, 아무것도 없는 거다, 가장 단순하게 되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본래 단순한 하나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뿐입니다. 그러니까 공부는 관심을 가지고 자꾸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깊이 빠져 들 수도 있고,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할 수는 없고, 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게 되면 결국엔 그 의도 쪽으로 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는 공부는 안 되는 거고,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이것이 내 인생의 숙제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것밖에는 달리 없어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