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15. 07:4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창조적 인생을 사는법/광덕 스님 추모 법어
산승은 광덕 스님과 한 40여 년 이상의 인연을 가지면서 우리 스님(동산 스님)의 가장 총애하던 제자로서 광덕 스님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광덕 스님과는 사형사제의 관계인데, 그 동안 많은 스님들로부터 광덕 큰스님의 원력과 수행의 이력은 많이들 들으셨을 줄로 압니다 . 그렇기 때문에 오늘 산승은 굳이 스님의 개인적인 얘기보다는 순수하게 그냥 설법에 임할까 합니다. 우리는 21세기를 맞이한다고 하고 있는데 20세기 문명사회는 탐욕으로 일관된 세기였습니다. 물욕과 출세욕 등으로 얼룩진 세기였습니다. 그러면 21세기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요즘 언론매체에서 유명인사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21세기는 정보화 사회라고 합니다. 정보화 사회가 되면 정보에 어두운 사람은 살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경쟁사회에 뛰어들어 생명을 걸고 정보화 시대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들 하는데 이게 다 인간들의 목을 조르는 얘깁니다.
21세기도 그렇게 살아가야겠는가 하는 것이죠. 21세기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정신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21세기도 망가질 것입니다. 21세기는 정신세계와 물질세계의 균형을 맞추는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으로 말하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지금 유럽이나 미주지역의 심리학자들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연구를 굉장히들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해서 정신세계는 어떻게 개척하며 물질의 세계는 어떻게 균형을 잡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연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불교인들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앵무새처럼 외우고만 있지 그것이 무엇을의미하는지는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불교계가 더 모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시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부처님의 출가는 이런 데서 이루어졌습니다. 왜 계급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왜 인간은 생로병사에 시달려야 하는가, 생로병사가 없는 자유로운 세계는 없는가, 소위 해탈의 세계는 없는가, 왜 인간들은 평화롭게 살기를 희구하면서도 전쟁을 하는 것일까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출가를 결행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사시던 시대를 전국시대라 합니다.
부처님은 어린 시절부터 전쟁을 보고 자라면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생로병사에 대한 자유, 계급에 대한 평등, 전쟁에 대한 평화를 갈망하셨지요. 인간에게는 고(苦)만 있는 것이 아니고 행복도 존재하는데 왜 행복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일까, 왜 지속되지 못하는 것일까? 하고 회의를 가지면서 부처님은 29세에 출가를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출가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죠. 부처님의 출가 동기를 보면 대단히 복잡해요. 부처님뿐만 아니고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도 29세의 청년기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의 고민은 단순합니다. 경제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요. 지금 사회를 보세요. 얼마나 험악한가. 그것이 모두 경제적 욕망 하나를 성취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도 법당에 나와 있을 땐 평화로워 보여도 가정으로 돌아갈 땐 와글와글 들끓고 있는 거예요. 옛말에 “사양하면 남아 돌아갈 것이요, 욕심을 챙기면 부족할 것이다” 하는 말이 있어요.
옛날엔 옷 한 벌을 온 가족이 입어도 남아 돌아갔어요. 지금은 한 사람이 옷 100벌을 입어도 부족해요.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데 과연 이대로 좋은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절에 가서 열 가지 소원을 빌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요? 불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수행하지 않고 되는 일이 뭐가 있어요? 천당과 지옥이 이 마음에서 유출된다는 것을 확인하신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여러분, 바깥 경계를 향해 찾아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자기의 심성 가운데로 돌아가서 탐구해야 합니다. 제일 먼저 자기를 보세요. 그런 안목으로 자기의 가정과 조국을 보고, 국제사회를
보세요. 이러한 민족이 세계화가 가능한 겁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세계화가 불가능합니다. 세계화를 하자면 먼저 자기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불교적인 인간관이란 어떤 것이냐. 불교적인 관심은 인간적인 자기탐구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어떠하냐, 부처님 앞에 예배 공양하면 그분이 이러한 복을 줄
것이다 하는 착각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으되 부처님이 아닙니다. 불성을 지니고 있는중생입니다.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있으나 부처님은 아니에요. 불성의 세계를 밖으로 노출시켜서 행동으로 옮긴 분을 ‘부처님’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 세 끼 먹고 직장생활 정상적으로 하고 사회적인 일상생활을 이치에 맞게 하고 그런 것이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읽으면서 부처님과 똑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부처님의 인격은 구체적으로 부처님 말씀속에 있는데 부처님말씀을 읽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불교를 믿을수 있나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불교를 믿으려면 부처님 말씀을 아침저녁으로 탐독하고 부처님의 인격을 닮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서, 경제적으로 가난하지 말아야 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면서 누구에겐가 신세를 지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노력하고 힘써서 열심히 사는 사람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적인 관심은 불성적인 자기 재인식에 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재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못된 성격을 하나하나 교정해 가면서 부처님과 닮아가야 됩니다. 이것은 생명력을 구현하는 겁니다. 무한능력을 개발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한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무한능력을 개발하는 겁니다. 이 말은 광덕 스님께서 대단히 좋아하시던 말입니다. “생명을 구현하는 것이다.
새롭게 인생을 창조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분이 쓰신 글 치고 이런 말 안 나오는 글이 없습니다. 내가 40여 년간 그분과 함께 살았는데 불교를 정도(正道)로 이끌고자 무척 애쓰셨으되 일반 신도는 거기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한국불교신도들은 우연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고 있노라면 언젠가 인생이 확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정신세계를 구현하지 않고 그런 일은 없는 겁니다. 그러한 점에서 불교는 어떤 주의와 사상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이데올로기에 따르지 않는다, 그런 것입니다. 불교는 어떤 주의·사상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불교는 중도주의예요. 중도란 무엇이냐 하면 딱 들어맞았다는 뜻이에요. 무엇에 딱 들어 맞았냐 하면 도에 딱 들어맞았다는 말입니다. 중도란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불교는 대단히 비판주의적인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무(無)자가 대단히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저 앞산 금광에서 금덩어리를 캐기 위해 흙 한 삽, 한 삽 수없이 떠서 버립니다. 금덩어리가 아니라 이거지요. 금덩이가 아닌 흙을 계속 파들어가야 결국은 진짜 금덩이를 캐는 겁니다. 그럴 때 ‘적중하다. 딱 들어맞았다’는 것이고 목적을 달성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예배 공양하는 것도 염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심이 가지고 있는 그것은 부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 여러분들이 108참회할 때 진실되게 절하는 것은 세 번도 될까 말까 할 겁니다. 참선도 마찬가지예요. 참선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깨치는 것은 아니에요. 계속되는 것은 다 뭐냐, 이것도 아닌 것이요, 저것도 아닌 것이에요. 아니다 하는 것으로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불교는 비판주의적인 종교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중도에 딱 들어맞는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 하는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의 서암 선사가 무문관 제12칙에서 보면 ‘주인공아’ 이런 말을 합니다. 자기 자신을 부르는 거예요. ‘예’ 자기 자신이 대답합니다. ‘어떤 것에도 속지 말지니라.’ 이게 무엇인가? 절대 주체도를 향해서 자기 자신을 불러일으키는 생활이에요.
불교적인 수행이란 진실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선지식은 법을 물었으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고 답변하는 것이지 ‘불교란 이런 것이다’하고 답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조주 스님을 보세요.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은 다 불성이 있느니라’ 그러니까 어떤 학인이 묻기를 그러면 ‘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무(無)다’, 거기에서 ‘없다’라는 화두가 나왔다고 하지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이것은 그 학인이 집착하고 있는유(有)를 타파하는 것이에요. 학인이 묻기를 ‘저 뜰 앞의 잣나무에 불성이 있습니까? ‘유(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뜰 앞의 잣나무가 불성이 있으면 성불할텐데 언제 합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 성불하느니라’ 하니까 그 학인이 허공에 생각을 붙여 말하되, ‘스님이시여, 허공이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이 학인은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에요.조주 스님 왈, ‘뜰 앞의 잣나무가 성불하는 날 허공이 떨어지느니라.’
이것은 답변이 아니에요.
그 학인이 유와 무에 치우치지 않도록 돕는 데 선지식의 뜻이 있는 것이지,
이런 것이니라 저런 것이니라, 하는 게 아닙니다. 조주 스님은 ‘진흙으로 만든 부처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나무로 만든 부처는 불을
건너지 못하고 금으로 만든 부처는 용광로를 건너지 못한다. 진흙불, 목불, 금불은 부처가 아니다. 참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심성 가운데 있는 겁니다. 육조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바탕에 그릇함이 없는 걸 계율이라
하느니라. 우리 마음 속에 어리석음을 없애는 걸 지혜라 하느니라.그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걸 정이라 하고 이것이 더함도 덜함도 없는 것이 금강심이다.’ 벽암록에 ‘줄탁동시’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미 닭이 알을 품을 때 21일이 지나면 알 속에서 병아리가 밖으로 나오려고 안달을 합니다 이렇게 안달을 할 때 어미닭이 껍질을 탁 쪼아주면 병아리가 쉽게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알고 싶어 안달을 할 때 법사의 한 마디가 생명력이 있는 것이지 아무 생각도 없는 죽은 송장 같은 사람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한 마디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알고 싶은가요? 무엇에 안달을 하고 있나요?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은 나의 인생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살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부처님 말씀이 필요한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부처님의 사상을 통해서 여러분 각자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 것은 바보입니다. 불교를 통해서 나의 인생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살 것인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충분히 여러분에게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부처님의 사상을 통해서 우리 각자가 내 인생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살아야겠는가를 제기하지 못하면 불교 믿으나 마나에요. 그리고 세상의 일을 너무 하찮게 보는 데에 종교인의 허물이 있어요. 나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불교인 중에서 위대한 정치가, 사상가, 경제인, 성자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광덕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무진장스님/전 조계종 포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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