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연기(眞如緣起) [1] / 청화스님
우리 중생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모두가 한 세상 나그네 길입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 모두가 바로 고생의 바다요 불구덩이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법회장 분위기는 우리 불자님들의 지극한 자비심으로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산승도 마치 고향 같은 아늑한 환희심과 행복에 넘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안심법문》
우리가 대체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부처님 법문은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우리 중생이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편안하고, 사회도 편안하고 모두를 다 편안하게 하는 그러한 안심법문입니다.
고생의 바다, 이 불구덩이를 어떻게 우리가 편안하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부처님 법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안심하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안심을 하려면 어떻게 어느 길로 가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 목적지는 어디인가?
또 목적지까지 가는 길의 순로는 어떠한 것이고, 어떻게 길을 걸어가야 빠를 것인가? 그런 것을 몰라서는 마음이 안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은 우리 중생의 안심을 위해서, 중생의 근본이 무엇인가,
또 우리가 떠나온 고향은 어딘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고향은 어디인가, 이런 것을 아주 극명하게 밝히신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의 대요를 살펴보면, 먼저 상식적인 차원, 세간의 인간들이 보통 느끼는 그런 차원으로는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모든 현상계가 우리 중생이 보는 그대로 존대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불교 술어로 말하면 이것을 유교(有敎)라.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을 그대로 긍정하는 이러한 유교입니다. 그러나 중생이 보는 차원, 이런 유교만 가지고서는 우리가 제대로 근본 뿌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현대 유물주의 사회, 이 물질 지상주의 사회, 이런 사회는 모두가 이른바 '있다, 없다' 하는 그런 것에 근거된 사회가 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도 마찬가지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물질은 물질 그대로 존재한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런 차원입니다.
그러한 현상 세계만 전부고 우리 중생의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만 생각할 때는 있는 것만 가지고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하고, 또 눈에 보이는 것이 화려하면 좋은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 빈약하면 나쁜 것이고, 이렇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차원에서는 방금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은 우리 중생들이 보는 그대로 존재한다. 이런 유교(有敎) 차원에서는 인생의 참다운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욕계(欲界)도 고생뿐이고, 또 더 올라가서 색계(色界)도 고생뿐이고, 무색계(無色界)도 고생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중생들이 눈에 보이는 세계, 눈에 보이는 그러한 존재, 이런 것이 전부다. 그런 견해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우리 중생들이 있는 것에 집착하는 한 고생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모든 존재의 근본 뿌리를 훤히 아십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이것은 연기법으로 해서 인연법으로 해서 잠시간 나온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대체로 아시겠습니다만 아함경(阿含經)같은 부처님 근본 불교의 초기 법문에서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부처를 본다고 설하셨습니다.
불교에서 법(法)이라 할 때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우주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 하는 그런 법과 만법이라 하는 제법의 법, 그런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고 생각할 때는'먼저 연기를 보아라,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우주의 근본 도리를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 즉 석가모니, 세존인 나를 본다. 이런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연기를 모르면 우주의 도리, 법도 모르는 것이고 또 부처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기는 어떠한 것인가?
불교를 믿는 여러분들은 인연법, 연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그러나 가만히 보면 연기를 낮은 차원의 연기는 제법 아시는 분들이 많지만 본질적인 연기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기회에 꼭 그런 본질적인 연기법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또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런 식의 연기법은 보통 차원의 연기법이 아닙니까.
이런 식의 연기법으로 우리 인생고를 인생의 본질적인 병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연기법의 도리 가운데도 이런 연기법은 소승적인 연기법인 것이고, 부처님께서 꼭 말씀하시고자 하는 대승적인 본래 연기법의 뜻은 아닙니다.
현대 과학적으로 말하면 소승적인 연기법은 마치 상대성 원리 같은 그런 범주를 미처 못 벗어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근본 도리에서 이뤄지는 연기법은 이것은 진여연기(眞如緣起)라. 또는 법계연기(法界緣起)라. 우리 중생의 때 묻은 마음에서는 미처 모른다 하더라도 삼천 대천 세계, 우주에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우주는 무한한 생명자체다.》
우리는 먼저 부처님 법에 대해서 신(信:믿음)을 갖지 않으면 부처님 법을 닦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경험도 못하고 우리의 때 묻은 눈으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주의 청정법계에는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주의 참다운 생명 자체가 충만해 있습니다.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는 것이 아니며, 우리 개체적인 인간도 머리카락 끝부터 발끝까지 진여불성이 충만해 있습니다. 여기 계시는 우리 불자님들도 다 그렇습니다. 모두가 진여불성이라 하는 순수 생명, 현대적인 말로 하면 순수 에너지 이것이 충만해 있습니다.
진여불성이라 하는 그 자리는 다른 말로 바꿔서 말하면 법성(法性)이고, 불성(佛性), 참 나(眞我)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이고, 열반(涅槃)이고, 또 도(道)고, 진리(眞理)입니다.
표현은 다르나 모두가 진리의 별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진여불성은 경(經)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불생불멸, 본래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불구부정, 더러운 것도 없고 청정할 것도 없는, 부증불감,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자리입니다.
하여튼 어떠한 차원으로 보나, 즉 능력으로 보나 지혜로 보나 자비심으로 보나, 또는 행복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자리, 충만한 생명 자체가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산이고 냇이고 인간이고 또는 삼천 대천 세계의 별이고 달이고 해이며 이들 모두가 다 우주에 본래로 충만한 진여불성으로부터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그래야 대승적인 연기법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법계연기(法界緣起)라. 또는 진여연기(眞如緣起)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은 무엇인가?》
모두가 다 그런 연기법에서 왔거니, 모두가 다 그런 진여불성에서 왔거니,
그러면 진여불성은 무엇일까? 물질일까?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물질이라 하는 것은 공간성과 시간성이 있어야 물질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떠한 질량이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동시에 공간성도 시간성도 있어야 질량이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물질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이 물질이라고 한다면 차별적인 공간성, 또는 주기적인 변화 그런 시간성, 이런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고 있는 물질이 인연 따라서 이것 되고 저것 되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근본 생명인 진여불성은 우리 마음의 본체이기 때문에 바로 불심입니다.
우주 만유의 본체이기 때문에 법성(法性)입니다. 또 우주 만유의 참다운 모습이기 때문에 실상(實相)이라 하며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그러한 도리이기 때문에 중도(中道)입니다.
법성, 불심, 실상, 중도 모두가 다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는 물질이 아닙니다. 진여불성이 물질이 아니라는 말은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또는 언제나 존재하고 이래야 물질이 아닌 참다운 생명 자리가 되겠지요. 바로 이 자리는 우리 마음자리입니다.
마음이 물질이 아닌데 마음이 어디가 있고 어디가 없고 하겠습니까. 우리가 남을 미워한다거나 남을 좋아한다고 할 때 미워하면 그 마음이 어디가 있습니까. 남을 미워하는 그 마음도 자취가 없습니다. 우리가 감투를 좋아하고, 재물을 좋아하고, 이런 것도 우리가 잘 보지 못 하니까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이지 좋아하는 마음 이것은 어디에도 흔적이 없습니다.
이조(二祖) 혜가(慧可) 스님이 달마 스님한테 가서 '제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제 마음을 안심 시켜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드렸습니다.
여러 가지 사연이 많이 있습니다만 달마 스님께서 '아! 그러면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 봐라.' 혜가 스님이 아무리 돌아봐도 자기 마음이 존재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마음이 물질이 아닌데, 무처소(無處所)라. 어느 처소가 고유하게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마음이라는 것은 명상(名相)을 떠난 것입니다. 이름도 떠나있고 모양도 떠나 있습니다. 진여불성도 그와 같이 물질이 아니고, 우리 마음도 물질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할 때는 결국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내 마음이나 네 마음이나 다 하나의 마음입니다. 또 별 마음이나 태양 마음이나 나무 마음이나 흙 마음이나 물 마음이나 물질이 아닌 순수 생명 자리는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이 자리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진여불성이라. 또는 불심이라 법성이라 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연법 따라서 모든 존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대승적(大乘的)인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연기법 이것이 왜 우주의 법인 동시에 우리 불교를 통괄하는 그런 진리인가? 이 자리를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불행이고 행복이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자기 문제가 아닙니까? 자기 문제는 바로 자기 마음의 문제입니다. 자기 마음 떠나서 불행이 있고, 마음 떠나서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도 우주에 충만해 있는, 그러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그 자리로 부터서 인연 따라서 자기 마음이 된 것입니다.
자기 몸은 무엇인가?
자기 몸도 역시 인연법 따라서 잠시간 진여불성으로 부터서 모양을 나투었습니다.
진여불성이 원래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공간성도 시간성도 없고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사람 몸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 몸도 사실은 물질이 될 수가 없습니다. 물속에 비친 그런 달그림자같이 또는 아지랑이같이 그와 같이 상(相)만 나툴 뿐인 것이지 자기 몸뚱이 이것도 사실은 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 진여연기(眞如緣起) [2]
《가장 행복스러운 가르침》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하고, 또 진리 그대로 조금도 굴곡이 없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과학, 가장 궁극적인 철학, 가장 행복스러운 종교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인간은 마음도 편안하고 몸도 편안하고, 누구나가 다 그러한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행복 자체 이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어떻게 하여야 행복스러울 것인가? 자기 마음의 본질도 훤히 알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또는 미워하는 사람이나 사람의 본질도 알고, 또는 우리가 현대인들이 그렇게 숭상하는 물질의 본질도 알고,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막힘없이 알아 버려야 그래야 우리 마음이 편안합니다.
불안하지 않아야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갈 길도 모르고, 가장 소중한 자기 존재 파악도 못하고, 이런 차원에서는 행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세간적인 행복, 찰나 무상한 그런 행복, 이런 것은 모르거니와 이른바 적어도 불멸의 행복, 영생불멸한 행복을 추구한다고 생각할 때에는 물질적인 차원, 우리 중생이 보는 그런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같이 투철한 본질적으로 보는 안목에서 볼 때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이 사는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가 모두가 고생 바다밖에는 아닙니다.
어느 종교든 근본적으로 신앙의 그 목표 의식이 모호할 때는 참다운 신앙이 못됩니다.
이른바 불타관(佛陀觀)이라, 불자는 먼저 확실한 불타관을 확립을 해야 합니다. 그것도 역시 그냥 방편적인 그런 가르침이 아니라 본질적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대사인연이라! 금생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고난을 뿌리부터서 구제할 수 있는 그런 일승법문(一乘法門) 대승법문(大乘法門), 이런 법문으로 해서 자기의 불교적 인생관을 확립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현대와 같은 그러한 뿌리 깊은 문명의 병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현대병이 지금 얼마나 무겁습니까? 물질병 또는 그야말로 이데올로기 같은 그런 사상병 말입니다.
현대는 종교, 철학, 과학, 예술 등 인간의 관념의 형태가 한도 끝도 없이 많습니다. 가령 종교 하나만을 예를 들어본다 하더라도 어느 종교에서는 하나님은 저기가 있고 나는 여기가 있다고 합니다. 태초에 나를 창조했을 하나님은 현재 저기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또 자기 남편은 저기 있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종교는 모두가 이와 같이 대립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따로 사탄 따로 있으므로 따라서 사탄은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사탄은 사탄인 것이지 악마나 마귀가 하나님은 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남을 사랑하라. 남을 위해서 봉사하라. 여러 가지 캠페인이 지금 성행하고 있습니다.
또는 자연을 보호하자. 자연을 오염시키지 말자. 자연 파괴나 환경오염이
우리 인간 생활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 아니겠습니까. 세계적으로도 떠들썩하고 굉장한 큰 보호 운동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런 환경 운동에 같이 동참하여야 할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짊어져야 할 필수적 의무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도 대립적으로 보아서는 근본적인 해결은 할 수가 없습니다. 나 따로 있고, 남 따로 있고, 이런 인생관에서는 자기의 편의와 자기 이익을 먼저 앞세웁니다.
또 자연 따로 있고 나 따로 있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기 있는 산은 산이고 나는 나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잘 모르는 분들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런 법문이 있으니까 우리 중생이 보는 산은 별도로 그렇게 산은 산일 따름이고, 물은 우리 중생이 보는 그런 물일 따름이다.
이렇게 잘 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연기법이라 하는 부처님의 근본도리, 이 도리는 바로 우주의 도리입니다.
우주의 법칙입니다. 이러한 연기법으로 볼 때는 산 따로, 물 따로 가 아닙니다. 너 따로 나 따로 가 아닙니다. 동일한 생명입니다. 일미평등(一味平等)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닌 것이니까 차이가 없어야 되겠지요.
좋다, 궂다, 많다, 적다. 그러한 상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어떠한 것이나 완벽하게, 자비, 지혜, 능력, 행복, 어떠한 것이나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진여불성, 그 자리에서 그 자리의 기운 따라서 일어나는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따라서 산도, 물도, 달도 거기서 왔습니다. 아무리 표독한 사람도 아무리 선량한 사람도 모두가 거기서 왔습니다. 따라서 그 자리,
진여불성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산도 달도 나와 둘이 아닙니다.
너와 나도 둘이 아닙니다. 물과 나도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 법성(法性) 자리에서 볼 때는 우주는 중중무진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는 하나의 생명으로 모두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산을 함부로 하면 그만큼 우리가 보복을 받는 것이고 물을 함부로 해도 우리가 보복을 받습니다.
오늘 여기 오신 불자님들께서는 다른 것은 미처 모르신다 하더라도 방편설이 아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진여연기(眞如緣起) 연기법의 도리를 항상 명심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기도가 되고 참다운 참선이 됩니다. 가사 우리가 '무(無)'라 하는 무자(無字) 화두를 든다고 생각하여 봅시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께서 무라고 하셨으니까 무 하고 나아가면 우리 마음이 정화되면 견성오도(見性悟道)가 되겠지. 오랜 세월동안 하다보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그냥 덮어놓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덮어놓고 나를 믿어라, 하나님을 믿어라 하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전제로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안 나오셨으면 우리가 더듬고 암중모색(暗中摸索)을 해서 길을 발견하여야 하겠지요.
그러나 세존이 나오신 뒤에는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명의 낭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 그대로 우리가 신(信) 하면 됩니다.
신시보장제일법(信是寶藏第一法)이라! 그러기에 믿은 이것이 모든 보배 가운데 제일이라 합니다.
자기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근본 생명자리, 이 자리는 우주에 충만한 자리요. 완벽한 자리인데, 그 자리로 부터서 잠시간 자기가 있고 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저 사람은 나한테 해코지해서 지독하게 밉다.
누가 안보면 당장 죽이고 싶다. 우리 사회를 보면 그런 일이 허다히 많지 않습니까? 자기 부모도 미운 때는 죽이게 되고 말입니다.
중생이라 하는 것은 그런 조건만 되면 자기 부모도 죽입니다. 조건이 조금 좋으면 친하게 사귀다가도 조건이 좀 사나워져서 자기한테 손해가 온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친구도 형제간도 배신을 합니다.
우리가 지금 위대한 정객들을 봐도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이익에 맞아 합당 할 때는 서로 껴안고 악수하고 하지만 감투를 서로 빼앗고 빼앗기고 한다고 생각 할 때는 잔인하게 배신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중생심(衆生心)인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곧 죽일 듯이 밉다 하더라도 저 사람도 생명의 본질은 근본 마음 바탕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철학적으로 생각이 될 때는 그 사람을 끝까지 지독하게 지나치게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진여연기(眞如緣起) [3]
《나와 남이 절대로 둘이 아니다》
우리 불자들이 그냥 당장에 쉽게끔 부처님이나 도인들같이 '나와 남이 절대로 둘이 아니다. 천지 우주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다.' 하는 그 자리는 증명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증명은 견성오도를 해야 합니다. 견성(見性)이라. 볼 견(見)자, 성품 성(性)자.
내 성품의 본성인 동시에 우주의 본 성품을 깨달아야 견성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절로 자기 마음을 조작 않더라도 바로 저 사람과 나와 원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느껴 버리는 것이고,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분명히 봐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는 설사 이렇게 법의를 입고, 알기로는 모두가 다 연기법이 아닌가. 이렇게 제법 알기는 알아도 여실하게 말로 뜻으로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윤리의 퇴폐 문제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절감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남한테 함부로 하지 말아라. 베풀어라. 이런 저런 윤리적 덕목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우리의 사회는 윤리의 길로 나아가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지금 기독교 인구만 보더라도 세계적으로 18억쯤 믿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불교는 그 반도 못됩니다.
그러나 유고, 도교, 이슬람교, 그런 종교 인구를 합할 때는 세계 인구 반을 훨씬 상회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마땅히 그와 같이 종교 인구가 반 이상 된다고 생각할 때는 세계가 보다 화평스럽고 화해하고 정말로 평화스러운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못되고 있습니다.
어느 종교든 봉사를 역설하고 또는 사랑을 역설하고 자비를 역설합니다.
왜 그렇게 못되는 것인가? 이것은 바른 철학이고 바른 가치관이 확립이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 불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양보하면 모두가 쉬울 것입니다.
홍로일점설이라, 모두가 서로 양보하고, 부처님 사상대로 따르면 다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한 줌의 눈을 뜨거운 화롯불에 넣으면 순식간에 녹아 버리듯이 그와 같이 모두가 다 만사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상이 제대로 안 배어져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거짓말 하신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고 하면 분명히 둘이 아닙니다. 천지 우주가 오직 동일 불성, 일미 평등한 동일 불성에서 나왔다고 하면 분명히 그러한 것입니다.
나는 제법 양심이 바르고 나는 지금 승복을 입었는데 그대는 불교도 안 믿고 승복도 안 입고 그대는 죄가 많지 않은가? 그대와 나는 거리가 굉장히 멀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이 드시겠지요.
그러나 부처님의 차원, 성자의 차원, 바른 도리 차원에서 볼 때는 지금 도둑질한 사람과 나는 똑 같습니다. 본질도 똑같고, 현상으로 나왔다 하더라도 사실은 원래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인연 따라서 나온 것은 모두가 공입니다.
불자님들 장소가 더우셔도 이런 대승적인 진여 연기법에 대한 말씀은 잘 명심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부산은 그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이 아주 열성적인 훌륭한 도읍지입니다.
그래서 기라성 같은 큰 스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많은 법문을 들으셔서 부산 불자님들은 굉장히 마음이 순숙해져서 정말로 진여불성에 가까워지신 분들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법이 조금 어렵더라도 그때그때 다시 또 듣고 또 듣고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다문선지식(多聞善知識)이라. 많이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잠재의식에 참다운 부처님 도리가 차근차근 차곡차곡 거기에 축적이 되어서 우리 마음이 불성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나왔기 때문에 무상(無常)입니다.
어느 순간도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저는 어느 법회 때 마다 꼭 잊지 않고 말씀을 드립니다만 일초 전과 일초 후의 자기가 똑같지가 않습니다. 하물며 오늘 자기와 어제 자기는 현저한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10년 전이나 10년 후나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 나도 나이가 많이 드는구나. 그렇게 느끼지만 순간순간은 미쳐 못 느끼지 않습니까.
사실 어느 순간도 같은 자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후단멸(前後斷滅)이라. 앞서 지나간 자기와 지금 자기가 같지 않은 것인데 우리 중생들이 이것이 연속되니까 고유한 내가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어느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까 따라서 어느 공간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인 도리 아닙니까.
어느 순간도 같은 모습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런 것이 어디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당체즉공》
따라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만법이라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볼 때는 무상이고 같을 수 없이 변화무상한 것이고, 전변무상(轉變無常)이라. 그러기 때문에 어느 공간도 사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부처님 말씀에 제법이 공이라.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해서 끝에 가면 공이라. 이렇게 보통은 생각하지요.
그러나 부처님 대승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색즉공이라 했듯이, 색은 물질 아닙니까. 물질이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제 몸도 역시 바로 공입니다. 여기 있는 테이블도 역시 바로 공입니다.
색즉공이요. 소리도 역시 공입니다. 성즉공(聲卽空)이라. 다 공입니다.
같은 공도 분석할 석(析)자, 빌 공(空)자, 석공(析空)이라. 우리가 보통은 현대 물리학자들 같이 분석한 다음에 공이 아닌가?
이렇게 느끼시기가 쉽습니다만 부처님의 대승법은 그렇지 않고 바로 즉공(卽空)이라.
또는 몸 체(體)자, 체즉공(體卽空)입니다. 당체즉공(當體卽空)입니다.
왜 공인 것인가?
이것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이 시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공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니까 바로 공입니다.
그러니까 무아(無我)입니다. 내가 없단 말입니다. 무상이고 공인 것을 '나'라고 고집할 건더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여불성 자리, 부처님의 연기법에서 보면 다이아몬드도 금도 감투도 대통령도 모두가 다 공입니다. 이 도리가 바로 반야바라밀, 즉 반야지혜입니다.
반야지혜 없이 우리 중생병 못 고칩니다. 반야지혜 없이 우리 행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즉 공 도리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22년 동안 반야설이라.
부처님의 요설변재(饒舌辯才) 그 대웅변 가지고도 22년 동안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부처님의 친 종제인 제바달다는 도를 깨닫지 못하고서 엉뚱한 일을 많이 했지 않습니까.
반야바라밀이 존재해야 참다운 부처님의 지혜(智慧)입니다. 반야를 떠나서는 어느 분야에서나 바르게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문학적인 작품을 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세속적인 그저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런 글이나 쓰는 것이지 그렇게 시원스러운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나 걸작을 낸 사람들은 견성오도까지는 미쳐 못 갔다 하더라도 그 무상한 도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허무하지 않은가. 이런 도리를 조금쯤은 알아야 참다운 글도 쓰고 참다운 음악도 하고 다 그렇습니다.
따라서 제법의 공 도리를 알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됩니다. 제법의 공 도리를 알아야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본래로 하나다.
그런 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여불성이라 하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앞서 언급을 했습니다만 진여불성 이것은 모든 존재의 근본 실상입니다. 진여불성 거기서 부터서 모두가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왜 나왔는가?
이것은 우주의 법칙 따라서 자연 본연적으로 나온 것이지만 우리 중생 차원에서 보면 무명심(無明心)이라. 우리 무명심 때문에 시초에 존재가 다 나왔습니다.
-. 진여연기(眞如緣起) [4]
《무명심(無明心)과 십법계(十法界)》
무명심은 무엇인가?
천지 우주가 오직 진여불성뿐인데 우리가 우주의 순환 과정에서 마음이 가려져서 그것을 미처 모른단 말입니다. 학식이 많고 적고 그건 문제가 아닙니다.
설사 박사 학위, 석사 학위가 몇 십 개가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지 참다운 지혜가 못됩니다. 따라서 제 아무리 세간적인 학문을 많이 한다 하더라도 불교에서 볼 때에는 아직은 무명심을 못 떠나 있습니다.
무명심을 어떻게 떠날 것인가? 그것은 방금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모든 존재의 근본 생명의 실상 자리, 이 자리를 깨달아야 비로소 무명심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명심을 여의어 버리지 못하면 무명심을 깨버리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생명의 고향인 진여불성 자리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무명심을 떠나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영원히 끝도 갓도 없이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십법계라. 극락세계도 분명히 존재하고 또 지옥세계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무엇인가? 우리 무명심이 가장 어두운 세계입니다. 앞서 범어사 주지 큰스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와 같이 청명한 날은 우리 기분도 좋지 않습니까.
우리 중생은 밝은 것을 다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는가? 우리 생명 자체가 본래로 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미워하면 그만큼 마음이 어둡지 않습니까.
본래 진여불성에는 미움도 좋음도 없습니다.
우리가 남을 미워하는 것은 불성에 어긋나는 행동이므로 그만큼 우리 마음이 금방 어두워집니다. 우리가 물질에 너무 집착하여서 이렇게 욕심을 낼 때에 청정 미묘한 마음이 금시에 어두워집니다. 우리가 무명심에서 말도 함부로 하고 행동도 함부로 하면 본래 청정 미묘한 마음이 더욱 어두워집니다. 가장 어두운 중생심의 세계 이것이 지옥입니다.
조금 밝아지면 아귀(餓鬼) 세계라. 더 밝아지면 개나 소나 돼지 같은 축생(畜生) 세계라. 조금 더 밝아서 싸움 좋아하는 아수라(阿修羅) 세계라. 훨씬 더 밝아지면 우리 인간(人間) 세상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래도 그런대로 무던히 밝아 온 셈입니다.
더 밝아서 천상(天上)이요. 더 밝아서 진여불성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는 세계가 성문승(聲門乘)이요, 더 깨달아서 우주의 연기법을 깨달아서 연각승(緣覺乘)이요. 모든 중생과 더불어서 성불로 가는 참다운 중생이 보살(菩薩)이고 온전히 깨달아야 비로소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지금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그런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은 전생에 다섯 가지 계율 정도는 닦았단 말입니다. 살생도 별로 하지 않고 훔치지도 별로 않고 음탕한 행동도 별로 않고 이렇게 해서 다행히 인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진여불성 극락세계라 하는 우리 고향으로 갈 것인가?
그렇지 않고 다시 인간 정도로 헤맬 것인가?
여느 사람들은 잘 모르고서 인본주의(人本主義)라. 인간이 제일 높다고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기는 합니다만 인간이 제일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보다도 더 높은 천상도 있습니다. 욕계에도 천상이 있고, 색계, 무색계에는 천상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보다 훨씬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의 고향 자리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것은 우리 결단에 달린 것이고, 또 우리가 인생고를 떠나서 마음의 고향 자리로 가기 위한 가르침은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 이외는 없습니다.
기왕이면 빨리 가고 싶은데 부처님 가르침을 어떻게 믿어야 빨리 갈 것인가? 불자님들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암시(自己暗示)라는 법문을 아시지 않습니까.
법문이라기보다는 일반 심리학적인 용어입니다만 '내가 나쁜 놈이다''나는 별 볼일 없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바로 살려고 해도 진심(嗔心)이나 욕심(慾心)을 도저히 제거할 수가 없다'
이렇게 자기비하(自己卑下)를 하고 이렇게만 생각할 때 자기 발전이 오겠습니까.본래 석가모니는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석가모니는 우리보다도 훨썩 위대하기 때문에 부처가 된 것이고, 나는 과거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고 금생에 타고난 죄도 역시 많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을 절대로 마십시오. 견성오도나 불은 나하고는 무관하지 않은가. 이렇게 생각을 절대로 마십시오.
석가모니 마음과 예수 마음과 우리 마음이 똑같습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도 역시 똑같습니다. 진여불성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더하고 덜하고, 또는 청정하고 더럽고 이런 차이가 없습니다. 도둑놈 마음이나 도둑놈 몸이나 우리 몸이나 똑같습니다.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변동이 없습니다. 다만 인연 따라서 그 텅 빈 상만 차이가 있습니다. 상의 결합적인 차이만 있습니다.
같은 탄소도 결합 여하에 따라서 더러는 검은 숯 부스러기가 되고, 또는 결정체로 되면 그때는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결합 여하에 따라서 숯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그와 똑같이 진여불성이 결합 여하에 따라서 전자가 되고 양성자 또는 중성자가 됩니다.
본래는 우주의 순수 생명인 그 진여불성, 현대 말로 하면 순수 에너지 말입니다. 물질이 아닌 순수 에너지가 그때그때 결합 여하에 따라서 양자가 되고 전자가 되곤 합니다.
또 그들의 결합 여하에 따라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곤 합니다. 어떤 물질이나 그런 원소로 안 된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서 한 말씀 더 명심해야 할 것은 현대 물리학과 불교는 굉장히 밀접 불가분리 합니다. 현대 물리학이 사실은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가면 갈수록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현대 물리학은 모든 것은 본래로 비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
에너지는 파멸이 안 되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에너지가 산이 되고 달이 되고 별이 되고 하여도 에너지 자체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 허망 무상한 상만, 모양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질은 변질이 없다. 이러한 것이 현대 물리학적인 설명입니다.
따라서 앞서 말씀드린바 예수의 몸이나 내 몸이나 석가모니 몸이나 똑같은 몸입니다. 마음이야 본래 모양이 없으므로 석가모니 마음, 내 마음 차이가 없어야 하겠지요.
다만 우리 중생이 자작범부(自作凡夫)라. 우리가 잘 못 봐서 나는 나요, 너는 너요, 나는 못나고, 너는 잘나고, 이런 마음 때문에 스스로 우리가 범부가 되는 것입니다.
설사 범부가 되었다 하더라도 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석가모니나 나나 누구나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 진여연기(眞如緣起) [5]
《마음이 바로 부처다》
그러기 때문에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불자님들은 말로는 심즉시불을 모르는 분이 별로 없으시겠지요. 마음이 바로 부처다. 우리 마음을 닦으면 부처다. 닦아서 석가모니처럼 되면 부처라. 이렇게 생각하신 분이 많으시겠지요.
그러나 닦을 것도 없이 바로 이 마음, 남 미워하고 욕심내고, 이 마음 바로 부처라. 이 마음 바로 부처입니다. 석가모니한테나 예수한테나 달마 스님한테나 누구한테나 꿀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진정으로 내 마음 이것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은 본래로 오염이 안 되어 있다. 100% 믿으면 그 자리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마음을 여셔야 합니다. 위대하고 무한한 우리 마음이 그 별것도 아닌 자기 몸뚱이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제 아무리 값비싼 팔찌를 하고 귀걸이를 한다 하더라도 이런 걸로 해서는 우리 가치가 높아지지 않습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허무합니다.
이 목숨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모릅니다. 그렇게 허망 무상한 우리 인생인데
무슨 필요로 생명의 본 고향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셔야 합니까.
본래 부처인 우리가 잠시간 졸고 있는 그 동안을 오랫동안 연장을 시킬 것이 아니라
다시 깨어서 본래 부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마음 이대로 바로 부처인 것이고, 석가모니 마음, 공자 마음, 예수 마음, 하나님 다 똑같은 자리입니다.
일미 평등이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본래 내가 부처입니다.
《참선염불》
우리가 염불을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나무아미타불이 저 십만 억 국토 저 밖에 계신다. 우리가 애쓰고 부르고 외이면 나한테 도움을 주시겠지. 이런 식의 염불은 참다운 염불이 못되는 것입니다.
내 본래가 바로 부처고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인데 그 부처를 다시 확인하는,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본래 부처인 것을 재확인하는 공부가 바로 참다운 염불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무'자 화두를 하나, 또는 '이뭣고' 화두를 하나, 어떤 화두나 모두가 다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안 여의여야 참다운 참선이란 말입니다.
인류 문화사의 수행법 가운데서 가장 궁극적인 수행법이 이른바 선(禪)! 참선입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더러 대답을 잘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저 화두하고 앉아 있으면 참선이다. 참선은 그런 협소한 것이 아닙니다. 화두를 하던 하지 않던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화두를 한다 하더라도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생명자리인 진여불성 자리, 그 자리를 안 여의어야 그래야 참선입니다.
그 자리만, 그 본질적인 본래면목 자리만 안 여읜다면 비단 무(無), 이뭣고만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또는 하나님 알라신을 불러도 모두가 참선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지구촌(地球村) 시대, 세계일가(世界一家) 시대, 이런 때에 와서는 자기 종교만 옳다. 자기 민족만 제일이다. 이렇게 해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을 바르게 느끼게 하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꼭 내 방식만이 옳다. 이런 식이 아니란 말입니다.
천지 우주를 하나로 보고서 모두를 다 동일불성(同一佛性), 어느 것이나 모두가 부처님 아님이 없이 보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나무아미타불 장엄 염불을 해 보셨습니까?
나무아미타불이 어디 계시는가 하면 도마죽위(稻麻竹葦) 무한극수(無限極數) 삼백육십만억(三百六十萬億) 일십일만(一十一萬)구천오백(九千五百) 동명동호(同名同號) 대자대비(大慈大悲) 아등도사(我等導師)금색여래(金色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빽빽한 삼 밭 대 밭 같이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일십일만 구천오백이라, 이것저것 억 사람 천 사람 모두가 다 동명 동호라, 같은 이름 같은 호의 아미타불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관세음보살님을 오랫동안 염한 사람보고 관세음보살보다 지장보살이 훨씬 더 영험이 있다. 이런단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지장경(地藏經)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관음경(觀音經)을 보면 이제 관음보살님이 제일 좋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본뜻은 이것만 좋고 저것은 좋지 않고, 이 경만 좋고 다른 경은 나쁘다. 그런 의미는 절대로 아닙니다.
이 경이나 저 경이나, 법화경(法華經)이나 화엄경(華嚴經)이나 어느 경이나
다 좋은 것입니다.
모두가 우리 중생이 삼계의 윤회에 헤매지 않고 해탈의 그런 참다운 자성,
참다운 불성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구촌 시대에 와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종교만 제일이다. 기독교는 참선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시진 마십시오.
설사 하나님을 외이고 하나님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네들 식으로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이나 밖이나 바로 우주가 하나님뿐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무방합니다.사실은 예수님의 뜻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서, 요한복음서, 누가복음서 또는 묵시록을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님의 본뜻은 지금 일부 기독교인들이 독선적으로 다른 종교를 배타하는 그런 데가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민족과 민족, 사회와 사회를 화해시킬 수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럴 것인가?
부처님 법은 바로 연기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온 동일한 동포란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동체대비(同體大悲)란 말을 모르시는 분은 없지 않습니까. 하나의 생명 자리, 우리는 만물과 더불어서 뿌리가 같고 일체 존재와 더불어서 생명이 똑 같은 것입니다.
그냥 적당히 똑같은 것이 아니라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똑같은 것입니다. 온전히 똑같은 것이 인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가상만 다르게 되었습니다.
범부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중생들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현상만 보고 있습니다. 성자들은 현상도 보지만 현상을 상 그대로 집착하지 않고서 본질적으로 본래에서 본 성품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사상인 제법 공 도리가 아니고서는 사람 사람끼리 화해도 안 되고, 세계적인 문제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어떠한 문제에 있어서도 완벽한 온전한 해결은 볼 수가 없습니다.
-. 진여연기(眞如緣起) [6]
《상락아정(常樂我淨)》
그리고 진여불성 이것은 그냥 텅 비어 있는 공(空)이 아닙니다.
허두에서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진여불성 이 자리는 다만 물질이 아니고, 텅 비어 있다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가운데는 일체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습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진여불성 자리는 상덕(常德)이라. 영생해서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순수한 생명 이것은 영생불멸한 것입니다.
또는 락덕(樂德)이라. 안락무우(安樂無憂)라. 조금도 불행이 없습니다.
변치 않고 일체 공덕을 다 갖추었거늘 그 자리에 불행이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또는 고통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안락만 존재하는, 완벽한 행복만 존재하는, 그런 것이 진여불성 자리입니다.
그와 동시에 아덕(我德)이라. 나 아(我)자, 큰 덕(德)자, 아덕 이것은, 우리 중생 이것은 망아(妄我)고 이것은 이른바 소아(小我)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잘 못 본 것이 사람들은 이것이 나란 말입니다. 견성오도를 미처 못 한 사람들은 항시 자기라 해도 망령된 자기밖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참다운 자기, 우주의 진여 불성과 온전히 하나 된 자기, 이런 자리에서는 삼명육통(三明六通)을 위시해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다 부리는 것입니다.
모두를 다 알고 모두를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깊이 느끼셔야 합니다. 불자님들 우리 마음에 갖추고 있는 덕, 이것이 그냥 흐지부지한 보통 덕이 아니라
아는 것도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모두를 다 할 수가 있고, 일체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 부리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고 없고 상관이 없습니다. 육조 혜능(慧能) 스님이 유식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닦아서 마음 깨달아서 마음이 온전히 본래면목 자리와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은 신통 부사의(不思議)해서 일체 것을 다 알 수 있고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절대로 제한을 마십시오.
그런데 하물며 나는 어디가 아프다. 부처님 법은 그런 아프고 조금 어디가 거북하고 이런 것을 치유할 수 없는 그런 시원찮은 법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완벽한 법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금생에 내가 설사 잘못 살아서 허물을 많이 범했다 하더라도 내 불성만은 내 본 성품만은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조금도 흠절이 없다. 완벽하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는 그 즉시에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우리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동시에 우리 잔병은 다 떨어집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는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 똑같은 불성이거니, 다른 사람을 사랑해 보십시오, 그 사람도 꼭 자기를 좋게 봅니다.
우리 몸뚱이는 우리가 생각한 것 같이 60kg, 50kg 그런 무게가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공인데 공이 무슨 무게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 대류권 내에서 우리 중생들이 업장으로 무명심에 가려서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요, 육조 혜능 대사의 게송(偈誦)아닙니까. 본래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니 어느 곳에 번뇌(煩惱)가 있고 티끌이 있을 것인가.
우리 중생이 억울하게도 무명심 때문에 잘못 봐서 밉고 곱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퇴폐(頹廢)하고 반목(反目)하고 분열(分裂)하고 이대로 사실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에는 사바세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조금도 오염이 안 되었습니다. 다만 중생들이 불쌍하니까. 본래로 극락세계인 것을 본래 부처인 것을 중생들이 잘 못 보고 스스로 자기를 구속하고 고생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안타까워서 중생 제도 하려고 도인들이 교시하는 것이지 바른 차원에서는 그대로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오늘 죽어도 극락세계 내일 죽어도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자기 몸 허망 무상한 본래로 있다고 할 수 없는 가상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기 생명 자체는 조금도 흠축이 없습니다.
운문 스님한테 가서 어려운 때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렇게 문법을 하니까,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요, 시시시호시(時時是好時)라. 날마다 좋은 날이요, 때때로 좋은 때라. 어려운 때는 어떻게 피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날마다 좋은 날이고 때때로 좋은 때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현상적인 상대 유한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좋고, 궂고 여러 가지 고난이 많겠지요. 그러나 진여불성 자리, 반야바라밀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이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자의 견해인 반야바라밀의 경계에서는 항시 좋단 말입니다.
언제나 제 말씀이 너무나 길어지는 것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될수록 제 마음을 제 말씀을 간추려 줄여서 가겠습니다.
《일체는 부처님 법으로 수렴된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불하는 것이 우리의 근본 도리이고 사실은 불자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나가 성불 아니면 갈 곳이 없습니다. 갈 곳이 있는 것은 고생 바다밖에 없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고생 바다를 떠나는 길은 부처님 가르침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석가모니 가르침이기 이전에 바로 우주의 도리입니다. 석가모니가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우주의 연기법은 항시 존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연기법으로 볼 때에 천지 우주는 다 허망 무상하고 오직 존재하는 것은 다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먼저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바로 과학적인 도리인 동시에 철학적인 원리입니다.
연기법 이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바로 우주의 공덕입니다. 때문에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적성의 원리라던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라던가 그런 것도 모두가 다 연기법 속에 들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은 근본 본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못됩니다만
아무튼 현대 과학은 특히 정밀 물리학은 부처님 가르침을 차근차근 점차로 증명해 갑니다. 따라서 싫든 좋든 간에 무슨 종교나 무슨 철학이나 세월이 흐르면 그때는 필연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냇물 저 시냇물이 종당(終當)에는 다 바다로 가듯이 부처님 가르침은 바다와 똑같습니다.
다른 철학, 종교, 이데올로기 이런 것은 모두가 바다로 흘러내려 오는 시냇물과 똑같습니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천지의 도리입니다. 다행히도 우리 불자님들은 정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로 과거 무수생 동안에 닦아 내려온 그런 공덕으로 오늘날 부처님 가르침을 만나신 것입니다.
거짓말 같으면 눈을 찔러서 소경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조금도 주저 없이 확신을 가지고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어느 종교나 어느 과학이나 모두가 다 가면 갈수록 점차로 부처님 가르침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큰 박수)
불자님들 그와 같이 바른 가치관, 바른 불타관을 먼저 확립을 시키십시오. 아무리 못되게 살았다 하더라도 내 마음은 석가모니와 더불어서 조금도 흠절이 없는 그러한 무한 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비도 원만, 지혜도 원만, 우리 자비를 좀 베푼다고 해서 자비심이 줄어지지가 않습니다. 우리 지혜를 너무 많이 쓴다고 해서 우리 몸이 피로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먹는 음식도 몇 칼로리를 먹어야 한다. 지방질을 얼마를 먹어야 한다. 이것은 욕계 중생이 그러는 것이지 색계 이상 올라가면 사실은 음식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생활하는 것입니다. 음식 그런 것에 대해서도 너무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설사 진여불성이라 하는 우리 생명 자리에다 우리 생명을 온전히 하나가 되게끔 하는 그런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음식 같은 것은 별로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기도나 모두가 그런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저기가 계신다. 우리가 기도를 모시면 나한테 와서 돕는다. 그런 것은 세간적인 기도법입니다. 부처님 법은 그런 기도법이 아닙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천지가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하셔야 참다운 가피를 받습니다.
아무튼 음식이나 그런 것도 마땅히 검소하게 가실수록 우리 몸은 훨씬 좋은 것입니다.
꼭 명심해 두십시오. 고기를 꼭 먹어야만 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생명은 생명 자체 스스로 지탱하는 것입니다.
저 월남 드리쾅승, 그분은 반체제 운동을 하신 스님인데 옥중에서 100일 동안 물만 먹고서 조석 염불, 아침에 2시간, 밤에 2시간, 4시간씩 고성 염불을 그렇게 하면서도 백일 동안 물만 먹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 계십니다. 그것은 극단적인 예로 우리가 극단적인 고행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아무튼 우리 몸이라 하는 것도 역시 일체가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몸도 역시 마음의 반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업장 따라서 이와 같은 몸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청정하면 우리 몸도 그냥 즉시 반사작용으로 우리 몸도 청정해 옵니다.
병도 꼭 약을 먹어야 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필요에 따라서 약을 좀 먹어도 무방하겠지만 사실은 우리 마음이 우리 몸의 병을 꼭 낫을 수 있습니다.
인도의 이른바 신지학(神智學), 이런 것은 심리요법, 정신요법으로 우리 병을 낫는단 말입니다. 그런 법도 모두가 인간성의 무량무변한 공덕을 역설하고 발효한데서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부처와 나와 더불어서 일체가 호리차이(毫厘差異)가 없는 하나입니다.
-. 진여연기(眞如緣起) [7]
《청정계율》
부처란 것은 완벽한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확신할 때는 우리 몸도 거기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꼭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불타관을 확립하시고 그 다음은 계율을 청정히 하십시오. 현재는 부처님 계율을 더러 함부로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거짓말이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사소한 것이나 우리 몸뚱이에 대해서나 우리 마음에 대해서나 어떤 것에 대해서나 조금도 오류가 없는 그런 말씀입니다.
더러 세세한 계율 가운데는 인도에는 있고 우리 한국에는 없고 그런 점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음식을 어떻게 먹어라. 이성간에 어떻게 사귀라. 이런 정도는 조금도 빈틈이 없습니다. 이런 것은 꼭 우리의 마음과 몸을 정화(淨化)해서 중생들로 하여금 본래 성품 자리, 진여불성 자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는 그런 법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계행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 마음도 정화가 안 되고 우리 몸도 정화가 안 됩니다.
어느 분들은 물질이라는 것은 허망한 것이니까 마음속으로 범하지 않으면 되겠지. 그러나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으로 범하면 마음도 그만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철저하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지키셔야 우리 몸도 마음도 정화가 되어서 우리가 불성 자리에 더욱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인 중생이 업을 지어서 그 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나쁜 습관성 때문에 습관성을 떼는 것이 공부인 것입니다. 나쁜 습관성 때문에 우리 몸도 아프고 마음도 흐린지라 그 습관성을 떼어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계행(戒行)이 청정해야 쓰겠지요.
계행이 청정해야 우리 마음에 선정(禪定)이라 하는 삼매(三昧)의 기운이 담깁니다. 우리 중생 마음은 파도같이 항상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우리 마음을 바람 잔 파도같이 또는 맑은 거울같이 그렇게 하여야 참다운 지혜가 비춰 옵니다. 우리 중생들 마음은 마치 터럭 끝같이 항시 동요부단(動搖不斷)해 마지않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관념 '너'라는 관념에 가려서 이른바 반야바라밀을 몰라서 그럽니다. 설사 반야바라밀을 어렴풋이 알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습관성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습관성이 녹아 나고 동시에 우리 마음이 가면 갈수록 우리 생활이 하루하루 부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몇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완전무결한 가르침인 것이고, 일미 평등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른바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참다운 진리라는 것은 어느 문이 따로 있고 따로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염불하는 문이나 주문하는 문이나 참선하는 문이나 또는 기도 모시는 문이나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다만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이 진여불성이라 하는 그 반야바라밀 자리에 입각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참선도 부달성공(不達性空) 하면 좌선무익(坐禪無益)이라. 제법이 공 자리에 우리가 이르지 못하면 참선해도 별 볼일이 없단 말입니다. 부달성공이라, 일체 성품이 본래로 비어 있다는 그런 경계를 모른다고 생각할 때에는 좌선 무익이라. 참선을 하여도 별로 이익이 없습니다.
지금 내 공부가 잘 안 된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은 모든 명상(名相)이 본래로 허망하다는 것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 자기 재산도 자기 몸뚱이도 자기 관념도 모두가 본래 바로 즉 공(卽空)이라, 본래 공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느낄 때는 지장보살을 부르나 무엇을 부르나 다 하나입니다.
지장보살 약사여래 관세음보살 모두 다 진여불성 자리의 공덕을 우리한테 표하는 자리입니다. 부처님 자리가 무슨 이름이 따로 있습니까? 진여 불성 공덕이 무한 공덕이기 때문에 한 말로 하나의 개념으로 해서는 다 표현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을 진여불성을 자비로운 쪽으로 봐서는 관세음보살, 지혜로운 쪽으로 봐서는 문수보살, 우리 중생들의 병고를 다스리는 쪽으로 봐서는 약사여래, 우리 영혼을 이끌어서 극락세계나 천상으로 인도하는 그런 면에서는 지장보살 그러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광명이다.》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 광명은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님은 바로 순수한 생명의 광명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이 바로 우주의 광명이다.
이런 차원에서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우리 생명의 본질인 부처님의 수명이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그런 차원에서는 무량수불(無量壽佛)입니다.
번뇌가 조금도 없이 청정한 면에서는 청정광불(淸淨光佛)이라, 행복이 충만한 면에서는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따로따로 뿔뿔이 있지 않습니다. 뿔뿔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 다신교라, 참다운 종교가 못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분명히 바르게 느끼셔야 됩니다.
똑같은 것인데 다만 공덕 따라서 그와 같이 이름이 다르니까 어떻게 부르나 본래 하나다. 그렇게 생각하면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바른 가치관 바른 불타관을 가지고서 계행 청정히 할 것이고, 그 다음 문제는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계행이 청정하다 하더라도 우리 공부가 지속적으로 계속이 안 될 때에는 우리가 과거 전생에 잘 못 붙인 습관성, 금생에 나와서 잘 못 붙인 그런 나쁜 습관, 이런 것이 순식간에 녹아 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생각 생각에 걸음걸음 소리 소리에 공부를 하여야 차근차근 더 익어져서 공덕은 더 쌓이고 나쁜 습관은 추방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산은 정말로 축복받은 고장입니다.
저는 어제 밤에 왔습니다만 밤거리를 산책을 조금 해봐도 그 십자가가 별로 안 보였습니다. 십자가를 저는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 그야말로 의미가 깊은 것인데, 지금 잘 못 믿는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자기 조상 제사도 예수가 모시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상 제사 모시는 것도 진리에 어긋난다, 다른 가르침은 모두가 다 마귀다 그럽니다. 지금도 역시 시한부 종말론이라. 얼마 안가서 자기들 믿는 사람들만 영생으로 저 위로 휴거가 되어서 올라가고, 다른 사람은 다 파멸이 온다. 이렇게 하므로 우리가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불자님들의 그런 열성으로 해서 부산은 정말로 축복 받은 고장입니다. 이것은 바로 선지식들이 그만큼 많이 계셔서 여러분들한테 감로수같은 법음(法音)을 전달하시기에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저도 축복과 환희심을 느낍니다.
여러 불자님들, 바른 가치관, 반야바라밀을 꼭 가지십시오.
반야바라밀을 가지실 때에는 우리 마음은 천지 우주를 우리 마음으로 합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천지와 더불어서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남을 미워하고 남을 싫어하고 하겠습니까. 물질이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 필요한 필요조건은 되어도 충분조건은 못됩니다. 그걸로 해서는 우리 행복을 절대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허두에 말씀드린 대로 안심을 바랍니다. 안락을 바랍니다.
안락스런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꼭 반야바라밀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와 같이 반야바라밀! 어느 것도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내 마음은 본래로 무량의 지혜 공덕을 다 원만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끼고서 계행 청정하시고 거기에서 또 빠뜨리지 말 것이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염불도, 화두도, 주문도 모두가 지속적으로 공부하기 위한 그런 법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염불도 생각 생각에, 화두도 생각 생각에, 주문도 생각 생각에 이렇게 하셔서 우리의 그런 나쁜 습관이 다시는 우리한테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기왕 들어온 나쁜 습관은 그냥 다 온전히 나가 버려서 금생에 꼭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법을 닦아서 성불하기가 사실은 제일 쉬운 일입니다. 본래로 갖추고 있는 것이고 누구한테 빌려 와서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부산 불자님들이 꼭 우리 한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불교의 중심지가 되도록 까지 공부를 하셔서 더욱 더 빛나시기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1. 눈 고장에서 - 식물도 알아듣는다
/ 법정스님
난蘭이 한 분 나와 함께 겨울을 나고 있다.
안거安居에 들어가기 전 내 처지를 잘 알고 있는 도반道半이,
빈 산에서 홀로 지낼 것을
생각해서 말벗이라도 하라고
기왕에 있던 분에서 포기 가름을 해서 안겨 준 것이다.
나무와 꽃을 좋아하면서도 나는 방 안에
화분을 들여놓는 일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벌써 오래 전, 다래헌茶來軒 시절에 난을 기르면서
터득한 지독한 집착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아는 분들이 나를 찾아올 때면 화분을 가지고 오는 일이 더러 있었다.
면전에서는 혼연스러게 받아들이지만 그들이 산을 내려가고 나면
즉시로 새 인연 터를 골라 떠나 보내곤 했다.
까닭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였다.
그러던 고집이 이 겨울 이 오두막에서는 난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말벗이라도 삼으라고 하던 도반의 살뜰한 뜻이
요 며칠 전부터 꽃대가 되어 솟아오르고 있다.
어느 날 밤 꿈에 난초분에 꽃대가 올라오는 걸 보았는데,
다음날 유심히 살펴보니 과연 꽃대가 두 군데서 솟아올랐다.
그 뒤부터는 말벗뿐이 아니라 눈길의 벗이 되어 한결 가까이 보살피게 된다.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이 다 그렇듯이
식물도 마음을 기울여 보살펴주면 건강하게 잘 자란다.
낮에는 햇볕이 드는 밝은 창 아래 두고 눈길을 보내면서 두런두런 말도 걸다가,
밤에는 방 안의 온도가 난에게는 답답할 것 같아
마루에 내놓고 잘 자라고 밤 인사를 나눈다.
차(녹차)를 마시고 난 찌꺼기를 찻잔을 씻은 물과 함께
버리지 않고 오지그릇에 담아 두었다가,
한참 삭힌 뒤에 암갈색으로 우러난 그 물을 한 닷새에 한 번꼴로
서너 숟갈씩 화분에 주면 난은아주 좋아라 한다.
윤기가 도는 그 청청한 잎을 보면 난의 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식물에도 마음이 있느냐고?
암, 있고말고,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는 저마다 형태가 달라서이지
영靈이, 그 마음이 깃들어 있다.
산 것과 죽은 것의 구분은 영이 깃들어 있느냐
나가버렸느냐에 달렸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 기준으로만
속단하기 쉬운데,인간은 이 무변광대한 우주의 큰 생명체에서
나누어진 한 지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최근에 나는 흥미 있는 책을 한 권 읽었는데,
정신세계사에서 펴낸 <식물의 신비생활>
(피터 톰킨스.크리스토퍼 버드 공저)이다.
거기 보면 식물도 우리 인간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기뻐하고
슬퍼한다는 것이다.
예쁘다는 말을 들은 난초는 더욱 아름답게 자라고,
볼품없다는 말을 들은 장미는 자학 끝에 시들어 버린다는
실험 결과를 싣고 있다.
또 어떤 식물은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클래식을 좋아하고,
어떤 식물은 시끄러운 록 음악을 좋아한다고도 했다.
'식물도 생각한다' '인간의 마음을 읽는 식물'
'식물과의 의사 소통' '우주와 교신하는 식물들의 초감각적지각' 등
식물의 초감각적 지각에 대한 최근의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도 머리말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가 산에 가거나 나무나 꽃과 함께 있을 때
우리 마음은 차분해지고 아늑한 기분을 느낀다.
그것은 영적인 충만감에 젖어 있는 식물들의 심미적 진동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식물은 우리가 함께 기대고 있는
이 우주에 뿌리를 내린 감정이 있는 생명체다.
인간의 처지에서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식물이 지닌 영적인 영역을 놓치는 것이다.
식물은 우리 인간에게 양식과 맑은 공기를 비롯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유익한 에너지를 무상으로공급해 주고 있다.
자연과 교감을 하면서 살아온 미국 인디언들은 과로해서 기운이 달리게 되면
숲 속으로 들어가 양팔을 활짝 벌린 채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그 나무의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한 친구도 도시생활에 지치면
시골집에 내려가 집 뒤 소나무 숲을 찾아간다.
정정한 한 소나무에게 안부를 묻고 거기 한참을 기대어 속말을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투명해지고 기운이 솟는다고 했다.
나도 불일암의 뜰에 있는 후박나무들, 잎이 다 지고 난 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 나무를 쓰다듬고 안아 주면서
볼을 비비기도 하고 속엣말을 건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말할 수 없는 신뢰와 친근감을 우리는 서로 나눈다.
아, 이 겨울에 우리 후박나무는 별고 없이 잘 있는가?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제2부 식물의 왕국에 문을 연 선구자'들에 대한 기록이다.
인도의 뛰어난 식물 연구가 찬드라 보스는 한 학술모임에서
자신의 철학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진리가 머물고 있는 이 광막한 자연이라는 거주지에는 저마다
문이 달린 수많은 통로들이 있다.
물리학자, 화학자, 생리학자들은 자신들만의 전문지식을 가지고
이 각기 다른 문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것이 다른 분야와는 관계가 없는 자기들만의 교유한 영역이라고
고집하면서, 이렇게 하여 우리는 지금 광물의 세계니, 식물의 세계니,
동물의 세계니 하면서 분야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들은 깨져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탐색의 목표가
전체적인 앎에 도달하기 위한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어떤 특수 전문 분야라 할지라도 인간의 삶을 위한 궁극적이고
보편적인 영역에까지 이르지 않으면
그것은 한 곁가지를 붙드는 일에 그치고 말 것이다.
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주장한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며 심리학자인 페히너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들이 어둠 속에서 목소리로 서로를 분간하듯이
꽃들은 향기로써 서로를 분간하며 대화한다.
꽃들은 인간들보다 훨씬 우아한 방법으로 서로를 확인한다.
사실 인간의 말이나 숨결은 사랑하는 연인끼리를 제외하고는
꽃만큼 미묘한 감정과 좋은 향기를 품기지 않는다."
20세기 최고의 식물 재배가로 일컬어진
캘리포니아의 푸터 버뱅크는 한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식물을 독특하게 길러내고자 할 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식물에게
말을 건넵니다.
식물에게는 스무 가지도 넘는 지각능이 있는데
인간의 그것과는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선인장에 관한 실험이야기인데,
나는 처음 집게로 선인장의 가시를 뽑아 주면서
선인장에게 수시로 말을 걸어 사랑의 진동을 일으켜 보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게 없다.
그러니 너는 이제 가시 따위는 필요 없어, 내가 너를 잘 보살펴 줄 테니까."
그 결과 마침내 가시 없는 선인장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식물들이 어떤 종류의 텔레파시를 통해
자신이 뜻하는 바를 감지하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그는 학부모들에게 말한다.
"어린이들에게는 책에 실린 지식을 강요하는 것보다
건강한 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린이들은 고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놀이나
자연과의 교류 등 기쁨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버뱅크는 자신의 성공은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로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낀 데서 비롯된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 작가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제 77세에 가까운 나이지만 아직도 대문을 뛰어넘고
달리기 시합을 하고 샹들이에를 걷어차기도 한다오.
그것은 아직도 청춘인 내 마음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늙지 않았기 때문이오.
나는 지금껏 어른이 된 적이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랬으면 싶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난蘭 .
꽃대를 재어 보았더니 11.5 센티미터,
어제보다 5밀리미터가 더 자랐다. 기특하다. <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