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한결같다-독선(讀禪) - 신심명 읽기

2013. 3. 8. 17: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신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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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선(讀禪) - 신심명 읽기 15.
                                                                  김태완
언제나 한결같다

 

색(色)을 공(空)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상(相)을 비상(非相)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일체(一切)를 일(一)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생멸(生滅)을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이법(二法)을 불이법문

(不二法門)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사(事)가 곧 이(理)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색에서 한결같고, 공에서 한결같고, 상에서 한결같고, 비상에서 한결같고,

일체에서 한결같고, 일에서 한결같고, 생멸에서 한결같고, 불생불멸에서

한결같고, 이법에서 한결같고, 불이법문에서 한결같고, 사에서 한결같고,

이에서 한결같다.

 

不好勞神 정신을 피곤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아 하는 것이 있으면 피곤하다. 좋아 하는 것을 손에 넣어도 유지하기가

피곤하고, 손에 넣지 않으면 넣고 싶은 마음이 안달하여 피곤하다.

싫어하는 것이 있으면 피곤하다. 싫어하는 것을 만나면 고통스럽고, 만나지

않더라도 만날까봐 두렵다. 옳고 그른 것이 있으면 피곤하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를 가려내는 것도 피곤하고, 옳음을 지키고 그름을 버리는

일도 긴장되고 피곤하다. 희망을 가지고 추구하는 일도 피곤하다. 당장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에

피곤하다. 지식에 의지하면 피곤하다. 지식은 늘 새로워지므로 즐 새로운

지식을 좇아 다니는 것이 피곤하다. 오직 피곤하지 않은 한 곳은, 좋아함도

싫어함도 없고 좇아 가지도 지키고 있지도 않고 행동도 없고 판단도 없이

바로 지금 밝고 밝아서 막힘이 없는 여기이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인가?

 

何用疎親 어찌 멀리 하거나 가까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

 

싫어하여 멀리하고 좋아하여 가까이하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그러나

싫어하여 멀리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고, 좋아하여 가까이 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괴롭고 피곤한 일을 겪지 않으려거든, 한결같은 곳에 있어라.

한결같은 곳에 있고 싶은가? 우선 어떤 계산도 염두에 두지 않은 순수한

염원을 가져라. 가치를 따져 보거나 손해와 이익을 헤아려 보거나 비교하거나

하면 순수한 염원이 되지 못한다. 아무런 계산 없이 오로지 한결같은

곳만을 염원하라. 그러면 자연히 여러 가지로 찾고 모색하게 될 것이고,

결국 올바르게 지도하는 선지식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올바른 선지식을

만났구나 싶거든, 그를 완전히 믿고 그에게 의지하여 순수한 염원이

성취되도록 오로지 노력하여라. 결과를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말고 순간순간

이것 하나만이 눈 앞에 또렷하도록 하여라. 그런데 이것 하나가 무엇일까?

 

欲趣一乘 한 수레로 나아가고자 하거든,

 

한 수레는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수레는 여러 가지 부속품으로

조립된 것이 아니다. 바퀴도 한 수레요, 바퀴살도 한 수레요, 바퀴통도 한

수레요, 축도 한 수레요, 손잡이도 한 수레이다. 바퀴와 축과 손잡이는 제각각

바퀴와 축과 손잡이이면서도 한결같이 평등한 한 수레이다. 이 한 수레를 지금

당장 만나고 싶은가? 눈 앞에 또렷하게 드러나 있고, 귓 가에 늘 살아 있고,

입 속에 늘 굴러다니고, 손바닥에 온통 발라져 있으며, 발바닥에 항상 붙이고

다닌다. 그래도 만나지 못하는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구나. 언제나 보고 있으면서도 보는 줄 알지 못하고, 언제나 듣고

있으면서도 듣는 줄 알지 못하는구나. 이래도 만나지 못한다면, 눈 앞에서

손가락을 한 번 들어올려 보라. 그래도 안되면, 팔을 폈다가 오무려 보라.

다른 힘을 전혀 빌리지 않음을 알겠는가?

 

勿惡六塵 육진 경계를 싫어하지 말라.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은 아무 분별심이 없어서 좋아하는 일도 없고

싫어하는 일도 없다. 사람이 스스로 경계와 법을 구분하고,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고, 옳음과 그름을 구분하고, 성스러움과 세속을 구분하여, 좋아하고

싫어함에 따라 이리저리 시달린다. 법(法)이니 도(道)니 마음이니 하는 것은

경계가 아니다. 마음이 하나의 차별되는 경계라면, 마음 아닌 다른 모든 경계를

구분하여 분리시킴으로써, 마음만 드러내고 마음만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사물 가운데 하나일 뿐, 모든 사물이 마음 하나에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언제나 경험하고 있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다만 마음 하나일 뿐이다. 어떤 사물이 나타나더라도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물은 나타나고 사라지지만,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두고서 사물을 취하거나 버려서는 안된다.

 

六塵不惡 육진 경계를 싫어하지 말아야,

 

육진경계를 벗어나 한결같은 곳에 있으면서 육진경계을 싫어하거나 좋아하지도

말고 버리거나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 보고․듣고․느끼고․아는 바로 이 순간,

보이는 것에도 물들지 않고, 들리는 것에도 머물지 않고, 느껴지는 것에도

따라가지 않고, 알려지는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아서 그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으면서도, 보는 일에 막힘이 없고, 듣는 일에 막힘이 없고, 느끼는 일에

막힘이 없고, 아는 일에 막힘이 없다. 아무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일에

막힘이 없다. 무엇 때문에 막히는가?

 좋아하기 때문에 막히고 싫어하기 때문에 막힌다. 좋아하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고 싫어하는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일에

막힘이 없다. 이것이 한결같은 것이다 라고 할 그 무엇은 없으나,

늘 한결같아서 달라짐이 없다. 늘 한결같으면서도 차별 경계에 어둡지가 않다.

 

還同正覺 바른 깨달음과 같아진다.

 

깨달음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좋아함도 없고 싫어함도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한결같아야 바른 깨달음이다. 어둡지 않아야 바른 깨달음이다. 눈 앞에서

밝게 확인되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보고, 듣고, 손을 움직이고, 팔을 흔드는

곳에서 어긋남이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바른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저절로 딱딱 들어맞아서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예외가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가 없을

정도로 확실하여야 바른 깨달음이다. 남에게 물어볼 것 없이 스스로가 의심할

수 없고 부정할 수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아야 바른

깨달음이다. 찾으면 희미해지고 찾지 않으면 또렷해야 바른 깨달음이다.

바로 지금 떠날 수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바로 이 순간 막힘과 의심이

없어야 바른 깨달음이다.

 

선과 언어 (3)/ 김태완 

<현대불교신문> 기고글.


 

이제 조사선의 어록에서 언어와 관련한 언급이나 깨달음의 일화를 통하여

선과 언어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먼저 <육조단경>에서 혜능이 언어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아보자.

오조 홍인에게 의발을 부촉받고 남쪽으로 피해 가는 혜능을 뒤쫓아와 법을

설해주기를 간청하는 혜명에게 준 혜능의 가르침은,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는 바로 이러한 때에,

무엇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라는 말이었다.

혜명은 이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혜능의 첫 제자가 된다.

여기서 ‘선도 생각지 않고 악도 생각지 않는 바로 이러한 때’란 곧 모든

사량분별을 쉬어버린 때를 말하며(破邪이다), 모든 사량분별을 쉬어버린 때에

드러나는 것은 오직 여여한 자성뿐인데(顯正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면목이다. 이처럼 혜능의 가르침은 언어 곧 사량분별을 쉬어버린 곳에서

자성을 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량분별을 쉰다는 것이 무언(無言)의 침묵 속에

잠긴다거나 생각이 깨끗이 비어버린 허공 속에 머문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한다면 도리어 공(空)에 집착하는 변견(邊見)에 빠지는 것이라고

혜능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선문(禪門)에서는 무념(無念)·무상(無相)·무주(無住)를 내세운다고 <육조단경>에서

말하는데, 이 때 무념이나 무상은 ‘생각(念) 속에서 생각이 없는 것’이며 ‘상 속에서

상을 벗어나는 것’이지, 생각과 상을 버리고 허무(虛無)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즉 무념은 생각 속에서 생각이 아닌 자성(自性)을 보는 것이며, 무상은 상 속에서

상이 아닌 자성을 보는 것이다.

 이처럼 생각과 상 속에서 생각과 상에 머물지 않는 것이 곧 무주이다.

요컨대 상(相) 속에서 성(性)을 발견하라는 것이지, 상을 버리고 성을 찾으라는

말은 아니다. 성은 상이라는 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므로, 성만으로는 어떻게도

드러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말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이지, 말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말을 잊고 고요히 앉아 삼매에 빠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설법과 경청 혹은 문답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자성은 언어라는 상을 드러내는

작용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때문에, 자성의 파악은 언어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조사선에서 깨달음이 늘 ‘말 아래의 깨달음(言下便悟)’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점은 <육조단경>의 후반부에 혜능이 이른바 10대 제자들에게 종지(宗旨)를

잃지 않게 법을 설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부분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혜능이 가르치는 설법(說法)의 방식이란, 법을 설함에는 반드시 두 개의 상대법

(한 쌍의 모순개념이나 상대개념)을 함께 제시하여 모든 법은 상대적이고 의존적으로

성립할 뿐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보임으로써, 두 상대법의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 중도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이리하여 법이란 모두 상대적 사고체계 속에서 연기적으로 드러나는 관념적

구성물일 뿐임을 밝히고, 그와 같이 법을 연기적으로 발생시키는 것이 바로

자성의 작용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자성은 물론 연기라는 작용으로

드러나지만 어떠한 상대법에도 속하지 않는다.

즉 자성은 다만 연기하는 작용일 뿐 어떤 법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자성은 지금 이 순간의 머무름 없는 작용일 뿐이다.

 

혜능이 설법이나 문답을 통하여 깨우치고자 한 것은 이처럼 언어동작 속에서

자성의 작용을 깨우치려 한 것이었다. 사실 <육조단경>과 그 이후의 조사선에서

기록되어 있는 깨달음의 사건들은 모두 설법을 듣거나 문답 도중에 말을 듣고

깨달았다는 것들이며, 조사선을 계승한 후대의 간화선에서 깨달음의 방편으로서

화두(話頭)를 이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따라서 선에서는 언어를 십분

활용하여 견성을 추구하고 있지, 언어를 버리고 침묵을 지키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언어는 견성을 향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커피 한잔에 녹아나는 사랑
마음의 문을 열고 바라보는 세상엔
늘 행복이 있네

우리 커피 한잔 어때?
차를 마시자는 말일 수도 있고
때로는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표현일 수도 있는 말

그 말이,,,
오늘따라 참 그립다.


나랑 커피 한잔할래......?

 

윤현석/love

 

                         묻고 싶어 너를 만나게

                         되면 나를 떠난 후

                         정말 괜찮은지

                         또 다른 누굴 만나 날 잊고 사는지
                         혹시 나와 같은지


 

                         그 누군가가 너를 물을 때마다 이젠 날 떠나
                         행복할 거라고 해
                         나 또한 알고싶어 너무 힘들어

                         너를 잊을 수 없어


 

                         사랑해, 사랑해
                         너의 사랑이 너무 필요해 기억해 잊지마

                         너를 너무 사랑해


                         너 하나만을 사랑한 죄밖에 없어

                         사랑 때문에 모든 걸 포기했어

                         이제 단 하나 나의 바램이
                         있다면 행복하게 살아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