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가 마음이고 불법이다 / 청담스님

2013. 4. 26. 20: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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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가 마음이고 불법이다 / 청담스님

 

마음이 모든 생각의 주체다.

 그런데 이 마음이 생각이 아니다 .

지식 사상 정치 경제 예술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것조차 아니다.
그런데 결국 이 '나'라는 것도 한 개의 생각이다.
자기 마음을 모르고 자기를 모른 사람이

돈 없는 가난한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다.
저 가난한 사람이 밥이 없다고 가난한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이 없어 가난하다.
자기 마음만을 믿으면 이것이 곧 부자다.

일체유심조 (一體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또 벌어 질 수 있으니 일체 유심(一體唯心)이라,
지을 조(造)하나를 빼버려야 알기 쉽다.
오직 마음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우리 마음이 동서남북 하늘 땅 천당 지옥을 쏘다닌다.
어디에 가면 좋은 음식 좀 얻어먹을까 어디에 가면 좋은 사람을 만날까,
이런 번뇌망상으로 잠을 못 자고,

부산 갔다 대구 갔다 하며 이런 짓거리로 업을 짓고 있다.

그런데 이 번뇌의 마음을 버리면

부산 대구 생각하던 그 마음이 없어진 것뿐이지,

대구나 부산 생각하던 마음자리까지 어디로 간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마음자리만은 그대로 영원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마음을 깨친 이 말고는 참 지도자라 할 수 없는것이다.

마음이 우주의 핵인 까닭이다.
그러니 우주의 핵인 이 마음을 깨치기 전에는

누가 옳은 지도자가 되겠는가?
짐승이나 사람이나 죽을 때는 아주 죽는 줄 안다.
심지어 공자 님도 죽으면 영원히 죽는 줄 알고 죽었지만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살아 생전의 모습과 같은 존재로 또 무엇이 되어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다.

이 마음 못 깨달았으니 천당이나 지옥이나 개나 소가 되어 가지고

지금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이 그렇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제 마음대로 만들기 때문이다.
조화의 힘이란 이 마음밖에 없다.
물질도 조화를 못하는 것이고 허공도 조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
살아있는 이 마음밖에는 조화를 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이 우주의 주체인 진리의 핵이 된다면 산 것이다 .

허공은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이 마음이 우주의 핵이 되기 싫어도 되는 수밖에 없다.
오직 내 마음이 우주를 주재하는 유일한 주인공이란
붓다의 유심사상만이 참혹한 암흑에서

허덕이는 인류를 구원하는 참된 길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는
지구상이 평화와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점차 서광이 비춰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인류의 등불인  부처님의 정법의 새싹이 이 땅에서 싹트고

자랄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행히 이 땅에 태어났을 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육신과 이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용맹정진 참회하여야겠다.

육신은 기계와 같고 자동차와 같으며,

마음자리는 운전사와 같고 기사와 같으며,

몸뚱이가 옷이라면 말하고 듣는

이 마음자리는 옷을 입은 사람의 몸에 비유된다.
그러므로 알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이 마음자리인 나는
육체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나 몸뚱이를 거두어 치웠을 때나 변하지 않는다.

중생놀음하는 범부시절에도 마음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이
제 성능을 다 하고 있으며
이 다음에 성불해서 부처가 되었을 때에도
무엇을 알 줄 아는 그 힘이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다 .
마치 소금을 입에 집어넣어서 짠맛을 아는 것은 아기 때나
학사 박사 때나 변함없이 똑같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육체는 그대로 산송장이다 .
눈동자가 무엇을 볼줄아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지각성을 가지지 못한 그것이

생리적으로 체계 있게 조직이 되어 있다고 해서
알 줄 아는 능력이 물질에서 나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눈이 볼 줄 알고 ,귀가 들을 줄 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범부였을 때는 눈을 빌어서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사람이 뚫린 창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사진기의 렌즈를 통해서
사진을 찍듯이 사람이 창구멍으로 비치는 것들을 내다보고 알고
필름에 찍혀 나온 물건을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지 
창구멍이나 렌즈 자체가 알 줄 아는 것은 아닌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눈이 보고 귀가 듣고 코가 냄새 맡는 것이 아니다 .
할 줄 아는 마음자리가 직접 보고 냄새맡고 듣고 하는 것이다.
육체가 내가 아닌 진리를 깨닫고 나면 지식 사상이 내가 아닌데
그러면서 또 지식을 알고 사상을 아는 참 나를 찾게 된다.

이제까지 육체가 나라는 착각으로 고생을 하고 육도를 돌아다니다
도인을 만나 마음이 나지 육체가 나는 아니다.
육체는 내 소유는 될지 연정(소유도 될 수 없는 것이지만)나 자체일 수는 없다.

이런 진리를 듣고 이제부터는 참마음을 단속해야 겠다.

지식이나 학사 박사 노벨상 다 필요 없다.
돈도 권리도 의식주도 필요 없다고 결심하여

육체본위의 생활을 차차 청산해 간다.
하루 세끼에서 두끼만 먹고 두끼에서 한끼로 나중에는 안 먹어도 된다.
정신의 도가 높아지고 마음의 힘도 커져서
이 마음이 우주도 창조할 수있으므로 굶어도 몸이 축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밥을 안 먹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도 아니고
도의 깊이를 굶는 능력으로 안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도 집착도 구속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질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부정 긍정의 아무 생각 없이 대하라.
누워 자도 장사를 해도 정치를 해도 나를 위해선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
나는 망하고 내가 없을 때 그리고 남만을 위해서 살 때 나는 자꾸 커진다.

온 우주가 전부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 청담 스님 탄생 100주년 기념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에서 발췌한 귀중한 어록입니다.
Alfredo"s Theme /Giovanni Marradi 外11곡

    
    

     

     

     


    자기답게 사는 것/법정스님

    세상과 타협하는 일 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한다.

    우리가 일단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한 다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내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풍요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 라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그리고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서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청빈의 덕이다.

    우주의 기운은 자력과 같아서
    우리가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온다고 한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