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심시불(卽心是佛)

2013. 5. 2. 20: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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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심시불(卽心是佛)
實踐이자 體驗, 改革이자 完成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 하며 불교 공부는 마음공부라고도 한다.

그리고 많은 禪語錄에서는 自身의 마음 外部에 부처는 없으며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지 말란다.

사실 이러한 마음에 대한 선언은 불교가 外部의 어떤 對相에도 依持하지 않는다는

저 無我論的 主體性을 極明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그런데 이 마음이 그저 主觀的이거나 觀念的인 마음이거나  

社會 環境이나 外部의 여러 가지 條件과 關係없는 마음일까?

예컨대 社會는 病들어가고 온갖 抑壓과 不平等이 亂舞하며 苦痛스러운 절규가 들려오는데

그저 마음만 저홀로 平和로울 수 있을까?

 

그래서 심지어 어떤 뜻 있는 불교학자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그 마음에 대해 다시 한번 生覺해 보자고 提言하기도 한다.

과연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면 그것은 너무 便宜的 解釋이지 않느냐는 疑問이다.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왜 마음이 부처라 했을까?

初期 禪宗의 歷史를 기록한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를 보자.

이 마음이 부처요 이 마음이 부처를 부린다.

부처가 바로 이 마음이요 마음 밖에 달리 부처가 없음을 마땅히 알라

(是心是佛 是心作佛 當知佛卽是心, 心外更無別佛也)

 

마음이란 무엇일까?

혜가는 달마대사가 불안한 그 마음을 찾아보라고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마음이 어디 있는지, 어디 붙어 있는지 찾으려 해도 도무지 그 마음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마음은 나를 움직이는 生命의 뿌리이기도 하다.

唯識佛敎에서는 그 마음을 식(識)이라 한다.

요즘말로 말하자면 意識이다. 불교적으로 말해서 이 意識이 없으면 生命도 없다고 할 것이다.

물론 識이라 할 때 識은 저 深層意識이나 無意識까지 包含하는 精神作用이다.

그러한 모든 것을 마음이라 하고

本來 이 마음에는 淸淨한 佛性이 숨쉬고 있다고 불교에서는 강조한다.

 

禪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禪에서 마음은 絶對 主體를 일컫는다. 그것은 生命이고 靈性이며 創造力이기도 하다.

마음엔 인간적인 따스함, 발고여락(拔苦與樂)의 大慈大悲, 더불어 기뻐하는 歡喜, 躍動 등이 담겨 있다.

그 마음은 對相化할 수 없으며 밖에서 찾을 수 없다.

밖에 있다면 우리는 安樂과 平和를 위해 外部 對相이나 神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사실 佛敎와 여타 有神論的 宗敎와 다른 점은

삶의 安樂과 平和, 眞情한 幸福을  마음안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저 너머에 존재하는 神에 依存해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眞情한 나를 강조하고,

그 眞情한 나를 形成하는 마음에 焦点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代身할 수 없다. 내 마음을 代身할 수는 없다.

삶의 主體는 나이며 내 마음이다.

 

아울러 이 마음이란 虛空과 같이 限界와 差別이 없으며 더러움이 없고 生起거나 消滅하지 않는다.

마음은 淸淨하여 執着할 게 없다. 잃고 얻음도 없으며 안과 밖도 없다. 한마디로 境界가 없는 것이다.

확 트여 活達하며 宇宙에 充滿하다.

그렇기에 이 마음으로 森羅萬象과 어우러지며 서로 生命의 숨결을 나눈다.

그래서 마음이요 한 마음이기도 하다.(萬法一切가 波動의 波長으로 連結되어있는 한몸/한마음)

또한 마음은 自由自在하다. 어디에도 拘束되지 않는다.

神에게도 부처에게도 어떤 無所不爲의 權力者에게도 拘束되지 않는다.

無限하게 自由롭고 걸림이 없어 어디에도 依存하지 않는 것이다.

홀로 完全히 벗어나 있다. 그것을 독탈무의(獨脫無依)라 한다.

 

마음은 어디에도 依存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創造한다. 一切唯心造다.

이 일체유심조를 禪에서는 '自性이 모든 것을 能動的으로 만들어낸다'고 表現한다.

自性이나 마음이나 같은 뜻이다.

마음이 능조자(能造者)라는 것이다.『육조단경』에 나오는 말이다. 거기서 말한다.

自性은 本來 動搖가 없어, 萬法을 能動的으로 만들며(能生萬法), 萬法은 自性을 떠나지 않는다.

[何期自性本自淸淨 何期自性本不生滅 何期自性本自具足 何期自性本無動搖 何期自性能生萬法]

 

그런데 우리는 이 마음(自性)을 生覺으로 그려내 對相化할 수 없다.

對相化된 마음이라면 그 마음은 사람들의 先入見에 依해서 汚染된 마음이다.

眞情한 마음은 生覺을 떠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안과 밖을 떠나 있다.

마음은 단순히 안(內)도 아니며 단순한 밖(外)도 아니다. 오히려 안의 안이며,

밖의 밖이다.

마음은 너와 나가 나누어지기 以前의 眞情한 自己이며 나와 世上이 함께 어우러

지는 한 生命, 한 살림이다.

이러한 마음은 결코 獨線的이거나 나이브하거나 觀念的인 그런 主體가 아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고 包括하면서 眞情한 自己로 活動한다.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내거나 限定될 수 없기 때문에 무상(無相)의 自己요

매일매일 새로워지며 生命, 삶, 世界를 創造해 나가는 自己다. 

그때문에 마음을 絶對 主體라 하는 것이다.

 

卽心是佛이다. 마음이 부처다.

그러나 그 마음은 觀念이나 生覺이 아니고 實踐이자 體驗이며 改革이고 完成

이기도 하다.

스스로 만져보고 마셔보아야 그것이 딱딱한지, 차가운지 體得할 수 있으며

그 體驗에는 質的인 變化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곧 바로 온 몸으로 體現되고 實證되지 않는다면 卽心是佛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해서 觀念 속에 머물러 있거나 生覺으로 그것을 이리저리

헤아려 規定한다면 부처(마음)의 자리에서 십만팔천리 멀어진다는 얘기다.

 

自身의 마음에 파릇파릇 숨 쉬고 있는 이 부처를 찾고 보고 온 몸으로 實現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부처의 옷을 입고 부처의 밥을 먹고, 부처의 行動을 할 것이니, 그대로 부처다.

무문 혜개(無門慧開) 禪師의 말이다.

대매법상(大梅法常, 752~839)이 마조선사를 찾아가 묻는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

마조선사의 이 한마디 말에 大梅는 그 자리에서 大悟한다.
대매법상은 바로 그 자리에서 卽心是佛을 온 몸으로 보고(觀) 實現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 이 瞬間에서 

나의 一擧手一投足이

부처의 마음(意)이며

부처의 行爲(身)이고

부처의 言語(口)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명석/조계종 포교원 신도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