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루공덕의 열매

2013. 5. 23. 20: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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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공덕의 열매

 

 

 

 

불자님들

오늘은 음력사월 초하루입니다.

오늘부터 7일간 부처님오신 날을 맞아 봉축기도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우치신 도리가

중도임을 다시 한 번 되새겨

우리도 중도의 삶을 실천해 보기 위해 함께 공부하도록 합니다.

 

 

◇ 부처님께서 출가 후 6년간 혹독한 고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6년 고행에도 큰 도를 이루지 못하고 쓰러지셨습니다.

수자타 처녀아이가 준 우유죽으로 정신을 차리신 부처님은

어느날 네란자 강가에서 스승과 제자가 배를 타고 가면서 하는 대화내용을 듣습니다.

 

“거문고를 탈적에 줄을 너무 당겨도 소리가 잘 나지 않고,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하여도 소리가 잘 나지 않는 법이다.

줄을 적당하게 당겨야 소리가 가장 잘 나게 되느니라....”

 

부처님께서 순간 ‘내가 극심한 고행을 해야 도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에 집착한

나머지 큰 깨달음을 얻지 못했구나!’라고 스스로를 되돌아보시고

네란자강가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7일간 용맹정진 끝에 위없는 큰 깨달음을 여셨습니다.

바로 중도(中道)의 도리를 깨우치신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시고 최초의 가르침은 출가 전 부처님의 시종인 5비구였습니다.

“나는 중도를 얻었노라! 쾌락도 극심한 고행도 둘 다 버렸느니라!”

이렇게 선언하시고 사성제(고집멸도)와 팔정도(멸에 이르는 길)를 설했습니다.

이 사성제와 팔정도의 근간이 바로 중도인 것입니다.

즉 이 중도를 상황에 맞게 설한 것이 연기법이며, 사성제와 팔정도도 중도를 근간으로 한

연기의 이치를 설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을 중도로 보신 것입니다.

다음은 중도의 삶에 대한 어느 구도사문(求道沙門=수행스님)의 글을 봅니다.

 

 

중도(中道)의 삶

중도의 삶은 영원한 안락이다.

좋아하는 마음도 갖지말라.

싫어하는 마음도 갖지말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면

좋아하는 것이 나를 떠날 때 마음이 괴롭고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면

싫어하는 것과 만날 때 또한 괴롭다.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둘 다 버리면

그대로 여여한 부처님의 삶이다.

 

 

내가 옳다는 마음을 갖지말라.

남이 그르다는 마음도 갖지말라.

내가 옳다는 마음을 가지면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일어나고

남이 그르다는 마음을 가지면

내가 우월하다는 마음이 일어난다.

우월감 업신여김 모두가 생사의 인(因)이다.

옳다는 마음, 그르다는 마음 둘 다 버리면

그대로 여여한 부처님의 삶이다.

 

 

나의 현실이 고통과 곤궁에 시달리더라도

나보다 못한데 견주면 자족한 줄 알게 된다.

자족함을 깊이 느껴

부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돌려라.

감사한 마음이 생활 속에 뿌리내리면

반드시 감사할 일만 일어난다.

 

 

부처님의 가르침 듣고 배우기를

콩나물에 물 주듯이 하여라.

콩나물에 물을 주면 금시 다 새어 버리지만

그래도 주고 또 주면 콩나물이 자라난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금방 듣고 돌아서면 잊어버려도

그래도 듣고 또 들으면

우리의 삶은 점점 풍요로워진다.

 

 

◈ 중도의 도리를 쉽게 설명한 지혜로운 신하

   양변은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

 

양변은 홀로 존재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상대되는 연을 만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중도의 도리를 쉽게 설명한 지혜로운 신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국왕이 선(­­­­­)을 하나 그어놓고 신하들에게 명하기를,

“아무도 이 선에 손을 대지 말고 작게 만들어 보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두 전전긍긍하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한 신하가 선뜻 나섰습니다.

국왕에게 나아가 왕이 그은 선 아래에 더 크게 선을 그었습니다.

<국왕> ---------

<신하> --------------

그러자 국왕이 그은 선이 작아졌습니다.

국왕은 지혜로운 신하를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크다는 것과 작다는 것의 양변이 항상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서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상대되는 연을 만날 때 비로소 크다 작다 하는 양변이 성립됩니다.

 

이 원리는 모든 양변에 다 적용되며, 일체만법에도 다 적용이 됩니다.

일체만법을 일체법·제법·만유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일체만법은 천지우주·삼라만상·산천초목·강·바다·무슨 주의(사상·이념)·모든 양변·유정(사람·축생 포함)·무정 등 그야말로 모든 존재를 다 통틀어서 말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으며,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존재 논리는,

모두 인연에 의한 연기의 작용입니다.

 

  이 연기의 작용이 중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중도연기라 합니다.

우주만유가 다 중도의 연기 작용으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모양은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어서 모두가 실답지 못한 허망상이기 때문에 허망상을 붙들고, 나다 너다, 밉다 곱다, 좋다 싫다 하며 애착·집착하지 말고 양변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 허망상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한 우리의 고뇌는 끝이 없습니다.

사막길에서 목마름에 시달리는 행인이 허망한 신기루를 보고 찾아가다가 끝내 지쳐 죽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양변을 떠나 중도의 삶을 살면 가만히 중도에 계합이 되어 영원한 안락, 열반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중도의 자리는 대 안온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도의 삶을 사는 의의입니다.

 

 

◈ 중도의 삶

중도의 삶이란 중도의 원리에 어긋남이 없이 참다운 이치 그대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부처님이나 조사 스님들께서는 중도실상을 깨달으셨기 때문에, 평상시의 삶 그 자체가 온전히 그대로 중도의 삶입니다.

 

바로 평상심이 도(道)라고 하는 것입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라고 하는 것은, 일체 분별심이 없이 인위적으로 조작이 없어 천진에 계합이 된 여여한 마음을 도라고 합니다.

여여한 마음은 진리 그대로의 변함없는 참모습을 말합니다.

 

반대로 범부들은 항상 사량(思量, 생각하며 헤아림) 분별하고 인위적으로 마음을 지어서,

집착심에서 비롯된 분별망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범부들의 평상심은 도가 못됩니다.

 

그러므로 하루속히 중도의 이치를 이론적으로나마 잘 배워서 깊이 인식하여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범부심을 벗어버리고, 나도 남도 크게 유익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불자로서 마땅히 부처님의 행을 본받아 중도의 삶을 실천해 나아가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이 대자재하고 영생열반의 안온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삶을 본받으면서 성장하여 어엿한 성인이 되면, 부모님께 은혜도 갚고 자립하여 당당하게 살아가듯이, 우리도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생활해 나아가면 점점 부처님의 경계에 도달하고, 거기에서 얻은 평화와 행복을 이웃과 사회에 나누면 부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중생이 본래로부터 부처님과 똑같은 무량한 공덕과 위대한 능력을 다 갖추고 있으며, 본래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고 그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신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은, 천만번의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못다 하는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중도의 삶을 생활화 하도록 노력하며, 끝없이 자기 자신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향상시키고 변화시켜, 진정한 불자로 거듭거듭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중도의 삶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구제하면 남도 구제하게 되지만, 자신을 구제하지 못하면 남도 구제하지 못합니다.

갈수록 물질만능화 되고 참다운 인간성이 메말라 정신적인 고통과 불안이 심한 이 시대에, 오직 중도의 삶을 실천해 나가는 길만이 나를 구제하고 사회와 인류를 구제하는 길이라는 것을 각성하자는 의식개혁 운동이, 뜻있는 스님들에 의하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선두에 서서 이 중도의 삶을 실천하여 그 삶이 온 세상에 뿌리내려, 전쟁이 없고 시비와 갈등, 반목과 질시가 없는 행복의 꽃이 피고, 평화의 열매가 맺는 세상이 되도록 우리가 먼저 노력합시다.

 

◈ 중도의 삶에 어긋난 삶

  중생의 삶은 항상 너와 내가 있고, 선과 악이 있고, 옳고 그름이 있고, 좋고 나쁜 것이 있고, 사랑과 미움이 있고, 부귀와 빈천이 있고, 귀하고 천한 것 등이 있어서 항상 이것과 저것이라는 양변의 분별심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나에게 좋으면 이것을 취하여 애착하고 집착하며, 나에게 싫으면 저것을 버리는 취사심이 있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취사심으로 분별하여 일으키는 인위적으로 지어가는 삶입니다.   이 조작된 삶은 언제나 고통과 번민과 불안이 따릅니다.

부자는 많은 돈과 재산을 취하여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얼마나 마음이 불안합니까?

  가난한 사람은 항상 가난에 시달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그 가난을 버릴려고 얼마나 마음이 번뇌롭습니까?

중생 살림살이가 가져도 불안, 못 가져도 불안, 언제나 괴로움과 번민의 연속입니다.

 

인기와 명예와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진 사람은 언제 그것들이 추락하여 나를 떠날까 항상 노심초사하며,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애를 씁니다.

특히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잃어버릴까 봐 별별 암투를 다 벌이며, 그것을 지키려고 갖은 번민을 다 일으킵니다.

  권력을 갖지 못한 정치인들은 권력을 쟁취하려고 갖은 모략으로 항상 마음은 번민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세속의 욕락이 영원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영원한 줄로 착각하고 그것을 집착하여 취하려고 하는 데서 고통과 번민이 일어납니다.

 

 

◈ 불교를 믿는 목적은 모든 사람이 생사의 고통을 여의고 열반락을 얻자는데 있는데,  이 양변을 버리지 못하고 취하고 버릴 것이 있는 한에는 영원한 안락은 멀고 먼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고 차별하여 고정관념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것에 구속되어 늘 마음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고정관념으로 찌들은 집착심을 과감히 놓아버리는 삶, 중도의 삶을 살도록 우리는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할 줄로 압니다.

  일체법의 본성은 실체가 없으므로 허망하다 하며 공(空)이라 합니다.

우주만유가 현재는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도연기법에 의해 인연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연의 힘이 다하면 다시 공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주만유,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볼 때 사람이니, 축생이니, 달이니, 별이니, 산이니, 꽃이니, 나무니, 하늘이니, 땅이니 하는 것으로 분별하여 차별한 마음으로 모양을 보지 말고, 모든 존재를 중도로 관하여 하나의 평등심으로 대하는 것을 중도의 삶이라 합니다.

 

 

<부처님오신 날 법보 시 : 무루공덕의 열매에서>

 


     자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