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30. 19:02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처님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다
멘토와 멘티
모두 다 힐링(healing)을 말하는 시대이다. 거리에서 “8090 힐링콘서트”라는 플레카드를 볼 수 있는데, 치유자는 가수나 개그맨들이다. 8090 세대로서 대학을 졸업하였으나 취업을 하지 못하여 절망하는 80년대생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90년대생을 대상으로 하여 웃음을 선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절망하는 이삼십대를 대상으로 하여 크게 성공한 사람도 있다. 안철수의원이 대표적이다. 대선을 앞두고 수 십 차례 청년을 대상으로 한 ‘청춘콘서트’를 말한다. 대학을 졸업해도,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취업이 되지 않아 절망하는 세대를 향하여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처럼 힐링이라는 말은 콘서트라는 형식으로 이미 보편화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스님들의 힐링이 회자 되고 있다. 강연이나 방송등 메스컴에서 잘 알려진 유명스타스님들이 주인공들이다. 대중적인 인지도를 바탕으로 한 이들 스님들이 법문을 하면 구름청중을 몰려 든다. 그래서 스님의 한 마디 말에 감명 받고 마음의 위안으로 삼는다. 스님의 법문 자체가 치유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에서는 이들 스님들에 대하여 ‘힐링멘토’ 또는 ‘국민멘토’라는 타이틀을 붙여 주었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힐링 또는 치유라는 말이 대유행하고 있다. 주로 치유자격인 ‘멘토’가 있고 치료 받는 자에 해당되는 ‘멘티’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멘토와 멘티의 관계에 대해서만 힐링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멘토이고 부처님의 말씀이 힐링이다!
힐링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멘토를 가질 수 없다. 마치 모든 불자들이 스승을 가질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특히 사자상승을 원칙으로 하는 선불교 전통에서와 같이 모든 불자들은 자신을 직접 지도하는 스승을 가질 수 없다. 설령 불자들이 스승이나 멘토가 있다고 할지라도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시간을 낼 여력이 없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누구에 의지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하루 하루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부로 시간을 내서 심산유곡에 있는 산사에 찾아가 법문을 들을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가장 가깝게 접할 수 있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히 경전이다. 그것도 우리말로 번역된 빠알리니까야이다.
빠알리니까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팔만사천이나 되는 법문 안에 인생에 대한 해법이 있는 것이다. 팔만사천법문이 오로지 마음 ‘심(心)’자 하나에 있다고 하여 내칠 일이 아니다. 팔만사천법문안에 지금 고민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정답이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사무량심이다. 왜 사무량심인가?
부처님은 깨달음에 대해서만 말씀 하신 것이 아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는 말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의사로서 부처님이다. 특히 정신과 전문의 의사로서 부처님이다. 그런 부처님의 말씀은 치유능력이 있다. 지금 당장 법구경 게송 몇 개만 읽어 보아도 근심과 걱정 그리고 후회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의 말씀은 치유효과가 있다. 부처님이 멘토이고 부처님의 말씀이 힐링이 되는 것이다.
자애명상이 있는데
사무량심은 자애(慈, mettā), 연민(悲, karuṇā), 기뻐함(喜, muditā), 평정(捨, upekkhā) 이렇게 네 가지 마음을 말한다. 이를 한자어로 자비희사(慈悲喜捨)라 한다. 그런 사무량심을 다른 말로 거룩한 마음가짐이라 한다.
사무량심의 어원은 빠알리어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āra)이다. 이는 brahmā(梵, 거룩한)와 vihāra(住, 거주, 머묾)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사범주(四梵住)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무량심은 어떻게 활용되어야 할까?
사무량심을 구성하는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 중에 가장 핵심은 자애이다. 그래서 시중에 자애명상이 큰 인기이다. 누구나 자애명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loving-kindness-meditation-focus
메타기도 사례 1
그런데 어느 사이트에서는 자애명상에 대하여 ‘메타기도’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자애명상을 하면서 자애를 방사하는 것에 대하여 소원성취를 이루려는 기도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그래서 마치 절에서 백일기도 하듯이 ‘100일 소원성취 메타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예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저는 100일 소원성취기도 시작하여 100일 되기 전 84일째,90일째 소원성취했습니다. 아들이 원하는 미국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기도는 한미디로 "아! 이렇게 하는거구나!" 알게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기적, 대박이라고 하지만 아닙니다! 한치의 오차 없는 철저한 수행지도로 이끌어낸 정신과 물질 현상의 과학입니다. 과학의 특성은 같은 과정을 그대로 밟으면 누가해도 같은 결과를 낸다는 것입니다. 이번 기도로 저는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기쁨! 같은 과정을 밟으면 같은 결과를 낸다는 것은' 인과법칙'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희망입니다. 소원성취의 공개된 비밀! 그 중의 하나는 메따입니다. 이제 우리와 함께 지역메따 (이 화면 왼쪽 메따-꾸띠 (서울, 경기)에 들어오셔서 메따를 시작합시다. 소원성취하고 싶으신 분은! 이 길을 보여주신 OOO스님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여러분 모두 소원성취로 기쁘고, 행복하고, 안전하시길 메따합니다.
이 기도문을 보면 절에서 발원하는 기도와 다를 바 없다. 절에서는 이른 바 4대기도라 하여 건강, 학업, 취업, 사업을 성취하는 발원이 있다. 위 예문은 학업성취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메타(자애)기도라 한다.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자애의 방사를 응용한 것이라 보여진다.
빠알리니까야에서 자애에 대한 정형구가 있다. 일반적으로 “자애로운 마음으로 한쪽 방향을 충만시키고 마찬가지로 두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세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네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경우 모든 곳에 일체의 세계를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고 원한 없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충만시킵니다.”라는 정형구로 표현된다.
메타기도 사례 2
그런데 이 정형구가 마치 소원성취용 기도문처럼 사용된다는 것이다. 모든 방향으로 자애의 마음을 방사하였을 때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메타기도이다. 이런 변형된 기도문의 또 하나의 실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메따도 저와 저의 신랑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안그랬지만 수행을 하면서 이제는 이번달은 임신이 될까? 이러면서 한 번 씨~익 웃어 버립니다.. (임신녀)
임신이 잘 되지 않는 여인이 남편에게 메타(자애)기도를 날린 것이다. 스님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메타(자애)기도를 하였더니 드디어 임신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 임산부는 스님에게 감사의 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스님 !! 오늘 병원에서 초음파로 아기집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스님께서 열심히 메따해주신 덕분입니다. (임신녀)
고대하던 임신이 된 것에 대하여 스님에게 감사하고 있다. 스님이 열심히 메타(자애)해준 덕분에 임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도를 배격한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도라는 말은 없다. 빠알리니까야 어느 곳을 찾아 보아도 기도를 하여 소원성취하였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오히려 기도를 배격하였다. 이는 빠알리니까야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촌장상윳따(Gāmaṇī Saṃyutta, S42)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먼저 촌장이 부처님에게 묻는다.
[촌장] “세존이시여, 서쪽지방에 사는 사제들은 물병을 들고 쎄발라 꽃으로 화환을 하고 물에 들어가 목욕재계를 하고 불의 신을 섬기는데,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들어올려 이름을 부르고 하늘나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세상의 존귀한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께서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까?”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촌장상윳따(Gāmaṇī Saṃyutta, S42)에는 여러 분야의 직업을 가진 촌장이 등장하여 부처님에게 궁금한 것에 대하여 묻는다. 질문자 중에는 적대적인 의도를 가진 자도 있었으나, 부처님이 그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주의 깊은 분석과 합리적인 논박으로 그들을 압도하자 그들은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
경에서 어느 촌장이 부처님에게 ‘천도’에 대하여 물어 보고 있다. 부처님 당시 외도들이 행하는 천도의식에 대한 것이다. 그런 용어가 경에서 ‘죽은 사람을 들어올려( mataṃ kālakataṃ uyyāpenti)’라는 표현이다. 이는 각주에 따르면 ‘죽은, 돌아간 자를 가지고 나왔다.’라는 뜻이다. 또 경에서 ‘하늘나라로 인도합니다 (saggaṃ nāma okkāmenti)’라는 뜻은 “하느님(범천)세계로 가자, 하느님 세계로 가자”는 뜻이라 한다. 하느님 세계는 범천을 말한다. 외도들은 죽은 자에 대한 의식을 행하여 범천에 태어 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천도의식을 한다고 하여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와 육사외도 등 수 많은 사상이 난립할 때 촌장은 이런 천도의식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하여 부처님에게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무어라 답하였을까? 부처님은 촌장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반문한다.
[세존] “그렇다면 촌장이여, 거기에 대해 내가 그대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옳다고 생각한다면 대답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지거리를 하고, 꾸며대는 말을 하고, 탐욕스럽고, 성내는 마음을 가지고, 삿된 견해에 사로잡혔다면, 그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지어다’ 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은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 까닭에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로 태어날 수 있습니까?”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촌장에게 오계도 지키지 않은 자에게 천도의식을 행하여 하늘나라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묻는다. 살인을 저지른 자에 대하여 천도의식을 행한다고 하여 범천에 태어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자 촌장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부처님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
바라는 기도
이렇게 문답식으로 대화를 한 부처님은 하나의 예를 든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세존] “촌장이여,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커다란 큰 돌을 깊은 호수에 던져 넣었다고 합시다.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그것을 두고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 라고 기도하고 찬탄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커다란 큰돌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합장하고 찬탄하고 순례한 까닭에 물 속에서 떠오르거나 땅위로 올라올 것입니까?”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역시 부처님이 반문하여 되묻고 있다. 커다란 돌이 호수에 빠져 있는데, 이를 기도한다고 돌이 떠 오를 수 있겠는가에 대한 바문이다. 이에 대하여 촌장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부처님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
저주하는 기도
그러자 부처님은 또 다른 예를 들어 비유로서 설명한다.
[세존] “촌장이여, 예를 들어 버터가 든 단지나 기름이 든 단지를 깊은 호수에 집어넣고 부수어 봅시다. 그러면 조각이나 자갈이 되어 밑으로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 때에 버터나 기름은 위로 뜨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와서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라고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한다면 촌장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버터나 기름이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한 까닭에 잠기거나 물밑으로 가라앉거나 바닥으로 가라앉을 수 있겠습니까?”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두 번째 예를 든 것은 버터와 기름이다. 버터와 기름은 물보다 가볍기 때문에 호수에 뜰 것이다. 그런데 이를 보기 싫다고 하여 기도하여 호수 바닥으로 가라 앉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큰 돌이었고, 두 번째 비유에서는 버터와 기름이다. 전자의 경우 “커다란 돌이여, 떠올라라.”이었다면, 후자의 경우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 버터여, 기름이여, 잠겨라”이다.
이는 선처와 악처를 대비하여 설명한 것이다. 전자는 오계를 지키지 않아 악처에 태어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한다고 하여 선처에 태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후자는 오계를 지키는 생활을 하여 선처에 태어 날 것임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저주하는 기도를 하여 악처로 떨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기도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계를 준수하고 십선행을 하면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Evameva kho gāmaṇī yo so puriso pāṇātipātī adinnādāyī kāmesu micchācārī musāvādī pisunāvāco samphappalāpī abhijjhālū vyāpannacitto micchādiṭṭhiko, kiñcāpi taṃ mahājanakāyo saṅgamma samāgamma āyāceyya thomeyya pañjaliko anuparisakkeyya: "ayaṃ puriso kāyassa bhedā parammaraṇā sugatiṃ saggaṃ lokaṃ upapajjatu" ti. Atha kho so puriso kāyassa bhedā param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jjeyya.
“촌장이여,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간질을 하지 않고, 욕지거리를 하지 않고, 꾸며 대는 말을 하지 않고, 탐욕스럽지 않고, 성내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녔다면, 그에게 많은 사람이 모여와서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날지어다’ 라고 기도하고 저주하고 합장하고 순례하더라도 촌장이여, 그 때에 그 사람은 몸이 파괴되고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날 것입니다.”
(Asibaddhakaputtasutta-아씨빤다까뿟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십선행(十善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십선행을 하면 누군가 저주의 기도를 하여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즉 악처에 보내려 하여도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저주와 관계 없이 오계를 준수하고 십선행을 하는 자는 죽어서 좋은 곳, 즉 천상에 태어날 것이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보았을 때 기도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 악처에 떨어진 자는 평소에 악행을 하였기 때문에 그 과보로 악처에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후손이 기도한다고 하여, 천도재를 지내 준다고 하여 천상에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평소에 오계를 준수하고 선행할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올바른 견해’를 가질 것을 강조하였다. 올바른 견해란 다름 아닌 ‘사성제’이고 이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부처님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다
촌장상윳따에서 부처님의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모든 것이 명백하다. 부처님은 결코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업자득’을 강조한 것이다. 비록 냉정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자신이 받는 것이다. 기도한다고 하여. 축원하다고 하여, 또는 저주한다고 하여 결코 소원성취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초기불교를 전공한 스님은 멧따(자애)에 대하여 메타기도라 하여 소원성취용으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아들의 학업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메타기도를 날려서 소원을 성취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또 어는 임산부는 신랑에게 메타기도를 하였더니 임신이 이루어져 소원성취하였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빠알리니까야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 보았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들이다.
사이비(似而非) 자애명상
자애(멧따)명상이 소원성취 기도로 이용되는 것은 넌센스이다. 더구나 자애를 사방, 십방으로 방사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소원성취를 이룬다는 말은 허황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육각수의 예를 들어 ‘물은 알고 있다’라는 책을 인용하여 기도의 효력에 대하여 설명하기도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도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애명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이비가 있다. 사이비(似而非)에 대한 인터넷국어사전을 보면, “겉으로는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가짜”라고 설명되어 있다. 진짜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면 가짜라는 것이다. 시중에서 말하는 힐링을 목적으로 한 자애명상,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한 메타기도는 알고 보면 모두 사이비라 볼 수 있다. 왜 사이비인가?
외도들도 자애명상을 한다는데
빠알리니까야를 읽다 보면 종종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그것은 요즘의 상황과 너무나 들어 맞는 이야기들이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시중의 치유명상, 메타기도도 그런 것 중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사이비멧따수행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멧따경(Metta Sutta, 자애의 경, Sn46:54)가 그것이다. 경의 도입부에 따르면 외도들도 멧따수행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유행자라 불리는 외도가 부처님의 멧따수행 기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유행자들] “벗들이여, 수행자 고따마는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가르침을 설합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그대들은 마음을 오염시키고 지혜를 약화시키는 다섯가지 장애를 버려라. 그리고
1) 자애의 마음으로 동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남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서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북쪽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자애의 마음으로 위와 아래와 옆과 모든 곳을 빠짐없이 가득 채워서,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한량 없고 악의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일체의 세계를 가득채우라.
2) 연민의 마음으로… 3) 기쁨의 마음으로… 4) 평정의 마음으로… 벗들이여, 우리도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가르침을 설합니다.
(멧따경-Mettasutta-자애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4, 전재성님역)
외도 유행자가 한 말이다. 부처님이 설한 자애명상에 대한 정형구이다. 이런 정형구는 연민, 기뻐함, 평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외도 유행자가 왜 부처님의 자애명상에 대하여 언급하였을까? 이는 경에서 외도가 “벗들이여, 우리도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가르침을 설합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애명상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전매특허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의 제자들만 자애명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외도)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짐짓 세존의 설법을 듣고
하지만 이는 겉으로만 아는 것이다. 사이비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치의 경(S46:52)의 각주의 설명을 빌면 왜 사이비인지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Srp.III.168 에 따르면, ‘이교도의 집회에서는 다섯 가지 장애를 버려야 한다든가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아야 한다든가 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숲으로 가서 대중의 외곽에 서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고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하여, 짐짓 세존의 설법을 듣는다. 그리고 사문 고따마가 이것을 버리고 이것을 닦으라고 설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숲으로 가서 숲속에 자리를 마련하고 시자와 봉사자에 둘러 싸여 머리를 들고 몸을 굽혀, 자신에게서 생겨난 앎으로 근거를 꿰뚫어 보여 주는 것처럼,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라고 이야기한다.’
(이치의 경 S46:52, 각주)
멧따경(S46:54)은 제46상윳따인 ‘깨달음의 고리의 모음’ 안에 있다. 역시 같은 모음 안에 있는 것이 ‘이치의 경(S46:52)’이다.
이치의 경의 각주에 외도의 행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부처님이 대중설법을 할 때 외도의 지도자가 먼 발치에서 모른 척하고 듣는 것이다. 그리고 들은 내용에 대하여 마치 자신이 깨달은 것처럼 신도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경계를 뛰어 넘기 때문이다.”
멧따경에서도 한 외도가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들은 자애명상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과 똑 같은 내용이다. 이런 말을 들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경에 따르면 “그러자 그 수행승들은 그 이교도 유행자들이 한 말에 기뻐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았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 대신 제자들은 부처님께 외도로부터 들은 말을 자초지종 설명하였다.
이 말을 들은 부처님은 무어라 말하였을까?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처럼 이교도의 유행자들이 말하면 이와 같이 ‘벗들이여, 그런데 어떻게 자애로운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으며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탁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결과는 무엇이고 그것의 궁극은 무엇인가? 연민… 기뻐함… 평정…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질문받으면 이교도 유행자들은 어쩔 줄 몰라 더욱 곤혹해 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그들의 경계를 뛰어 넘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여래나 여래의 제자나 그것에 대하여 배운 자 이외에는 이러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자를 보지 못했다.”
(멧따경-Mettasutta-자애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4, 전재성님역)
외도들도 자애명상을 말하지만 수행을 하는 궁극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어보아 했어야함을 말한다. 왜냐하면 답을 하지 못하고 쩔쩔 맬 것이기 때문이다.
외도들이 부처님의 대중설법을 먼 발치에서 듣고 부처님이 말씀 하신 자애의 방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본질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은 그들의 경계를 뛰어 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겉으로만 시늉만 낼 뿐 왜 자애명상을 하는 지에 대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애로운 마음에 의한 해탈은 청정함을 그 최상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자애명상을 하는 이유에 대하여 무어라 말씀 하셨을까? 부처님은 “어떻게 자애로운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으며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탁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결과는 무엇이고 그것의 궁극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칠각지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런 내용 중에 염각지에 대한 것을 보면 “멀리여읨에 기초하고 사라짐에 기초하고 소멸에 기초하여 완전히 버림으로서 열반으로 회향하는, 자애로운 깨달음 고리를 닦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애명상의 목적은 열반으로 회향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 대하여 외도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것은 그들의 경계를 뛰어 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애수행의 목적이 무언가 도모하려는 기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bhikkhave, mettā cetovimuttiṃ vadāmi idha paññassa bhikkhuno uttariṃ vimuttiṃ appaṭivijjhato.
수행승들이여, 자애로운 마음에 의한 해탈은 청정함을 그 최상으로 삼는다고, 나는 여기 현명하지만 최상의 해탈을 꿰뚫지는 못한 수행승들을 위해 말한다.
(멧따경-Mettasutta-자애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4, 전재성님역)
자애수행을 하는 목적이 최종적으로 해탈과 청정에 있음을 말한다. 이는 지혜는 있지만(idha paññassa), 아직 최상의 가르침을 꿰뚫지 못한 자(uttariṃ vimuttiṃ appaṭivijjhato)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렇게 개발된 것이 자애명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연민, 기뻐함, 평정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동사섭(同事攝)이 있는데
자애명상과 유사한 것이 있다. 동사섭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동사섭이란 무엇일까? 인터넷 검색에 따르면 ‘동사섭(同事攝)이란 말은 불교의 사섭법(四攝法)중의 한 개념’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섭법은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을 말한다. 베푸는 것이 보시섭이고, 자애어린 말이 애어섭이고, 이로운 일로 도와 주는 것이 이행섭이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것이 동사섭이라 한다.
이런 사섭법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정 무정의 개개가 낱낱이 우주의 주인공이되 낱낱이 서로 평등하게 어우러져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때만 존립할 수 있으니 우주 전체가 한 생명체일 수밖에 없다는 일체(一體) 사상을 뜻매김하여 쓰고 있다.”고 한다.
사섭법은 대승보살사상에 기초한 전형적인 대승불교적 발상이다. 더구나 우주적 개념까지 도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법계연기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서로가 서로를 창조하는 상즉상입의 사사무애적인 관점으로 설명된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에서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무량심은 사섭법과 다르다. 그것은 세계를 보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이라는 것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감각대상이 감각능력과 만났을 때 접촉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연기적 세상을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따라서 당연히 나를 중심으로 해서 세상이 돌아 갈 수밖에 없다. 내가 주체가 되는 세상을 말한다. 그러나 삼천대천세계를 말하는 대승불교에서는 내가 주체가 될 수 없다. 삼천대천세계안에 속해 있는 하나의 객관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 이처럼 세상을 보는 눈이 서로 다르다.
이처럼 세상을 보는 눈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멧따수행을 멧따기도로 개발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메타기도를 하면 소원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속으로 십방으로 자애를 방사하면 그 마음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대승불교적 발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기도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메타기도를 사이비로 본다. 마치 외도가 부처님의 대중설법을 먼발치에서 모른 척 듣고 신도들에게 활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본다. 본질은 모른 채 겉모양만 가져 간 것이다.
해탈과 청정을 이루기 위한 수단
메타기도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기도는 사이비이다, 또 자애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치유라는 방편으로 행해지는 힐링(healing) 역시 사이비이다. 전형적인 양두구육(羊頭狗肉)이다.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실제로는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다. 이는 겉으로는 훌륭한 듯이 내세우지만 속은 보잘것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다름 아닌 사이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멧따명상을 하는 것은 기도를 위한 것도 아니고 치료를 목적으로 한 힐링도 아니다. 멧따명상은 해탈과 청정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애(慈, mettā), 연민(悲, karuṇā), 기뻐함(喜, muditā), 평정(捨, upekkhā) 이렇게 네 가지는 40 가지 사마타 명상수행의 주제에 속한다. 이와 같은 명상수행을 하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kāmarāga), 분노(b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흥분과 회한(uddhaccakukkucca), 의심(vicikicchā) 이렇게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궁극적으로 마음의 해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빠알리니까야에서의 사무량심에 대한 설명이다.
따라서 멧따수행은 절대로 소원성취용 기도도 될 수 없고 어떤 치료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도 없다. 또 보살정신을 구현하는 사섭법의 의미도 아니다. 멧따수행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게 해주는 사마타 수행의 일종이다.
자신이 청정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청정하게 되었을 때 결국 세상도 청정해진다. 청정한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향내가 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청정해지는 것 자체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굳이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나 역시 여기 남아서 세상의 고난을 없애도록 하소서!”라고 외친 ‘산띠데바’의 보살정신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청정하게 하였을 때 보살정신은 구현되는 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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