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6. 20:2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열반사덕 (涅槃四德) 청화큰스님 |
열반(涅槃)…멸도(滅度)ㆍ불생(不生)ㆍ안락(安樂)ㆍ극락(極樂)ㆍ해탈(解脫) 열반사덕(涅槃四德) 1. 상덕(常德)…상항불변(常恒不變)하여 생멸(生滅)이 없음. 2. 락덕(樂德)…무위안락(無爲安樂)함. 3. 아덕(我德)…신통묘용(神通妙用)이 대자재(大自在)함. 4. 정덕(淨德)…일체구염(一切垢染)을 해탈(解脫)하여 청정(淸淨)함.
열반(涅槃)이라는 말을 풀이하면 멸도(滅度)라, 번뇌를 다 멸하고 생사고해를 건너서 해탈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의미는, 불생(不生)이라, 삼계육도(三界六道)에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욕계(欲界)나 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나 또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ㆍ수라(修羅)ㆍ인간(人間)ㆍ천상(天上)등 그러한 제한된 경계(境界)에는 다시 태어나질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계(聖界)라면 태어나지만, 불성(不聖)인 무명중생도(無明衆生道)에는 태어나질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풀이는 안락(安樂)이라, 번뇌를 다 멸해버렸으니 안락만 얻는다는 뜻입니다. 안락이란 뜻은 또 역시 극락(極樂)이라는 말입니다. 안락이 한도 끝도 없이 가장 지극(至極)한 안락(安樂)이니까 그것이 극락이겠지요. 또는 해탈(解脫)이라, 번뇌의 결박을 다 풀어버려서 자유자재로우니 일체 신통자재(神通自在)를 우리가 수용(受用)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열반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람이 죽을 때에 불교말로 ‘열반 든다’ 는 말을 합니다만, 이것은 번뇌가 다 멸해 없어져버린다는 말을 좀 비약시켜서 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칙은 이같이 번뇌를 다 없애서 극락에 이르는 것이 열반입니다. 따라서 ‘열반 든다가 죽는다는 말’ 이란 조금 의미가 빗나간 것이지요.
열반사덕(涅槃四德)이라, 열반에 네 가지 덕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불성(佛性) 곧, 부처의 성품이니까 그 덕성(德性)이 한도 끝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미처 거기에 안 가봐서 모르는 셈 아닙니까만, 그러한 불성에 있는 덕성을 음미(吟味)한다고 하면 그 덕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가사,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한, 성자(聖者)의 길을 성취한 분들이 몇 천명 몇 만명이 모여서 몇 백년 동안, 부처님 한테 있는 공덕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다 헤아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도 공덕(功德)이 많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영원적인 순수 에너지에 포함되어 있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금은 대강 느낄 수가 있지 않습니까. 가사, 우리가 우라늄(uranium)에 중성자를 쏘아 분열시키면 원자폭탄이 되는데, 하나의 원자에 포함된 그런 무시무시한 힘을 보십시요. 그것을 생각할 때에 그러한 원자보다도, 보다 더 성능(性能)이 순수하고 근원(根源)이 되어 있는 불성(佛性)에 들어 있는 공덕이란 것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성 공덕을 현대 물리학은 조금씩 증명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많은 공덕을 다 헤아릴 수가 없으니까 간추려서 말씀들을 많이 합니다. 더러는 140불공법(佛共法)이라, 백사십가지로 부처님 공덕을 나열(羅列)한 데도 있고 또, 더 간추리면 18불공법(不共法)이라, 18종으로 부처님 공덕을 나열한 데도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 가장 간추린 것이 네 가지 덕성(德性)으로 구분한 열반4덕입니다.
맨 처음은 상덕(常德)이라, 상주불변(常住不變)하여 생멸(生滅)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몸은 생멸(生滅)이 있으나 참다운 생명은 생멸이 없습니다. 영생(永生)합니다. 생멸이 없다는 말은 영생한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열반(涅槃)은 극락(極樂)이요 해탈(解脫)이라, 또는 불성(佛性)이라, 이런 것인데, 열반 이것이 ‘참 나’ 의 덕(德)입니다. 그래서 열반까지 가야 이제 ‘참 나’ 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반의 덕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이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항상(恒常) 불변(不變)하여, 항시 있어서 변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일체 존재는 무상(無常)한 것인데, 열반은 무상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항시 존재합니다. 이같이 생하고 멸하는 것이 없는 곧,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또는 락덕(樂德)이라, 이것은 무위안락(無爲安樂)한 것입니다. 안락스러운 것이 보통 그냥 재미지고 어떠한 유한적(有限的)인 안락이 아니라, 조금도 변치않는 영생의 안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위(有爲)는 우리가 애써서 받는 것이고, 무위(無爲)는 애쓰지 않고서 그냥 자연적으로 받는다는 말입니다. 번뇌가 녹았으니까 자연적으로, 불교 말로는 법이적(法爾的)으로 받는 안락이 락덕입니다. 부처님의 공덕 즉, 우리 ‘참 나’의 공덕은 그야말로 행복의 뭉치인 것입니다. 사랑의 뭉치요 환희의 뭉치요 행복의 뭉치 이것이 불성 공덕 즉, ‘참 나’ 의 공덕입니다.
그 다음은 아덕(我德)이라, 신통묘용(神通妙用)이 대자재(大自在)하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역시 팔자재아(八自在我)등 아(我)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풀이가 있습니다만, 하여튼 한마디로 말하면 일체 모두를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공중에 날으는 것이나 어떤 어려운 문제를 외우는 것이나 또는 무엇이나 일체 모두를 다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체 모두를 볼 수가 있고, 일체 모든 음성을 다 들을 수 있고, 일체 것에 다 신통자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아덕(我德)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다운 진아(眞我)가 되면 즉,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참다운 도인이 되고 성불(成佛)하면 일체를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정덕(淨德)이라, 일체구염(一切垢染)을 즉, 일체의 때나 또는 물든 것을 다 해탈(解脫)해서 청정(淸淨)하다는 말입니다. 번뇌가 조금도 없고 때묻지 않은 청정한 것이 정덕(淨德)입니다.
열반사덕(涅槃四德)은 우리가 목적하는 성불에 갖추고 있는, 부처에 갖추고 있는, 참 나(眞我)에 갖추고 있는 공덕(功德)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범부지(凡夫地)에 있다 하더라도 내 본바탕은 이같이, 열반사덕이 있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종교와 불교와의 차이를 생각 할 수가 있습니다. 철학이다 종교다 하는 것은 먼저 목적론(目的論)이 어떠한 체계가 서는가, 안서는가? 또는 목적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方法論)이 체계가 서는가, 안서는가? 여기에 따라서 한 철학이나 종교의 우열(優劣)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비방이 아니라, 기독교를 놓고 본다고 할 때, 하느님이라 그러면, 하느님한테 갖추어 있는 덕을 세밀히 풀이한데는 별로 못 봤습니다. 깊이 연구 안해서 잘은 모릅니다만, 그냥 어렴풋이만 말씀했단 말입니다. 또는 하느님한테 가는 길목, 가는 방법도 역시, 십계명(十誡命) 지키고 기도(祈禱) 모신다는 그 외에는 별로 잘 못 봤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우리가 가는 목적이 성불이요, 부처고, 참나, 진아(眞我)인데, 진아에 대한 공덕이 굉장히 세밀히 풀이 되어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 드린바와 같이 보다 더 큰 풀이는 140법이라, 140가지나 부처님 공덕 즉, 우리 신앙 목적을 나열해 있고, 그 다음 더 간추리면 18종으로 부처님 공덕을 나열했고, 가장 간추리면 4덕인데, 4덕도 역시 이렇게 체계가 선 것입니다.
나중에 또 더 알겠지마는 열반사덕(涅槃四德)은 굉장히 체계가 선 것 입니다. 열반경(涅槃經)이란 경은 다른 법문도 있습니다마는 주로 열반사덕을 풀이한 것입니다. 또, 불교는 지금까지 배워서도 우리가 알 수가 있고 또 앞으로 배웁니다마는, 그러한 열반에 이르기 위한 즉, 해탈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도 역시 굉장히 과학적이고 체계가 서 있습니다. 이렇게 목적면이나 또는 방법론이 체계가 서면 그만치 벌써 우수한 종교이고 철학인 셈이지요.
영생불멸(永生不滅)하고 또는 행복이 끝도 갓도 없이 절정(絶頂)을 이루고 또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있고, 할 수가 있고, 들을 수가 있고 말입니다. 또는 청정해서 어떤 것에 조금도 후회도 않고 물들지 않고, 이것이 참 나, 성자의 갖춘 덕입니다. 이것이 대아(大我), 진아(眞我)의 공덕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은, 무아(無我)가 되어야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먼저 망령된 나, 잘못된 나가 없어져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서는 이런 대아(大我)는 개발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무상(無常)을 느껴라’ ‘제법(諸法)이 공(空)이다’ 이런 말씀을 수없이 하는 것입니다.
불교철학은 대체로, 세 단계로 시기(時期)를 나누어서, 시기적(時期的)으로 말합니다. 맨 처음 초기(初期) 법문은 유교(有敎)라, 우리 중생 차원에서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모두 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모두 있다’ 이와 같이 중생 차원에서 알기 쉽게 하는 법문이 유교(有敎)입니다. 그 다음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체가 다 공(空)이다.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망령된 것이고 일체가 공(空)이요 무상(無常)이다’ 이러한 높은 차원에서 모두를 다 부정하는 단계, 이것이 공교(空敎)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이나 금강경(金剛經)이나 그런 경은 주로 공교(空敎)를 말한 것입니다. 바로 본다면 역시, 우리 중생이 보는 견해(見解)는 다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강경에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라’ 일체 있는 바 법은 꿈이요 허깨비요 또는 그림자요 거품이라는 말입니다. 꿈이요 그림자요 거품같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렇습니다. 사실 거품이나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절대(絶對)로 존재(存在)를 못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존재는 아닙니다. 다만, 중생의 눈에 따라서 겨우 잠시간 있을 뿐입니다. 바로 보면 결국은 그것이 다 공(空)입니다.
그러나, 다만 공(空)이 아닙니다. 우리가 망령된 자기를 부정하고서 번뇌를 여의면, 거기에서 여여(如如)하니 분명히 영원적인 공덕이 나오는 것입니다. 참다운 진아(眞我)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같이 유(有)도 아니고 다만 공(空)도 아니고[非有非空], 천지우주는 오직 부처뿐이라는 가장 높은 차원, 이것이 중도교(中道敎)입니다. 우리 목적은 ‘다 공(空)이다’ 하는 거기까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영원적인, 영원히 행복을 간직한, 상주부동(常住不動)하고 안락무위(安樂無爲)하고, 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아덕(我德), 또는 청정무애(淸淨無碍)해서 언제나 청정하고, 이런 것이 우리의 가고자 하는 목적(目的)입니다. 이렇게 분명히 말한 종교나 철학은 불교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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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자 ! 또걷자, 틈나면 걷자, 인생 80
인생80 - 걷지 못하면 끝장이고
비참한 인생 종말을 맞게 된다.
걷고 달리는 활동력을 잃는 것은
생명 유지능력의 마지막 기능을 잃는 것이 아닌가.
걷지 않으면 모든 걸 잃어 버리듯
다리가 무너지면 건강이 무너진다.
무릎은 100개의 관절 중에서
가장 많은 체중의 영향을 받는다.
평지를 걸을 때도 4-7배의 몸무개가
무릎에 가해지며 부담을 준다.
따라서 이 부담을 줄이고 잘 걷기 위해서는
많이 걷고 자주 걷고 즐겁게 걷는 방법 밖에 없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되라 !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언제 어디서든 시간이 나면 무조건 걷자.
동의보감에서도 약보다는 식보요,
식보보다는 행보(行補) 라 했다.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일흔 나이
누우면 약해지고 병 들게 되고
걸으면 건강해지고 즐거워진다.
질병, 절망감, 스트래스, 모두 걷기가 다스리고
병이란 내가 내 몸에 저지른 죄의 산물이다.
일어나기 몇 시간 전에 잠이 깨어
죽은 듯이 누워 무슨 근심 걱정에 가슴 아파하나
박차고 일어나라 !
운동화 하나 신으면 준비는 끝이다.
뒷산도 좋고 강가도 좋고 동내 한 바퀴
어디를 가도 부지런한 사람들과 만난다.
처음에는 30분 정도 천천히 걷지만
열흘이면 한 시간에 20리를 걸을 수 있다.
몸과 마음 가뿐해지고 자신감과 즐거움
당신은 어느새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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