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중생의 눈과 귀에 와 닿는 모든 현상들은 단지 그들 마음의 환(幻)과 같은 현현(顯現)에 불과하며, 따라서 자체의 실재성을 갖지 못한다. (육입의 부정) 단지 마음의 분별하는 습성 때문에 무수한 사물들이 생겨날 뿐임에도, 대부분의 중생들은 그것을 마음 바깥에 실재하는 무엇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보이고 들리는 형형색색의 이 모든 현상들은 실은 바로 제 '마음'이 변하여 나타난 것이니, 물질적인 것이나 심리적 현상이나 그와 같은 일체의 존재는 단지 '마음'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만약 모든 법이 항상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나타나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온갖 바깥 경계의 성품이 모두 빈 것인 줄 능히 안다면, 이 사람의 견처(見處)야말로 곧 '부처'와 같으며, 말한 바의 법도 '부처'와 다름이 없으니, 그것은 스스로 세상만사가 오직 '나'의 한 찰라 한 생각에 달려있다는 '거룩한 지혜'(自覺聖智)에 깨쳐 들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만사는 이 한몸(오온)을 말함)
범부살이의 전 과정을 통틀어 보이고 들리고 하는 모든 현상이 이와 같을뿐더러, 일승(一乘)의 길에 들어선 참된 수행자라면 경전의 말씀이나 옛 조사의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 이 유심(唯心)의 도리에 한치의 예외가 있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즉 모든 중생의 '보고 들음'은 모두가 오직 중생의 '제 마음 속의 영상'(業影)일 뿐이니, 따라서 모든 설법(說法)은 오직 '마음만의 설법'이요, 모든 '들음'(聽) 역시 '마음만의 들음'인 것이다. '마음'을 여의고 그 밖에 어디에 다시 '법'이 있겠는가?
어느날 범천(梵天)이 문수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말을 하더라도 '법'을 듣는 것이 아니거늘, 이에 '경'(經)을 듣게 됩니까?』 하니, 문수가 대답하기를, 『눈귀코혀몸뜻이 '흘러 새지 않으면' 이것이 참으로 '법'을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의 '육근'에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흘러 새지 않으면' 이에 비로소 '경'(經)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문수보살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법다운 말씀이다)라고 했다.
눈귀코혀몸뜻(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을 굴리는 주재(主宰)가 없어서 견문각지(見聞覺知)가 다만 인연(因緣)일 뿐, 모두 환(幻)과 같은 것이니, 법계지(法界智)의 진경(眞經)은 견문(見聞)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문수보살의 법다운 말씀을 왜 반대말로 바꿔먹는지..) 그러므로 법을 전한 이들은 남에게 법을 전하여준 것이 아니고, 다만 훌륭한 인연이 되어 줌으로써 저들로 하여금 스스로 '법'을 얻게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이해가 아직 생기지 않았으면 남이 그를 깨쳐줄 수는 없는 것이니, 왜냐하면 스스로의 이해는 '남'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전을 엮은 결집자(結集者)와 그 말씀을 전한 전달자(傳達者)는 모두가 영상(影像)을 얻은 것이요, 결코 본질을 얻은 것이 아니니, '자기 마음'은 '남의 경계'를 얻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집'(結集), 이것은 '제 마음'에서 변한 바의 경전임을 잊지 말아야 하며, 또한 전달자가 전한 것도 역시 모두 '제 마음'에서 변한 바의 법(法)임을 알아야 한다.
마조(馬祖)대사는 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대들은 지금의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믿으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달마(達磨) 대사가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오셔서 최상승(最上乘)의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시어 그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고, 자주 능가경(楞伽經)의 글을 인용하여 <중생들의 마음 바탕>을 확인하셨건만 그대들이 뒤바뀌어 이 <일심의 법>(一心法)을 저마다 지니고 있음을 믿지 않을까 걱정하셨느니라. 능가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은 '마음'을 설하시는 것으로써 종(宗)을 삼으셨고, <문(門) 없음>-온 누리가 온통 마음 뿐이니, 다시 어디로 出入할 門이 있으랴? (육입이외에 다른 문은 없다)-으로써 법문을 삼으셨다」고 했으며, 또 말씀하시기를, 「법을 구하는 이는 모름지기 구하는 바 없이 구해야 하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 선(善)을 취하지도 말고, 악(惡)을 버리지도 말아야 한다」(신구의로 드러나면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행위로 드러나기 전에 살펴야 한다 법을 통해 내면의 의도로 명확히 드러나기전에는 취하지도 버리지도 말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더럽고 깨끗한 양쪽에 모두 의지하지 않고 죄(罪)의 성품이 공함을 통달하면 생각생각에 얻을 수가 없으리니, 제 성품(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 뿐이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한 법'에 찍힌 것이다.-일체만유(一切萬有)가 오직 영각성(靈覺性)의 응현(應現)이라, 자체성(自體性)이 없어서 환(幻)과 같고 꿈과 같다 -그러므로 무릇 보이는 형상은 모두가 '마음'을 보는 것이나, '마음'이 스스로가 마음이라 하지 못하기 때문에 형상(形相)에 의지하여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때에 맞추어 <현실(事) 그대로가 이치(理)임>(理에 卽한 事라, 물결이 그대로 물이다)을 말하되 도무지 걸림이 없어야 한다. 』(고집에 걸리지 않고 고의 소멸을 본다 고집의 있고 없음에 묶여 고집멸도4성제를 보지 못하면 그것은 걸림이 있는 것이다)
2. 법문(法門) : 사람이 어리석어 제 마음을 물건이라고 하네.
여러분, 무애(無碍)하다는 건 걸림이 없다는 말이죠? 일체의 평등성이 밝혀져야 비로소 무애법문(無碍法門)의 참 뜻이 드러나게 됩니다. '무애법문'의 본질은 '불이법문(不二法門)'입니다. 일체가 둘이 아니에요. 그리고 '불이법문'의 근본은 '일체유심(一切唯心)'입니다. 일체가 마음뿐이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일체유심이라는 말은, "마음 바깥에 아무 것도 없다"라는 말입니다. 심외무일물(心外無一物),... 자 마음뿐이라는 이 말이 진실이라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환각상태? 아니면 잠꼬대?)
"아무개 때문에 내가 속상해 죽겠다"고 하면, 아무개가 밖에 있기 때문에 내가 속상한 거죠? 우리는 전부 탓을 밖으로 돌려요. 마음 바깥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사람들은 마음 바깥에서 뭘 보길래 (현실로 증득되지 못한 개념을 사고의 전제로 깔아놓음) 그렇게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혹은 즐거워하고 기뻐할까요?··· 일체가 마음뿐이라면, 지금 우리의 마음을 출렁거리게 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건 간에 전혀 까닭도 근거도 실체도 없는 겁니다. 오직 마음뿐이라면 모든 상대는 끊어지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 나 홀로 우뚝 높아 존귀한 그런 마음 자리가 됩니다. (혼자라면서 누구보다 높은가?) 여러분, 눈에 보이는 물건이 됐건, 귀에 들리는 소리가 됐건, 그 눈에 보이는 빛깔이 빛깔이 아니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소리가 아니고, 그 빛깔과 그 소리는 다만 마음일 뿐입니다. 본래적인 그 참 마음만이 유일한 건데(본래적인 그 참 마음은 마음 안의 물건인가, 밖의 물건인가?), 마음 바깥에 뭔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를 흔들고 핍박하는 그 무엇에 대항해서 싸우느라고 우리는 괴로운 것입니다. (마음밖의 그 물건이 나에게 뭐라고 했길래 싸우는가? 그 물건에 의미부여한 내가 어리석은 것이다) 이러한 바깥 경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 사람을 성인이라고 합니다.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란, 유복하고 풍성한 환경이든, 아주 쪼그라들어서 옹색하고 비참한 환경이든 그게 전부 다 인연 화합(숙명 혹은 우연의 의미임)으로 말미암은 허깨비 같은 것이라는 걸 철저히 깨친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 마음 바깥에 있는 경계는 전혀 그 자체의 체성(體性)이 없습니다. 모양은 있는데 실체는 없어요.(모양은 있고 실체는 없는 것? 귀신?, 모양(경계)은 있으나 그것에 대한 탐진치의 의미부여가 법다운 살핌에 의해 빛바래었다로 표현해야 한다)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각기 형상이 있기는 있는데, 그게 전부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것도 조금만 깊게 살펴보면 실체가 없는 겁니다. 마음이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인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겁니다. 그 실체가 없는 게 지금 우리한테는 실제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인 거예요.(없는데 왜 보일까요? 마음과 경계의 조건지어짐을 마음 혹은 경계이 있고 없음으로 결론내어 버린다 이것이 곧 상단견이다)
여러분 지금 우리한테 문제가 되는 것은 경계죠? 이게 마음 안에 들어와서 딱 좌정(坐定)해 가지고 한 집안 살림살이로 확인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 '섭경(攝境)'이 아무한테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마음이니 거두어들여야지...' 하는 알음알이 가지고는 전혀 가망이 없습니다. 일체 존재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존재의 있고 없음에 묶이지 않고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를 살펴야 한다), 일체가 마음뿐이라는 사실이 털끝만큼도 에누리 없이 완전히 사무쳐진 사람에게만이 일체가 돌아와서 내 마음에 좌정하는 거예요. 섭경귀심(攝境歸心),... 일체 모든 경계가 거두어져서 내 마음으로 돌아올 때라야 비로소 온 누리가 참으로 적멸(寂滅)해지고 조용해집니다.(존재를 부정한다고 마음이 고요해질 수는 없다 존재가 아닌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가 산란함의 뿌리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또, '그 무한한 경계를 무슨 수로 다 거두어들이겠나...'하는 걱정을 할겁니다. 그러나 그게 아무 걱정할 것이 없어요. 이 마음은 본래 내기를, 끊임없이 내기는 냈는데 (현실에 대한 잊그릇된 전제이다) 털끝만큼도 낸 게 없이 냈기 때문에, 거두어들일 때에도 받아들이기는 받아들였는데 털끝만큼도 받아들이는 것 없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냈는데 낸 것이 없다, 거두었는데 거둔 것이 없다. 자신의 의도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인연과 숙명에 맡기는 무책임한 사고이다 아니면 스스로를 몸없는 신으로 착각하거나..) 그래서 섭경귀심 하면 일체가 참으로 비고 적멸해지고, 그럴 때 비로소 관(觀)이 열리게 되는 겁니다. 관심(觀心),... 마음을 제대로 보게 되는 걸 말하는 거지요. (대상 경계 말고 마음이라는 다른 실체는 없다. 그 대상 경계에 대한 의도를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이것이 안 되는 이유는, 깨달음은 투철하지 않고 말만 배우기 때문입니다. 이 경계를 거두어들여서 내 권속(眷屬)으로 삼는 힘이 아직 충분치 못해서 계속 바깥에서 뭔가를 보기 때문에 여전히 심신이 편안하지 못합니다. 자 여러분, 자기 자신한테 물어보세요. 오욕팔풍(五慾八風) 앞에서 나는 여여(如如)할 수 있는가? 사실 지금 이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섭경귀심을 못 한다면 전혀 공덕이 없어요. 탐진치(貪瞋癡)와 오욕팔풍이 모두 마음을 여의고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계가 있어야 탐진치가 일어남을 안다 경계를 놓치면 자신의 의도를 살피지 못한다) 이 세상 일체 만법이 오직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모든 탐진치도 그 성품이 비어서 나를 장애하지 못합니다. (탐진치의 토대를 보는 것이 그 성품을 보는 것이다 그 토대를 보면 나의 고가 소멸한다 즉 탐진치의 나는 장애하고 계정혜의 나는 증장한다)
자, 여러분 모두가 마음뿐인데, 우리에게는 말을 '하는 자'가 있고, 말을 '듣는 자'가 있고 두 법이 있죠? 여러분 마음뿐이라는 말의 참 뜻을 받아 가진 사람은 두 법을 쓰지 않습니다. 전부가 한 마음, 한 몸, 한 지혜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뭔가가 마음 바깥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사실 마음 바깥에 뭔가 있는 게 아니고, 마음이 쪼개져 가지고, 이 마음이 쪼개진 다른 조각을 보는 것일 뿐인 겁니다. (마음은 오온으로 쪼갤 수 있으나 색, 수, 상, 행, 식이 각각 따로 있다(有)고 보는 것이 문제이다) 꿈속에서 보는 숱한 게 전부 마음뿐이잖아요? 틀림없죠? 마음뿐인 줄 알면 저절로 무애하겠죠? 말을 하는 것도 마음만의 말이요. 말을 듣는 것도 마음만의 들음입니다. 상대가 끊어져서 완전히 볼 것도 들을 것도 없이 오직 마음뿐일 때에, 비로소 진리가 드러납니다. 그 진리만이 우리에게 완전히 무애자재한 삶(법을 알아야 무애자재함도 알게 된다 법에 미혹함은 탐진치에 묶인 행위로 드러난다)을 가능하게 해주는 거예요. 진정한 자유는,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발견한 자에게 저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리의 발견은 운명과 선업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법을 토대로 스스로의 고소멸에 대한 의지와 노력에 의한 것이다) 이제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일체가 거두어져서 마음뿐이라는 사실이 확연해지면, 이 마음뿐이라는 사실은 누가 얘기해준 걸까요? 오직 마음뿐이라면 누가 있어서 뭐를 보고, 뜻을 짓고 이름을 지어서, 마음뿐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일체가 마음뿐이라는 말이 참으로 진실이라면, 이미 그 자리에는 말도 뜻도 다해버려요. 부처니 하느님이니, 범부니 성인이니, 중생이니 부처니,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일체의 이름도 뜻도 다해버립니다. 영롱하고 청정한, 그러면서도 그 안에 일체의 모든 공덕을 갈무리한 그 자리에서 인연 따라서 뭐든지 내고, 종일 하루 내도 낸 사이 없이 내는 그런 묘용(妙用)...아주 묘한 큰 작용을 자재하게 굴릴 뿐인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않는, 경험지을 수 없는 깨달음에 대한 상견이다) 활달자재함도 옹색함도 전부 다 한 마음이 지은 것인데, 그 청정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이 '활달'과 '옹색'은 하늘과 땅만큼 갈라져버립니다. 이게 전부 마음뿐인 줄로 보는 사람은 이것들이 내 마음의 하늘을, 인연 따라 스쳐 왔다가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새털구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봅니다. 여러분, 쉬세요. 그냥 편히 쉬세요. 이게 마음도 경계도 다해버린다는 거예요. (끊임없는 법다운 정진과 법에 대한 검증이 있어야 한다 8정도를 행해야 한다)
우리는 내 마음은 가만 둔 채로 저 바깥의 경계만을 내게 흡족한 방향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희망과 기대를 갖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빈 거라면 희망을 걸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때요, 그러면 마음이 편안하겠죠? 그런데 이 '경계'를 잊어버리는 것이 그렇게 어려워요. 그래서 늘 '저는 잘 안 됩니다...' 하고 하소연을 합니다. 잘 안 된다는 거... 경계가 말을 잘 안 듣는다 그거 아닙니까? 경계가 다 허깨비인데··· (경계가 인식과 조건지어져 있음을 알 뿐 경계를 부정하면 안된다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한다 즉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그럴 때 내가 한 술 더 떠서 이럽니다. "말 잘 들어도 허깨비이고, 말 잘 안 들어도 허깨비이니까 모든 허깨비의 행렬을 그냥 봐라...",...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아니야, 이 허깨비는 틀렸어, 이 허깨비가 맞아..." 계속 이럽니다. 그러면 정말 구처(求處)가 없는 거예요. 참으로 이 경계를 잊어버리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토대를 살펴야 한다)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건, 마음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 역시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토대를 살펴야 한다) 이 경계, 이 세상을 잊어버리기도 그렇게 어려운데.., 이 마음을 잊어버리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을 잊어버린다는 건 나를 잊어버린다는 소리입니다. 세상을 잊어버리면 참 존경받습니다. 성인 대접받고. 참 훌륭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게 이른바 성인이지요. 그러나 부처님은 그 성인 위에 머무르는 것도 범부로 봅니다. 세상을 잊어버리거나, 세상에 집착하거나, 부처님 눈으로 볼 때에는 똑같이 치우쳐 양끝(부처님이 말씀하신 양끝이란 상단견을 말한다)으로 내닫는 무리일 뿐입니다. 세상은 본래 한 물건도 실체로서 있는 게 아닌데, 잊어버릴 거는 뭐고 집착할 거는 뭐겠습니까? (이렇게 살피면 결국 막행막식 아니면 자포자기의 삶으로 결론난다) 그런데 이승(二乘)들은 그걸 잘못 알아들어서, "세상은 전부 허망한 거니까 잊고 버려야지..." 합니다. 아니 본래 없는 건데 뭐를 또 버립니까? 그러니 집착하는 것도 아직 진실을 밝히지 못한 것이지만, 그것을 버리고 아득히 여읜다 하는 것도 역시 진실을 밝히지 못해서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착하지도 말고, 여의지도 마세요. (무엇을 집착하는지 무엇을 여의는지 알아야 한다 의도를 살피는게 곧 수행이다) 그게 깊어지면 마침내 마음도 잊게 돼요. 참으로 이 마음을 잊기가 어렵소. 이 마음을 잊으면 완전히 나 없는 무심이요,... 마음이 없으면 무심이죠? 무심이면 바로 부처요.
자, 우리가 얼마나 너그럽고 활달자재한 경지가 되려고 애썼어요?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넓히고, 마음을 맑히려고 애썼냐구요. 여러분, 이 참 성품은 본래 원만구족하기 때문에 전혀 갈고 닦아서 어떻게 되어지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행여 앞으로 깨끗한 거 마음에 두지도 말고, 거룩하고 높다는 생각도 짓지 말고,... 마음을 맑히려고도 하지말고, 마음을 밝히려고도 하지말고,... 마음 비우려고도 하지말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 그대로 사세요. (허깨비라고 부정하고는 다시 그것에 순응하라면 모순이다 결국 허깨비라는 말은 조건을 인식으로 부정하라는 의미이다 현정선원에선 허깨비가 일종의 주문이다) 행여 지금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살라고 하는 말을 또 잘못 알아듣지 마세요.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 가지면 전부 들여우요.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가,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닙니다. 허깨비예요. 허깨비라면 바꿔야 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그 허깨비가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나의 삶에 고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허깨비가 아닌 것이다 법다운 자에게만 경계는 허깨비이다) 또 안 바꿔야 할 이유는 뭡니까? 해야 할 일도, 해서는 안 될 일도 전혀 없으니까, 누구 앞에 가서 '어떡할까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물을 이유가 전혀 없는 거 아니겠어요? 아 그게 허깨비라면 쓸어버려도 되고, 곱게 꾸며 이루어도 되고 마음대로 아닙니까? '참 나'야 뭐가 방해롭겠어요? (주재자가 없다면서 그 "참 나"는 누구인가? )
여러분 자기 성품을 밝힌 사람은 이제 바깥이라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밖에서 구하고 밖에서 얻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도무지 안이니 밖이니 하는 그 말 자체가 전혀 허망한 이야기입니다. 내 눈이 닿는 것마다, 내 뜻이 미치는 것마다, 어느 것도 내 마음 아닌 게 없어요. 그런데 그 마음은 본래 그 체성이 허공처럼 빈 거요. 그렇기 때문에 내 눈이 닿은 것, 내 귀에 닿은 것, 내 뜻에 닿은 건 그게 뭐였건 간에 전부 마음뿐이에요. 그 모두가 마음에 의지해서 세워진 것뿐이라면 그 모든 것은 전부다 물 속의 달 그림자 같고, 거울 속의 그림자 같은 것이어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절대로 의심하면 안 됩니다.
스승이 제자한테 묻습니다. "지금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 " "빗소리입니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제 마음을 물건이라고 하는구나..." (존재의 있고 없음에 묶이지 말고 존재에 대한 의미부여를 보라는 의미로 파악한다면 일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비에 대해 특이한 추억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바깥의 빗소리가 나의 고와 무슨 상관인가?)
3. 공안(公案) : 마음이 있어 윤회도 있는 것이다.
당(唐)나라 구봉 도건(九峰道虔) 선사가 어느 날 시중(示衆)하기를, ··· 『 상주법신(常住法身)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느니라.』 하였다. 이 때, 어떤 중이 묻기를, ··· 『 이미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면 어째서 육도(六道, 地獄·餓鬼·畜生·阿修羅·人·天)를 윤회합니까?』 하니, 선사가 대답하기를, ··· 『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하였다. 『 어떤 방편으로 법신을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 <허공의 마음>으로써 <허공의 이치>에 계합하느니라.』 『 증득한 뒤에는 어떠합니까?』 『 삼계(三界)가 윤전(輪轉)하는 대로 맡겨 두고, 사생(四生)의 분방함을 따르느니라.』 (운명론, 삼세인과론같은 존재하지도 않는 인식에 묶인 어리석음으로 자유분방함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태난습화(四生)에서 사람아닌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재생연결식을 말하며 물론 말도 안돼는 소리이다 그리고 사람 아닌 생명체는 인간처럼 법을 사유할수가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말하기를, ··· 『 알겠는가?』 『 모르겠습니다.』 (법을 모르겠을 때만 모르겠다고 한다 그리고 꼬치꼬치 캐서 물어야 한다) 『 절을 하라!』 (어리석음으로는 상대를 조복시킬 수 없다)하였다.
4. 게송(揭頌) : 생기지 않은 데 '생김'을 나타내고...
생기지 않은 데 '생김'을 나타내고
사라지지 않은 데 '사라짐'을 나타내며 (그것을 아는 자는 누구인가? 그 아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다)
'숨고 드러남'이 동시임은 마치 '물'과 '달'이
만억(萬億)의 국토를 나타냄과 같다.
'한 몸'과 및 '한량없는 몸'과
'타는 불'과 및 '내리는 비'며
마음마다 이들 체성은 다르지 않은지라
이에 '마음 뿐'(唯心)이라 한다.
'마음' 속에는 이 '마음' 뿐이요,
'마음'에는 '마음'조차도 없으면서 나며, (나툼없이 나툼을 내는 주체, 그런 건 없다)
갖가지 빛깔과 형상을 보는 것은
바로 '마음'일 뿐이다.
- 능가경(楞伽經)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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