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대하여(혜민 스님)

2013. 8. 22. 21:0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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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때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서적이 유행했는데
그 책에 '내 생각으로부터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다.'라는 말이 있었다.
내 느낌 감정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고 살아가고 있는데
한 발작 떨어져서 있는 그대로를, 선택하지 않고 자각할 수 있는 거
그 자체가 자유다 라는 말이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서 읽고 또 읽고 하면서
그때부터 깨달음에 대해서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학교공부는 뒷전이고 여러 법문집도 읽어보고
여기저기 큰스님들을 찾아다녔고, 재가자 중에서 깨달았다는 분들도 여럿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대학 2학년 때는 인도로 가서 두 달 반 정도를 방랑하기도 했다.
그때 달라이라마 존자님도 잠시 친견할 기회가 있었고, 다람살라의 여러 대덕 스님들도 뵈었다.
인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큰 스승들 '구루'라고 하는 분들도 여러분 뵈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신기한 체험도 해보았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티벳 스님들이 오시면 열심히 가서 배우려고 하고
밀교의 관정의식도 여러번 받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리석었다.
깨달음이 마치 무슨 특별한 느낌, 특별한 경험인줄 알았다.
뭐 쿤달리니가 열려서 내 안의 에너지가 우주와 합일된 듯한 느낌..
깨달음을 얻은 분이 나한테 깨달음을 줄줄 알았다. 그건 착각이었다.
우리가 찾는 본래면목은 원래부터 있었던 거다.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여러번 해보니까 특별한 경험은 무상해. 영원하지 않고 사라져..
전생을 본다, 빛이 나온다, 방광을 한다..
그런 건 무상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신기한 경험이 깨달음이 아니라는 걸 대학 4학년 때쯤 알았다.
새로 생겨난 건 모두 가짜다. 원래부터 있던 거라야 한다.
큰스승이 법을 전해줄 때는,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받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제자가 알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여기에 비밀이 들어있다.
하바드에서 공부하면서 경전공부도 하면서 여러가지 지적인 것을 쌓아갔다.
그렇게 박사를 마치고 나니까, 수행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사실 대학교 때 간화선을 하다가 잘 안 돼서 포기하고, 다른 걸로 눈을 돌리게 됐던 것이다.
화두를 드는 방법이 잘못 되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화두를 계속
머리로 되뇌었다. 이뭣고.. 이뭣고.. 이뭣고..
이것을 송화두 또는 염화두라고 한다.
그렇게 머리로 되뇌일 때는 다른 망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화두공부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낙처는 똑같기 때문에 망상은 좀 줄어들지만..
그 의심이 진의심으로 의정화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었다.
계속 머리로만 염화두 송화두만 되고 잘 안 되었다.
다른 분들이 '간절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서 의심을 쥐어짜는데도 잘 안 되었다.
그래서 안 되었던 것이다.

다시 시작해보니 똑같은 문제에 봉착했다.
'이뭣고.. 이뭣고..'를 간절히 되뇌이면
의심이 의정, 의단으로 진행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안 되었다.
고민하다가 수불스님 말씀을 들어보니까 탁월한 방편력이 있었는데..
의심에서 의정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의정이 뭐냐 하면
의심이 머리로 하는 거라면, 의정은 더 깊이 들어가 몸으로 하는 거라고 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좋아하면 처음엔 머리로 사랑을 하지만 나중엔 가슴으로 사랑을 하듯이
그래서 나중엔 머리가 헤어져라 해도 가슴이 말을 안 듣는 것처럼
왜냐 하면 감정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의심이 깊어지면 감정화 되어서 의정화 된다.

스님께선 '송화두 염화두를 하지 말고, 대신에 답만 찾으라'고 하셨다.
'이뭣고 이뭣고 하지 말고, 이뭣고의 답만 알려고 하라..
온몸으로 알려고 하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때 미국에서 어렵게 시간을 내서 왔던 터라 더 간절한 마음으로
정말 스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다. 간절하게 열심히 했다.
사실 이것이 배우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세다.
그동안 알던 거 다 내려놓고 스승이 시키는 대로 하는 거..
그랬더니 의심이 금방 의정으로 되었다.
왜냐 하면 '이뭣고 이뭣고..' 하는 언어적인 상황이 끊어져 버리면
그 상황에서 끙끙대면서 알려고 하다보면 이게 바로
의심의 감정화.. 답답하게 느껴진다. 몸이..
알려고 하는데 모르니까 죽겠는 것이다.

이게 뭐랑 비슷하냐 하면
오래된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친구 이름이 생각나지 않을 때..
알려고는 하는데 생각은 없는 상태.. 의심의 감정화..
그게 계속되면 죽겠는 거다. 온몸이 답답해서..
아주 어떤 철옹성,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이걸 의단이라고 한다.
단단한 벽이 하나 생겨.. 계속 진행이 돼.
죽기 살기로 하면 의단이 단단해지고
머리로 '이게 뭐지?' 이게 아니라.. 온몸으로 알고 싶어진다.
어떤 감옥이나 우물 속에 갇힌 것같은 느낌이 들면서
일어나도 미치겠고, 앉아도 미치겠고, 걸어가도 미치겠고..
그런데 그 상황에선 안 할 수도 없다. 그냥 그 상황이 계속 간다.
의정 단계만 딱 들어가도 계속 진행된다.
의심에서 의정으로 잘 못가기 때문에 애를 먹는 것이다.

그러다가 참다 참다 못 참겠는 지경까지 가서, 의단이 박살이 나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뭘 봤냐 하면, 일단 모든 생각이 다 끊어지고
아주 상쾌하고 시원하다. 하늘을 날 거 같다. 밑둥이 빠지는 거 같은
환희..
그런데 그 환희의 느낌은.. 깨달음이 아니다. 가짜다.
없던 게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고, 조용하고..
그런데 본래 화두의 답을 찾았는가 자문해 보니, 아직 못 찾았다.
그냥 텅 비었지 답은 안 나왔다.
왜냐고 생각해 보았더니 깨달음의 경지를 '공적영지'라고 표현하는데
그때 공적에 대해선 조금 감을 잡았지만, 영지 즉 '신령스레 앎'이 없었던 것이다.
혜안이 없던 것이다. 그냥 텅 빈 채로 좋기만 했던 것..
이것도 무상하더라. 환희나.. 그런 느낌은 다 무상하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또 스님들께 여쭤봤더니,
깨달으려면 회광반조를 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보면 그 밖의 것 대상으로 마음이 끌려 들어가는데
그렇게 밖으로 나가는 마음을 돌이켜서, 보는 그 자를 보는 것이다.
밖의 경계로 자꾸 끌려나가는 마음을 안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턴 회광반조를 했다.
밖의 것을 볼 때, 뭐가 보나? 그
보는 자를 보려고 하고, 듣는 자를 보려고 하고..
경계에 끄달려가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회광반조를 했다.
그러다가 새로운 경험을 했는데.. 이 또한 가짜지만..
마치 몸이 거울처럼 깨끗하고..
그리고 그 거울에 삼라만상이 다 비쳤다.
그리고 그것들이 무슨 환(幻)처럼, 영상처럼 느껴졌다.
내 안이 투명한 거울처럼 느껴지고, 내 안이 텅 비었고..
그런데 중요한 건, 그 거울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다가.. 혜국 큰스님 법문을 들었다.
'우리 주인공의 허공성을 보라. 그 허공에 똥을 아무리 바가지로 던져도 더럽혀지느냐?'
그 법문을 들으니까 거울이 더 깨끗하게 느껴지고, 삼라만상이 다 환처럼 비쳤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화두의 답은 안 풀렸다. 지혜가 안 나온 것이다.
아직도 모두 가짜였다. 왜냐 하면 없던 게 새로 생겼으니까.
안도 비고 밖도 환처럼 느껴지지만
안에 거울이 있고 삼라만상이 비치니까
아직도 미세한 분리감이 항상 있었다.

그러다가 봉암사 정명 큰스님께 여쭤보았다.
'지금 힘이 약해서 자꾸 경계에 끄달려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시면서
염불을 하냐고 물으셨다. '예, 가끔 염불 합니다.'
'염불을 입으로만 하지 말고 계속 지극정성으로 하다보면
가슴 속에 염불이 흐르지?' '예, 흐릅니다.'
'그럼 도대체 그 염불 소리가 마음의 어떤 구멍에서 나와서
어떤 구멍으로 사라지는지, 그 구멍을 자세히 들여다 봐라.'
그러셨다.
나의 특징은 어른 스님께서 말씀하시면 고대로 믿고 따라하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봉암사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즉시 그것을 시작했다.
약 한 시간 반 정도를 나무아미타불을 하면서 그 구멍이 어딘가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나무.. 할 때 그 '나'가 나오기 바로 직전.. 그 구멍을 봐야 하니까
'나' 하기 직전의 그 자리를 아주아주 섬세하게 보았더니..
그 '나'가.. 텅 빈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멋지게 표현하는 사람들은 '적멸'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정말 신기했던 것은
한 시간 반을 열심히 하고 힘들어서 가만히 쉬고 있는데
뒤에 있는 사람 두 명이 대화를 하는데.. 버스 안이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 소리가 나오는 구멍이
내가 '나무 아미타불' 할 때 그 '나'가 나오는
구멍이랑 똑같았다.
완전히 똑같아. 조금도 안 달랐다.
그리고 그 소리가 나오는 구멍과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똑같아. 둘이 아냐..
똑같이 텅 빈 자리에서 나오는 거였다.

그리고 또 신기한 것은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그냥 텅 비고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
너무너무 신기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찾아들어간 것은, '도대체 이 아는 놈이 어디에 있나?'
'앎'을 찾아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앎' 자체가 '형태가 있는가? 모양이 있는가?'를 찾기 시작했다.
찾아 보니까..
그건 각자 본인이 찾아야 한다.

'앎' 자체는 원래 청정하다.
예를 들어서, 연등을 보고 '아, 연등이 있구나' 알고
이어서 시계를 볼 때, 연등의 모습이 보이는가? 안 보이는가?
그 모습이 안 떠오른다. 시계만 딱 안다.
앎의 성품은 본래 청정해서, 연등이 그 성품을 물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아는 것'과 '공간'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런데 그 성품을 제대로 들여다 보면, 공간이 앎이다.
그 '텅 빈 공간'이 아는 것이다.
사실 '공간'이라는 표현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알고 보니까..
공간적인 개념과 인식적인 개념이 따로따로가 아니었다.

그 뒤로도 계속 더 알려고 했다. 아직 끝이 아니니까..
왜냐 하면 아직도 계속 경계에 끄달려 다니니까..

우리가 찾는 것은 새로 생겨난 게 아니다.
무슨 초능력.. 무슨 광명을 보고.. 그런 데 혹하면 안 된다.
그런 건 우리가 찾는 주인공이 아니다.
원래부터 있던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신비한 경험, 깜짝 놀라는 능력, 천상의 소리를 듣는다거나
내 안의 빛을 본다거나, 전생을 알아 맞춘다거나.. 이런 것은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 그리고 본래 청정한 것
그리고 하나도 얻은 바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법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서 하나라도 '내가 얻은 게 있다' 라고 생각되면
'내가 깨달은 게 있다, 경험한 게 있다'고 내세울 게 조금이라도 있으면
아직 더 닦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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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시끄러우면 세상도 시끄러운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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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안되면 내 탓으로 돌려 자괴감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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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나는 조용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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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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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올라 왔을 때 그 화를 한발자국 떨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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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를 내면 그 화는 어떤식으로든 돌아온다
내가 낸 화를 상대가 화로써 받아쳐
바로 돌아오기도 하고,

은근히 가슴을 후비는 신경전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끝없는 구설수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니 각오하고 화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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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대를 너무도 좋아해서 그 사람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가 원하는 대로 나를 많이 바꾸려고 엄청난 노력을 한다면

그 사랑을 얻고 나서도 나는 계속 힘들어져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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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잘 보질 못한다.
왜냐하면 경험안에 개인의 관점에서 본 옳고 그름, 바램과 공포,
어디서 들은 이야기의 끝없는 재잘거림이 첨가되어 비틀어 놓는다.
생각을 빼고 있는 그대로 봐서 즉시 아는것이 깨달음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사는것은 거의 도 닦는 수행과도 같다.
다른 사람 마음에 맞게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지 않고
포기하고 절제하고 배려하는 것이 하나의 수행이다.

그러니 가족, 친구, 룸메이트랑 힘든것이 있다면
도 닦는다 생각하고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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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열마디 칭찬보다 한마디
비난에 훨씬 더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를 비난해서
많이 상처 받았을때 기억하자.

그 한마디 비난뒤엔
나를 응원하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의 열마디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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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거나 폭력을 쓰거나 남을 비난하는 말은
자비한 말이나 인내보다 효과가 즉시 있는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고두고 그 일들이
나를 괴롭히는 상처, 혹은 깊은 후회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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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나 느낌, 그냥 물 흐르듯 흐르도록
놓아두면 되는 것을 가지고 특별한 의미를
자꾸 부여하여 집착하면서
고통스러워 하시지는 않으세요?

흐르도록 보내요. 이것도 지나가요.
이것도 또 지나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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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정말로 좋아하면 핑계를 대지 않는다.
핑계를 대거나 설명을 하거든 바로 알아채라.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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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식 혼자 조용히 있을때 느끼는 마음의 고요는
마음에 주는 약과도 같습니다.
홀로 조용히 있을수 있을때 지혜가 나고
본인의 중심을 되찾으며
내안의 신성과 만날수도 있습니다.
고요함의 약을 스스로에게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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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 속에서 힘들어하고,
가족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함께 있어도 왠지 외로움을 느끼고,
남들로 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은 것 같아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설해목(雪害木) / 법정스님

                
      해가 저문 어느 날,

      오막살이 토굴에 사는 노승(老僧) 앞에 더벅머리 학생이 하나 찾아왔다.

      아버지가 써 준 편지를 꺼내면서 그는 사뭇 불안한 표정이었다.
      사연인즉, 이 망나니를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더 이상 손댈 수 없으니,

        스님이 알아서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노승과 그의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편지를 보고 난 노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몸소 후원에 나가 늦은 저녁을
        지어 왔다. 저녁을 먹인 뒤, 발을 씻으라고 대야에 가득 더운 물을 떠다
        주는 것이었다. 이때 더벅머리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훈계가 있으리라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지만
        스님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중만 들어주는 데 크게 감동한 것이었다.
        훈계라면 진저리가 났을 것이다.
        그에게는 백 천 마디 좋은 말보다는 다사로운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제는 가 버리고 안 계신 노사(老師)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게는 생생히 살아 있는 노사의 상(像)이다.

        산에서 살아 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겨울철이면 나무들이 많이
        꺾이고 만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 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들여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 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얼굴처럼 수척하다.

        사이밧티이의 온 시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던 살인귀(殺人鬼)
        앙굴리마알라를 귀의(歸依)시킨 것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통력
        (神通力)이 아니었다.
        위엄도 권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자비(慈悲)였다.
        아무리 흉악무도한 살인귀라 할지라도
        차별 없는 훈훈한 사랑 앞에서는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Giovanni Marradi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