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 주지 일진스님 인터뷰

2013. 9. 12. 17: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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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주지 일진스님 인터뷰

 

“지금 이순간 잘 살자!”

 

 

 

일진스님의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십사 년 전 인터뷰 때보다 더 깊어지고 여유로워졌다고 할까. 당시 운문사 승가대학 강사로 있었던 스님은 학감을 거쳐 3년 전 주지로 취임했다. 7월 초, 오전 9시, 운문사 학인들이 공부 삼매에 든 경내를 둘러보고 나서 밀짚모자를 손에 든 채 나타난 스님을 종무소에서 만났다.

 

 

주지는 받는 사람이 아닌 주는 사람

“스무 살에 운문사에 들어와 40년 만에 주지로 취임했다. 주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운문사는 ‘세속오계’를 전한 원광국사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천년 도량이며,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개설된 비구니전문 강원이 1985년 운문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교육과 경전연구기관으로 1800여 명의 수행자를 배출했다.

 

“주지는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혹 공부 시간에 졸고 있는 학인을 보면 공부할 시간에 왜 졸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저 어린 나이에 여기에 와서 공부하겠다고 마음을 낸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장한가, 그리고 건강하니까 졸린 거다 하는 마음이 든다. 잠시 재워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주지다. 주고 싶은 마음이 어른 마음 아닌가.”

 

“운문사는 현재 150여 명이 상주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교육기관이다. 책임감이 남다르지 않을까?”

 

“출가자는 모두 부처님의 흉내를 내고 사는 것처럼, 지금 회주로 계시는 명성스님을 오래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보고 배운 바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이어서 큰 부담은 없다. 잘하던 못하던 책임은 주지에게 있지만 평소대로 살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운문사라는 비구니교단 안에서 은혜를 입으면서 살았으니까 대내외적으로 봉사를 많이 하고 심부름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어린이 수계법회에서의 일진스님.

 

 

 

"7월 6일에는 논산에 있는 육군훈련소 호국연무사 군법당 수계법회에 갑니다," 하시더니,

3200명 훈련병에게 명성회주스님께서 수계해 주셨고 일진주지스님, 대학원생스님, 화엄반스님들이 다녀왔다고 한다.

 장병의 손을 잡고 앉아계신 분이 일진스님.

 

 

 

 

일진스님은 스물여덟에 운문사승가대학에서 처음 강의를 하기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명성스님에게 전강을 받았다. 한국불교사에서 비구니가 비구에게 전강을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전국비구니회장을 지내실 만큼 비구니계에 끼친 영향력이 큰 명성스님은 어떤 어른인가?”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부처님이 따로 없다는 생각을 한다. 솔직 담백함과 천진함을 가지고 계시다. 운문사를 졸업한 학인이 1800여 명이니 얼마나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거쳐 갔겠나. 그런데 아무리 모난 사람도 스님의 품안에 들면 모두 둥그러진다. 소임자 입장에서는 공사가 분명하고 시간을 아끼시고 정해진 규칙을 반드시 지키는 것을 배웠다. 지금 여든이 넘으셔서 모든 소임을 놓고 자유롭게 사셔도 흐트러짐이 없으시다. 규칙을 엄격하게 지켰을 때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배운다.”

 

“봉녕사 묘엄스님, 명성스님 등 뛰어난 강백을 이은 차세대 강백인데, 본인은 후학들에게 어떤 스승인가?”

 

“얼마 전 한 학인스님이 시자로 살다 나가면서 ”강의실에서나 법당, 그리고 주지실에서 똑같은 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배운 게 많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제에게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행복했다“는 편지를 남겼다.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행복했고 출가자로서 자긍심을 가졌다면 스승으로서 성공한 것 아닌가.”

 

 

불가에서 여성은 열등한 존재인가

스님은 불교여성개발원이 출범할 때 후원금을 내놓으면서 특별자문위원을 맡았을 만큼 여성 불교에 관심이 많다. 또 대학에서 ‘불교와 여성’ 강의를 오랜 동안 해오고 있다.

 

“여성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기도를 하고 신심이 충만한 채 내려오다가, 대여섯 분의 비구 스님들이 올라가면서 ‘백 년을 해봐라, 여자가 해봤자…’라는 말을 하더라. 그때 큰 충격을 받고 ‘여자는 수행을 해도 안 되는가’ 하는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학교로 돌아와 부처님은 여성을 어떻게 출가시켰고, 당시 교단 사정을 어떠했을까 하는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했다.”

 

“당시 ‘불가에서 여성은 열등한가’ 라는 시사 논문을 발표했다. 결론이 궁금하다.”

 

“누구를 비난하거나 투쟁적이지 못한 성격이라서 늘 화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편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불법승 삼보이고, 승가는 비구, 비구니 출가 2부승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므로 비구, 비구니는 승가의 양쪽 날개다. 당연히 함께 날아야 발전이 있는 것 아닌가. 남성과 여성의 문제는 우등과 열등에 있는 게 아니고 특징에 있다. 강한 것은 남성의 특징이고, 부드럽고 섬세한 것은 여성의 특징이다. 양쪽의 특징을 살려서 조화를 이룰 때 제대로 된 수행이 되는 것이지, 우열의 관계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은 불교적인 사고가 아니다. 진리를 이해한다면 여성, 남성을 분별할 것이 있는가.”

 

“반응은 어땠나?”

 

“논문을 근거로 책상 앞에서 쓴 것이 아니고 비구니 노스님들을 찾아뵈면서 스님들은 어떤 마음으로 수행을 하는가에 대해 여쭤봤다. 물론 비구스님들도 찾아뵈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을 뒷바라지 한 일이라던가 인경사업, 관등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분들도 비구니스님들이었다. 불교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데에는 여성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난 6월, 194회 종회에서 ‘종헌종법개정안을 폭넓게 다루는 가운데 호계위원의 자격을 ’승려‘로 개정해 비구니스님들의 진출을 가능하도록 한 개정안이 표 대결에서 부결되자, 비구니 종회의원 10명 전원이 퇴장하는 사태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승가에서의 남녀평등 문제는 발전이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가 1700년이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하지 않겠나. 이번 종회에서의 일도 발전적인 쪽으로 가는 변화라고 본다.”

 

“비구니종회의원으로 그날 현장에 있지 않았나? 비구니 호계위원의 자격건은 어떤 방향으로 가닥지어질 것으로 보는가?”

 

“바뀌어 질 것이다. 비구니가 비구를 갈마하는 것이 아니고 비구니는 비구니가 보살필 수 있도록 장치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방안인데, 안 되겠는가. 비구든 비구니이든 참선수행, 강의, 포교 등 각자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보살행을 하며 자기 역할을 다할 때 위상이 올라가고 자리가 확보된다고 생각한다.”

 

“부처님께서는 정작 여성 불교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궁금하다.”

 

“출가한 비구, 비구니는 10계와 260계, 348계를 지니고 산다. 여성은 업이 두터워서 비구보다 계가 많은가 하는 시각도 있어왔으나 사실은 부처님께서 여성의 신체적, 감성적 부분까지 조목조목 세밀하게 배려한 것이라고 본다. ‘일체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선언한 분께서 성차별을 하셨겠는가.”

 

어머니의 힘, 여성의 힘

“우리나라 어머니들이 신행생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게 사실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고 가정생활을 주도하는 등 영향력이 대단하다. 바람직한 신행생활은 어떤 걸까?”

 

“어느 종교든 여성의 숫자가 많은 게 사실이다. 여성 불자들을 가장 많이 만나는 우리 비구니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를 많이 생각한다. 나는 주로 경전을 강의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들에게 독립적인 인생을 살라고 권한다. ‘나는 너의 무엇이다’라는 집착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누구의 무엇이 아닌 개인의 인격으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할 때 가족 구성원들도 행복한 것이다. 자식도 어머니의 손길이 필요한 순간까지는 정성을 다해 완전히 독립할 수 있도록 정성을 쏟고 그 다음엔 놓아야 한다. 각 개인이 독립적일 때 서로 존경할 수 있다.”

 

“특별히 여성들에게 권장하는 경전이 있나?”

 

“여성들에게는〈승만경〉을, 남성들에게는〈유마경〉을 필독서로 권장한다.〈승만경〉은 재가 여성인 승만부인이 부처님께 성불할 수 있다는 수기를 받고 승만부인이 설주가 된 경전으로, 남녀가 차별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경전이다. 파사익왕의 부인이자 승만부인의 어머니가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서 ‘착하고 심성이 고운 나의 딸이 이 자리에서 부처님 법문을 함께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그 모습이 참 부러웠다. 모녀가 함께 하는 수행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남성들에게〈유마경〉을 권하는 이유는?”

 

“보살은 마음을 취하고 범부는 경계를 취한다고 했다.〈유마경〉은 경계에 매이지 않는 것을 설하는 취고의 경전이다.”

 

“스님의 어머니께선 세 따님을 출가시키셨다고 들었다. 불심이 누구보다 강하셨을 텐데, 어머니의 신심이 궁금하다.”

 

“기복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모든 것을 초월한 완벽한 신앙심을 가진 분의 표본이셨다. 어머니에게 관세음보살님은 각박하고 힘든 세상일을 해결해주는 분이라는 믿음만 있었다. 역사성과 이론이 없는 맹신일 수도 있지만 나는 우리 어머니처럼 맹목적인 신앙심이 없으면 수행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십대의 서양 수행자들이 운문사를 방문했을 때 북대암을 올라가다가 바위에 대고 절을 하더라. 바위에 절을 할 수 있는 맹목적인 신앙심이 없으면 어떻게 한국스님을 의지해 출가할 수 있겠는가. 어머니가 마흔의 늦은 나이에 나를 낳으셨는데 얼마나 약골인지 서른을 못 넘길 거라고 했다. 나의 출가와 출가생활엔 늘 어머니가 계셨다.”

 

“세 따님을 출가수행자로 둔 어머니의 인생이 궁금하다.”

 

“어머닌 16세에 결혼해서 89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오로지 현모양처로 일생을 마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농사를 지으시면서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는 수발을 다 하셨는데 동갑내기이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가야겠다’고 하시면서 곡기를 끊으셨다. 언니 스님들이 ‘어머니 지금 가시면 눈이 많이 쌓이고 추워서 자손들이 고생하니까 봄에 가세요.‘ 하고 말씀드리자 ’어디 그게 맘대로 되나요?‘ 하시더니, 언니 스님들과 함께 한 철 안거를 나시고 추운 겨울이 지나 개나리가 활짝 피어날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님을 깨우쳐주신 나의 스승이셨다.“

 

“10년 전, 불교여성개발원이 출범할 때 격려해주시고 큰 힘을 실어주셨다고 들었다. 덕담을 해주신다면?”

 

“여성 불자님들은 불교의 희망이고 든든한 울타리이다. 누구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려면 무엇보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 단체 속에서도 개인의 실력을 키우길 바란다. 넉넉한 힘은 자기 수행과 실력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두 시간 남짓의 인터뷰 시간 동안 스님은 시종여일 미소를 잃지 않았고, 말씀하시는 것도

물 흐르듯 유연하고 걸림이 없었다.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스님께 좌우명을 물었더니 1초도 망설임 없이 나온 답은 이랬다.

 

“지금 이 순간 잘 살자! 행복하자!”

 

일진스님은 1970년 재석스님은 은사로 득도, 다음해 벽안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78년 운문승가대학과 동국대 승가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현 운문사승가대학장 명성스님에게 전강을 받고 운문승가대학 강사로 취임했다. 1988년 대만불학연구소에서 중국불교를 연구하고, 1994년 일본 경도불교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조계종 교재편찬위원, 단일계단 갈마위원, 불교여성개발원 특별자문위원,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운문사승가대 강사, 운문사 주지로 있다.

 

-계간 우바이 예찬 여름호에서 박원자(승진행) 취재

 

 

 




운문사의 여름 풍경(운문사 홈피에서 퍼옴)

오전엔 방문했을 때는 수업중이어서 절 전체가 삼매에 든 듯 조용했는데,

점심 때가 되자 이제 막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한 듯한 파릇파릇 푸른 젊을 간직한 스님들이

식당에서 공양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 우리 불교가 참 희망적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3200명의 장병 앞에서 수계를 마치고 법문하시는 운문사 회주 명성스님.

비구니 스님들의 파워가 팍팍 느껴지네요.^^  

妓生 眞香과 詩人 白石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



眞香(法名:吉祥華) 이 시주한 터에 세워진 吉祥寺


吉祥寺 境內의 眞香 功德碑


吉祥寺에 모셔진 眞香의 影禎

 

기생 眞香(본명:金英韓,  1916~1999)



號:子夜, 法名:吉祥華,

 

白石에 의해 子夜라 불리웠던 진향은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게 되자, 당시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琴下 河圭一(1867~1960)이 이끌던. 정악전습소와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김영한은 기생이 된 후 춤과 노래와 문학 등에서 높은 예술성을 드러냈다. 특히 그의 스승이자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한 신여성이자 문학여성이기도 했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녀는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기생이기도했다. 그녀는 자신의 글에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를 포함한 많은 시가 자신을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진위를 알 수는 없으나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에서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라는 부분과 당시 두 사람이 단성사에서 상영하던 '전쟁과 평화'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점으로 미루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하였으며, 1989년 백석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1990년에는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 1995년에는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을 펴냈다. 그녀는 백석과의 사랑을 나누었던 인연으로 1997년 11월 사재 2억 원을 출연, 백석문학상(창작과 비평사 주관)을 제정하기도 했다.

 


백석의 연인 진향은, 1987년까지 세상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월북작가 해금이 되자, 1987년 9월, 시인 이동순(李東洵)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 (창작과 비평사)을 펴냈다. 한 달 뒤인 10월, 단정하고 기품 있는 음성의 할머니-眞香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이 할머니는 자신을 처녀 시절 백석과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사람이라고 소개했고, 이동순 교수는 곧장 서울로 올라와 이 할머니를 만나고 子夜여사(김영한)로부터 백석 시인과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되었다.

子夜여사(김영한)는 자신을 찾아온 백석의 까마득한 후배 시인에게 백석이 붙여준 이름 ‘子夜’ 로 불러달라고 부탁하고는 백석과 얽힌 한이 많은 사랑의 지난날을 털어놓았다. 이동순시인은 그 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 함흥 시절에 쓴 백석 시의 애틋함과 고뇌와 갈등 따위가 일시에 정돈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하던 한 선배 시인의 풍모와 체취를 새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에 나는 몹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 버렸다.”

이동순 교수는 일차로 백석과 관련된 자야의 생애를 엮어서 ‘창작과 비평’에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이 나온 뒤에도 백석의 삶에 대한 미진함과 아쉬움이 남아 자야에게 백석과 보낸 3년의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김영한은 1995년 ‘내 사랑 백석’ (문학동네)을 출간했는데, 이 교수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930년대의 필치(筆致)로 쓴 원고를 현대적 필치로 바꾸고 부족한 부분은 구술 정리로 보완 조력했다고 한다. 이 책의 출간으로 미스터리로 있던 백석의 삶이 비로소 복원된 것이다. 생전의 자야 여사(김영한)는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詩를 조용히 읽는 게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 고 술회한다. 그녀가 1997년 '창작과비평'사에 2억 원을 출연해 시집을 대상으로 한 백석문학상은 1999년부터 수상작을 발표해 현재 14회를 맞고 있다. 황지우, 최영철, 신대철 고재종등이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이다.

진향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1999년 11월14일, 목욕재계 후 절에 와서 참배하고 吉祥軒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이튿날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고 길상사는 유골이 뿌려진 자리에 조그만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7일 기재를 지내고 있다.

 

시인 白石(본명 : 백기행1912 ~1995)

백석은 1950년대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최근에 199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白石은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났다. 1924년(13세) 五山 학교 입학했는데, 재학시절 오산 학교의 선배 시인인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문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동문들은 회고한다.

오산학교 졸업 후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맡아보다가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모던 보이(modern boy)' 라는 애칭처럼, 문단 최고의 미남으로 평가받던 백석, 그의 멋진 헤어스타일이 그의 감각을 말해준다.

백석과 진향의 운명적인 만남은 함흥 영생여고보 재직 중에 이루어진다. 함흥에 와 있던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김진향을 만나서 사랑에 빠졌는데, 어느날 백석은 진향이 사들고 온 ‘唐詩選集’ 을 뒤적이다가.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 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자야(子夜)’ 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진향은 우연히 함흥 영생여고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다가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는 이렇게 속삭였다고 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내 사랑 백석’에서)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 둘.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잃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진다.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린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 같았다. 나중에 두 사람은 거처를 명륜동으로 옮긴다. 백석과 자야가 동거를 한 기간은 3년여. 백석은 자야와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서정시를 쓰는데, 그 중 ‘여성’ 에 발표한 ‘바다’ 와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는 자야 자신과 관련된 작품이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첫인상은 외국 사람같이 키가 크고 허여멀쑥한 느낌이었는데, 야릇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그는 회색 계통의 수수하고 품이 넉넉한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에도 이런 색깔의 옷을 즐겨 입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불과 스물 댓밖에 안된 청년이 어찌 그리도 거침없이 '마누라' 란 말을 썼었는지... 그가 주로 나의 하숙으로 왔었는데 때때로 그는 '만주 가서 살자' 는 말을 불쑥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 손목을 들여다 보며 장난스럽게 "어이구, 요런 손목을 하고 그 바람 찬 만주땅을 어찌 가서 살겠나.하고 웃었다 ..."

-자야의 글 중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차디찼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백석을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키기로 한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에 의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가 정한 여자와 혼인을 올리지만 초례만 치른후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오곤 했다. 백석은 기생과의 동거를 한사코 반대하는 부모와 장남으로서의 갈등,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 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자야는자신의 존재가 백석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 했다. 백석이 태어난 정주는 이광수, 김억, 김소월 등 文壇史的으로 대가들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백석은 반세기 가까이 남쪽과 북쪽 모두에서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었다. 시집도 <사슴> 한 권 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이 이토록 수많은 시인들과 문학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토속적인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 그의 노력과 시를 읽을 때마다 묻어나오는 솔직함과 서민적(방언)이고도 아주 서정적인 시를 白石만의 언어로 쓴 이유가 크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조만식 선생의 사랑을 받아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다. 백석은 월북작가가 아닌 재북작가였다. 고당 조만식선생의 비서로 그는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 을 번역하며 북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 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 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백석은 1995년 1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밝혀졌다.

운명의 만남 자야는 집안이 사기를 당해 파산한 후 열 여섯 나이에 기생이 된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자야는 스승 신윤국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곧바로 귀국해서 스승을 면회하기 위해 함흥으로 간다. 함흥에서 스승의 면회를 시도하나 면회가 불가능해지자 아예 함흥에 눌러앉았고, 다시 함흥의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기생이 되면 법조계 유력인사들과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스승의 면회가 보다 쉬워 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스승과의 면회를 위해 기생의 길을 선택했던 일만 보아도 그는 대단히 의리가 깊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스승과의 면회는 끝까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김영한은 이곳 함흥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만난다. 함흥에서 영어교사로 있던 시인 백석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함흥 영생여고보의 회식자리에서의 처음 이뤄진 두 사람의 만남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아름답고 슬픈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진향에게 첫눈에 반한 백석은 진향을 옆자리에 앉히고 영원한 사랑을 속삭였다고 한다. 당시 진향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 백석의 나이는 스물여섯.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 중 먼저 서울로 올라온사람이 진향이고, 결국 백석도 함흥의 교사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 다시 김영한의 자취방에서 뜨거운 사랑을 이어나간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보금자리를 튼 두 사람은 혼례만 올리지 않았을 뿐 엄연한 부부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김영한과 백석의 꿈같은 사랑의 동거는 3년만에 위기를 맞았다.하늘도 말리지 못할 것 같았던 이들의 불같은 사랑도 결국 백석의 부모에 의해 엇갈림이 시작이 된 것이다.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마땅한 백석의 부모는 백석을 강제로 결혼을 시킨다.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인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내려가지만, 혼인을 치루고 도망쳐 다시 김영한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함께 만주로 도피하자고 재촉하지만 김영한의 반대로 결국 백석 홀로 만주로 떠나게 되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자신이 싫어 만주로의 사랑의 도피를 포기한 이가 김영한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백석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이야. 해방이 되고 다시 한국전쟁이 일어나 백석은 북한에서 재북작가로, 교수로 남고 김영한은 남한의 서울 성북동에 대원각이란 요정을 차리고 이곳을 세를 놓아 많은 돈을 모으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재산 중에 현금 2억원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그리고 대원각의 모든 전각과 땅은 법정스님께 시주를 하게 된다.

대원각은 당시 3공화국 시절 요정정치의 산실이었다. 평소 무소유의 삶을 사시는 법정스님은 길상화 김영한 보살의 뜻을 수차례 거부하다가, 나중에 그 뜻을 받아들여 오늘날의 길상사를 창건하게 된다. 당시 전 재산을 보시한 길상화 보살에게 어느 기자가, ‘시가 천억 원의 엄청난 재산을 이렇게 내놓으시는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 고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길상화 보살의 대답은 이랬다.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김영한 보살의 백석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알만한 대목이다. 국악계에서는 길상화나 김영한보다는 김진향으로 더 널리 알려진 그녀. 그리고 그녀의 일생과 사랑이 고스란히 드리워진 사찰 길상사. 길상화 보살의 감동적인 순애보를 가슴에 안고 돌아보자면 길상사 경내 한 켠에서 법정 스님의 반가운 법문 하나를 만난다. 깨달음에 이르는 데는 오직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실천이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자비의 길이다.

남자건 여자건 누구나 평생을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사는 연인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남편이나 아내가 아니라는 점이겠지만... 그래서 가슴에 묻는 것 아니겠는가. 그 연인이란 영화 속의 아름다운 여배우이거나 문학작품 속의 구원의 여인 등이 대부분이겠으나, 간혹 현실에서의 이루지 못한 애틋한 정인(情人)일 경우 그것은 일생을 두고 아릿한 아픔이 된다. 물론 이러한 아픔은 어떤 측면에서는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

'추억이 많은 사람은 가난하지 않다' 라는 말도 있잖은가. 롯데 그룹의 회장인 신격호씨는 어린 시절 읽었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 나오는 유부녀 '롯데' 를 마음 속에 묻어두고 있다가 창업시 자신의 기업 이름으로 썼고, 피카소는 자신의 연인들을 곧잘 그의 화폭에 담았다. 문인의 경우는 이러한 묻어두거나 숨겨온 사랑이 시나 소설을 통해 드러낸다.

여러군데 찾아 보았으나 진향의 미색에 관한 글은 찾아볼 수 없었고, 백석에 대하여는 미남이며 서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여러군데에서 볼 수 있었다. 다행히도 묵은 사진이라도 찾아 실었으니 여러분들은 미루어 가늠 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