修道의 位次(수도의 위차,수행의 순서)/청화스님

2013. 9. 12. 17:5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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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의 위차 1



이것이 수행의 단계, 즉 수도(修道)의 위차(位次)입니다.


금생의 번뇌뿐만 아니라 과거생의 번뇌 때문에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습니다. 능엄경 보면 처음 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런 저런 가운데서 가장 쉬운 것을 여기 이렇게 교시(敎示)를 했습니다.


유식오위(唯識五位)라. 오직 유(唯)자, 알 식(識)자입니다. 이것은 유심(唯心)이라, 오직 마음뿐이다. 오직 식(識)뿐이다. 그런 말과 똑같은 뜻입니다. 우주는 오직 식뿐이고 오직 마음뿐입니다. 중생은 겉만 보고 오직 마음인 것을 못 봅니다. 물질만 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어르신들은 공부를 많이 하셔서 정말로 물질이 있지 않다는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이라는 것을 자꾸만 생각을 하십시오. 화두(話頭)로 해서 물질이 공이라는 것을…, 물질은 바로 공입니다.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바로 공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쪼개고 쪼개서 공이 아니라 바로 공인데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사실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동(動)해서 이렇게 진동해서 선회해서 모양만 보일 뿐이지 마치 횃불을 돌리면 불바퀴 둥글게 보이듯이 물질은 그와 똑같이 이렇게 빙빙 도니까 물질로 보이는 것이지 사실 물질이 아닙니다.


색즉공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자량위(資糧位)라. 부처님 법문을 딱 믿고서 그렇게 되고자 애쓴단 말입니다. 정말로 '나'라는 것도 허망하고, '너'라는 것도 허망하고 물질도 허망하고, 허망한 것을 자꾸만 생각하고 책도 읽고, 명상(暝想)도 하고, 염불(念佛)도 애쓰고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결국 머나먼 나그네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불이라 하는 멀고 먼 고향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하겠지만 결국 성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고향인 성불로 갈려고 생각하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성불의 준비가 여기 있는 자량위(資糧位)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자량을 거기에 따르는 재료를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참선(參禪)도 해보고, 염불(念佛)도 해보고, 경(經)도 읽고 또 고행(苦行)도 해보고 단식(斷食)도 해보고 여기 자량위에서 하여튼 성불을 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이래저래 자기한테 맞는 행법을 찾아 공부합니다.


이렇게 되면 범부보다는 좀 앞서지요. 욕심도 그때는 누르려고 해보고, 그때는 삼현위(三賢位)라. 현자(賢者)의 위입니다. 성자(聖者)는 억제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하는 행동이 모두가 법도에 딱 맞는 것입니다. 욕심도 누를 수가 있고, 진심도 누를 수가 있습니다. 범부(凡夫)는 못 누르지요. 누르는 정도가 희박해서 조금쯤은 몰라도 아무튼 현자는 악도 눌러서 나쁜 짓을 않고, 성인군자 같은 성자는 미처 못돼도 우선 죄악도 안 범하고 애쓰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가다 가행위(加行位)라. 이때는 법문도 확실히 알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천지우주는 본래 청정한 눈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의 불성(佛性)이다. 이렇게 확신이 서면 그때는 결단심(決斷心)을 내서,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집에서만 해서는 잘 안되겠구나, 그래서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오로지 공부만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오로지 하는 공부가 가행위입니다. 즉 어려운 말로 하면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삼칠일이고 애쓰고 오로지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는 것은 일상생활인 것이고, 그래서는 결국 우리가 본래 부처이지만 불심하고 하나가 못됩니다. 이따금씩 불심을 생각하면 어디로 간 곳이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가 그것을 좀 더 붙들어 잡기 위해서는 오로지 해야 하기 때문에 사흘이고 몇 일이고 오직 공부만을 합니다. 보통은 사흘, 일주일 또는 이십일일 또는 사십구일 동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 출가 수행자는 일 년 동안에 두 번 삼 개월씩 그렇게 하지요. 더하려면 삼년도 딱 배겨서 산문 밖을 안나가고 정진만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아무리 둔한 사람도 부처님만 자꾸 염하니까 그때는 부처님에 가까워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오로지 공부하다 보면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마음이 시원해 옵니다. 몸도 시원합니다. 마치 무슨 전류에 감전된 것같이 시원해 옵니다. 이렇게 시원해 오면 사실은 몸이 좀 피곤해도 부처님만 생각하면 피로가 순식간에 싹 가시는 것입니다.



 
 
 
 
 

수도의 위차 2



이렇게 느낌이 오는데 그래도 더 공부를 하면 다스울 난(煖)자, 난법(煖法), 이런 경계는 그냥 했다 말았다 하면 잘 못 나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랫동안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희 같이 출가해서 승복을 입었다 하더라도 정진하는 정도가 모호하다거나 업장관계라든지 또는 환경관계가 나쁘면 몇 년 동안 공부한다 하더라도 이런 시원한 경계를 잘 못 맛본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무튼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같이 찌르르 하니 전신이 시원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쉬지 않고 더욱 정진해 가면 그야말로 참 이렇게 이마 앞에 가서, 이마 정(頂)자, 정법(頂法)이라, 가행위의 두 번째인 정위(頂位)에 오면 그때는 욕심은 차근차근 줄어옵니다. 그때는 욕계로 해서는 끝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욕심의 끄트머리가 아니라 욕심을 떠나는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때는 물질은 누가 좋은 물건을 사용해도 그렇게 별로 갖고 싶지 않고, 음식도 그때는 먹으나 마나 합니다. 이런 때가옵니다. 하도 몸도 시원하고 마음이 시원하기 때문에 그때는 물질이나 음식이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는 시원해 옴과 동시에 어렴풋이 광명이 비춰 옵니다. 광명이 말입니다. 아주 맑은 달이 이렇게 줄어지고 이렇게 커지곤 합니다. 이런 때가 오면 마치 천지우주의 모든 기운이 자기 몸을 향해서 오는 기분입니다. 그러면 힘도 남이 보면 비약해 보이기도 하고 훨씬 자기 이상의 힘을 쓸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어 가다가 또 안 쉬고 더 나가면 그때는 인법(忍法)이라. 참을 인(忍)자 인법까지 되어 놓으면 그때는 별로 큰 후퇴는 없습니다. 정법까지는 애쓰고 하던 참선이나 기도를 놔버리면 그냥 원래대로 후퇴합니다만 인법에서는 너무나 많이 하여 보았으므로 그것이 습관성이 되어 별로 후퇴가 없습니다.


인법 다시 말하면 앞서 보았던 심월(心月), 마음 심(心)자, 달 월(月)자입니다. 그런 광명기운이 더 커지고 줄어들고 해서 그때는 우주에 꽉 들어차 버리는 그런 기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어 가다가 안 쉬고 더 나아가면, 여기서 게으름 부려서 그냥 두어버리면 안되겠습니다만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때는 하나의 달, 심월광명(心月光明)이 차근차근 그 빛이 그야말로 금색광명(金色光明)을 띄워 오는 것입니다. 금색광명이 트여 옵니다.


금색광명이 트여 온 그런 광명을 딱 보는 단계를 가리켜서 이제 세제일법(世第一法) 그러지요. 성자는 당하 못되었다 하더라도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법(法)입니다. 인간 세(世)자, 차례 제(第)자, 한 일(一)자, 법 법(法)자, 세제일법(世第一法)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우리 마음으로 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맹자나 그런 분들은 이런 단계에 올랐겠지요. 그 이는 성자(聖者)가 아니라 현자(賢者)이니까.


이렇게 해서 이 단계를 넘어서 우주가 확 열려서 천지우주가 그야말로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 되어버려야 이른바 참말로 견성오도(見性悟道)인 것입니다. 그 거짓말로 견성오도(見性悟道)가 아니라, 교만한 사람들은 마음이 좀 열리면 거짓말로 견성오도 했다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견성오도 자리가 이제 앞서 말씀드린 천지우주의 광명이 자기한테도 감득이 되고 이른바 광탄만상(光呑萬象)이라! 천지우주가 광명 속으로 다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별이고 무엇이고 모두가 다 그렇게 되어 버려야 그때가 이제 참다운 견성오도가 되겠지요.



 

 
 

     수도의 위차 3


 
이렇게 되는 것이 결국 성자가 가는 길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기에까지 가야 비로소 내 고향에 왔구나. 아! 그때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항시 마음이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일반 범부중생은 가행위(加行位), 즉 사가행범부위(四加行凡夫位) 여기까지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안 놓고 공부를 해서 나아가면, 계율도 바르고 음식도 함부로 안 먹고 정진해 나아가면 그때는 순간 찰나에 천지우주가 광명으로 화하면서 통달위(通達位)라. 통달위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때는 경(經)은 실지로 안 배웠지만 경을 보면 쭉쭉 이렇게 다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가 즉 말하자면 견성오도(見性悟道)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와 같이 좀 되었다 하더라도 공부가 그걸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었지만은 아직 우리 번뇌의 습기 그 종자가 남아 있습니다. 습기 말입니다. 금생에 지은, 금생에 잘 못 듣고, 잘 못 배우고, 잘 못 생각하고 잘 못 느낀 것은 이제 다 사라져버렸다 하더라도 과거전생에 지은 업은 아직 아 있습니다.

 인간은 과거에 낳고 죽고 무수생을 되풀이 하면서 그때그때 사람도 죽이고 축생으로 살생도 하고 남을 배신도 하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 잠재의식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성인들도 과거 전생에는 배신도 하고 살생도 많이 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누구나가 개도되었다, 소도 되었다, 무수 만생동안 그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지은 번뇌는 견성오도와 더불어서 다 사라진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지은 번뇌는 그 종자가 남아 있습니다. 그 놈을 차근차근 빼내야 됩니다. 그 놈을 못 빼내면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불성, 천안통도 할 수 있고, 천지우주를 다 알 수 있고 하늘을 날을 수도 있고, 그러한 재주가 다 들어 있지만 번뇌의 종자가 남아 있으면 그런 재주를 못 부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성에 갖추고 있는 공덕을 못 부리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을 보면 우리한테 있는 욕심의 뿌리만 다 뽑혀도 우리 몸이 하늘로 날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신화로만 알지 마십시오. 우리가 공부해 보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차근차근 가벼워 옵니다. 이것만 본다 하더라도 정말로 견성오도하여 욕심의 뿌리가 뽑혀지면 육신 그대로 등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원래 무게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중력이 있는 것이지, 사실은 인력이니 중력이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중생차원에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원적인 순수 생명 에너지 차원에서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번뇌의 종자를 뽑아버리면 종자를 뽑아버리는 것이 이른바 수습위(修習位)라.

 천지우주가 오직 불성뿐이구나! 불성뿐이라는 그 자리에 딱 안주해서, 불성을 확실히 보았으므로 견성오도해서 통달위라 모두를 다 알 수가 있고, 이때는 광탄만상이라, 우주를 불성광명이 다 삼켜버립니다. 다만 번뇌의 뿌리 대문에 불성에 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을 발휘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성에 입각해서 차근차근 더 닦아 가면 그때는 불성이 보이니까 불성만 보고 있으면 되겠지요. 아미타불이나 관음보살이나 무엇이나 안한다 하더라도 불성이 보이니까 아! 그 자리를 보고만 있어도 공부가 나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있으면 있는 만큼 흐린 탁수를 가만 두면 앙금이 가라앉고서 바닥이 보이듯이 견성오도한 다음에는 가만히 있으면 정(定)에만 들어가면 차근차근 번뇌가 녹아갑니다. 녹아서 조금 올라가면 이지(二地), 삼지(三地), 사지… 이렇게 올라가서 십지(十地), 십지에 올라가서 번뇌가 근본적으로 다 해버리면 그야말로 석가모니 같은 성불이 됩니다.

 자고로 원효(元曉)스님 같은 분은 견성오도한 뒤에 팔지(八地)까지 올라갔다고 하고, 서산(西山)스님 같은 분은 사지(四地)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일본의 공해(空海)스님 같은 분은 삼지(三地)에 올라갔다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지킬 보(保)자, 맡을 임(任)자. 즉 견성오도한 그 자리를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불성 봤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 더 앞으로는 못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그 교만심(驕慢心)이라는 것이 굉장히 장애(障碍)인 것입니다. 조금 알면 그걸 좀 풀이해 먹을려고, 또 그 견성오도라고 해 가지고서 확 트여서 환희심이 충만하면 우쭐해 가지고서 그래버리면 결국은 공부는 더 못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는데 신통묘지를 다해야 그래야만이 참다운 깨달음인 것인데 말입니다. 아직은 광명은 좀 봤다 하더라도 우리가 광명 기운을 못 쓰는 것입니다. 순수 에너지에 갖추고 있는 그런 무한한 힘을 못 쓴단 말입니다.

 그래서 겸허하니 차근차근 인연도 피하고, 자꾸만 사람 만나고 얘기하면 힘이 빠져버리고 이제 시간이 더 없어 못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 깊이 들어간 스님들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중봉(中峰)스님은 배에가 피하고 산에가 피하곤 했습니다.
 
 
 

        수도의 위차 4




공자(孔子)의 논어(論語)를 보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나 또 어떤 다른 경전을 보나, 우리 중생의 인격을 이와 같이 우주와 하나로 해서 구경지(究竟地)까지 인격완성을 시키는 방법체계(方法體系), 즉 수도의 위차를 명확히 밝힌 법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벌써 이렇게 해서 공부가 인격의 가장 최고봉(最高峰)까지 가는 성불에 이르는 수행의 단계를 다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도(修道)의 위차(位次)를 외워 두어도 미처 금생 내내 여기도 못 간다 하더라도 목표만은 뚜렷이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워 놓으면 그만큼 희망이 있듯이 인간이 제아무리 어려운 구렁에 든다 하더라도 결국 불성은 죽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때 묻지 않으므로 불성을 생각하면 자기 위안이 생기고 행복의 미소를 띄울 수가 있습니다.


참선하는 과정도 여러 가지 학설이 많이 있습니다만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직접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몸소 행하시고 49년 설법하신 후 열반 드실 때 또 당신이 몸소 우리한테 보여 주신, 그리고 근본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서 몇 십번 역설한 법문이 다시 말하자면 참선하는 그 근본선 이것이 아홉 가지 차체정(九次第定)으로 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선근(四善根)입니다. 즉 말하자면 가행위는 시원해지고 또 이렇게 심월(心月)이 나오고, 심월이 컸다 작았다 하고, 찬란스러운 심일(心日)이 나오고, 이와 같이 사선근을 거쳐서 다음에 들어가는 삼매가 견성오도인데 선정의 차원으로 하면 그때는 초선정(初禪定) 여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들어가야 이제 견성오도를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복됩니다만 아무튼 초선정이라. 이때는 우리의 거치러운 분별은 다 끊어져버립니다. 거치러운 분별은 다 끊어지고 이제 세밀한 분별만 남습니다. 그렇게 되었다가 이선정(二禪定)이라, 여기에 올라가면 그야말로 세밀한 분별까지 다 끊어집니다. 거치러운 것도 미세한 것도 다 끊어지고 오직 하나의 마음자리만 지킵니다.


우리 중생은 몸도 다르고, 몸 따라서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사실은 이렇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차근차근 같아집니다.


이때 더욱 올라가면 우리 중생 같은 이런 몸이 아니라 광명신(光明身)입니다. 몸이 광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몸뚱이 때문에 피차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도 먹고 싶으면 생각만 하는 걸로 배가 부르니까 많이 먹을려고 음식 때문에 다툴 필요도 없지요. 아무튼 이렇게 올라가면 광명의 몸이기 때문에 하등의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광명신(光明身)이지만 광도(光度)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게 돼 가다가 삼선정(三禪定)이라, 여기 올라가면 오로지 한 마음만이 있습니다. 그때는 마음도 광명도 하나입니다. 삼선정 지위에 올라가면 차이가 없습니다. 순수광명인 동시에 그때는 마음도 같습니다. 다만 같으나 아직은 부처의 지위는 못되어 있습니다.


사선정(四禪定)이라. 이때에 가면 마음이 조금도 동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동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 가다 그때는 우주가 텅 비어서, 광명도 하나의 질료가 있는 광명이 아니라 그야말로 참 텅 비어 있는 하나의 순수 광명인 것이고, 즉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입니다. 이제 식(識)이라! 하나의 마음이 우주에 충만해 보이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인 것입니다. 식이 충만해 있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무소유처(無所有處)입니다.


그때는 이것이고 저것이고 구분도 없고,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원융무애(圓融無碍)인지라 혼연일체(渾然一體)인지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입니다.


그때는 생각이 있을 것도 없고 또 없을 것도 없단 말입니다. 아주 미세해서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리 중생이 느끼는 번뇌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고 아주 맑은 생각만 조금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어가다가 이제 멸진정(滅盡定)이라. 멸할 멸(滅)자, 다할 진(盡)자. 이때는 그야말로 번뇌의 찌꺼기를 다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상비비상처 여기까지는 아직 번뇌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습니다만 올라 갈수록 차근차근 번뇌가 녹아져서 저 위에 가서는 번뇌가 다 녹아서 완전히 그때는 우리 범부라 하는, 즉 말하자면 이생위(離生位)라, 너와 나의 차이 또 사물과 나와의 차이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이제 하나의 불성으로 해서 그때는 완전히 통일이 딱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여기 있는 참다운 정각(正覺) 성불(成佛)이 되는 것입니다.


 

 

産卵期/김문억

 

 

 

 

내가 끙끙대며 원고를 쓰는 때는

알 낳는 시간이냐고 마누라님이 농을 하지만

농담도 자주 듣다 보니 그렇기도 한 것이

포획한 낱말들이 가두리에서 서식하다가

몇 고비 빛을 불러 태胎를 잡은 생명이

던져도 깨지지 않는 알 하나를 낳고 싶다

 

 

씨 심은 생명 하나 혼신으로 품은 시혼詩魂

스스로 껍질을 쪼아 날마다 부화를 하여

만지면 노래 부르는 그런 알을 낳고 싶다.

                                  -알 낳기. 전문-

 

 

 

  날짐승이나 들짐승은 번식을 위해서만 교미를 하고 알을 낳는다.

산란기라는 때가 있다. 씨앗을 밭에 뿌리는 때가 있는 것처럼 긴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꿈꾸었던 봄을 맞이하게 되면 알 낳는 기간이 된다.

새 순이 나오고 꽃이 피면서 녹음방초 욱은 숲을 만들어 아늑한 기분이 드는 때다.

허허한 나목으로 빈 집처럼 바람만 돌던 산과 들에 포근하고 아늑한 집을 마련 해 주는

것이 봄을 맞는 자연의 조화다.

좋아라, 새들은 사람들이 쓰고 버린 지푸라기 같은 허접한 것들을 입으로 물어다가 열심히

집을 짓고 신방을 차려 사랑을 하고 알을 낳는다. 한순간에 치르는 봄의 축제다.

잠시도 쉴 틈이 없는 생명의 번식기다. 그래서 산란기는 행복을 위한 고통의 계절이다

 

티 하나 묻지 않은 목소리도 각기 다르고 영롱한 옷 패션도 다양한 산새들이 이른 아침부터

숲에서 분주하다. 생나무 가지에 부리로 망치질을 하며 구멍 뚫는 놈 도 있고 휘파람을

휘~ㄱ 불고 달아나는 건달패도 있다.

"꿩! 꿩!" 숲 속의 왕초다. 사물 패 징 치는 소리로 정회를 선포하면 온 산이 들썩한 후 깊은

고요 속으로 빠져든다.

석양이 비치는 오후가 되면 서늘한 산그늘이 들면서 숲은 깊은 정적에 빠진다.

알을 품고 있는 때다. 산 정봉에 걸려있는 뭉게구름도 가던 길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산 전체가 새들의 둥지다. 이 무렵 산행을 하게 되면 뒤꿈치를 들고 걸어야 한다.

산사람들은 그래서 산란기와 가을이 되면 산길을 조심한다고 했다. 성스러워야 할 번식기와

낙엽에 덮여있을 벌레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겉으로는 평화롭게 녹음이 우거지고 있는 숲 속에서 벌어지는 삶의 경쟁 또한 사람과

다름없다.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는 오죽하랴.  심한 경우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놓고 다 기른

후에 데려가는 얌체족이 있는가 하면 남의 알을 훔쳐 먹는 포악한 놈도 있다.

숲 속의 먹이 감을 찾아 하늘 높이 떠 있는 수리 과의 새들은 하늘을 평정하고 땅을 관장하려는

위용으로 평화를 위장하여 푸른 하늘에 멈추어 서 있다. 가관이다.

조는 듯 창공에 떠 있는 매의 눈매는 연약한 새를 찾는 총알이요 화살이다.

자연의 질서는 불공평한 중에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물고기 역시 봄이 오면 산란기를 맞아 물살을 타고 역류하는 力泳을 한다.

수온이 따듯해지고 초록빛 물결이 흘러가는 시절이 오면 알을 쏟아 놓을 곳을 찾아 온몸을

돌짝에 비비면서 괴로워하고 있다. 심한 경우 비늘이 떨어져 나갈 만큼 입덧을 하는 것 보면

출산의 고통이 사람과 무엇 다를까 싶다.

이 때는 맛나니 떡을 코 앞에 갔다 주어도 안 먹는다. 아무 곳이고 출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모래알이 판판하고 돌짝이 적으면서 물살이 잔잔한 가생이라야 한다. 알이 쓸려 나가거나

적에게 노출되지 않는 곳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사적이다.

북태평양까지 올라갔다가도 오직 번식의 알을 낳기 위하여 태 자리 남대천을 찾는 연어 떼는

장관이다. 푸른 등을 세우고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몸부림은 오히려 장엄하다.

암수가 몸을 부비면서 산란을 하고 정액을 뿌리면서 죽어가는 것도 있다.

 물고기의 알 낳기는 새들 보다 더욱 전투적으로 격렬하다. 알에서 부화하는 새끼들이 산란의

고통으로 죽어간 어미의 육신을 먹이 감으로 뜯어 먹으면서 자라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육신마저 새끼들에게 바치는 경건한 의식은 거의 종교적인 축제라 하겠다.

 

 

새나 물고기가 번식을 위해서만 교미를 하고 새끼를 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구태여 번식의 생식 노동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날마다 생활에서 얻어지는 기쁨과 사랑의

증표로 알을 생산 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은 수고의 값이면서 삶의 보람으로 가슴에 안겨오는

따듯하고 매끄러운 행복의 꾸러미다.

사람 중에서도 나는 수놈이지만 연중무휴로 알 낳기를 하면서 산다.

시인에게는 산란기가 따로 없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되고 응가를 하는 시간이 길어지기도

한다. 무엇이고 눈만 마주치면 푼수 없이 잉태를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 보다는

그 만큼 더 삶의 보람과 행복을 누린다.  

창작에서 얻는 포만감은 실로 야릇한 희열이다. 집중적으로 작품 정리가 되는 분만은 컴퓨터가

있는 책상머리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이전에 이미 예술적인 수태는 아무 곳에서나 헤프게?

이루어진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포충망을 늘 갖고 다니기 때문이다.

 

티도 흠도 없이 매끄럽고 생명체의 속이 가득 찬 것이 알이다. 문학은 그래서 순수한 것이고

그 어떤 것으로도 문학이 도용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철저하게 경계해야 한다. 끝 없이 내가

나를 찾아 나서는 길이면서 모든 세계는 그 길로 부터 시작된다. 시 창작의 위대성디다.

 

모양 없이 부화를 해서 날아간 詩도 많지만 아직도 내 둥지< 쥔장 책가방> 속에는 아직도  

피가 묻어 있는 수백개의 알들이 부화를 기다리고 있다.

때 없이 울어대는 씨암탉의 알 낳기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한낮의 정적을 뒤흔들던 목청으로 던져도 깨지지 않고 노래하는 알을 낳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