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

2013. 11. 7. 20:4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색즉공(色卽空) 공즉색(空卽色)
/ 청화 큰스님
  
현대 물리학의 결론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질이 바로 본래에서는 에너지 뿐이란 말입니다. 
우리 불교식으로 말하면 색즉공(色卽空)입니다. 
공즉색(空卽色)입니다. 
우리 중생의 그 제한된 탐욕심(貪慾心)이나 분노하는 
마음(貪心)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痴心)이나 
그런 독스러운 마음 그런 흐리멍텅한 마음에 가려서 
우리 중생은 지금 겉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의 밝은 눈으로 볼 때는 천지 우주의 겉, 
이것은 움직여 가는 하나의 과정(過程)에 불과한 
가상(假相)에 불과한 것이고, 그 본 바탕은 
모두가 다 순수한 에너지고 생명이고 바로 부처로 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우리가 지금 사는 세계 
좋다고 싸우고, 궂다고 싸우고, 서로 아귀다툼 하는 사회, 
이 사회 모든 것이 허망한 것이다. 
이것은 지금 현대 물리학이 증명을 합니다.
●만법유전(萬法流轉)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모든 것은 결국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부처님이고 또는 법성(法性), 우주의 성품(性品)입니다. 
내 마음이나 부처나 이것은 바로 우주의 성품입니다. 
또 중도(中道)라. 
조금도 치우침이 없습니다. 
중도는 우리가 공부해 가지고서 뒤에 중도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근본 성품이 바로 중도입니다. 
어디에 치우침이 없습니다. 
자비나 지혜나 사랑이나 행복이나 
다 원만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물질에 치우침도 없고, 또 정신(精神)에 치우침도 없고, 
모두가 다 마음뿐인데 물질은 우리 마음이 잠시간 모양을, 
가상을 나툰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자취가 없으며 잡을 수도 없습니다. 
물질과 정신은 본래 하나입니다.
 
※ 이 “안심법문(安心法門)”은 청화(淸華) 스님께서 
미국 카멜에 있는 삼보사에서 1995년 1월 동안거 중에 
일주일 동안 사부대중을 대상으로 봉행한
[순선안심탁마법회(純禪安心琢磨法會)]에서 설하신법문 
탐욕스러운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수없지요
큰어른 청화스님의 법문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산은산이요 물은 물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빨리 깨달아 중생을 구제하십시오”지난 10월26일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고불식에서 지유대종사는 법문을 통해 바른 마음을 깨우칠 것을 당부했다. 법문 내용을 정리했다.

    <법어>

       
     

    지금 법상에 올라 불자를 좌우로 흔들고, 법장을 내리쳤습니다. 대중께서는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형식이라지만, 불자를 흔들고 법장을 내리친 이유를 생각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고통의 원인이 무엇이냐. 사람마다 천태만상이지만 결국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 고통이요, 들여다 보면 실체가 없는 것이 고통입니다. 있지도 않은 존재에 대한 환상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깨달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도(道)라고도 하고 진리라고도 하는데, 그것 또한 실체는 없습니다. 내 마음이 본래 깨끗하고 망상없는 마음이다. 이것은 한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망상을 떨치라는 의미로 지금 불자를 흔들고 주장자로 소리를 친 것입니다.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모양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문득 생각에서 벗어나야 귀로 듣고 모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모든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마음을 열어주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중생에 맞춰 때로는 멀고 크게, 때로는 작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이냐.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자체로 마음은 존재하지만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지지 못할 뿐입니다. 마음을 싸고 있는 먼지를 털어버리고 나면 보기 싫어도 보이고, 듣기 싫어도 들리게 됩니다. 온갖 잡념, 깨달아야 한다는 생각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깨달음은 바로 초발심입니다. 처음 마음을 낼 때의 마음이 곧 깨달음입니다.

    도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초심을 잃지 말고, 달이 뜨고 지는 것처럼 내 몸이 늙어가고 있음을 알아채야 합니다. 위대한 명예를 얻는다 한들 괴로움이 존재하며 오래 지속되지도 않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를 닦아 하루 빨리 성불해 중생을 제도 하십시요

     

    *

    지유대종사 약력
    193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한 스님은 해방 후 귀국해 1948년 18세에 출가해 이듬해인 1949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50년 해인사에서 상월대종사로부터 구족계를 수지하고 해인사 강원과 선원, 범어사 선원 등지에서 정진했다. 한국전쟁이 마무리 되던 해인 1953년에는 파계사 성전암과 청화산 원적사, 금용사 금선대 등에서 정진했으며, 1970년부터 73년까지 봉암사 주지와 1975년부터 1977년까지 범어사 주지를 역임했다.

    1991년 범어사 조실로 추대된 이후 범어사 원효암에 주석하며 후학을 지도해 왔으며, 지난 5월21일 열린 산중총회에서 금정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다.

     

     

     
    [習靜偸閑습정투한 - 고요함을 익히고 한가로움을 훔쳐라]



     


    ◆習靜偸閑(습정투한); 고요함을 익히고 한가로움을 훔쳐라.

    세상 맛에 푹 빠지면
    바쁨을 구하지 않아도 바쁨이 절로 이르고,
    세상 맛에 덤덤하면
    한가로움에 힘쓰지 않아도 한가로움이 절로 온다.

    世味濃, 不求忙而忙自至:世味淡,不偸閑而閑自來.

    -취고당검소(醉古堂劍掃)/명나라 육소형(陸紹珩)-



    명나라 육소형(陸紹珩)이
    취고당검소(醉古堂劍掃)에서 한 말이다.
    우리들의 관심이
    밖으로 향해 있으니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우리들 마음이 안쪽으로 향해야 비로소 한가로울 수 있다.
    바쁘기를 구하는 것[求忙]과
    한가로움에 힘쓰는 일[偸閑]의 선택은
    세상 일에 대한 관심정도에 달린 것이지,
    내가 도시와 시골 중 어디에 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마음이 한가로우면 사방으로 통하는 대로변이나
    떠들썩한 시끄러운 시장통 속에서도 한가로움을 누릴 수 있는 법.

    어찌 인적없는 깊은 산 중이나
    고즈넉한 맑은 물가에서만 한가함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런 산중이나 물가에 머물며는 더 말할 나위없겠지마는..   




        이덕무(李德懋:1741~1793)는 '원한(原閒),에서

        彼方寸不擾擾者鮮矣, 其心各有營爲. 商賈者缺錙銖, 仕宦者爭榮辱,
        田農者缺耕鋤,營營焉, 日有所思,如此之人, 雖寘諸零陵之南, 瀟湘之間,
        必叉手坐睡而夢其所思, 奚閒爲? 余故曰: “心閒身自閒.”

        즉 한가로움의 의미를 풀이한 글에서 이렇게 썼다.
        "저 작은 마음이 소란스럽지 않은 자가 드물다.
        그 마음에 저마다 영위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장사꾼은 이문을 따지고, 벼슬아치는 영욕을 다툰다.
        농부는 밭 갈고 김매느라 여념이 없다.
        부지런히 애쓰면서 날마다 궁리하는 것이 있다.
        이런 사람은 비록 풍광 좋은 영릉(零陵)의 남쪽이나
        소상강(瀟湘江) 사이에 두더라도
        반드시 팔짱을 끼고 앉아 졸면서 제가 바라는 것을 꿈꿀 테니,
        대체 어느 겨를에 한가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말한다.
        마음이 한가로우면 몸이 절로 한가롭다고."




        北宋 시인 소동파蘇東坡의「승천사의 밤 나들이(記承天寺夜遊)」란
        글을 읽어보면 그 기막힌 한가로움을 만나게 된다.

        元豊六年十月十二日夜, 解衣欲睡, 月色入戶, 欣然起行.
        念無與樂者, 遂至承天寺尋張懷民. 懷民亦未寢,
        相與步於中庭. 庭下如積水空明,
        水中藻荇交橫, 蓋竹柏影也. 何夜無月,
        何處無竹柏, 但少閑人如吾兩人耳.

        "원풍(1,083년) 6년 10월 12일  밤이었다.
        옷을 벗고 자려는데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기뻐서 일어 났다.
        생각해 보니 함께 즐길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승천사로 가서 장회민을 찾았다.
        회민 또한 아직 잠자리에 들지않고 있었다.
        서로 함께 뜰 가운데를 거닐었다.
        뜰 아래는 마치 빈 허공에 물이 잠겼는데,
        물 속에 물풀이 엇갈려 있는 것만 같았다.
        대나무와 잣나무의 그림자였다.
        어느 날 밤이고 달이 없었으랴.
        어디인들 대나무와 잣나무가 없겠는가?
        다만 우리 두 사람처럼 한가한 사람이 적었을 뿐이리라."



        하는 일 없이 마음만 부산하다.
        정신없이 바쁜데 한 일은 없다.
        울리지도 않는 휴대폰의 벨소리가 귀에 자꾸 들린다.
        갑자기 일이 생기면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다.
        혼자 있는 시간은 왠지 불안하다.
        너나 할 것 없이 정신 사납다.
        고요히 자신과 맞대면하는 시간을 가져 본 것이 언제인가?
        일없는 사람이 마음만 바쁘면 공연한 일을 벌인다.
        마음이 한가로우면
        정신의 작용이 활발해져서 건강한 생각이 샘솟듯 솟아난다.

        내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할까?
        나는 마음이 한로운 사람인가?
        몸만 한가롭고 마음은 한가롭지 못한 사람인가?
        그도 아니면 몸이 하도 바빠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인가? 





        - 글    / 정민 著 '일침一針'에서
        - 그림 / 연우 김도연화백 - 한국화
        - 음악 /  Nicolas Jeandot - Matin Calme (고요한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