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의 4행관,교리에도 불립문자에도 집착말라/탄허스님

2013. 12. 18. 20: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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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에도 불립문자에도 집착말라

 

조사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과정에서 달마대사의 '사행관(四行觀)'을 간절해한다.

사행관(四行觀)을 살펴보면

첫째 보원행(報怨行),

둘째 수연행(隨緣行),

셋째 무소구행(無所求行)

넷째 칭법행(稱法行)이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보원행은 어떤 액난(厄難)이나 고통을 당해도 이것이 과보(果報)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중국사람들은 칼을 맞고 죽을 때도 합장을 하며

'천명天命'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멀리 유교,도교에서부터 싹터온 사상이다.

혹시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들은 천명이라 생각하고 편안히 눈을 감는다.

이와 같이 어떤 액난을 당해도 과보라 생각하고 마음을 편안히 하는 것이 보원행이다.

 

둘째, 무소구행은 구하는 바가 없는 행위다.

고통이란 원이 많은 것이 제일 고통스러운 것인데,

구할 바가 없다고 하면 그 것이 가장 잘 구하는 것이다.

도를 구하는 것은 구하는 바가 없는 구함이다.

이에 비해 재?색?식?명?수? 등 오욕(五慾)을 구하는 것은 구할 바 있게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고통이 따르는 구함이다.

 

셋째, 수연행은 연을 따르는 행위다.

연을 따른다는 것은 굳이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피하지 않고 연을 따라서 행하는 데,

일이 닥쳤을 때 응작(應作)?불응작(不應作)을 관해서

당연히 해야 할일은 하고 

하지않아야 할 일은 끊어 버려야 한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않고 회피하는 것은 이기심이요,

또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하는 것 또한 안되는 일이다.

해서 안 될일은 과감히 끊고, 해야 할 일은 목숨을 바쳐서 하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연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수연행이다.

 

마지막으로 칭법행은 법에 합한다는 뜻인데,

이 법은 사회법이 아니라 진리에 합한다는 의미다.

능(能)과 소(所)가 다 끊어진 것, 즉 내가 하는 바도 없고 할 바도 없어진 경계를 말한다.

이처럼 마지막 회통되는 것을 칭법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달마대사가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한 것은

그 당시 고질적인 병, 즉 교리와 지식에 자나치게 치우친 병폐는 고쳐 주었지만

후세에 큰 화근(禍根)이 되었다.

달마 대사가 불립문자로 깨달았다고 해서 요즘 무식한 수좌들 중에는

진짜로 문자는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팔만대장경이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인가?

불립문자란 '문자가 쓸데없다'는 의미가 아님을

달마대사의 전법제자(傳法第子) 육조(六祖) 혜능스님의 어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육조 혜능 스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들이 달마대사의 말을 빌려 걸핏하면 문자가 필요없다고 하는데,

스스로 자기 미(迷)한 것은 옳거니와

어찌 부처님의 경전까지 비방하는가.

이런 견해는 그릇된 것이니

마땅히 당장 고칠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의 일화를 살펴보자.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경(經)을 보아라."

이 말을 들은 앙산스님이 대답했다.

"평소에 경을 보지 말라 하시더니 어찌 저에게는 경을 보라 하십니까?"

그러자 위산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너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제 할 일도 못하지만

너는 인천(人天)의 스승이 될 몸이다."

 

어느 날 위산스님이 경전을 보고 있는데 한 스님이 와서 물었다.

"저희들에게는 경을 보지 말라고 하시더니

스님은 왜 경을 보십니까?"

그러자 위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경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눈가림하고 있다[只圖遮眼].”

다시 한 스님이 물었다.

“그렇다면 저희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눈가림하는 것이 아닙니까?"

위산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들은 소가죽도 뚫는다[牛皮也透得].”

이 말의 의미는 ‘소가죽도 뚫을 만큼 경전에 집착한다’는 뜻이다.

이 일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배우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이 모두 다를 뿐만 아니라,

바로 보고 바로 듣는 사람은 그런 데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탄허스님

 

 

 

슬픈 그리움 - 이 해인


세상 떠난 사람이
자꾸 보고싶어 못 견딜 땐
어떻게 할까
아무리 기도해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향한
슬픈 그리움

그 목소리 듣고 싶고
그 웃음 보고 싶고
그의 손을 잡고 싶은데
하늘도 땅도 야속한 침묵이네
사람들은 아무 일 없이 즐거워하고
오늘은 바람 조차
나를 위로해 주지 않네

이 슬픈 그리움
평생을 안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잠을 자면서도
그리움은 깨어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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