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26. 09:1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법과 원칙 그리고 담마와 위나야, 크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정의
법과 원칙에 따라
지난 일요일 어느 때 보다 긴장의 강도가 높았다. 철도파업을 해산시키고자 경찰이 진압작전을 폈기 때문이다. 무려 오천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노조원이 머물고 있는 민노총사무실을 포위하였다. 종편방송에서는 이를 거의 생중계 하다시피 하였다. 현장분위기를 전하는 목소리는 급박하였다. 연이어 노조를 압박하는 정부측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이때 항상 듣는 말이 ‘법과 원칙’이다.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과 원칙이라는 말은 권력자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법과 원칙이란 무엇일까? 법이라는 것은 제재하고 보호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원칙이란 무엇일까? 권력자들은 늘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데 이 때 원칙이라는 것은 아마도 ‘원리원칙’의 준말이 아닐까 여겨진다. 원리원칙이라는 것은 법으로 규정된 것 외에 하나의 고정불변의 법칙 같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도덕적 규범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도덕적 규범이라는 것은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판단하였을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과 원칙이라 하였을 때 법적으로 제재를 받는 것과 도덕적으로 억제 되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법과 원칙이라는 말은 정치권력자들이나 쓰는 말일까?
불교에서도 법과 원칙이
불교에서도 법과 원칙이라는 말이 사용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알 수 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Atha kho bhagavā āyasmantaṃ ānandaṃ āmantesi— “siyā kho panānanda, tumhākaṃ evamassa— ‘atītasatthukaṃ pāvacanaṃ, natthi no satthā’ti. Na kho panetaṃ, ānanda, evaṃ daṭṭhabbaṃ. Yo vo, ānanda,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accayena satthā.
그때 세존께서는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셧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 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Mahāparinibbana Sutta-대반열반경, 디가니까야 D16, 각묵스님역)
그 때 세존께서는 존자 아난다에게 말씀 하셨다.
[세존] 그런데 아난다여, 그대들은 이처럼 ‘스승은 가르침은 지나갔다. 우리에게 스승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난다여,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Mahāparinibba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으로서 ‘담마(dhamma)’와 ‘위나야(vinaya)’에 의존하라고 하였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법’과 ‘율’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가르침’과 ‘계율’이라 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불교에서도 법과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법이라는 것이 사회에 적용되는 법과 다른 것이긴 하지만 똑같이 ‘법’이라고 불리우는 것에 있어서는 같다. 그렇다면 율은 어떤 의미일까?
정치권력자들이 즐겨 쓰는 말이 법과 원칙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위나야(율)은 ‘원칙’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율은 ‘도덕적 규범’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계에서 불살생, 불투도, 불움주 등에 해당된다. 도둑질하다 잡히면 사회법으로도 처벌받지만 불교의 법에서도 처벌받는다. 그래서 오계를 어기면 사회법과 어기는 것처럼 중죄를 짓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에서 법과 원칙을 강조하듯이 담마와 위나야는 가르침과 도덕적규범으로서 불교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
크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정의
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늘 듣는 말은 법과 원칙이다. 모든 것을 법대로 하겠다고 말하거나 원칙대로 처리할 것임을 강조한다. 이번 철도노조 파업에서도 정부 고위책임자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였다. 그래서일까 무려 오천명이 넘는 경찰병력이 파업현장을 에워 싸고 법집행을 하기 위하여 건물로 진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리창을 부수고 상층으로 진격해 들어 갔는데 전하는 뉴스에 따르면 건물이 초토화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침내 빌딩을 완전장악하였지만 노조 지도부를 검거하지 못하였다. 경찰병력이 에워싸기 이전에 이미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과도한 법집행을 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법과 원칙을 앞세워 진압작전을 세웠지만 결국 법과 원칙을 어긴 쪽은 공권력을 행사 한 쪽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약자에게 있어서 공권력이라는 것은 사실상 폭력이나 다름 없다. 법과 원칙이라는 것이 약자에게는 폭력으로 비추어지고 강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법은 누가 만들어 놓았을까? 당연히 강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강자들이 법을 만들어 놓고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의미있는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교계신문에 난 기사인데 이를 메모해 두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조계종은 크라시마코스와 같다.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그가 말하는 정의는 법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권력을 쥔 강자가 자신에게 이익되도록 만든 법을 따르는 것이 바로 트라시마코스가 말하는 ‘정의’다. 정의의 주체는 법을 따르는 약자다. 강자의 편에서 자신에게 이익을 주거나 약자에게 해가 되도록 법을 만들거나, 만들어진 법을 마음대로 어기는 행위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며, 결국 정의와 불의는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적어도 법률을 제정함에 있어서 각 정권은 자기의 이익을 목적으로 해서 한다. 정의로운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 자의 이익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를,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다스림을 받는 자들에게 정의로운 것으로서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나 불의를 저지른 자로 처벌한다.” 조계종 중앙종회의 모습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2013년 08월 06일 불교닷컴 서현육기자)
지난 8월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발표된 기사이다. 기사에서 기자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정의’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는 정치권력을 쥔 강자가 자신에게 이익 되도록 만든 법을 따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즉, 힘 있는 자가 법과 제도를 만들어 자신의 지위와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법과 제도를 만들어 놓고 지위와 기득권을 향유할 때, 그것도 “지금 이대로 영원히!”를 외치며 고착화 될 때 저항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불만이 쌓이고 쌓이면 변화와 분배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법과 제도에 대한 도전이다. 그럴 경우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을 동원한다. 이때 공권력은 약자에게 있어서 폭력이나 다름 없다. 이번 철도노조 파업에서 오천오백 명의 경찰병력이 공권력을 행사한 것 자체가 법과 원칙에 따른 법집행이라 하지만 공권력의 속성상 폭력에 가깝다.
담마와 위나야 대로 산다면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양심대로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과 창피함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 같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른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성폭행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세상은 서로 죽고죽이는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나 다름 없고 개들이나 할 짓을 하는 ‘개판’이 될 것이다. 모두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법과 원칙만을 강조하는 세상은 법과 원칙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법과 원칙은 누가 만들었을까? 힘있는 자들이 만든 것이다. 그런데 힘있는 자들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를 때 과연 법과 원칙이 먹혀 들어갈까? 민심은 천심이라 하였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들이 말하는 법과 원칙은 ‘크라시마코스의 정의’와 같은 것이다.
사회에서는 법과 원칙을 강조한다. 이때 법은 규제하는 것을 말하고 원칙은 도덕적 규범에 해당된다. 불교에서도 법과 원칙이 있다. 그것은 담마와 위나야 이다. 이를 법과 율이라 한다. 줄여서 ‘법률’이 된이다. 사회에서는 법과 원칙을 따르지만 불자들은 법률을 따라야 한다. 가르침대로 살고 오계를 준수하는 것이 불자들의 삶이다. 만일 누군가 담마와 위나야 대로 산다면 “그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1 지구는 아름다운 행성입니다. 우주의 많은 지성체들이 지구를 보호하려고 합니다. 지구인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행성을 아름답게 가꾸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렸으면 좋겠습니다. 그 지성체들과 대화는 입증할 수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진실입니다. 보지 않으면 혼란이 없습니다. 그러나 '뭔가'를 보기 위해서는 혼란은 피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2 낙천적 성격이 행운을 부르고 비관적 성격이 불운을 부릅니다. 마음 안에 반복해서 간직하는 것들은 씨가 되거나 알이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꽃으로 피어나거나 짐승으로 태어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인사를 합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법문이지요.
3 "마음의 고통을 겪으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게 낫습니까? 아니면 명상가를 찾아가는 게 낫습니까?" - 가장 좋은 것은 아기나 꽃을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나 이전의 것, 지금의 내가 되기 이전의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쳤을 때 우리는 왜 아기와 꽃을 볼 생각을 하지 못할까요?" - 아상我相때 문입니다. 아상은 잘못된 자신의 모습입니다. 본디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곡되고 일그러진, 비정상적인 자신의 모습입니다. 잘못 알고 있는 나의 모습에 가려져서 진짜 나, 아기와 같은 나, 꽃과 같은 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부처가 꽃을 들어 보였을때 가섭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부처가 꽃을 들어보인 것은 "예쁘지 않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에 가섭은 미소로 "예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지요. "온천하가 아름답고, 너 또한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하면 "맞습니다"하면 됩니다.
꽃을 들여보였는데 우리는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을 모읍니다. 그냥 보고 "아름답구나"하고 느끼면 통하는 도를 참으로 멀리 돌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꽃 한 송이가 만 세상을 통하는 道입니다.
"꽃을 왜 들었을까 생각하는 순간 끝나는군요" - 머리로 가버리면 '도로아미타불'입니다.
낭만의피아노곡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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