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看話禪)과 위빠사나(vipassana)의 다른 점
출처: 2003년 2월 지리산 실상사 화림원에서 열린
제7회 선우논강의 발제문 “간화선과 위빠사나, 무엇이 같고 다른가”에서
논주로 나선 각묵스님은 이글 앞에서 간화선과 위빳사나가 같은 점을 5가지를 들었다.
참조 : 전문은 네이버 오픈백과 다음 항목을 참조하십시오. :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같은 점
1. 경절문(徑截門)이다. 즉 먼저 남북불교에서 공히 각각 간화선과 위빳사나를 각각 견성과 해탈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간명한 방법이라고 설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2. 챙김을 중시한다 즉 화두라는 특정 대상에 대해서 의정을 돈발하게 하는 간화선 수행법과 몸과 마음의 특정 현상에 대해서 무상.고.무아로 수관할 것을 가르치는 위빳사나 수행법은 화두나 법, 대상 혹은 명상주제에 마음을 챙기는 것을 수행의 출발로 삼고 있다.
3. 깨달음의 성취 ― 견성과 해탈 즉 간화선도 깨닫기 전에는 수많은 세월이 걸린다. 그러나 깨닫는 순간은 즉각적이다. 위빳사나를 통해 수관을 닦는 기간 역시 많은 세월이 걸릴지 모르나 해탈하는 순간은 즉각적이다. 그러므로 남북방의 간화선과 위빳사나는 돈오라는 입장도 공유하고 있다.
4. 대신심.대분지.대의정과 오근/오력(信.精進.念.定.慧) 즉 간화선의 기본인 신심.분심.의심은 위빳사나의 기본 요소인 信.精進.念.定.慧의 오근/오력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간화선의 의단은 초기불교와 남방불교에서 강조하는 念(마음챙김).定(선정).慧(지혜)의 세 가지 심리현상이 극대화된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다.
5. 선정보다 지혜를 중시한다. 즉 대혜 스님이 행주좌와어묵동정에 간단없이 화두를
챙기는 것을 강조하고 묵조선을 흑산의 귀굴에 앉아있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일상에서화두를 참구하는 것 자체가 반야의 실천이 되는 공부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혜가 주창한 간화선은 고요함(선정)보다는 지혜(반야)를 강조한 수행법이다.
위빳사나는 지혜의 다른 이름이다. 위빳사나는 선정의 고요함에만 빠져있는 사마타를
거듭거듭 경계하고 있다. 실제로 수행센터에서는 앉는 데만 집착하지 못하도록 수행자들을 독려하고 있으며 행주좌와어묵동정에 항상 정해진 대상(법)을 수관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각묵스님은 이렇게 간화선과 위빳사나가 같은 점을 5가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간화선과 위빳사나가 다른 점 5가지를 이어서 설명하였다.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다른 점
1.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 ― 화두와 법
적묵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간화선은 화두참구를 그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고 사마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위빳사나는 법을 관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둘이 공히 대상을 참구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제일 큰 차이점은 바로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점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방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참구의 궁극은 은산철벽이나 전후제단 등으로 표시되듯이 참구하는 자와 참구대상의 차별이 없어진 경지를 말한다. 이런 경지를 투과해야 주와 객, 심과 법의 대를 넘어선 절대의 경지 바로 性의 경지를 체득할 수 있으며 이런 주객이 끊어진 자리에 계합하는 것이야말로 견성이다
(心法雙忘 性卽眞 심법쌍망성즉진 - 증도가).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은 법이다. 위빳사나는 매순간 마음의 대상이 되는 물․심의 현상(법)을 무상(변함)과 무아(실체없음)로 철견하고 통찰을 계속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변함과 실체없음을 통찰할 때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심의 현상(오온)이 해체되어버림을 통찰하는 멸괴지와 모든 현상(상카라)들에 완전히 초탈하여 평온하게 되는 평온의 지혜가 일어나게 되며 이런 과정을 거쳐 공하고 상이 없고 바램이 끊어진 해탈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찰라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심의 제 현상[法]들을 변하고 괴로움을 가져다주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통찰해내지 못하고 매순간 이런 무상․고․무아를 바로 지금 여기서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공이나 성이나 자성청정심이나 진여 등에 즉각적으로 계합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관념(빤냣띠, 산냐)놀음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아비담마는 말한다. 이것은 오히려 탐진치에 놀아나면서도 본자청정을 부르짖는 무사선의 폐풍과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묵묵히 본자청정을 반조한다는 묵조선을 비판하고 행주좌와어묵동정의 매순간에 화두를 실참실수하여 분별망심을 극복할 것을 강조하는 간화선과 같은 입장이라 해야 할 것이다.
2. ‘오직 직관’과 ‘분석을 통한 직관’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또 다른 입장은 직관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일체의 전제를 부정하는 간화선의 입장은 직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심의 현상(법)을 분석하고 이것을 수관하여 무상․고․무아를 꿰뚫을 것을 가르치는 위빳사나의 입장은 분석을 통한 직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먼저 선종의 화두와 힌두의 명상주제는 분명히 구별되어야한다는 점을 들고 싶다. 아무 구분없이 이 둘을 혼용하면 불교수행을 호도할 우려가 너무 많다. 그리고 실제로 요즘 그런 경향이 한국불교에 많이 나타나서 두렵다.
힌두의 여러 수행 테크닉들은 그게 어떤 형태를 띠던, 어떤 식의 미묘한 설명이던 그들은 아뜨만․브라흐만 아니면 이것의 화현(avatāra, 요즘 아봐타로 발음하기도 한다)으로 보는 여러 가지를 설정하고 그것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그것과 합일하려는 발상을 가진 수행법이다. 그러므로 힌두의 수행법은 초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종의 화두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선종의 화두의 출발은 전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근본 신조로 하고 있다.
그런 전제를 다 부정하는 근원적 의문과 의정이 화두의 출발이다. 무엇하나 전제를 둔다면 화두와는 십만 팔천리이고 간화선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숫따니빠따』에 나타나는 초기 부처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산냐남 우빠로다나(san$n$aanam uparodhana) ―
산냐들의 척파’라 할 수 있다. 이런 산냐의 척파를 고구정녕히 설하는 것이
선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이고『금강경』에서는 아뜨마산냐(aatmaa-san$n$aa) 즉, 我相(자아라는 산냐)을 그 대표적인 것으로 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궁극의 자아나 브라흐마를 설정하고 그기에 몰입함을 근본으로 삼는 힌두 수행과는 출발부터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무아라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굳건히 서서
확철대오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간화선의 태도는 직관적(intuitiv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빳사나는 이 둘과는 또 다르다. 위빳사나는 초월적이지도 않고 직관적이지도 않는 분석적(analytic)으로 접근한다. 나란 무엇인가를 초월적으로 접근해서 그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 몰입하는 힌두적인 행법도 아니요, 화두일념이 되어서 본무생사를 직관적으로 직입적으로 확철하려는 간화선적인 접근도 아니다.
나를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 심리현상]과 물질[色]의 72/82가지 물/심의 현상[法]들의 합성체로 관찰하고 그래서 이들이 어떤 복잡한 관계와 과정을 그리며 찰라생 찰라멸을 하는 가를 극명히 드러내는 아비담마의 분석위에 기초하여 사물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먼저 가르치는 것이 위빳사나이다.
이렇게 분해하고 분석해보면 이런 ‘나’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의 단위들이 모두 찰라생이고 찰라멸이라는 것이 투철해진다[無常, anicca]. 그래서 그런 것에 연연하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고통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며[苦, dukkha] 이런 근본적인 구조로 이루어진 나라는 존재는 그래서 ‘나’라고 주장할 어떤 본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無我, anattā] 여실지견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분석적인 태도는 부처님이 즐겨 사용하신 제자들을 깨우치는 방법이다. 물론 이런 무상/고/무아를 여실지견하는 최후의 경지는 직관적이라고 해야 한다. 분석의 끝은 바로 직관이다. 그러므로 위빳사나는 분석을 철저히 하고 그 분석의 바탕위에 물/심의
제 현상이 무상/고/무아임을 직관하는 분석을 통한 직관을 중시한다.
이처럼 위빳사나는 철저한 분석을 통해서 무상/고/무아의 직관에 이르도록 하는 체계이고 반면 간화선은 어떤 전제도 거부하며 본무생사를 직관할 것을 다그치는 체계라
할 수 있다.
3. 정해진 대상(화두)과 변하는 대상(법)
간화선의 화두는 정해져 있다. 여기서 정해져 있다는 말은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자는 무자화두만 참구해야지 화두를 ‘이뭐꼬’나 ‘간시궐’ 등의 다른 화두로 바꾸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자가 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이유 없이 화두를 바꾸는 일이다.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화두에 모든 것을 걸어야하는 것이 간화선의 제일 중요한 측면이다.
반면 위빳사나의 대상인 법은 매찰나 바뀐다. 복부의 일어남과 꺼짐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일어남과 꺼짐은 순간순간 바뀌고 있다. 온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온몸의 느낌은 의식이 집중되는 매순간 바뀌어 간다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에서도 찰나찰나의 마음은 바뀌어간다. 오히려 이런 변화하고 실체가 없는 현상(법)들을 매순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사무치게 꿰뚫어보는 것이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이다. 대상의 변화와 실체없음을 망각해버리고 대상의 표상에 집중하는 수행은 위빳사나가 아닌 사마타 수행일 뿐이다.
간화선은 지혜를 개발하는 수행이 아니라 정해진 대상(특히 화두라는 개념)에 집중하는 사마타 수행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화두는 단순한 집중의 대상이 아니다. 양귀비가 소옥아!하고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안록산에게 그 목적이 있듯이 단순히 집중을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은 아니다.
‘관법(觀法)으로는 생사해탈 못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서 관법이라 표현한 것은 백골관 등의 부정관을 일컷는 것 같은데 이런 부정관은 사마타 수행이지 위빳사나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방에서도 부정관으로서는 생사해탈 못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남북방 공히 선정수행, 즉 사마타 수행으로는 해탈을 못하고 지혜를 돈발하는 간화선, 혹은 위빳사나로만이 생사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오해하여 간화선은 사마타 수행이므로 해탈 못한다고 하고, 위빳사나는 선정수행이므로 해탈못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한다. 서로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억지임을 곧 알 수 있다.
4. 교학 무시와 중시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교학을 무시하고 중시여기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간화선의 기본모토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물론 이 언구가 깨달음을 밖에서 구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실현하라는 말이기는 하지만 문자를 무시하고
교밖의 가르침임을 강조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선종의 기본입장은 깨달음의 경지나 진여의 자리를 현란하게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는, 화엄을 상수로한 대승의 교학체계를 비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관심일법이 총섭제행이라 하였다고 전해오며 후대에는 마음 깨치는 이 공부법을 대승이 아닌 최상승이라 불렀다고 파악한다. 그리고 이런 현란한 교학에 매몰되어버리면 마음이라는 바로 지금 여기를 놓쳐버리기 때문에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선종의 모토로 제시하였고 대혜 스님은 일체전제를 거부하는 무전제의 수행법으로 화두참구를 제시하였다고 받아들인다.
반면 위빳사나에서는 바른 위빳사나의 전제조건으로 아비담마를 정확하게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아비담마는 현란하지 않다. 무미건조할 정도로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 남방의 강원에서는 아비담마를 중시하고 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서 아비담마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으면 자칫 테크닉에만 치중하여 자기가 배운 기법만을 정통으로 고집할 우려가 있고 이 테크닉이라는 지엽적인 것에 걸려 위빳사나를 팔정도를 실현하는 큰길로 살려내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아비담마를 통해서 물/심의 여러 현상을 분석해서 꿰뚫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 중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에 속기 십상이다. 물론 아비담마는 수행의 길라잡이라는 것이 그 근본이다. 수행이라는 근본을 잃어버리면 아비담마는 그냥 고담준론이나 메마른 해석학에 떨어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5. 인가 중시와 무시
교학을 무시 내지는 부정하는 간화선의 가장 중요한 입장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가이다. 저 학인이 화두를 타파했는지 아닌지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는 객관적으로 없다.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기본종지로 하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간화선은 인가와 인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법맥을 중시한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특히 법맥을 계통 나열하여 한 종장의 권위를 확보하려 애쓰며 우리는 선종사를 통해서 이런 법통을 속가의 족보이상으로 중시여기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빳사나에서는 인가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남방에선 인물 중심의 수행 법통을 중시하지 않는다. 굳이 스승의 인가를 받지 않아도 빠알리 삼장과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의 여러 지침서 등이 빠알리어와 미얀마 말로 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자신의 경지를 정확하게 가늠해 볼 수 있다.
6. 결론
간화선과 위빳사나의 궁극적인 차이는 참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간화선에서는 견성의 도구로 화두참구를 들고 있고 위빳사나에서는 해탈의 방법으로서 법을 수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화두는 고정된 대상이고 법은 변화하는 대상이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참구를 통해서 언로와 심로가 끊어져 주와 객, 심과 법을 초탈한 성을 즉각적으로 볼 것을 다그치고 위빳사나에서는 법을 매순간 무상/고/무아로 꿰뚫어 궁극에는 공하고 모양을 여의었고 일체 의도가 끊어진 해탈을 성취할 것을 가르친다.
화두참구는 직관에 바탕하고 수관은 분석에 바탕한다. 비록 참구의 대상은 다르지만 이 둘이 추구하는 것은 지혜의 완성이다. 그러므로 간화선을 사마타에 걸린 수행으로 간주하거나 위빳사나를 적정처를 닦는 선정 수행정도로 치부하는 견해는 옳지 않다.
그리고 견성을 주창하는 간화선은 교학을 무시하고 대신에 인가를 중시한다. 한편 해탈을 주창하는 위빳사나는 아비담마에 대한 정확한 분석지를 중시하며 대신에 인가는 중시하지 않는다.
우리조계종지에서는 간화선으로 공부수행을 하지요 굉장히 어려운
공부이고 은산철벽이 가로막혀 스스로 체득하지못하면
심히 갑갑한 공부이기도 합니다만
스승님들께서는 반드시 공부에 필요한 줄탁에 도반들과 스승님들을
천거해 인가를 받기를 권하지요 많은 공부가 되였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