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도 않았는데 죽을까 걱정하나 / 종범스님

2014. 3. 12. 20:1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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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도 않았는데 죽을까 걱정하나 / 종범스님

                                         
오늘은 학인과 도인을 주제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학인(學人)은 배우는 사람이고
도인(道人)은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학인이란 원래 학도인(學道人)의 준말로 ‘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도인은 행도인(行道人)의 줄인 말로
‘도를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두가 학도인입니다.
도(道)라는 말은 선(禪)이라는 말과 같이 사용하여
학선인(學禪人)이라는 말도 널리 사용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도는 무엇일까요.
도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또 무엇일까요.
우리말을 보면 말에는 논리(論理)가 있고
사물에는 물리(物理)가 있고
일을 해나가는 데에는 사리(事理)가 있으며
생각을 하는 데에는 심리(心理)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요.
진리는 논리도, 사리도, 심리도 아닙니다.
하지만 진리를 말로 표현하자면 논리가 되고,
일로 표현하면 사리가 되고, 생각으로 표현되면 심리가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논리를 진리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설명하는 것은 논리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도가 무엇인가”하고 묻지만 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답을 하면
이미 말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도란 사실 말을 하고 말을 듣는 것입니다.
말을 하고 듣는 가운데에 모든 일이 다 이뤄집니다.
옛 글에 보면 도에 대한 문답이 많이 있습니다.

옛 선사들의 문답을 살펴보면
“도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도는 담 너머에 있다.”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그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도(大道)를 묻는 것입니다.”라고 묻자
선사는“대도는 장안(長安)으로 통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논리가 아니면서 도를 설명한 것입니다.
또 마조 선사의 어록을 보면 어떤 분이 마조 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라는 묻자
“평상심이 도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평상심이 무엇일까요.
이는 조작이 없는 것입니다.
일부러 만드는 것은 진리일수 없지요.
조작이 없는 평상심, 이것이 바로 도입니다.
조작은 물드는 것입니다.
오염이 없는 것이 곧 조작이 없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자꾸 마음에 물이 듭니다.

공연히 미워하고, 공연히 걱정하고,
제 마음을 제 마음대로 갖고 있지 못하고,
물질을 걱정하고, 지나간 일에 허우적거리고,
다가오지도 않은 일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입니다.
오늘 할일을 하고,
하지 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곧 평상심입니다.

도라는 것은 무엇을 만들지 않고,물들지 않고,
스스로 더럽혀지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간혹 평상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저 하루하루 반복되는 마음을
평상심으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어제도 근심걱정하고 오늘도 근심걱정하고
내일도 근심걱정 하는 반복을 평상심으로 아는데
이것은 도가 아니라 망상심입니다.

도를 배우려면 무엇보다도
관자재학습(觀自在學習)을 해야 합니다.
‘관자재보살’이라는 경구가 있듯이
무엇보다 보는 것을 잘 봐야 합니다.
보살은 결과를 그대로 실행하는 행도인도 되고
원인을 닦아가는 학도인도 됩니다.

‘관자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령 예를 들이 이 그릇을 보자면 이것은 그릇이기도 하지만
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흙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릇 속에는 만든 사람의 솜씨와 생각도 들어 있습니다.
재료인 흙은 이 그릇을 만들기 전인
수억만 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함께 보는 것이 관자재하게 보는 것이다.
더 깊이 보면 그릇은 영원히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는 것이 관자재하게 보는 것이다.

관자재는 관자관타(觀自觀他) 나도 보고 상대방도 보는 것이며,
관색관공(觀色觀空) 색도 보고 공도 보는 것입니다.

그릇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을 보는 함께 보는
관자재의 경지에 들어가면
나도 보고, 남도 보고, 삶도 보고, 죽음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다 보면 걱정할 것이 없는데 그렇지 못하고 한 곳에 치우쳐
마음이 끌려 다니는 것이 걱정입니다.
마음이 매어있고 끌려가기 때문에 편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잘 보기만 한다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헛것을 보아 망견 망상에 빠져
관자재를 하지 못하는 것이지
누가 나에게 고통을 주고 걱정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잘못 보고 잘못 생각해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깊이 보고 넓게 보고 진실하게 본다??
걱정 근심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죽지도 않았는데 죽을까 걱정하고
지나간 과거를 걱정하는 이것이 모두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않을 것은 하지 않으며 살면
그것이 관자재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관세음(觀世音)이 됩니다.
세상의 소리란 즉 다른 사람의 소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소리를 눈에 보는 것처럼
깊이 듣는 것이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입니다.

배움이란 것은 관세음을 배우고 관자재를 배우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할 때 그 소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깊이 들을 수 있으면 관계는 좋아집니다.
하지만 내가 걱정이 많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람소리를 듣고, 물소리를 듣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손바닥을 보고도 깨달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일체가 모두 도인데 허망하게 보는 망견과
허망하게 생각하는 망상에 빠져서 도를 보지 못할 뿐입니다.
스스로 보고 스스로 듣는 능력을 키워내는 것 그것이 학인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도를 실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망상을 줄이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또 어떻게 해야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을 쉬라고 하면 어떻게 마음을 쉴 수 있는지 고민합니다.
그래서는 점점 더 쉴 수가 없습니다.

경전 중에 간단하고도 중요한 경전이 있는데
바로『반야심경』과『법성게』입니다.
정말 위대한 경전입니다.

반야심경은 모두 270자로 되어있고
법성게는 210자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진리가 그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경전을 자꾸 읽고 외우면 됩니다.
이 경전에 무량공덕이 있고
관자재보살이 되고 관세음보살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속에서 쓸데없는 망상이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잠들어있는 사람이 꿈을 꾸기 때문에 복잡함이 생긴 것이지
잠든 자리 자체에 복잡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도로 돌아가면 걱정할 것이 없는데
망상으로 가기 때문에 걱정이 있는 것입니다.
‘경’은 잠에서 깨어나는 이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을 30여년 전의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마음이 조급하고,난폭하고, 거칠어 졌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니 TV를 많이 보아서입니다.
그 속에는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도 들어있습니다.
TV를 통해서 악을 공격하고 악에 대해 말하고
복수하는 것을 자꾸 보다보면
어느 순간 악의 그림자가 내 마음속에 떨어지게 됩니다.
악에 대한 공부를 자꾸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보를 교환하는 것은 좋지만 자꾸 보고 있으면
나쁜 것도 우리 머릿속에 자꾸 저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TV와 인터넷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점점 조용하고 맑게 하면
본래 근심걱정 할 것이 없습니다.
근심걱정은 내가 만들어 내가 하는 것입니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만 제대로 이해해도 불교를 다 이해하는 것입니다.
불자여러분들은 도를 잘 배우는 좋은 학인이 되어야하고
도를 잘 실행하는 도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근심걱정 없이 세세생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