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은 실향민
이른바 위없는 부처님의 법왕법(法王法)은 말을 떠나고 일체상(一切相)을 떠나 있습니다. 상대적인 말이나 형상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법상(法床)에 오를 때는 마땅히 상(相)을 떠난 법문(法門), 또는 말을 떠난 법문을 해야 합니다. 즉 우리 중생의 상대적이고 유한한 말을 떠난 참다운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기에 방(棒;몽둥이)을 탕탕 내리쳐서 선기(禪機)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므로 해설이 곁들여진 법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불이나 법회를 시작할 때 우리는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하면서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예를 올립니다. '양족존'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비나 지혜와 같은 모든 덕성을 완전히 구비한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일일이 다 이야기하자면 비단 자비나 지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자비와 지혜의 두 속성을 들어서 부처님의 공덕을 표현합니다.
그럼 '부처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 불자(佛子)들은 이런 질문을 항시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 귀의해서 일 년 된 분이나 또는 십 년 된 분이나, 몇 십 년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질문을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 성불하여 부처가 되기 전까지는 부처님은 대체 어떤 분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질문에 바르게 해답할 수 있어야 수행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말이나 문자로는 부처님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또는 인과율을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현상적인 형상만 보고 상대적인 문제만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부처님이 현상적인 문제를 떠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현상과 그 본래 모습인 실상(實相) 모두를 하나로 보는 것이 부처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안목이 짧아서 실상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참다운 세계, 본래 진면목의 세계가 우리 중생이 볼 수 있는 현상의 세계와 둘이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하나의 현상은 모두가 다 실상이 형상화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에 대한 파도의 관계와 같습니다. 바닷물 자체가 실상, 곧 체(體)에 해당한다면, 여기서 일어나는 온갖 거품이나 파도는 현상인 용(用)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바닷물을 떠난 파도와 거품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현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자기 한계상황을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이 현상적인 세계만 본다면, 우리 중생은 평생 동안 인생 고해(苦海)에서 헤매다가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근본을 떠난 우리는 모두가 다 실향민입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1천만의 실향민 때문에 피차 서로 가슴을 앓고 있습니다만, 비단 이북에서 온 1천만 동포들만 실향민인 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성자를 제외한 세계 50억 인총(人總)의 범부중생은 모두가 다 자기 고향을 떠난 실향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주만유(宇宙萬有)의 본성품을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비록 제아무리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학식이 많다 할지라도 실향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참다운 본성을 찾는, 참다운 고향을 찾는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참다운 고향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지금 나는 어디만큼 가고 있는가?' 이렇게 자기를 성찰해 보고 자기 반추를 해봐야 합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우리 중생들이 추구하는 안락은 오욕락(五欲樂)이라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쾌락입니다. 오욕락이란 재(財), 색(色), 명(名), 식(食), 수(睡)를 말합니다. 재물이나 이성(異性)에 대한 욕심, 명예, 음식, 또는 잠 욕심, 이런 것은 분명 오욕락인데, 우리 중생들은 이런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곧 인간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예수, 공자나 노자 혹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들은 이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것을 제목으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만, 우리 중생은 지금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우리 중생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것이 모두라고 여기고 참다운 실상, 그 본성품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본성품인 참다운 고향자리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고향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실향민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이 현상세계는 인연 따라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지 절대로 실존적인 것이 못 됩니다.
루터가 법문을 할 때, 법상 - 물론 지금 여기의 법상과는 다르겠습니다만 - 에 올라가면 먼저 가만히 하늘을 한참 우러러본 다음에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루터가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영원한 진리와 자신과의 거리를 없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당(上堂)에 올라서 하는 법문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한마디 한마디가 다 영원한 진리의 차원을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바로 참다운 성품자리로 가는 성불의 길이기 때문에, 거기서 한 발짝만 벗어나게 되면 죽고 사는 길에 떨어지고 맙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조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오욕락, 즉 재물에 눈이 어둡고, 이성에 대한 욕망에 눈이 어둡고, 명예나 음식 또는 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생활, 이런 것에 얽매인 생활은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재물ㆍ명예ㆍ잠ㆍ음식ㆍ수면, 심지어는 자기 몸뚱이까지도 결국에는 스러지고 마는 것 아닙니까? 어느 땐가는 죽고 맙니다. 어느 땐가 소멸해서 목숨이 다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이 몸뚱이입니다. 내생(來生)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몸뚱이 이대로 생(生)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 동안의 자기 행위에 따라서 다시 다른 몸을 받는 것이고, 지금 이 몸은 이 생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 몸뚱이는 인연 따라서 잠시 동안 이런저런 요소들이 모여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변하는 것 같지 않지만, 변화무쌍하여서 오늘 죽어 없어질지 내일 죽어 없어질지 모르는 것이 바로 이 몸뚱이입니다. 이런 것에 우리 마음을 두고 사는 것, 그게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애지중지 아끼는 재물도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재물이든 명예든 상대적이고 유한한 것에 얽매여 사는 생활, 그건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르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도 온갖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고 맙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는 대체 무엇인가? 머잖아 우리는 이북과도 합해야 하는데, 주체사상은 어떠한 것인가? 또는 우리 한민족 가운데 1천 5백만을 헤아리는 신도를 가진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것인가? 아직도 우리 사회의 근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교는 어떠한 종교인가? 이런 문제에 부딪히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 명확한 해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슬기로운 어머니가 되고, 참된 아버지가 되고, 또한 지혜로운 스승, 총명한 사회인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바른 사회인도, 바른 어버이도, 바른 스승도 못 됩니다.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안다는 것은 나의 종교나 이념을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종교를 모른다는 것은 나의 종교를 모른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른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것을 비교해서 생각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는 적어도 20대부터 자기 인생관, 자기 철학이 확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와 같이 모든 중생에게 참다운 길이 어떤 것인가, 우주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상대적인 생각을 떠나서 영원히 변치 않는 부동의 진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단 부처님의 가르침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이나 유교 경전, 혹은 마호메트의《코란》이나 모두가 다 죽음에 이르는 가르침이 아니라 죽지 않고 영생에 이르는 가르침입니다. 무상하기 그지없는 자기 몸뚱이나 재산, 헛된 명예나 이성간의 욕망에서 벗어나 참되고 변치 않는 불멸의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모든 성자들의 가르침입니다.
삼매와 법락
적어도 부처님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삼매(三昧)라는 용어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독서삼매, 염불삼매 등 무슨 무슨 삼매라는 말이 많지 않습니까? 삼매란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바른 도리, 참다운 도리에 딱 모아진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생활할 때도 더러는 황홀할 때도 있는 것이고, 또는 무엇에 도취해서 자기도 모르는 순간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삼매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참다운[正] 생각으로 일념(一念)이 되어서 움직이지 않는 그런 때를 삼매라고 합니다. 참선을 좀 했다고 해서 그냥 삼매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참선을 좀 했더니 무아무중(無我無中)의 삼매에 들었다" 이렇게 말합니다만, 그런 정도로는 아직 삼매가 못 됩니다. 우리 마음이 정확히 참다운 부처님 성품, 우주만유의 본래자리, 용(用)이나 상(相)이 아니라 근본 참다운 성품자리에 입각해서 그것을 몸소 체험하여 전혀 흔들림이 없는 마음, 그런 마음을 삼매라 합니다.
그러면 그런 법락은 어떤 때에 나오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욕락이란 잘 먹어서 재미가 있고, 재물이 많아서 재미가 있고, 명예가 높아서 재미가 있는 것을 말하지만, 법락은 그러한 즐거움이 아닙니다. 참다운 법락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삼매에 들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보배입니다. 만약 우리 중생이 삼매에 들지 못한다면 평생 동안 참다운 법락을 맛보지 못하고 가는 셈입니다.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지만, 참다운 법락을 맛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처럼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이번 공부에서 법락을 맛보셨습니까? 우리 마음이 부처님 성품자리에 딱 머물러서 조금도 동요 없는 법락을 맛보셨습니까? 우리 인생은 낭비할 마당이 아닙니다. 낭비할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한 걸음도 한눈팔지 말고 참다운 행복을 맛봐야 하는 마당입니다. 그리하여 꼭 고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며, 고향으로 못 갈 때에는 다시 동물로, 사람으로 끝도 갓도 없이 헤매고 맙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피타고라스와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소크라테스도 윤회설을 긍정했습니다. 자기가 금생에 마음먹는 대로 꼭 다시 태어납니다.
따라서 삼매를 가리켜 현법락주(現法樂住)라 합니다. '나타날 현(現)'자 '법 법(法)'자 '즐거울 락(樂)'자 '머무를 주(住)'자, 즉 삼매를 가리켜서 법락이 나타나는 그러한 경계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한순간 삼매 혹은 법락을 맛보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온전한 행복, 즉 영원불변의 참다운 행복은 못 됩니다. 그런 자리에서 일단 증명은 했다 하더라도 아직 습관성, 다시 말하여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번뇌는 못 버린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성이 된, 마음 구석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번뇌까지, 그런 씨앗까지 모두 뽑아 버려야 참다운 최상락(最上樂)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최상락 자리가 바로 열반락(涅槃樂)입니다. 비록 우리가 미처 열반락까지 못 간다고 할지라도 알기는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중생들이 구하는 행복인 오욕락은 사실 아무런 자취가 없습니다. 세간에서 흔히 "저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만, 사실 가장 지독한 배신자는 바로 우리 몸뚱이입니다. 아무리 아껴 봐야 죽을 때는 미련 없이 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가장 지독한 배신자는 바로 우리 몸뚱이입니다. 분을 칠하고 연지를 칠하고 다이아몬드로 몸을 장식한다 하더라도, 제아무리 좋은 옷을 입히고 산해진미를 먹인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 중생들은 법락을 모르고 열반락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몸의 노예가 되어 한 세상 보내기 쉽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이 성자들의 가르침 아닙니까? 성자들의 가르침만이 거짓말을 않습니다.
부처님과 우리 중생과 천지우주는 절대로 둘이 아니고 셋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통관(通貫)한 데 있습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통관하고 있으니 나무나 소나 사람이나 또는 부처님이나 천체나 어느 것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의 성품인 것이고, 단지 모양만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이 알아야 할 문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본체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체(體)란 무엇인가' 혹은 '본성품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핵심입니다. 누구한테 법문을 하건, 누구한테 법문을 듣든 간에 '본체가 어떤 것인가' '본성품이 무엇인가' 그 자리를 알아 버리면 다른 문제는 다 술술 풀려 갑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만 본체는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기 때문에 모양만 따지고 사는 사람들은 본체를 모르고 삽니다. 모양이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생명의 실존이기 때문에, 일체 존재의 근본성품인 본체는 바로 생명의 실상자리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번뇌로 때 묻은 우리 중생의 안목에서는 볼 수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길을 가다가도 '엑스터시' 즉 무아경(無我境)에 들곤 했습니다. 한번 마음이 통일되면 발도 안 떼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온종일 멈춰 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이상해서 사람들이 구경을 하느라고 길거리가 장바닥처럼 되곤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만, 유명한 분들은 이처럼 영원한 본체를 지향하므로 자기 마음이 분산되고 동요되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선방스님들이 한 철 90일 동안 가능한 한 문 밖에도 안 나가고 더더욱 산문(山門) 밖에 나가는 것을 금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상(相)을 떠나고 허망무상한 현상을 떠나서 영원한 것, 또 생사를 초월하고, 더함도 덜함도 없는 일체 존재의 근본인 그러한 생명의 본체를 알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
이와 같이 모든 것의 본체는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오직 하나의 성품입니다. 이러한 본체는 곧 불성(佛性)자리요, 부처님 성품입니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논리가 아닙니다. 참다운 우주의 도리인 동시에 우주의 생명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논리적으로만 따져서 합리적인 이치만 구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치만 알면 '공부 다했다'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자리는 다만 논리적인 이해로 닿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지성ㆍ감성ㆍ의지의 모든 것을 초월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근본자리를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라 말하고 하나님이라 말하는 것도 하나의 우상숭배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화두를 구해야 하지' 혹은 '말없이 구해야지 부처님이나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등 그 근본자리를 인격화시켜서 부르는 것은 하나의 우상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본체를 보지 못하는 중생입니다. 따라서 본체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셔야 공부하신 보람이 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본다 하더라도 이 우주는 궁극적으로 광양자(光量子), 즉 광자(光子)로 충만해 있습니다. 공간성ㆍ시간성도 없고, 질료ㆍ열량도 없는 광자만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광양자란 무엇인가? 이것은 알 수 없는 우주의 에너지, 우주의 장(場) 에너지입니다. 우주를 구성한 장 에너지가 광명같이, 빛같이 보이는 것이 이른바 '광양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리학적으로 볼 때는 사실 우주가 모두 빛뿐입니다. 광명뿐입니다. 광양자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 어떻게 진동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중성자(中性子)니 전자(電子)니 하는 것입니다.
저는 물리학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상세한 것은 잘 모릅니다만,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는 것 가운데서 다소 부정확한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요는 다 그런 뜻입니다. 또 물리학적인 입장에서도 우주의 본질이 '광명의 파동(波動)인가?' '광명의 입자(粒子)인가?' 하는 논쟁을 해오다가 지금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라는 입장으로 정리가 되고 있습니다. 파동이 어떤 충동 때문에 동요해서 중성자가 되는 차원에서는 하나의 입자라는 것입니다.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광명이 우주 어디에나 틈도 없이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는 현대 물리학적으로 본다 해도 사실은 광명뿐입니다. 광명뿐인 것이 이렇게 운동하고 저렇게 운동하고 해서 양자가 되고 전자가 되고 또는 중성자가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모여서 산소가 되고 수소가 되고, 각 원소(元素)가 되었습니다. 원소들이 모여서 분자나 세포가 되고 우리 육신이 구성되고 나무가 구성되고 하늘에 있는 달이나 별이 구성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광명이 어떻게 진동하고 결합되어 사람이 되고 다이아몬드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광명은 조금도 변질이 없습니다. 부처님 법문은 그 광명, 그 순수한 생명체가 곧 진여불성(眞如佛性)이며, 덜함도 더함도 없는 진여불성은 일체 존재가 모양을 내거나 말거나, 천지우주가 파괴되거나 말거나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체이며, 이것이 바로 부처님 성품이요 진여불성이라는 겁니다. 참다운 우주의 도리니까 바로 진여(眞如)요, 우주의 본성품이니까 불성(佛性)이요 법성(法性)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것이 하나의 생명, 즉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억울하게도 우리 범부중생은 번뇌에 가려서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이 규칙 없이 진동하기 때문에, 즉 순수한 진동을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품인 광명을 못 보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다가 호흡도 하고 염불도 하고 화두도 해서 우리 마음이 안정되어 가면 안정된 정도에 정비례해서 우주에 항시 존재하는 생명이, 광명이 차근차근 비쳐 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같은 사람도 그가 남긴 최후의 기록을 보면 가끔 광명을 봤습니다. 광명을 보고 환희심에 넘쳐 절대자를 흠모했다 합니다. 위대한 분들은 이와 같이 영원한 광명을 보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영원한 리듬을 듣습니다. 우리 중생은 이런 광명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영원한 리듬, 황홀한 음악도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주에는 영원한 리듬이 분명히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와 같은 본래 광명에서 온 하나의 생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여타의 생명체와 다르지 않습니다. 돼지나 소, 혹은 나무나 흙과 같은 생명과 다를 것이 없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대개 '생명' 하면 현대인들은 "사람이나 동ㆍ식물까지는 생명인데 다른 곳에도 생명이 있는가?"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 어떤 것이든 전자나 중성자의 결합체가 아닌 것이 없는 것처럼, 모두가 다 부처님 성품이라고 하는 진여불성, 즉 생명의 형상화인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든 흙이든 일체 자연(自然)이 생명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거나 공해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만 생명이고 다른 것은 생명이 아니다" "우리 인류만 생명이다" "인본주의다"라는 주장을 펼 때는 온갖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를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합니다. 일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불교가 인본주의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인간의 본성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인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중생의 차원에서 "사람이 제일 높다"라고 할 때는 불교를 인본주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교가 인본주의라는 본래의 뜻에서 어긋나는 해석입니다.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서 맨 처음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하늘 위나 하늘 아래서나 나 홀로 존귀하다"라고 하신 말씀도 그냥 우리 인간 존재, 범부 그 자체가 존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불성까지 간 존재, 일체 존재의 근원까지 간 존재, 부처님 차원까지 간 존재만이 하늘 위나 하늘 아래서나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
우리는 지금 광명의 바다, 광명의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광명의 고향에서 떠나온 것입니다. 광명의 고향을 떠나서 얼마나 헤맸는지 모릅니다. 과거 전생에는 천상(天上)에도 갔을 것이고, 사람도 되었을 것이고, 더러는 축생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금생에 사람의 몸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다시 우리는 광명의 바다, 광명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광명의 고향으로 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 인간이 탐욕[貪]이나 분노[瞋] 혹은 어리석은[癡] 마음에 가려서 미처 모르는 것이지, 설사 지금 강도짓을 하는 사람이라 해도 불성의 차원에서 보면 아무런 흠도 훼손도 없습니다. 불성은 결코 훼손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순금으로 가락지를 만드나 안경테를 만드나 순금 자체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진여불성 자리, 부처님 성품자리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변질되지 않습니다. 우리 중생 차원에서 강도요 나쁜 놈이요 좋은 사람이요 하는 것이지 불성 차원에서 본다면, 불성은 똑같이 온전하게 그 사람 속에 충만해 있습니다. 좋은 사람에게 불성이 빛나고 있는 것처럼, 나쁜 사람에게도 진여불성 자리가 훤히 빛나고 있으며, 동물이나 식물 속에도 부처님의 불성광명(佛性光明)이 훤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오염된 세계 그 자체가 바로 광명정토(光明淨土)인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 공부를 어떻게 해야 가장 빨리 광명의 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옥신각신 서로 싸우게 됩니다. 일본 일련종(日蓮宗) 같은 종파는 '남묘호랑게교'를 외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 종파를 세웠습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까 우리 한국에도 한 40만 정도가 일련종을 따르고 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남묘호랑게교'를 외는 것이 부처님 공부의 첩경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약 40만 명 정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법화종(法華宗)도 일련종을 본따서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경의 이름을 외우게 하고 있습니다. 광명세계로 가는 길, 성불의 길로 가기 위하여 법화경의 이름을 외는 방법을 취합니다. 경의 이름을 외면서 하는 방식은 일본의 일련대사(日蓮大師)가 처음으로 창시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법화경이 제일 수승한 경이므로 법화경의 본래 이름인 '남묘호랑게교'라는 경 이름만 외우면 진리가 그 속에 다 들어간다는 식이란 말입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보통 하고 있는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은 어떤 것인가? 또는 우리 선방에서 보통 하고 있는 '이뭣고[是甚麽]' 선이나 '무(無)'자 화두, 또는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板齒生毛]' 화두나 '마삼근(麻三斤)' 화두는 어떤가? 이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의 본래성품 자리로 가장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가? 이런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다.
참다운 참선 참다운 염불
부처님 자리는 단지 경(經)만이 아니고 바로 생명 자체입니다. 내가 생명인데, 우리 자신이 바로 생명인데 일체 존재, 일체 생명의 근본자리인 부처님 자리가 생명 아니겠습니까? 천지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러기에《관무량수경》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즉 부처님은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저 어떤 하늘에 계셔서 하늘만 몸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우주를 몸으로 하는 가운데 우리도 다른 모든 존재와 똑같이 우주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자리에서는 대소장단이 없습니다. 모두가 우주에 들어 있는 부처님 성품인데 잘난 사람은 부처님 성품이 더 많은가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 동물이나 인간, 또는 식물이나 하나의 티끌조차도 모두가 '성품'이라는 차원에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성품은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습니다. 공간성이나 시간성이 없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공간성이 없으니 물질이 아니겠지요. 또한 공간성이 없으니 시간성도 없단 말입니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 인과율(因果律)조차도 초월한 순수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는 작고 크고 많고 적고, 또는 높고 낮은 어떠한 차이도 없습니다. 티끌에 있는 진여불성이나 사람에게 있는 진여불성, 석가모니에게 있는 불성이나 예수님 불성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역사적인 상황과 인과의 여러 가지 차이 때문에 상(相)만, 오로지 상만이 차이 있게 표현된 것이니, 본성품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남묘호랑게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참다운 성품은 대소장단의 차이 없이 우주에 충만해 있고, 훤히 빛나는 부처님의 무량광명이 우주에 충만해 있다' 이렇게 확신하면서 '남묘호랑게교'를 외우면 허물될 것이 없습니다. 또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는 화두를 한다고 하더라도 '어째서 판때기 이빨에 털 나온다고 하는가?' 이런 식으로 의심하면 참다운 공부가 못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참다운 참선이라는 것은 본성품 자리, 본분(本分)자리, 본래면목(本來面目) 자리, 곧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님들도 기왕이면 참선을 하고 싶지요? 스님 네한테 말을 들으면 "일반 공부는 방편이요 참선이라야 훌륭한 공부다" 하니까, 저에게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화두를 타러 옵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어떻게 공부합니까?" 하고 물으면 "아, 저는 '관세음보살'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분들은 관세음보살과 화두가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관세음보살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입으로는 "관세음보살!" 하면서 그 마음 자세가 본성품을 떠나서 '관세음보살이 저만큼 어디 계신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대상적인 것으로 추구하는 것은 참다운 참선이 못 됩니다. 그것은 참다운 염불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염불에 불과합니다.
참다운 염불은 불이불(不二佛), 즉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부처님 이름을 외는 것입니다. 또는 불리불(不離佛)이라, 즉 부처와 내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염불한다는 말입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님뿐이다, 부처님 한 분뿐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중생은 그 자리를 떠나기 쉬우므로 그 자리를 간절히 지키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한다면 "관세음보살!" 하는 것 이상의 다른 화두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화두를 들든 그 화두를 다만 상대적인 문제로나 의심하고 이럴까 저럴까 또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의심한다면 그것은 바른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은 하나의 이성적인 추구방법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한순간도 본체를 여의지 않아야, 본 주인공을 안 여의어야 바른 참선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공부가 차근차근 순숙(醇熟)됩니다.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단박에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람의 근기가 선근(善根)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만, 대체로 오랜 시간 동안 추구해야 바른 참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께서도 6년 고행(苦行)이 필요했으며, 조주(趙州)스님 같은 대천재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조주스님께서 처음에 남전보원선사에게 가서 공부를 하셨는데 "부처란 무엇입니까?" 하고 보원선사에게 묻자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말을 따라서 조주스님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조주스님이 깨달은 경계를 말씀드리니까 "그대가 비록 문득 깨달았다[頓悟] 할지라도, 재참삼십년(再參三十年)하라!" 즉 30년 동안 더 참선 수행하라고 말씀했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열렸다 하더라도, 즉 '천지우주가 부처님뿐이며, 모두가 광명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공부가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느꼈다 하더라도 공부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습관성, 그 씨앗을 뿌리 뽑으려면 굉장히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조주스님 같은 분도 30년의 수행이 더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처님 명호는 '나무아미타불'이든 '관세음보살'이든 모두가 다 진여불성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했다고 해서 더 높은 것도 아니고 '관세음보살'을 외는 것이 더 낮은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는 고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공덕 차원에서 볼 때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처님은 형상이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은 우주의 대생명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찾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나무아미타불' 또는 '아미타불'을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부처님 명호(名號)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화두입니다. 다시 말하여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나무아미타불 해라!" 또는 "관세음보살 해라!"고 하신 것은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그 자체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두라는 말입니다. 꼭 '무(無)'자나 '이뭣고'만 화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화두라는 것은 현성공안(現成公案), 즉 바른 마음에서 보면 우주만유가 다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지금 "지장보살!"을 많이 하여 거기에 습관이 붙었고, 게다가 약간의 법락(法樂)에 가까운 재미까지 보았다면 구태여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지장보살이나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모두가 하나의 자리, 하나의 생명자리이며 전혀 구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영가천도를 할 때도 이런 자리에 우리 중생이 영혼을 천도(薦度)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지구 같은 땅덩어리를 맡고 있는 성령 기운이 지장보살이다'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장보살은 다른 성령 기운하고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
부처님 차원의 참다운 기운은 전혀 한계가 없습니다. 부처님 차원의 기운은 우주에 충만해 있어서 어디에 덜 있다거나 더 있다는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외우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든 '이뭣고'를 하든, 또는 광명진언(光明眞言)을 하든 하나인 바로 그 자리라고 생각하셔야 쓸데없는 시비를 하지 않게 되고, 우리의 공부도 차근차근 진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란 자비와 지혜가 원만히 갖추어진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자비와 지혜, 이것은 부처님 자리에 갖춰져 있는 가장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공부할 때는 꼭 자비와 지혜를 함께 가지런히 지닐 수 있을 때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의 날개가 한쪽만 있고 다른 한쪽은 없다면 바로 날 수가 없습니다. 땅 위를 굴러가는 달구지도 두 바퀴가 똑같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공덕, 다시 말하여 우리의 본성품인 진여불성의 공덕은 자비와 지혜가 원만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의 공덕은 음과 양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음이 많고 양이 부족하다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만일 자비만 좋아서 자비만 추구하고 지혜를 소홀히 한다면 자비조차도 참다운 자비가 못 되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원래 혼연일체라서 온전히 하나입니다. 지혜와 자비가 뭉친 자리가 본래 우리의 성품이기 때문에 이 둘은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공덕을 말하면 둘로 대별할 수 있기 때문에, 자비만 구하고 지혜를 무시하면 우리의 공부가 더딥니다. 본래 우리의 근본 생명자리는 다 갖추어진 것인데 하나만 추구하면 공부도 잘 계합(契合)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도인이든 자비와 지혜, 또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추구했습니다. 정과 혜에서 '정'은 '뜻 정(情)'의 '정'이 아니라 마음을 한 군데에 통일시키는 '정할 정(定)'자 '정'입니다. 마음을 한 곳에 일념으로 모으는 정(定)과 비추어 보는 지혜[慧]는《화엄경》이나《육조단경》또는《보조어록(普照語錄)》에도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모든 도인들이 정혜쌍수(定慧雙修) 또는 정혜균등(定慧均等)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를 균(均)'자 '같을 등(等)'자, 즉 정과 혜가 고르게 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점은 주의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정과 혜를 같이 공부할 것인가? 화두를 하든 참선을 하든 또는 다른 무슨 공부를 하든 원래 우리 성품에 구비되어 있고 전 우주에 갖추어져 있는 정과 혜를 균등하게 해서 나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공부가 빨리 진척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반야지혜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반야지혜가 너무 좋아서,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을 하던 분들이 '마하반야바라밀'을 해야겠다고 하시기도 합니다. 그것도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 모두 같다고 생각해야지 줄곧 나무아미타불 하던 사람에게 그것은 그만두고 '마하반야바라밀'을 하라고 한다면 그것도 역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방식이 좋다고 해서 다른 공부를 비방하거나 폄하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런 데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참 주의해야 합니다. 자기가 염불을 좋아한다고 해서, "염불 아니면 필요 없다. 염불만이 성불한다" 하면 이것도 문제가 큰 것입니다. 그런 데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지혜와 자비가 균등히 똑같이 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균등히 갈 것인가? 사실 그것은 여러분께서 공부를 하시면 그때그때 자기한테 요령이 붙습니다.
지혜는 무엇인가? 불교의 지혜는 바로 반야의 지혜입니다. 또한 반야지혜는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 비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모두가 다 변화해 마지않는 변화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것은 실존적으로 고유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왜 비어 있는 것인가? 인연 따라 잠시 동안 합해져서 차근차근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순간도 머물지 않으며, 또한 어느 순간도 공간성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空)이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철저히 과학적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잠시 동안 합해졌으나 합해진 그것이 조금도 머물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에도 "사람은 같은 냇물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새 물이 흘러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한 시냇물에 우리가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가 있겠습니까?
현상계는 모두가 일과성(一過性)입니다. 한 번 지나가는 것입니다. 한 번 지나가는 무한한 인생입니다.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를 지독하게 탐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제아무리 미워한 사람도 이윽고 얼마 안 가서 흔적도 없이 사리지고 맙니다.
반야는 내 몸이나 원수의 몸, 혹은 내 권속의 몸이나 모두가 다 비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못 봐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산소나 수소와 같은 것이 잠시 합해져 있을 뿐 시시각각으로 변동하듯이, 우리 몸의 세포도 또한 신진대사를 통하여 시시각각으로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고유한 자기 몸뚱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법공(諸法空)이요 오온개공(五蘊皆空)입니다. 많은 사람들이《반야심경》을 즐겨 독송하는 것은, 이 경전에서 강조하고 있는 제법공이 바로 부처님 법문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제법공이라 해서 다만 공(空)으로만 안다면, 그때는 불교가 허무주의에 떨어지고 맙니다. 불교를 '허무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불교를 잘못 아는 것입니다. 불교는 결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 중생이 보는 그 자리만 공인 것이지 영원한 생명, 즉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의 자리는 항상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아인슈타인 다음 가는 위대한 물리학자인 호킹도 역시 우주가 파괴되면 '블랙홀'이라 불리는 하나의 '광명의 구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형성되어 나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라 할지라도 보다 깊은 소식은 모른다고 봐야겠지요. 부처님 법은, 천지우주가 다 파괴되어 우리 인간이 모두 광음천(光音天) 이상으로 다 올라가 버려서 물질이 전혀 남아 있지 않는 때라고 할지라도 조금도 변함이 없고 조금도 감축(減縮)이 없습니다. 모양이 있는 현상세계는 다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가 이루어질 때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우리 중생의 업력(業力)이 모여서 원자가 되고 분자가 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질과 중생의 업력은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염파(念波)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두가 상념파(想念波)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상념파가 금생에 이 몸을 만들었습니다. 생명이 엄마의 태(胎) 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단지 식(識)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상념파인 식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식들이 부모의 영양을 취하고 그 영양 밑에서 이렇게 사람의 모습이 되어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진여불성 즉 광명뿐입니다. 모두가 마음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반야라는 것은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 모두가 다 진여불성뿐이다' 이렇게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느껴야 불교의 지혜입니다.
불경을 많이 외우고 다른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하나의 분별공부인 것이고, 가장 핵심은 반야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진여불성은 모든 상(相)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허망무상해서 다 공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아
"무아!" "무아!" 이렇게 말씀들은 잘 합니다. 그러나 무아 소식을 좀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무아 소식을 제대로 안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명예를 구하고, 무엇 때문에 재산을 구하겠습니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무아라는 것은 진리에 입각한 마음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베풀 때도 반야지혜로 베풀어야 무주상(無住相) 보시가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합니다. '무'자 화두를 하더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참다운 참선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운다고 할지라도 반야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조금도 흠이 없고, 간격도 없고 모두가 다 부처님의 진여광명뿐이다' 이렇게 해야 참다운 염불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도 우리 마음은 까불기 잘하는 경망스러운 원숭이 같고, 또한 풍중등화(風中燈火), 즉 바람 가운데 있는 등불 같다 하였습니다. 바람 가운데 있는 등불같이 동요가 끊이지 않고, 원숭이같이 경망스러운 것이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법문을 듣고서 우선 당장은 '내가 잘은 모르지만 천지우주가 참으로 텅 빈 것이겠구나. 무아니까 부처님께서 무아라고 하셨겠지' 이렇게 생각들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부딪히면 금방 잊어버리고 맙니다.
따라서 그런 마음, 즉 '모두가 텅 비었고 오직 부처님만 존재하고 진여불성만 존재한다. 삼천대천세계가 일체유심조이므로 오직 마음뿐이다' 하는 그 무아(無我)의 마음자리를 지속시켜야 합니다.
이런 마음자리를 지속시키는 것이 바로 '정(定)'입니다. 지혜와 정(定)을 함께 균등히 해나가야 합니다. 순간 찰나도 참다운 지혜, 즉 반야의 지혜를 안 떠나야 하는 것이고, 동시에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켜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지켜가기 위해서 염주를 가지고 천번 만번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염불하거나 화두를 참구할 때 꼭 반야지혜를 놓치지 마십시오. 반야지혜, 이것은 우리의 참다운 고향자리입니다. 우리의 참다운 생명자리입니다.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에서는 "그리운 것은 모두가 다 님이다"라고 했습니다만, 우리가 진여불성에서 볼 때는 그립지 않고 미워도 모두가 다 '님'입니다.
정혜쌍수(定慧雙修)라, 즉 자비와 지혜를 지속시키는 수행을 하는 것은 본래 우리가 갖추고 있는 자비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지혜요 자비요 정(定)이요 혜(慧)이기 때문에, 우리의 공부도 정과 혜, 자비와 지혜를 함께 닦는 공부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식 때마다 '귀의불양족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반야의 지혜, 즉 시를 쓰든 그림을 그리든 모두가 다 반야의 지혜와 더불어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걸작이 나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야의 지혜를 지속시키는 선정을 병행해야 합니다. 즉 정혜쌍수(定慧雙修) 혹은 정혜균등(定慧均等)을 염두에 두시고서 다음에 공부하실 때는 꼭 오욕락을 떠나서 법락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법락을 맛보셔야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볍습니다. 법락을 맛보셔야 속물이 안 되고 인간다운 인간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꼭 금생에 무상대각(無上大覺),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35년 8월, 태안사 금륜회 하계 용맹정진 회향 및 정기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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