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 큰스님과 보리방편문 수행

2014. 4. 30. 17: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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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화 큰스님과 보리방편문 수행

 



                       배광식(cafe.daum.net/vajra) - 미주현대불교6월호

보리(진리)를 깨닫는 방편문

마음은 허공과 같을 새,
한 조각구름이나 한 점 그림자도 없이
크고 넓고 끝없는 허공 같은 마음세계를 관찰하면서
청정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이러한 허공 같은 마음세계에 해와 달을 초월하는 금색광명을 띤
한없이 맑은 물이 충만한 바다와 같은 성품바다를 관찰하면서
원만보신인 노사나불을 생각하며,
안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형체 없는 중생과
밖으로 해와 달과 별과 산과 내와 대지 등 삼라만상의 뜻이 없는 중생과 
또는 사람과 축생과 꿈틀거리는 뜻이 있는 중생 등의 모든 중생들을
금빛 성품바다에 바람이 없이 금빛파도가 스스로 뛰노는 거품으로 관찰하면서
천백억화신인 석가모니불을 생각하고,
다시 저 한량없고 끝없이 맑은 마음세계와
청정하고 충만한 성품바다와 물거품 같은 중생들을
공(空)과 성품(性)과 현상(相)이 본래 다르지 않는 한결같다고 관찰하면서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삼신(三身)이
원래 한 부처인 아미타불을 항시 생각하면서,
안팎으로 일어나고 없어지는 모든 현상과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덧없는 행동들을
마음이 만 가지로 굴러가는
아미타불의 위대한 행동 모습으로 생각하고 관찰할지니라.

 

초승달 아래에서 하얗게 빛나던 배꽃들이 스러져 간다. 이제 차마 잊지 못할 옛 기억을 고집하는 듯, 한 두 개의 꽃잎만이 푸른 잎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엊그제의 보름달빛 꿈을 안은 채. 한 두 개의 꽃잎마저도 머지않아 새롭게 돋아나는 푸른 잎들로 바뀔 것이다.


 이맘때쯤 오동나무의 앙상하였던 가지는 진보라 꽃의 귀한 자태를 드러낸다. 봉황이 내려앉을 날을 기다리는 손짓인 듯 바람에 하늘거리는 오동꽃이 한창이다.


 동리산(桐裏山)! 오동나무 숲 산이라는 뜻은 오동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었을까? 아니면 봉황이 깃드는 땅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을까? 동리산 태안사는 언제 들어도 아련한 정겨운 이름이다.


 신라 말(814년 : 헌덕왕 6년) 당나라로 가서 서당 지장(西堂智藏:735-814)의 선법(禪法)을 이어받고 귀국한 혜철(惠哲 또는 慧徹:785~861) 국사가 동리산에 창건한 태안사(泰安寺)는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근거지였다. 또한 도선(道詵) 국사가 846년 혜철(惠徹) 국사를 찾아가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대의(大義)에 통했고, 동리산파 3대 조사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유서 깊은 동리산 태안사에서 청화 큰스님을 처음 뵈었다. 그때 주신 정토삼부경(청화 역) 앞장을 펼치면, 청화 큰스님께서 손수 유려한 필체의 한자로 그 자리에서 써주신‘배광식 거사님, 권정자 청신녀 정감(淨鑑), 을축년 4월 14일, 어(於) 태안사(泰安寺), 청화 합장’이 선명하다. 그러니까 큰스님을 처음 뵌 때가 을축년(1985년)으로 지금으로부터 20년이 넘은 셈이고, 큰스님께서 갑자년 겨울 안거를 안성 칠장사에서 보내시고 해제 후 태안사에 오신 직후였다.


 태안사 오시기 직전, 칠장사 동안거에서 섣달 초하루부터 성도재일까지 8일간, 용맹정진 사부대중에 대해‘참선의 바른 길’에 대한 소참법문이 계셨다. 이것은, 40여 년간 일종식을 하시며 장좌불와의 피나는 수행만을 하시던 큰스님께서, 대중을 향해 설한 거의 첫 공식법문인 셈이었다. 큰스님의 첫 법어집‘정통선의 향훈’제 2 편은 이 법문 녹음을 후일 풀어서 수록한 것이다. 또한 큰스님께서는 동안거 해제 후 칠장사에서 만등불사를 하셨다. 평생도반 수형보살이, 화계사 100일 새벽기도에 다니면서 만난 어느 신심 깊은 노보살님의 도인(道人) 스님을 뵈러가자는 권유로, 이 만등불사에 참여한 것이 인생의 큰 전기가 된 셈이다. 


 만등불사에서 돌아온 평생도반 수형 보살은 도인 스님의 다음 행선지를 귀여겨듣고 왔던 모양이었다. 수형 보살은 도인 스님에 대한 찬탄을 계속하며, 곡성의 태안사에 같이 내려가서 도인 스님을 꼭 친견해야 한다고, 쉬임없이 졸라댔다. 당시 고교시절로부터 20년 이상 불교에 관심을 기울여온 나였지만, 곡성이라는 지명이나 태안사라는 절 이름이 생소하였다. 그때만 해도 후에 태안사가 아련한 그리움이 서린 곳이 될 줄은 전혀 몰랐었다.

  
 토요일(4월 13일) 치과진료를 평소보다 일찍 마치고, 서울역을 출발해 저녁 늦게 곡성역에 내린 후, 택시를 타고 비포장길을 한참을 달려 태안사에 도착하였다. 일요일 아침 해회당(海會堂) 마루를 닦고 계신 큰스님을 뵌 때의 그 환희는 20여 년 전이 아니라,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금강경의 제 2 '선현기청분' 에 장로 수보리가 세존을 향해“희유하여이다 세존이시여!---”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공양을 드시고 발을 씻고 앉아 계신 부처님을 향해, 느닷없이“희유하여이다 세존이시여!”라는 표현이 왜 나왔을까? 이것은 금강경을 접하고 난 후 항상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고, 운허 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들으면서도, 치의예과시절 원의범 교수님의 3학점짜리 불교학 강의에서 금강경을 들으면서도, 그 밖의 어디에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 오랫동안의 의문이 큰스님께서 해회당 마루를 닦고 계시는 모습을 처음 뵙는 순간 그냥 풀려버렸다. 아니 의문이 풀렸다기 보다 그냥‘희유하여이다!’라는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 큰스님을 친견한 이후, 태안사에서 결사대중과 함께 1985년 음력 시월 보름날 삼년 결사에 들어가신 청화 큰스님 법문이 매월 첫째 주에 정기적으로 열렸고, 법회가 있는 날에는 전국각지에서 사부대중이 운집하였다. 나와 수형 보살은 정기법회는 반드시 참석하였다. 그 뿐 아니고 한 달 네 번 일요일을 모두 태안사에서 보내는 일도 많아졌다. 물론 어린 두 아들도 항상 함께 동행하였다. 이제는 장성한 두 아들이 태안사를 고향처럼 생각할 정도이다. 지금은 태안사까지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는 편이지만, 당시에는 편도 7시간 이상 왕복 14시간 이상이 걸리는 길이었다.


 얼마 후 큰스님께서는 사부대중을 아우르는‘금륜회(金輪會)’를 결성하셨고, 나는‘서울.경기지역 금륜회’의 일을 맡게 되었다. 3년 결사가 끝난 후, 서울 금륜회 주최로 1989년 3월 19일 KOEX 4층 대강당에서 큰스님을 모시고 대법회를 가졌다. 이곳은 500석 규모의 현대식 강당으로 현재도 많은 학회와 모임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법회에는 2000 여 대중이 운집하여 의자사이의 통로를 모두 메우고도 자리가 모자라 문밖에 서서 음성법문만 듣는 대중도 많았다. 이때의 법문 녹음을 풀은 것이 '계간 광륜' 2005년 봄. 여름. 가을호(통권 13-15호)의 '큰스님 법문' 코너에 3회로 나누어 '천지우주는 바로 지금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로 실렸다.


 서울 금륜회에서는 년 5회 큰스님을 모시고 대법회를 할 셈으로, KOEX 대강당을 1년 5회 사용계약을 하였다. 그러나 큰스님께서는‘산승은 산에 있어야 어울린단 말입니다. 이러한 법회는 한 번으로 족합니다.’하고 말씀하시며 극구 사양하셨고, 나머지 네 번은 이기영 박사, 이영무 교수, 정태혁 교수, 이종익 박사를 모시도록 말씀하셨다.


 큰 스님께서는 금산 스님(현재 목포 목우암 주석)과 함께 집에 오셔서, 나와 수형보살을 앉혀놓고 이러한 큰 대중법회도 좋지마는 열 명 또는 스무 명의 적은 인원이라도 제대로 깊은 수행을 하는 모임이 중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기독교가 퍼진 것이 많은 대중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수인 열두제자에 의한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때의 그 말씀은 항상 숙제로 남아 있었고, 그 숙제를 푸는 것이 큰스님께서 베풀어주신 대천계만큼 큰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큰스님의 사상과 가풍에 따른 불법홍포를 위해 현대의 강력한 매체인 인터넷에 큰스님 법문을 올려 '수미산' 홈페이지를 만들었고, 이어 포털 '다음' 과 '네이버' 에금강 카페를 개설하였다.


 큰스님을 생전에 뵙지 못한 많은 분들이 카페를 통해 큰스님 법문을 접하고, 큰스님을 일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보리방편문으로 수행정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회가 새롭다. 큰스님께서 스승이신 금타 대화상을 한번도 뵙지 못한 상태에서, 평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법에 따라 수행하신 모습이 큰 귀감이 될 것이다. 청화 큰스님 한 분이 안계셨다면 과연 금타대화상의 수승한 불법(佛法)이 지금에 전해졌을까? 수승한 법은 수승한 사람을 만나 온전히 전해지게 된다.


 금타 대화상께서는 절을 많이 세우신 것도 아니고, 대법회를 많이 여신 것도 아니다. 다만 수행에 전심전력하여 수승한 법을 이루셨을 뿐이다. 금타대화상님과 큰스님의 관계에서 큰스님께서 말씀하신 수행과 전법을 담당할 인재불사의 중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제 금타 대화상에서 청화 큰스님으로 이어지는 사상과 가풍을 온전히 익혀, 계속 이어가며 불법을 널리 홍포할 인재들이 속속 나타날 것이다. 카페 금강에서는 큰스님의 당부말씀대로 수행하는 불자들의 모임을 지향하며, 뜻이 맞는 분들이 큰스님이 서울에 세운 절 도봉산 광륜사에 모여 매월 넷째 주 토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철야정진을 하여왔다.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광륜사 선방인‘금강선원’에서 염불선(念佛禪) 참선을 하고, 한 팀은 대웅전에서 아미타불 염불과 절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렇게 수행을 해보지 않은 분들 중에, 염불팀의 염불소리가 참선팀이 참선을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겠는가 우려하는 경우가 있는데, 금강 카페에서 수행에 참여한 분들의 공통의견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이 철야정진 모임은 광륜사를 떠나 금강정진회로 개편하여 큰스님이 수행하셨던 수행처들을 순례하며, 수행정진 해나가기로 하였다.


 큰스님께서는 원통불법을 주창하시고, 수행법에서도 어느 한 수행법을 국집하지 않으셨고, 제각기 자기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택하기를 권하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보화시대이고 급변하는 현대에 맞는 수행법으로 염불선을 권장하셨다.


 염불선의 시원과 종류를 따져보는 것은 나중에 다른 지면이 주어지면 따로이 다루는 것이 좋을 것이고, 여기에서는 큰스님이 권장하신 염불선에 대해 간략히 적어보고자 한다.


 칭명염불, 관상(像)염불, 관상(想)염불, 실상염불(實相念佛)의 4종 염불 중 실상염불이 곧 염불선이다. 실상염불은‘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여 영생상주(永生常住)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생명자체인 실상(實相) 곧 진리를 관조(觀照)하는 염불’이다. 헌데 망념(妄念)이 걷히면 실상이 그대로 드러나겠지만, 우리 범부 중생은 망념으로 보기 때문에 실상을 모른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깨달은 성자의 실상에 대한 설명인 의언진여(依言眞如)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아미타불은 극락교주이시기도 하지만,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아(화)미(보)타(법)불이시기도 하다.


 새로이 5월 9일에 금강강독회가 발족되었다. 매월 1회 청화 큰스님의 법문집 및 제경론을 함께 읽는 모임으로 이 모임에 참석하시는 분들은 앞으로 불교계와 사회의 큰 역군들이 될 것이다.

 

                                                    

 

 

 

 

엄동설한의 초라함이 없다면
따스한 봄날의 찬란함도 결코 없으리.
불운은 나를 단련시키고
내 마음을 더욱 굳세게 한다.

- 호치민 -

 




 

 

호치민의 사망소식에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했다.(1890.5.19~1969.9.2)

우루과이 한 언론은
"그는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었다"라고 극찬했다.

권력을 통해 어떤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조금의 안락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호 아저씨' 이미지를 안고 떠났다.

호치민은 유언장에서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마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고 당부했다.

권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 같았던 인품 속에
그의 정치력과 추진력은 변함없이 솟아났다.

"길을 잘못 들어서면 쌍차도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 하나로도 성공한다."

작은 체구가 베트남을 하나로 묶었다.
그는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였다.

 

 



 Ce Train Qui S'en Va  (기차는 떠나고)- 엘렌느(Hele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