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깨끗해야 마음을 닦지요 /청화큰스님

2014. 5. 7. 17:4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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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깨끗해야 마음을 닦지요 

청화큰스님

 

 

  부처님의 깨달음

  자기 신명을 내걸고 진리를 구해 보지 않은 분들은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또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무명으로 헤매다가 그 무명 때문에 인간이 가지가지의 죄업을 지어서 심각한 인생고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절한 인생고를 맛보지 않은 사람들은 또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릅니다.


진리를 모르기에 우리 마음이나 이 세계는 항시 어두운 암흑 가운데 싸여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길을 몰라서 신구의(身口意)로 가지가지의 많은 악업(惡業)을 행한단 말입니다. 악업을 행하면 그에 상응한 고(苦)를 받는 것입니다.


무명으로 인(因)해서 업(業)을 짓고 그 업으로 인해서 고(苦)를 받습니다. 무명은 혹(惑)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미혹된 무명과 미혹으로 해서 짓는 여러 가지의 번뇌, 그리고 번뇌로 인해서 행하는 신구의 삼업(三業), 즉 몸으로 짓는 행동, 입으로 짓는 망어(妄語), 뜻으로 짓는 무명업(無明業), 이러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인생의 가지가지의 고뇌를 초래합니다.


이러한 혹업고(惑業苦)는 전전(轉轉) 무변(無邊)해서 끝도 갓도 없이 영원히 인류를 윤회의 수레바퀴 가운데 몰아넣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혹업고 삼업을 벗어나는 길이 비로소 부처님의 '성도(成道)'로부터 열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안이하게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육 년 고행이라는 심각한 고행을 거쳐서 깨달으셨습니다. 또 육 년 고행만 하신 것이 아니라, 무수 세월 동안, 불교용어로 말하여 이른바 삼아승지겁이라 하는 과거에 헤아릴 수도 없는 여러 생을 거듭하면서 선행을 쌓고 자기 몸을 희생하여 깨달으신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느 생에서는 굶주린 범 새끼를 구제하기 위해서 당신 몸을 던지기도 하셨고, 또 어느 생에서는 중생의 고뇌를 구제하기 위해서, 중생의 빈곤을 구제하기 위해서 바다 속의 용왕이 간직하고 있는 마니보주(摩尼寶珠)를 찾아내기 위해 바닷물을 품는 것과 같은 끝도 갓도 없는 노력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여튼 부처님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생 동안 몇 천 번 몸을 바치셨는데, 도(道)를 얻기 위해서 눈을 바치는 등 사지(四肢)를 바치는 희생적인 삶을 무수히 지내왔습니다. 이러한 과거 무량세월의 보살행 뒤에 금생에서는 영화로운 왕자로 태어나서도 육 년 고행이라는 심각한 고행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도를 구하실 때는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고행외도(苦行外道)한테 가서 무시무시한 고행을 다했습니다. 고행상(苦行像)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피골이 상접해서 다만 앙상한 뼈만 남아 있을 정도로 고행을 많이 했습니다. 잡수시는 것은 하루에 일마척맥(一麻隻麥), 즉 한 조각의 피마자와 한 조각의 보리알만 자시고 공부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고행을 위한 고행은 지양하며, 또한 안일을 지양하지만 부처님께서 당초에 하신 것은 그야말로 고행을 위한 고행이라 할 정도로 심각한 고행이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위없는 길[無上大道]을 위해서 당신 몸을 불사르고 희생을 하셨던 겁니다.


부처님은 초기에 고행외도에게 가서 배웠으나 고행외도가 올라가는 길은 역시 기껏해야 욕계(欲界)를 초월해서 범천(梵天)에 가는 길밖에는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바라신 바는 삼계(三界)를 해탈하고 오직 참다운 자유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욕계를 초월하는 길도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욕계마저도 초월하지 못하면 참다운 진리의 빛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욕계만을 초월해서는 아니 되겠지요.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 방문한 외도는 아라라가란이라는 육사외도였는데 이분한테 가서 길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무소유처(無所有處), 즉 무색계(無色界)의 세 번째 경계까지 올라가는 선법(禪法)을 공부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중생이 생사윤회 하는 경계가 세 가지 있지 않습니까? 제일 밑에 욕계(欲界), 즉 음욕(淫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등의 욕심이 주가 되는 세계가 있습니다. 욕계 다음에는 색계(色界)가 있습니다. 색계는 일체 물질의 미묘한 색(色)만 존재하는 경계입니다. 색계 위에는 다만 인간의 심식(心識)만 존재하는 무색계(無色界)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이러한 욕계, 색계, 무색계를 생사윤회 합니다. 헌데 아라라가란이라는 외도는 욕계와 색계를 떠나서 무색계, 무색계에서도 세 번째 경계인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공부를 한 분입니다. 무색계에는 네 개의 천계, 즉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아라라가란에게 가서 무소유처까지 올라가는 선법을 배웠습니다. 이 경계 역시 사실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욕계를 초월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과거 전생에 무수한 세월 동안 선근(善根)을 심어서 거기에서 나온 선근공덕(善根功德)으로 해서 얼마 안 가서 아라라가란이 올라간 선법인 무소유처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무소유처 역시 해탈의 경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무소유처라는 하늘에 올라가는, 즉 천상에 올라가는 법뿐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어디에도 막힘이 없는 해탈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해탈의 길을 구하니 여기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하시고 아라라가란에게 가서 "당신보다 더 깊은 도를 아는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라라가란이 "내 아들이지만 나보다 더 높이 올라간 분이 우다카이다. 우다카한테 가 보아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다카한테 가서 법을 물으니 우다카는 중생이 생사윤회 하는 삼계(三界) 하늘 중 가장 높은 하늘인 비상비비상처에 있었습니다. 이 하늘이 삼계에서는 가장 높은 하늘입니다. 부처님은 여기에 올라가는 선법을 공부하셨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무색계의 세 번째 하늘인 무소유처까지 올라가셨으니 거기서 한 발짝 위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삼매(三昧)에 드셔서 그냥 올라가셨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비상비비상처에 올라가는 법, 즉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동시에 수명이 팔만대겁(八萬大劫)인 천상에 올라가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겁이라는 것은 무량세월 아닙니까? 그런 팔만대겁까지 갈 수 있는 처(處)가 비상비비상처입니다.


그렇게 오래 산다 하더라도 역시 인연이 다하면 그 천상에서도 미끄러져야 합니다. 다시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중생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에는 욕계에 있으나 색계에 있으나 무색계에 있으나 어느 하늘에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제아무리 안락해서 모든 것이 다 풍족해도 결국 인연이 다하면 다시 죽어야 합니다.


헌데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구하시는 길은 죽음이 없는, 생사가 없는 영원한 해탈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이 있다든지 번뇌가 있으면 해탈의 길이 못 됩니다. 해탈의 길은 영생불멸의 길입니다. 오직 영생불멸의 길을 구하는 것만이 석가모니부처님의 구도심이었으므로, 이러한 무색계의 가장 높은 하늘, 중생계 가운데서는 가장 최상천인 비상비비상처까지 올라갔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도 참다운 도를 구하는 분들은 어느 하늘에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광명이 빛나는 색계에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는 모든 것을 거의 다 갖추고 있는 안락한 하늘, 팔만대겁 동안 지속되는 그런 하늘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습니다. 특히 유위(有爲) 상대인 곳에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위(無爲) 적적(寂寂)한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이 아니고서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비상비비상처, 즉 삼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찬란하고 황홀한 세계에서, 내가 이만큼 공부했으니 이제는 거의 됐겠구나 해서 자만심을 좀 품었습니다.


그런 때에 삼계제천(三界諸天)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가만히 와서 수행자 싯다르타에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가는 곳은 아직은 유위상대인 천상에 불과하니 다시 정각해서 정신을 바짝 차려 진정한 해탈을 구해야 하느니라." 싯다르타의 아만심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이에 싯다르타는 삼세제불에게서 오상성신(五相成身) 법문을 듣게 되고, 그 법문을 가지고 다시 깊은 삼매에 들어 그때야말로 비로소 참으로 최상안온한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에 들었습니다.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대도를 성취하셨다는 말입니다.


제가 뒤에 보탠 말은 밀교에 있는 말이므로 참고로 할 뿐입니다만, 아무튼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무상대도(無上大道),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셨습니다. 완전무결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무상대도를 성취하신 분은 석가모니부처님 외에는 아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정통 조사(祖師) 모두가 이와 같은 무상대도를 성취하신 분들입니다.



  깨달음의 감격

  석가모니부처님은 납월 팔일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 즉 금성이 동쪽 하늘에서 빛나는 것을 보고 깨달으셨는데, 그 순간의 감격스러운 정황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순간의 장엄한 광경을 묘사한 법문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우선 간단히 말씀드리면 우화동지(雨華動地)라 하여, 헤아릴 수 없는 꽃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땅이 육동(六動)으로 진동했습니다.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부처님의 성불을 찬탄했다는 말입니다.


어느 신도님께서 저에게 "불경을 보면 꽃비가 내린다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이 말이 참말입니까, 상징에 불과합니까?" 하고 물어 왔습니다. 이것은 불경에 있는 말씀이므로 조금도 흠축이 없는 사실입니다. 무상대도를 성취할 때, 또는 무상대도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부처님 법에 대해서 희귀한 일, 아주 귀한 일이 있을 때는 하늘에 만다라화(曼陀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陀羅華), 만주사화(曼珠沙華),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라는 꽃이 핍니다. 만주사화는 만다라화보다도 더 찬란하고 영원에 가까운 천상의 꽃이고, 마하만주사화는 만주사화보다도 더 완전무결한 천상의 꽃입니다.


부처님이 무상대도를 이루었을 때, 이러한 천상의 꽃이 마치 비가 오듯 피었습니다. 꽃비가 내렸단 말입니다. 꽃비는 천상의 인간들이 무상대도를 성취하신 부처님을 찬탄하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을 우화동지라고 합니다. 천지우주가 육동으로 진동하며, 즉 천지가 좌우전후, 상하 어디도 흠축 없이 진동하며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부처님의 무상대도 성취를 찬탄했습니다.


《법화경》에도 '천우만다화(天雨曼陀華)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 즉 '하늘에는 천상의 만다라화 꽃이 항시 피어 있고, 하늘에 있는 북은 자연히 울리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소승경전에는 그런 말이 없으나 대승경전에는 부처님께서 무상대도를 성취하실 때나, 또는 여타의 대승법을 찬탄할 때는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또는 천지우주가 육동으로 진동해서 부처님 법을 찬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실 때 부처님은 무상의 희락을 느끼셨습니다. 우리 범부가 생각할 때는 인간의 재미라는 것은 오욕경계, 욕계에 있는 오욕을 맛볼 때 비로소 있는 것이지 오욕을 떠나면 재미가 없지요. 하지만 사실은 오욕을 떠나면 떠날수록, 오욕에서 멀어 가면 멀어 갈수록 참다운 법락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런 법락을 미처 맛보지 못하므로, 인간의 재미는 욕계밖에는 없구나, 그저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이성(異性)끼리 잘 사귀고, 물질이 풍족하고, 그런 것에 행복이 있는 것이지 그것을 떠나서는 참다운 행복은 없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은 욕계를 떠나면 떠날수록 인간의 참다운 법락은 더욱더 증장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살의 깨달음에서 맨 첫 단계는 환희지(歡喜地) 아닙니까? 환희란 말입니다. 환희라는 것은 자기 몸도 마음도 한없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보살이 깨달아서 환희지에 이를 때는 그 안락함과 행복이 어디에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마하가섭은 평생 동안 두타행(頭陀行), 즉 고행을 하고 누더기 하나와 바리때 하나로 평생을 지낸, 두타제일로 일컬어지는 부처님 제자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무상대도의 법을 전수받은 정법 조사입니다. 그런 근엄한 분도 보살 초지(初地)인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그냥 너울너울 춤을 추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좌선 중에 몸도 마음도 가볍게 되는, 이른바 경안지(輕安地)에 이르고, 또 경안이 나아져서 희락지(喜樂地)에 이르면 그때는 기쁨을 어디다 감추지를 못할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법락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그것이 정말로 인간 세상의 오욕락과는 비교할 수 없구나 하고서 다시없는 희락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 다시 말하면 염불삼매라든가 또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삼매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환희를 모릅니다. 물론 삼매라는 것은 주문을 외우나, 화두를 참구하나, 또는 염불을 하든 어떻게 하든 삼매에 딱 들면 그 경계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로만 깨닫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산란심이 제거되고 마음이 본래 마음자리에 들기만 하면, 그때는 어떻게 들어가든 욕계가 멀어감에 따라 무한한 환희를 느낍니다.


무한의 환희를 느끼는 것은 그냥 몸과 마음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적에 맛보시던 바로 그 만다라화, 마하만다라화, 만주사화, 마하만주사화라는 천상의 꽃이 비 오듯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맛보면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러기에 마하가섭 같은 근엄한 대도인도 너울너울 춤을 춘단 말입니다. 이러한 경지를 온전히 맛보지는 못한다 해도, 조금은 맛을 봐야 인간 세상의 오욕락에 대해서 집착을 않습니다. 오욕락은 그냥 순간에 불과하고 깨달음의 즐거움은 영원한 것입니다.



  일체중생의 성불

  부처님께서는 희락 가운데서 위없는 경지, 환희 가운데서도 최상의 무상정변지를 성취하셨습니다.


무상대도를 성취하시고 보니 자기 혼자만 성불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가 앉아 있는 보리수라든지 보리수의 이파리 하나하나, 보리수의 줄기 하나하나, 또 그 주변에 있는 숲, 천지우주 모두가 다 부처님의 성불과 동시에 같이 성불해 버렸단 말입니다. 사실 부처님이 성불했다는 사실과 더불어서 산하대지 산천초목 일체중생이 동시에 성불했다는 그 의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산을 보고 땅도 보고 여러 가지 모습을 봅니다. 여러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우리 중생은 자기 업장에 가려서 바로 보지 못합니다. 업장이 녹아지면 녹아진 만큼 그때는 차근차근 바른 모습에 가까워집니다. 이와 같이 업장이 녹아서 참다운 나, 진정한 자기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주의 참모습을 봅니다. 우주의 참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와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아무런 생명이 없어 보이는 산이나 돌멩이 하나까지도 실상은 모두가 살아 있는 생명일 뿐입니다. 그러기에《화엄경》<약찬게(略纂偈)>에 보면 산도 살아 있고, 냇물도 살아 있고, 나무도 살아 있고, 일체 동물 모두가 우리 인간과 차이 없이 생명을 갖추고 살아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산에는 산신이 있고, 물에는 용왕이 있고, 도량에는 도량신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양이 이러니까 사람이 아니라 그 안에 모양 없는 마음이 있으니까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 몸에 마음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아니지요. 그와 똑같이 산에도 역시 모양은 산이지만 그냥 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의 혼(魂)이 있습니다. 산의 혼은 결국 산신인 것입니다. 나무 하나가 있으면 나무라는 모양뿐만 아니라 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신(木神)입니다. 하나의 돌멩이가 있으면 그때는 석신(石神)이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신(神)만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오해하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존재도 거기에는 다 혼이 있습니다. 즉 말하자면 순수한 생명이 거기에 갈무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제한된 안목에서는 그것이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바른 본래면목을 볼 수 있는 안목, 본질을 보는 안목에서는 모두가 다 생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지우주의 모든 존재는 무엇이나 순수생명뿐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 덕분에 우리 중생은 생사윤회라는 인생 고해를 떠나서 참다운 해탈로 가는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도인들이나 정통 조사님들 역시 부처님같이 온전히는 다 못 깨달았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무상대도의 맛을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때는 전쟁도 하고 어떤 때는 온갖 무시무시한 고뇌를 겪지만, 여러 성자들의 가르침 덕분에 참다운 영생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고, 희망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이 깨달은 경계는 그냥 좋다거나 또는 마음이 개운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심수오묘한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의 경계를 구분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우선 마명대사의《기신론(起信論)》에 따라서 깨달음의 차서(次序)를 말하면, 네 가지 차원에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무상대도라 하더라도 그런 깨달음에 이르는 깊고 얕은 관계를 잘 모르면 자칫 암중모색을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단지 첫 단계인 초범(初梵)에 도달해 놓고, '다 됐다' 여길 수도 있는 것이고 중간쯤 가서 '다 되었구나' '이것이 무상대도구나' 이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 해서는 안 됩니다. 맨 처음까지 가기도 어렵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상대도이기 때문에 조금도 흠이 없는 일체공덕을 갖춘 자리여야 합니다.


우선 우리 욕계에서는 욕계 나름대로 먹는 것, 입는 것, 이성끼리 만나서 사는 것 등의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에게 갖추어져 있는 온갖 공덕이 없을 때는, 공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때는 욕계를 버리고 무상대도로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 중생은 부처님 경계에 들어 있는 무한공덕, 즉 불성 가운데 들어 있는 무한공덕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말씀했다 하더라도 그 법신 부처인 우리 자성(自性)에 깃들어 있는 무한한 공덕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불경에 나와 있는 말씀만 해도 백사십불공법(百四十不共法)이 있습니다. 즉 백마흔 가지의 공덕이나 재미, 행복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간추려서 말씀한 것이지 사실은 계산 잘하는 도인들이 몇 겁을 두고 헤아린다 하더라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백사십불공법은 보통사람들이나 낮은 차원의 성인들은 공유할 수 없는, 부처님만이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입니다.


또한 동시에 삼명육통(三明六通)의 능력이 있습니다. 삼명육통은 간단히 말하면 시간이나 공간이나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시간에 얽매이고 공간에 얽매이고, 인과율에 얽매이면 그것은 '도(道)'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다운 성품은 인과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시공을 초월합니다.


이러한 불성과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삼명육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성과 온전히 하나 되었을 때는 석가모니와 더불어 둘이 아닙니다. 우리의 법성과 더불어서 둘이 아닌 그 자리를 온전히 체험했다면 그것은 마땅히 인과율을 초월하고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못 하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의 법신 공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나 다 갖추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 가운데 원래 갖추고 있는 무한한 공덕 때문에 부처님, 즉 우주실상의 이름을 다보여래(多寶如來)라 했습니다. 또는 그 몸이 한도 끝도 없이 넓어서 우주를 다 포섭하므로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라고도 하고, 공덕이 하도 환희에 차 있기에 환희광불(歡喜光佛)이라고도 했습니다. 또는 환희장마니보적불(歡喜藏摩尼寶積佛)이라고도 합니다. 환희장마니보적불이라는 것은 환희가 충만해 있는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우리의 자성공덕, 우리의 불심은 환희심이라는 점에서 보나 공덕이 많은 보배라는 점에서 보나 무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행복이 충만한 자리, 광명이 충만한 자리니까 무량광불(無量光佛)이란 말입니다. 또는 청정하니까 청정광불(淸淨光佛)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본래면목인 자성, 즉 본성은 그 공덕이나 행복이 무한하기 때문에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이런 환희를 조금도 체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처님 경론을 따라서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늘 상기하고 되새기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명을 내걸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환희심이 충만하고 무한한 공덕을 발휘할 수 있는 부처님 자리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깨달음의 경계

  그러나 그렇게 행복한 자리라 하더라도 우리가 과거세에 지은 나쁜 버릇 때문에, 또한 금생에 지은 버릇 때문에 단박에는 성불을 못 합니다. 그래서 성불하는 과정을 이와 같이 네 가지 깨달음의 경계로 구분했습니다.


먼저 본각(本覺)입니다. 이것은 본래 우리가 불성을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공부를 조금도 안 하는 무식자라 하더라도, 어떤 존재든 모두가 본각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성 청정심 또는 본원각성(本源覺性)입니다. 따라서 본각이라는 치원에서는 모두가 성불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실 때, "모든 존재가 다 본각을 지녔구나" "모든 것이 다 부처구나" 하고 보셨단 말입니다. 불안청정(佛眼淸淨)한 안목으로 보셨으니까 그와 같이 바로 보시는 겁니다.


이와 같이 본각은 누구나 갖추고 있지만 우리 중생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본각은 있지만 닦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 불성은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처의 공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비록 본각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공부하면 상사각(相似覺)을 얻습니다. 비록 본각과 똑같지는 않지만 본각에 거의 닮아 있단 말입니다. 이것을 시각(始覺)이라고도 합니다. 비로소 본각을 알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본각을 알기 시작할 때는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했습니다. 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아닙니까?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의식이 청정하게 되어야만 비로소 본각을 어렴풋이 깨닫는 상사각, 시각의 경계에 들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분들이 항상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리가 정화되지 않으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체험을 못 합니다. 이치로야 좀 재주가 있으면 깨달을 수 있지만 참다운 증오(證悟)는 어렵습니다. 참다운 법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리가 정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도덕적인 계율을 지켜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생리를 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계율을 안 지키면 정화되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되면 마음이 정화되고, 역으로 마음이 정화되면 몸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설사 바른 지견(知見)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리가 정화되지 않아서 성불을 못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이 청정해짐으로써 비로소 불심 가운데 들어 있는 자성공덕인 본 깨달음을 맛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만큼 되면 환희지(歡喜地)에 이르기 때문에 환희용약(歡喜踊躍)해서 재미를 느끼고 도취해서 '공부가 다 되었구나' 생각하고 여기서 만족하는 분도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러한 분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근세에도 안 나왔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각(始覺)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경계만으로는 아직 육근청정이 완전하게 되지 못하므로, 시공을 초월하고 인과율을 초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시 인과에 묶여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생사를 못 벗어납니다. 시간, 공간, 인과율을 초월해야만 생사를 벗어납니다.


부처님 법을 온전히 알고서 시각 혹은 상사각에 머물지 않고, '아직 멀었구나' 하고 더욱 열심히 닦아야 합니다. 더욱 닦으면 차근차근 수분각(隨分覺)의 경계에 듭니다. 즉 자기가 닦는 분수에 따라서 깨닫는 것입니다. 보살초지(菩薩初地)에서는 초지만큼, 이지(二地)에서는 이지만큼 차근차근 깨달아 올라갑니다. 올라갈수록 부처님 공덕을 발휘하게 됩니다.


《화엄경》,《능엄경》등의 대승경전에서는 깨달아서 올라가는 단계를 소상히 말씀했습니다. 그런 경전을 제대로 보지 않거나 설사 보았다 하더라도 '부처님 경전 말씀은 모두가 다 문자다' '방편이다' 해서 그것을 의중에 두지 않고 아만심(我慢心)을 내는 분도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경전에도 상징과 비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경전에 전하는 부처님 말씀은 모두 참다운 금구설(金口說)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참다운 진리에 입각한 말씀이라는 겁니다.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올라가는 과정을 분명히 느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보살초지부터 십지(十地)까지 올라갑니다. 경전에서는 보살지의 각 단계, 즉 초지(初地), 이지, 삼지, 사지, 오지, 육지, 칠지, 팔지, 구지, 십지(十地) 중 어디에 오르면 얼마만큼의 공덕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올라야 할 목적지가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방법 체계가 없다면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경에는 성불의 목적지를 분명히 밝혔을 뿐만 아니라 또한 목적을 이루어가는 방법 체계도 이와 같이 뚜렷이,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사실은 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 주문이나 화두나 염불 또는 부처님 법에 입각한 다른 어떤 정당한 법을 하나 택했으면 그 다음 문제는 방금 말한 이런 과정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공부가 어디에 머물지 않고 차근차근 올라갈 수 있으며, 마침내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깨달음이 완성되는 원만 무결한 자리, 이것이 구경각(究竟覺)입니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가장 끄트머리의 깨달음입니다. 이것을 묘각(妙覺), 대각(大覺) 또는 정각(正覺)이라고도 합니다. 구경각은 심심미묘(深甚微妙)하다고 해서 묘각(妙覺)이라고 합니다. 위없는 각이라고 할 때는 무상각(無上覺)이라고 합니다. 또는 가장 바른 깨달음이기 때문에 정각(正覺)입니다.


여기에 이르러야 비로소 우리 중생은 본래 갈 수 있는 참다운 고향에 완전히 이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미처 이르지 못하면 여전히 번뇌가 남아 있게 됩니다. 그때는 설사 시각을 떠나서 수분각의 십지까지 올라왔다 하더라도 인연이 다하면 생사윤회를 다시 합니다. 다시 죽어서 윤회를 합니다. 그러나 묘각(妙覺)에 이르면, 그때는 온전히 번뇌를 다 녹이고 자기 본래성품인 불성과 우주의 본래성품인 불성이 딱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그때 비로소 윤회하지 않게 됩니다. 윤회가 사라질 때 우리 중생은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율

  그러나 비록 우리가 훌륭한 행법(行法)을 취해서 공부를 한다 하더라도, 도덕적인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공부에 성취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율적인 문제, 도덕적인 문제를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러 깨달음의 문제만을 중요시하는 분들은 도덕적인 문제, 윤리문제, 계율을 소홀히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부처님 법은 도덕적인 문제를 토대로 서 있습니다.


그러기에 계정혜(戒定慧) 삼학도(三學道)의 법문에도 인계생정(因戒生定)이라, 계율로 말미암아서 선정이 생기고, 인정생혜(因定生慧), 즉 선정 혹은 삼매로 말미암아 참다운 반야지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계율이 없으면 참다운 선정에 못 들어갑니다.


우리 경에도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 즉 계율이 청정하지 않으면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즉 삼매가 나올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출가인들은 출가인대로, 재가불자들은 재가불자대로 거기에 상응한 분수에 맞는 계행(戒行)을 지켜야만 비로소 삼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계행이 선행되지 않으면 제대로 선정(禪定)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죽이고는 선정에 들 수가 없고, 도둑질하고서는 선정에 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욕질하고 선정에 들 수가 없고, 욕심을 내고 선정에 들 수는 없습니다. 하여튼 계율이 선행되지 않으면 선정에 못 드는 것입니다. 선정에 못 들면 구두선(口頭禪)이라 하여, 말로는 부처님 법문을 해설한다 하더라도 참다운 체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반야지혜, 공(空)지혜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계율의 첫째는 살계(殺戒)라, 즉 생명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입니다. 둘째는 도계(盜戒)라, 즉 훔치지 말라는 것이며, 셋째는 음계(淫戒), 즉 출가인들은 일체 음란한 행위를 피하며 재가불자들은 자기 배필 이외의 다른 사람과 삿된 음행을 말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망어계(妄語戒)입니다. 그것은 거짓말, 욕설, 이간하는 말, 꾸며서 하는 말 등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망어 가운데도 가장 큰 망어는 미증(未證)을 증(證)으로 하는 것입니다. 도를 증하지 못하고서 증했다고 하는 거짓말, 또는 도인이 아니면서 도인인 체하는 거짓 행위, 이것이 가장 큰 망어입니다. 그래서 같은 거짓말도 보통의 방편적인 거짓말은 큰 죄는 안 되지만, 도를 못 증하고 증했다거나, 또는 도를 못 통하고서 통했다고 하는 망어는 우리 승려 같으면 승복을 빼앗기고 축출당하는 중죄가 됩니다. 이것은 큰 거짓말, 이른바 대망언(大妄言)입니다. 성자(聖者)를 사칭하는 것같이 큰 거짓말이 없습니다.


다섯 번째는 고주계(酤酒戒)입니다. 술을 먹는 것뿐만 아니라 술을 팔고 사는 것도 허물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사바세계에서는 술을 팔 수 도 있고 먹을 수도 있습니다. 부득이 해서 술을 팔 때는, '내가 파는 이 술 자시고 보리심을 내서 무상대도를 성취하십시오' 이렇게 기원하며 술을 팔면 됩니다. 술은 본래 오염된 음식이 아닙니다. 술은 이른바 만약지왕(萬藥之王)이라 하였습니다. 즉 잘 쓰면 만 가지 약 가운데 최고라는 뜻입니다.


사바세계의 중생은 어떤 때는 직업적으로, 혹은 이런저런 인연 따라서 그런 직업을 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오염된 술이 아닌, 우리 중생의 병고를 다스리는 '만약지왕'으로 팔아야 합니다. '지금 저 사람이 이 술을 먹고 무상대도를 성취하겠다는 보리심을 내서 금생에 무상대도를 성취하십시오' 하는 마음으로 기원하면서 술을 팔면 큰 죄가 안 됩니다.


여섯 번째는 설사중과계(說四衆過戒)입니다. 사중(四衆)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중은 결국 부처님 제자인 사부대중(四部大衆) 아닙니까? 출가한 비구, 비구니, 널리 보면 신부나 수녀나 다 같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사실 불교라는 것은 불교라는 테두리에 얽매여 있지 않습니다. 집을 떠나서, 세속을 떠나서 진리를 공부하는 분들은 비구나 비구니뿐만 아니라 신부나 수녀 모두가 포함됩니다. 출가하지 않고 집안에서 공부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인이나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인이나 도교인이나 간에 하여튼 진리를 지향하는 분들이 사부대중인데,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가 지금 열 가지 무거운 계(戒)를 말씀드리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 여섯 번째의 설사중과계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이 계를 범하는 분들이 하도 많기 때문에, 우리 승가나 진리를 구하는 분들이 온갖 중상 비방을 받습니다.


사중, 즉 출가한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허물을 말하는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출가한 사람들의 허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죄가 무겁습니다. 같이 불교를 믿는 분들이라 하더라도 출가한 사람들을 흔히 승보(僧寶)라고 합니다. 이른바 삼보 가운데 하나지요. 넓은 의미에서는 불법을 탐구하는 모든 분들이 다 승보입니다만 좁은 의미에서는 출가한 사람들만 가리켜서 승보라 합니다.


절대 진리의 분상에서 보면 그때는 모두가 다 승보이지만, 차별의 분상에서 보면 출가한 사람들이 승보입니다. 그런데 비록 승보의 최종 목적은 완전무결한 성불에 있다 하더라도 아직 수행 도중에서는 완전무결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절집은 그야말로 범부와 성인이 아울러 있습니다. 성자 같은 중도 있지만, 뱀 같고 독사 같은 스님네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삼십 몇 본사(本寺)가 있습니다만 그 본사에는 도인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총무가 있고 재무가 있고 부목이 있습니다. 또한 깡패 같은 중도 있지요. 이 모든 분들이 아울러서 한 본사를 지키는 것입니다.


불교의 명맥은 숭유배불(崇儒排佛)이 성성하던 조선조에도 이어졌습니다. 그처럼 부처님 법을 배척할 때도 불법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당시 우리 출가인들은 팔천민(八賤民)의 하나였으므로 노예 같은 천민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찮은 농부도 스님을 "여보게 대사" 하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하대를 했단 말입니다. 우리 스님네는 비록 도인이라 하더라도 서울 장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서 나라의 힘이 약해졌을 때, 비로소 우리 승려가 장안에 발을 디뎠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핍박을 당하면서도 우리 불교는 명맥을 이어왔단 말입니다. 누가 이어왔는가? 물론 사부대중이 같이 협력해서 이어왔지만, 그래도 역시 출가인들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수모를 당하고 핍박을 당하면서도 부처님 법을 닦고 경(經)도 출판하며 그렇게 간신히 명맥을 이어온 것은 바로 출가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부대중 가운데서 출가인들에게 조금의 허물이 있으면, 그걸 침소봉대(針小棒大)해서 퍼뜨려 비방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같은 도를 구하는 사람끼리 서로 비방하는 죄가 무거운 법인데, 그 가운데서도 출가인들의 허물을 퍼뜨려서 비방하는 것같이 무거운 죄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보살계(菩薩戒)에 보면, 어떤 사람이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면 그것을 들을 때 마치 백 개 천개의 창이 자기 가슴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는 못할망정 하물며 스스로의 입으로 삼보를 믿는다고 하는 불자가 어떻게 함부로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범망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부대중, 진리를 구하는 분들의 허물이 있으면 개별적으로 은근히 그 사람을 만나서 간곡한 정성으로 바른 길로 나가기를 기원하면서 충고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책임자, 큰스님들이나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가만히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설사중과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 조금 잘못하면 그것을 퍼뜨려서 얘기하면 그때는 죄가 차근차근 커집니다.


좋은 스님네와 나쁜 스님네, 계행을 청정하게 지키는 스님네와 못 지키는 스님네를 대비해서 말씀을 해도 안 됩니다.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이지 스님네들의 이런저런 허물을 말하는 것은 그만큼 자기의 선근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도를 깨달아 가는 것만으로도 바쁩니다.


일곱 번째는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입니다.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는 계입니다. 여덟 번째는 간석가훼계(慳惜加毁戒)입니다. 내 것 아끼려고 남을 욕하지 말라는 계입니다. 그리고 아홉 번째는 진심불수회계(瞋心不受悔戒)입니다. 즉 잘못을 참회하는 이를 화내서 물리치지 말라는 계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에 태안사에서 10여 명의 학인들과 같이 지냈습니다. 그때 제가 큰 허물을 범했습니다. 아홉 번째 계인 진심불수회계를 범한 것입니다. 상대편이 참회할 때 성내는 마음으로 그 참회를 받지 않았습니다. 별것도 아니면서 나만 청정하다, 그런 상(相)을 내서 학인들 가운데서 허물을 범하고 참회를 한 사람에 대하여 제가 참회를 못 받았습니다.


그때 담배를 피우는 데다 성격도 우악스러운 어느 수좌(首座) 하나가 싸움을 했습니다. 싸움이 벌어지자 그 수좌는 무시무시한 식칼을 들고 상대편을 찌르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려서 찌르지 못했고 그래서 상처는 안 났지만 그런 행위는 속인에게도 큰 허물인데 하물며 출가 수행자에게는 얼마나 큰 허물이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나무라니까, 이제 저한테도 반항을 하더란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니까 그는 잘못을 느꼈던가 가사(袈裟)를 수하고서 참회하려고 왔습니다.


제가 그때 보살계를 안 받은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 말씀드리는 이 대목을 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까짓 녀석은 용서할 수가 없다' '너는 삼보 가운데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참회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몇 시간 뒤에 다시 왔습니다. 그때도 안 받았습니다. 또 세 번째 왔습니다. 그래도 그 수좌의 참회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제 마음은 칼을 들고 같은 스님들끼리 싸우려 했던 그 사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나중에 승복을 벗고 환속했습니다. 저번에도 한 번 와서 만났습니다. 하여튼 그때 제가 그 사람의 참회를 받았더라면, 그는 공부해서 위대한 성자가 됐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참회할 때는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이라, 원래 마음에서 지은 씨앗을 씻어 버리면 벌써 그 사람의 마음에서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런 계율을 잘 모르고서 그때 참회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저는 지금도 가끔 뉘우칩니다. 따라서 어떤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설사 세간법은 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출세간법은 마땅히 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회하면 그때는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중금계(四重禁戒)는 다릅니다. 남을 죽인다거나[殺生戒], 훔친다거나[偸盜戒], 음행을 범한다거나[邪淫戒], 또는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허위로 말하는 등의 망어를 하는[妄語戒] 출가인은 승가 내에서 머물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열 번째는 방삼보계(謗三寶戒)입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앞서 사중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나 비슷합니다만, 우리 생명의 뿌리가 되는 성보(聖寶)인 삼보를 비방할 수가 없습니다. 삼보를 비방하면, 그것은 우리의 선근을 멸종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근을 잘라 버리는 겁니다. 착한 선근이 쌓이고 쌓여야 할 것인데, 선근을 없애면 성불이 멀어집니다. 이와 같은 허물 때문에 성불도 못하고 승가를 더럽히고 일반 사회인들도 우리를 불신하게 됩니다.


특히 여섯 번째의 설사중과계와 열 번째의 방삼보계는 우리 출가인들도 명심해야 할 말씀이지만, 특히 재가불자들이 마음 깊이 새겨야 할 계율입니다. 지금 사회는 자기 허물은 저만큼 두고 남의 허물을 말하는 풍조가 있는 때인지라 우리 스님들도 지나친 비방을 많이 받습니다. 몇 십 년 애쓰고 공부했지만 조그마한 허물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을 그냥 매장시켜 버립니다.



  금빛 사자의 노래

  여기에 걸맞는 견서사자게(堅誓獅子偈)를 하나 더 소개하고서 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무수겁(無數劫) 전에 사자도 범도 말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털이 금색 찬란한 금모사자(金毛獅子)가 있었는데 이 사자는 털이 금색으로 찬란한 만큼 식(識)도 높았습니다.


그때 마침 벽지불(辟支佛), 즉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성취하신 신선 도인이 산중 숲속에서 깊은 삼매에 잠겨 있었습니다. 삼매에 들어서 어떤 동물이나 어떤 맹수가 오든지 간에 하여튼 설법을 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금모사자도 가끔 이 벽지불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때는 동물도 지금의 동물 같지 않고서 식(識)이 보다 발달된 동물이 있었던 시기였겠지요.


금모사자는 처음에 뭐가 뭔지 잘 몰랐지만 벽지불을 만나서 차근차근 법문을 들으니, 불법승 삼보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부처님의 진신(眞身)이 소중하고, 부처님 법(法)이 소중하고,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 소중하고, 법 따라서 행동하는 출가한 분들이나 재가인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삼보의 소중함을 알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벽지불 아라한은 설법하실 때 항시 가사(袈裟)를 입고 설법을 했습니다. 마침 그때 포수가 사냥을 나와서 아주 찬란한 금모를 지닌 사자가 벽지불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설법을 듣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포수인지라 마땅히 그 금모사자의 금색 찬란한 가죽이 욕심났겠지요. 포수는 '내가 금색이 찬란한 사자를 잡아서 가죽을 벗겨서 왕자한테 드리면 왕자가 나한테 큰 상을 내리겠지' 하는 흑심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사자를 잡으려고 맘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몸집도 굉장히 크고 외형도 무시무시한 힘이 있어 보인단 말입니다. 보통 사자도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금모사자같이 괴력을 갖추고 무시무시한 힘이 있는 사자를 포수인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었던 거지요. 활을 쏘려고 맘먹으면, 그야말로 금모사자인지라 영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에 단박에 그걸 알아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저 사자가 가사를 걸치고 있는 아라한 밑에 저처럼 고분고분 들어가 무릎을 꿇는 걸 보니까, 내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활과 독화살을 가사 속에 감추고 가면 접근할 수가 있겠지' 하는 맘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포수는 머리를 깎고 가사를 걸치고 활을 그 가사 속에 숨기고 갔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금모사자가 이제 환희심을 내서 자기 발 앞에 와서 무릎을 딱 꿇고서 다소곳이 있단 말입니다. 이때를 놓칠세라 포수는 독화살을 쏘았습니다. 한 발만 맞아도 독이 온몸에 번져서 죽을 수 있는 그런 독화살이었습니다.


아무리 괴력이 있고 힘 있는 금모사자라 하더라도 역시 무서운 독이 있는 화살을 맞았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그러나 화살을 맞고서 그냥 죽을 수는 없었겠지요. 더구나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사자인지라 비록 독화살을 맞았지만, 잠시 동안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원망과 사무치는 진심(嗔心) 때문에 그때 분출되는 힘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무시무시한 진심을 낸 금모사자는 한순간에 포수를 덮쳐서 죽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삼보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법문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방삼보계(謗三寶戒)가 생각나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금모사자가 읊은 슬픈 노래가 '견서사자게'입니다.


"원자상신명(願自喪身命), 종불기악심(終不起惡心), 향어괴색복(向於壞色服)"이라, "원컨대 내 신명을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끝내 남을, 특히 괴색 법의를 입은 사람을 향해서는 해치고자 하는 악심을 품지 않겠습니다." 괴색(壞色)은 가사의 색입니다. 모든 색을 다 합하면 괴색이 됩니다.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을 한데 모으면 그때는 괴색이 됩니다. 우리 법의를 가리켜서 괴색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여 비록 독화살을 나한테 쏘았다 하더라도 괴색 가사를 입었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악심을 품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그 사냥꾼은 배신자요, 자기 욕심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며 더욱이 스님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기 신명을 바칠지언정 결코 악심을 품지 않겠다는 겁니다.


출가인들을 너무 돋보이게 말씀드려서 한편 언짢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사실은 소중한 것입니다. 재가인도 소중하고 다 소중합니다만, 특히 이렇게 세속에서 살기 좋은 때 집을 떠나서 이십대 삼십대부터 평생 독신으로 지낸다 하는, 또 늙은 말년에 오십, 육십이 되어서 자손들한테 시봉 받고 편히 지낼 수 있는 분들이 혼자 지낸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가정의 단란을 맛본 분들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따라서 우리 출가인들이 설사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괴색 승복을 입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와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의 미물에 불과한 사자 역시 스님도 아닌 엉뚱한 나쁜 사냥꾼이 입었지만 그 괴색복 때문에 악심을 낼 수 없었습니다.


인과라는 것은 지극히 소중한 것입니다. 비록 나쁜 마음으로 해서 가사를 걸쳤다 하더라도, 가사를 걸친 그것만으로도 그 사냥꾼은 나중에 성불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난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술에 취한 바라문 외도(外道)가 부처님한테 계(戒)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술에 취했는데 부처님께서 그 청정한 안목으로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오! 비구여 잘 왔구나!" 그 한마디로 바라문의 머리를 깎아 버리고 법의를 입혀 버렸습니다. 부처님의 위신력과 그 사람의 원력(願力)으로 해서, 무슨 계를 받는다, 준다 하는 말없이 그냥 "비구여 잘 왔구나!" 그 말 한마디에 머리카락이 떨어지고 법의가 입혀지고 계를 받아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에 계 받은 사람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술김에 계를 받았지만 술을 깨고 보니 이게 아니다 싶었겠지요. 따라서 아난존자 같은 분들이 부처님께 책망 조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존께서는 다 아시면서 그와 같이 술 취한 사람에게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을 주십니까?" 하고 힐난조로 말했단 말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담바라화(優曇跋羅華)는 비록 시든다 하더라도 여느 꽃보다 더 향기롭다." 비록 파계하고 나서 가버렸지만 한번 가사를 걸친 그 공덕 때문에 계율을 전혀 안 받은 사람보다는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술 취한 바라문이 부처님의 청정미묘한 계를 받겠다는 마음을 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자기 잠재의식에 훈습되어서 몇 생후에는 그 인연으로 성불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설사 술김에 계를 받았다 해도, 계를 안 받은 사람보다는 낫다는 겁니다. 마치 우담바라화 꽃이 비록 시들었다 하더라도 여느 일반 꽃보다도 더 향기롭듯이, 그 사람은 일반 사람보다는 더 소중한 선근(善根)을 심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도 한 걸음부터

  비록 우리의 갈 길이 멀다 하더라도 비약적으로 곧장 가기는 어렵습니다. 차근차근 선근을 가꾸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치로 아는 것으로 해서는 체용성상(體用性相)을 다 말할 수 있지만, 우선 도덕적인 윤리 행동으로 우리의 생리(生理)가 정화되어야 합니다. 생리가 정화되지 않으면 체험으로 도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보면, 사실 도를 증명하신 분들, 참다운 증오(證悟)를 하신 분들은 파계를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욕계 번뇌가 끝나고 색계 번뇌가 끝나고 무색계 번뇌가 끝나서 삼계 번뇌가 끝나 버리면 시공을 초월합니다. 시간, 공간을 초월하고 인과를 초월하는 그분들이 어떻게 계율에 어긋나겠습니까? 인과에 얽매여서 좋다, 궂다, 사랑스럽다, 밉다 하는 그런 마음, 유위 공덕에 얽매이니까 죄를 범하는 것이지, 그런 인과에 얽매이지 않고 시공을 초월한 분들은 죄를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인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동이 자기[我]에 걸리고, 음욕에 걸리고 또는 어떤 유위 상대적인 것에 걸리면 스스로 도인을 자칭한다 해도 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가인이든 재가인이든 마땅히 부처님의 법을 그냥 말로 이해하고 알 뿐만 아니라, 참답게 증명해서 영원한 희락(喜樂), 영원한 법락(法樂)을 맛보기 위해서는 꼭 청정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천태지의(天台智顗) 선사 같은 분도 공부하는 방편문(方便門)으로 첫째가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했습니다. 지계청정하지 않으면 단지 생각으로 아는 것에 그칩니다. 사실은 법력이 없단 말입니다.


요즘같이 혼란스러울 때는 마땅히 선오후수(先悟後修), 다시 말하여 먼저 부처님의 대요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실상묘혜(實相妙慧)라 했습니다. 우선 우리가 우주의 실상을 바로 느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범부지(凡夫地)에서 보는 것은 실상이 아닙니다. 성자가 보는 사실 그대로를 관(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듣는 좋은 말씀을 나의 것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계율이 앞서야 합니다. 청정한 계율이 앞서지 않으면, 우리가 다겁생래로 지나오면서 지은 누겁의 습기(習氣)를 녹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훈습(薰習)된 것은 그냥 단박에는 못 녹입니다. 선근이 깊은 사람들은 빨리 갈 수 있으나, 선근이 얕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녹여야 하는 것입니다. 녹이기 위해서는 마땅히 부처님의 오계(五戒), 또는 십계(十戒), 더 나아가서 부처님의 청정대계인 보살계(菩薩戒)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가 열립니다. 생리(生理)와 심(心)이 둘이 아니고, 몸과 불성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몸이 정화되면 그때는 마음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인 계율을 앞세우면서 실상지혜(實相智慧)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는 부처님도 하느님도 다 들어 있습니다. 물도, 불도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를 생각하는 즉시 부처입니다. 중생을 생각하면 중생이고, 물을 생각하여 사무치면 그때는 우리 마음이 우리 몸이 물로 화하는 것입니다. 불을 생각하여 사무치면 우리 몸에서 불의 광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런저런 모든 생명의 근원이 곧 영원한 정광명, 적광(寂光)이기 때문에 극락세계는 적광토(寂光土)인 것입니다. 화장세계(華藏世界), 적광정토(寂光淨土), 밀엄국(密嚴國), 모두가 다 이와 같은 광명세계를 말씀한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근본실상 광명자리에 마음을 안주시켜서 공부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선오후수의 공부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루빨리 성불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불기 2532년 1월, 태안사 삼년결사 및 금륜회 동안거 용맹정진 회향법회>   


                                                         
심즉시불(心卽是佛) / 청화스님
    비유로 말하면
    태양(太陽)의 체(體)는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명(太陽光明)은 원만보신(圓滿報身) 노사나불(盧舍那佛)에 해당하고,
    태양광선의 그림자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에 해당합니다.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은
    물질이 아니고 우주 가운데 텅 비어 있으니 공(空)이라 하고,
    그 공 가운데는 일체 존재를 일으킬 수 있는
    본 성품(性品) 원만보신 노사나불이 충만해 있으니 성(性)이라 하고,
    또 이 자리에서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인 일체현상이 나오므로 상(相)이라 합니다.

    앞서 천태지의 스님의 공(空), 가(假), 중(中)을 배대하면
    정확히는 좀 문제가 있으나, 이것은 중도(中道)의 중(中)에 해당하고,
    이것은 가(假)에 해당하고, 이것은 공(空)에 해당 하지요.
    이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선 배대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자리는 아미타불의 타(陀)에 배대하고,
    원만보신 노사나불은 아미타불의 미(彌)에 배대하고,
    일체존재 일체만유를 아미타불의 아(阿)에 배대를 시켰습니다.
     
    따라서 천백억화신 아(阿)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고,
    청정법신 공(空)만 따로 있지 않고,
    가사 우리가 하나의 불빛을 이렇게 볼 때
    겉으로 보이는 것은 아(阿)인 불빛이지만
    그 안에는 결국 성(性)과 공(空)이 다 들어 있습니다.

    또 그 반대로 공 가운데도 공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성과 상이 다 있습니다.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입니다.
    또 삼신(三身), 법신·보신·화신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의 부처님입니다.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신일불(三身一佛)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아미타불은 소박하니 방편적으로
    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만
    방편을 떠나서 제일의(第一義)적으로 해석할 때는
    아미타불은 천지 우주가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엇인가?
    관세음보살은 천지우주인 아미타불의 자비(慈悲)의 상징입니다.
    또 문수보살(文殊菩薩)은 무엇인가?
    천지우주 아미타불의 지혜(智慧)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그렇게 부처님 이름이 많지만 모두가 다 뿔뿔이 있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공덕(功德)이 하도 많으니까
    하나의 개념으로는 표현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덕 따라서 그때그때 이름이 붙습니다.
     
    중생의 병고(病苦)를 다스릴 때는 약사여래(藥師如來)라.
    또 하늘에 있는 각 성수들, 별들을 가리킬 때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 칠성여래(七星如來)입니다.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그와 같이 돌멩이나 티끌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화신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번에 말하면
    바로 마음이 부처인데, 마음 그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달마대사(達磨大師)의 관심론(觀心論)을 보면
    마음을 맨 처음부터서 풀이했습니다.
    인간성이 무엇인가?
    마음 그것이 기묘한 것이어서,우리 마음은 우리가 생각할 때는 참 별것도 아닌데
    결국 마음 파고 들어가면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암마라식(菴滅識)이고 결국은 부처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나 결국은 들어가면 다 부처가 되어버립니다.
    산이요, 내요, 티끌이요, 또 원소요, 소립자요,
    내내야 들어가면 결국은 마음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은 우주의 순수 생명 에너지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것에도 모두 이것이 똑같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을 보면
    우주라는 것은 종횡(縱橫)으로 얽히고설키고 딱 묶여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 덩어리입니다.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데 나만 잘 살고 남이 못살면 균형이 깨집니다.
    균형이 깨지면 틀림없이 그때는 무슨 소리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천지 우주의 도리에 맞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맞게 살려고 하면 될 것인데우리 중생은 앞서 말씀과 같이 겉만 본단 말입니다.

    본래 하나인 줄을 본다고 생각하면 균형 있게 살 수가 있을 것인데,
    속은 못 보고 겉만 보니까 이 놈의 모양만 보고,
    자기 몸뚱이도 사실은 자기 것도 아닌데
    권력이고 무엇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을 불경에서는 그때그때 중생의 근기 따라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합니다.
    보리(菩提)․도(道)․열반(涅槃)․법성(法性)․실상(實相)․여래(如來),

    이것이 원래 우리 주인공(主人公)이기 때문에
    주인공(主人公)․본래면목(本來面目)․진여(眞如)․극락(極樂) 모두가 다
    결국 부처라는 하나의 별명에 불과합니다.

    이명동의(異名同意)라. 이름은 다르고 뜻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불경을 볼 때 이렇게 나오고 저렇게 나오고 하면
    무엇이 무엇인지 잘 몰라버립니다만 결국은 다 불성을 말해 있습니다.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어떤 때는 현상만 가지고 상(相)만 말해 있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성(性)만 말해 있는 법문도 있고,
    어떤 법문은 체(體)만 말한 법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상만 말한 법문을 보면 성과 체는 잘 몰라버립니다.

    그래서 옛날 소박할 때는 그렇게 상만 말하는 법문이 다 통할 수가 있었으나,
    지금 현대는 일반 철학은 물론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철학이나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의 철학을 다 배웠기 때문에
    그야말로 스피노자는 불교도 많이 공부했으므로 책을 보면 이거 부처님 말씀 같구나,
    이렇게 생각이 날 때도 있습니다. - 이러한 때라
    그런 치우친 불교해설을 하면 잘 통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뜻도 그것이 아닌 것이고,부처님 법문은 그때그때 지금 현대는
    이것저것 다 종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입니다.

    따라서 같은 수행법도 앞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정관(不淨觀)이라. 몸이라는 것은 더럽다. 이렇게 생각하는 공부라던가,
    또 모두는 다 비었다. 다 비었다 하더라도
    사실 중생들은 비었다는 것을 못 보니까 실감이 갈 수가 없습니다.
    또 그것은 너무나 허망하고 말입니다.
    도인들이 보면 빈 가운데 다만 비어있지 않고서
    불성광명(佛性光明)이 충만한 자리, 모두를 찬란한 불성으로 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실상입니다.
    그런데 '실상이 아니라 텅 비었다' 이렇게만 생각하면 허무를 느낍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은 별 것이 아니지만 내내야 마음 저변은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같이 그런 고도한 법문이 아니면
    우리 마음이 항시 안정을 못 취합니다. 항시 불안스럽습니다.
    있다고 해도 불안스럽고 텅 비었다고 해도 불안스럽고 합니다.
    전부가 다 부처다 이렇게 되어버려야
    본래성품이기 때문에 마음이 활발하니 풍요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가장 풍요해지는 행법,
    이와 같이 현상이나 실상이나 모두를 종합적으로 수렴(收斂)한 법문이
    앞서 천태지의 선사의 법문이요,
    또 금타대화상(金陀大和尙)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입니다.

    따라서 이 법문은 우주만유를 하나의 도리로 딱 통달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체험은 미처 못한다 하더라도
    사실은 우리 마음이 개운한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어디가 아파도 우리 불성은 아프지 않고,
    아파도 말똥말똥 불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습니다.
    이러한데서 우리가 불성 자리에 마음 두고 사는 것이 불교인의 생활이지요.

    염불(念佛)도 결국 부처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서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항시 부처를 염합니다.
    본래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결국은 부처뿐인 것이니까
    부처를 안 떠나기 위해서 우리가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옛날의 방편염불은 부처님 그러면
    저만큼 밖에서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면
    우리한테 와서 가피를 준다. 이런 식이지만,
    사실 원래 염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이것 보나 저것 보나 모두가 부처다.
    이렇게 부처님을 염불하는 것입니다. 

     어찌 엄마아빠 뿐이겠습니까 / 고은  

     

      

      

    오늘도 저 남녘 앞바다 화면 앞에 있습니다
    아무리 땅을 친들
    땅을 쳐
    피멍들 손바닥뿐인들

     
    내 새끼의 환한 얼굴이 달려올 리 없건만
    밤 지새울
    멍한 아침바다를 바라봅니다


    어찌 엄마아빠뿐이겠습니까
    내 새끼야
    내 새끼야
    내 새끼들아


    - 고은의 <이름짓지 못한 시> 중에서 -

    * 온 나라가 울음바다입니다.
    온 천지가 통곡의 바다입니다.
    내 새끼야! 내 새끼야! 내 새끼들아!
    어찌 엄마아빠 뿐이겠습니까.
    이 땅에서 숨쉬는 모든 이,
    모든 사람의 가슴에 피멍울이 듭니다.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지겠고

    무겁고 깨질 것 같은 그 독을 들고
    아등바등 세상을 살았으니 산 죄 크다

    내 독 깨뜨리지 않으려고
    세상에 물 엎질러 착한 사람들 발등 적신 죄 더 크다.

     


    * 김용택은 ‘죄’에서 제 앞 가리려 살다 보니 베풀기는커녕...
    이웃에 폐 끼치기 십상이었다고 뉘우친다. 
    네 탓만 하는 세상에서 드물게 착한 고백이다.
    그런 반성에서부터 나눔과 베풂은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