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가족으로 만났을까요/법상스님

2014. 5. 14. 07:1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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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법회 녹취] 2월 9일 일요법회(즉문즉설)

                   " 어떻게 가족으로 만났을까요?"           

 

 

 

 

 

 

 

 

네, 반갑습니다.

오늘 눈이 많이 와 있어서 많이들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이 눈길을 헤치고 이렇게 오셨네요.

오셨더니 법당 풍경이 너무 아름답죠? 너무 아름다워서 참...정말...

‘야, 이 서울 한복판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여러분들께서 질문해 주신 답변을 좀 더 드리겠습니다.

“夫婦의 因緣은 어떻게 定해지는 건가요? 또 자식과의 因緣도 그런가요.” 라고 물으셨습니다.

 

부부의 인연 혹은 자식의 인연, 혹은 우리에게 오는 크고 작은,

친하고 또 좀 소원한 다양한 많은 인연들이 있는데 그런 인연들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그 가운데도 특히나 이생을 함께 하는 어떤 한 팀과도 같은 이런 가족이나 부모, 자식,

부부간의 인연들은 도대체 어떻게 정해지는 건가 궁금하실 겁니다.

근데 어떻게 정해지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그 뭐랄까요,

本質的으로 우리가 어떻게 인연이 맺어지는지를 좀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원수의 因緣도 있는 것 같고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찾아온  因緣도 있는 것 같고,

‘아, 이게 남편이 아니라 원수’라고 하는 얘기도 더러더러 들어봤는데,

자식도 마찬가지고 “이게 원수가 온 건지 모르겠다.” 라고 얘기하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根源에 있어서는, 本質에 있어서는 모든 因緣은 나쁜 因緣이란 없단 말이죠.

모든 因緣은 慈悲와 사랑의 因緣으로써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因緣의 根源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우리를 돕기 위한,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인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 理由 없이 이 사람을 단지 ‘괴롭히기 위한 목적으로 나타난 인연’이 있느냐?

그런 因緣은 없다.

우리가 그렇게 生覺하고 있을 뿐이지.

‘저 사람은 필시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찾아왔을 거야’라고 생각해서 

우리가 그렇게 解釋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그런 목적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짓밟으려는 목적으로 찾아오는 因緣은 없다는 거죠.

 

심지어 꿈도 마찬가지거든요.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악몽을 꿨다,

나쁜 놈을 만나서 내가 괴롭힘을 당하는 꿈을 꿨다,

이게 우리는 악몽이라고 생각해서 나쁜 일이라고 生覺 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런 악몽이 오는 것도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옵니다.

 

때로는 어떤 꿈은 꿈속에서 미리 한 번 이생에서 있어야 될 어떠한 괴로운 일을

꿈속에서 한 번 먼저 堪當해 봄으로써 이 좀 충격을 어느 정도 흡수시켜주는,

어느 정도 미리 한 번 예행 연습을 시켜 봐주는 어떤 그런 목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요.

또한 그런 목적의 연장으로써, 꿈속에서 악몽을 꿈으로써 사실은

이 생생한 현실 속에서 그 괴로움을 겪어야 되는데, 꿈속에서 이게 감소시켜 주는 거죠.

 

그것을 통해서 어떤 꿈으로써 미리 한 번 이렇게 시현해 봄으로써

現實에서는 많이 減少될 수 있는 어떤 그런 일들도 있을 수 있다.

혹은 내가 어떤 많은 안 좋은 일이 있거나, 또 내가 나쁜 일을 저지르고 있거나 그럴 때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기 위해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런 어떤 經驗들을 꿈속에서 미리 보내줄 수도 있는 것이죠.

 

저 또한 때때로 보면, 어떤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는 너무나도 뭐랄까, 

‘야, 어떻게 이러한 깨달음을 꿈이 나에게 줄 수가 있지?

어떻게 꿈이라는 것을 통해서 내가 이렇게 밤새 이렇게 놀라운 깨달음,

이렇게 참 살면서 배워야 될 것을 이렇게 어떻게 배울 수가 있었을까’하는

놀라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물며 꿈도 그럴진데,

꿈이라는 것이 좀 더 실제적인 것처럼 들어나는 게 바로 이 現實世界일 뿐입니다. 

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꿈은 꿈인데, 이거는 조금 더 진짜 같은 꿈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진짜 같은 꿈이 이루어지는, 구성되는 原理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어떤 사건이 만들어졌거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찾아왔거나 그럴 수는 없다.

 

모든 因緣은 다 貴한 因緣이고, 우리를 돕기 위해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찾아온 인연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根源的으로써는 다 道伴입니다. 도반.

도(道)의 길을 함께 걷는 도반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생에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이제 죽었어요.

죽고 나서 중음신으로 있을 기간 동안에 있다가 다음 생에 태어나야 됩니다.

다음 생에 태어나는데 어떻게 태어날까요?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 같이 

깨닫게 하기 위한,‘이 사람에게 지혜를 깨닫게 해 주겠다 ’라는 것은 그 사람을 돕기 위한 거죠.

 

즉, 그 사람을 무한한 자비로써 품어주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지혜를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지혜와 자비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사람을 지혜롭게 깨닫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는 이생으로 태어나는데,

그러면 태어날 때 아무 理由 없이, 아무런 뭐 저런 것 없이 그냥 태어나보니까

이 사람과 인연이 맺어졌더라. 태어나 보니까 이 사람이 내 부모였고, 이 사람이 내 자식이었더라?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일은 根本에서는 우리가 同意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우리의 表面意識에서는 전혀 同意하지 않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같지만,

그래서 내 인생을 짓밟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사실은 根源에서 내 意識이 同意한 일들만 現實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同意한 사람과만 因緣을 맺을 수가 있다. 특히나 깊은 인연일수록 더욱 더.

 

그런데 그 同意라는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生覺, 이 表面意識의 同意가 아닙니다.

그 『티벳 사자의 서』 같은데서 보면 우리가 죽고 나서

막 공포심에 사로잡혀서 지옥에 떨어지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죽음의 瞬間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瞬間이고 중요한 瞬間 이라고 합니다.

 

하루 중에 잠들기 直前이 너무나도 重要한 理由는 우리의 意識이

이 의식이 깨어 있는 시간이 한 삼분의 이는 되겠지만 한 삼분의 일 정도는 잠자는 시간이란 말이죠.

근데 주로 우리들의 의식이 깨어 있는 시간들은 말이 깨어 있는 시간이지 자고 있는 시간이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意識이 깨어 있는 시간동안 깨어 있지 못하죠.

意識이 깨어 있는 시간에  ‘의식이 깨어 있다’라는 것은  지금 이 瞬間,

지금 이 瞬間을 생생하게 느끼고, 알고, 존재하고,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 앞에 (법당 밖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눈이, 눈 세상이 아름답게 펼쳐졌는데

이것을 한 몇 분 정도 오셔서 느껴보셨습니까?

차를 휙~ 세우고서 정신없이 뛰어 들어오시느라고 ‘아이구~ 좋다’ 이러고 그냥 뛰어오신 분도 계시고,

조금 더 깊게 ‘야!!! 정말...‘ 감탄, 감탄을 해 가면서 천~천히 걸어오면서

이 아름다움을 감탄, 감탄 하면서 오신 분도 계실 겁니다.

 

 

여러분들! 햇살이 내리쬘 때나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때는요,

잠시 멈춰 설 필요가 있어요. 잠시 멈춰 서서... 따스한 햇살이 내리쬘 때는 잠시 눈을 감고

그 햇살이 어떤 느낌인지를 잠시 한 번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차가운 기운이 내 몸을 어떻게 적시고 있는지를 느껴 볼 필요가 있고,

운동을 하고 나서는 운동하고 나서 약간 몸이 뻑적지근하고 뻐근해 오는 그런 것들을

한 번 가만히 앉아서 느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느낌이 바로 그 瞬間에 存在하는 것이거든요.

 

깨달음이란 것이 뭐 어디 엄청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그런 것이 깨달음이 아니고,

그런 것들을 내가 깨달음이라고 붙잡는 순간 그것은 깨달음도 아니고,

단지 ‘지금 이 瞬間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느끼고 알 때,

그것이 바로 그 瞬間에 意識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어디서 봤는데, 얼마 전에 현각스님이 어디 인터뷰를 잠깐 하셨더라고요.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조그마한 절을 짓고 사시는데, 한국에서 너무 알려지니까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해서 가셨다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거기서 기자가 짓궂은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선승이라고 항상 그러시는데,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그렇게 물었더니 스님이 뭐라고 답변하시냐 하면,

그 앞에 놓여 있는 커피를 바라보면서, 뭐 이런 의미였습니다.

“차 한 잔이 이렇게 식어가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차 한 잔 마주하고 있고,

이렇게 차 맛이 참 좋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우리가 일터를 갈 때, 아침에 오늘 하루 종일 해야 될 일이 너무나도 많아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머리가 복잡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 뒤로는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는데,

일터로 가는 그 십분, 이십분, 삼십분, 한 시간 되는 그 시간을

이 아름다운 풍경들이 지금 내 옆으로 스쳐지나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머릿속은 그것을 느끼고 누리는 것은 뒷전이고, 오늘 하루 있을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이미 도착하기도 전부터, 차 운전하는 그 순간부터 하루의 스트레스를 미리 가져와서 받는 겁니다.

 

근데 운전을 하고 가는, 출근을 하는 그 시간 동안에는

그저 이 주변에 있는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바라보고,

아침햇살이 이 하늘을 물들이는 놀라운 그것에 감동하고, 감탄하고 그런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오히려 회사 가면 더 일이 안 풀릴 것 같지만

사실은 미리부터 고민하는 것보다 그냥 감동하고, 감탄하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있다가

그 순간에  회사에 가서 일을 딱 하면, 그럴 때 훨씬 일의 집중력이 훨씬 더 커지죠.

 

깨달음이란 것은 거창한 뭔가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그 순간에 우리 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지,

그것이 우리의 깨달음을 좌우하는 것이거든요. 조금 다른 얘기로 갔는데,

이것처럼 우리는, 우리 意識의 根源에서는 그 깨어 있음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놀라운 무한한 가능성들이 우리 의식에게는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육신을 받아 살고 있는, 이 인간의 몸을 받아 살고 있는 이 시간 동안은

이 몸뚱아리가 있으니까 그 어떤 시기보다 더 我相이 생기고 에고(Ego)가 생겨요. 

‘나다’라는 生覺이 생기고 그러니까 그 我相에서 피어나오는 그 生覺, 生覺들,

判斷과 이런 어떤 分別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生覺이  나의 本質을, 根源을 가로막고 있는 거죠. 막아서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根源的인 어떤 判斷을 내리지 못하는 거예요.

 

근데 언제나 근원적인 판단을 못하느냐? 그게 아닙니다.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每 瞬間에 意識이 存在하게 된다면

그 때 놀라운 어떤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번뜩이는 어떤 내 삶의 힌트들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저 또한, 이를테면요, 컴퓨터 앞에서 막 뭐를 할 때보다

이렇게 自然을 바라보면서 잠시 눈을 감고 햇살을 느끼고 있을 때,

혹은 절을 하고 있을 때, 좌선을 하고 있을 때, 그럴 때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문득 문득 떠오릅니다.

 

그래서 제가 보통 한 生覺 일어나면 저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수많은 生覺들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生覺들을 저지르기 보다는

어떤 수행이나 명상이나 절을 하다가,

혹은 自然 속에 있다가 어떤 한 生覺이 딱 일어났을 때,

그냥 是非 分別하지 않고  그냥 ‘저질러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意識이 고요했을 때 일어나는 한 生覺은

얕은 내 表面意識에서 생겨난 生覺이 아니라, 그야말로 意識 內面 깊은 곳에서,

宇宙法界에서 나에게 내보내주는 어떤 힌트와도 같은 情報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거기에 執着하지는 않아야 된다는 걸 배웠습니다.

 

옛날에 그렇게 어떤 直觀的으로 올라온 生覺들을 저질렀더니

놀랍게 現實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감동,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分明히 이것은 修行하던 중에, 冥想하던 중에 놀라운 어떤 한 生覺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아! 이것이 信號구나.’ 그래서 그것을 탁 저질렀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배웠습니다. ‘아, 저질른다고 無條件 되는 것만이  아니구나.

이것이 된다는 것에 대한 執着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어떤 공부구나.’

 

그것은 겉으로 봤을 때는 안 된다고 生覺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러한 방식으로 되는 거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意識次元으로써 이미 되고 있는 것일 수 있어요.

우리 生覺으로 우리들의 判斷으로 ‘된다, 안 된다’를 分別했을 뿐인 것이지.

그러한 根源的인 어떠한 놀라운 자리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죽고 난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까 말했던 것처럼 『티벳死者의 書』에서는

'죽고나자마자 놀라운 깨달음의 가능성들이 끊임없이 우리 意識 앞에 다가온다.

强烈하게는 일곱 번을 다가온다 ' 그래서 칠칠재(七七齋)를 한다고 하죠.

 

즉, 다시 말해서 우리 意識은 그 瞬間 우리 몸이 죽고 나서는 

根源의 자리와 '하나'가 되는 瞬間을 맛본다는 겁니다.

중음신의 기간 동안에도 이렇게 살아 있을 때처럼 막 生覺과 煩惱와 고민으로 물들어 있거나,

‘내가 왜 이렇게 먼저 죽었을까. 좀 더 오래 살아야 되는데, 그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잘 있을까?,

내가 그 핏덩이 같은 자식을 두고 왔으니 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가.’ 이런 生覺을 일체 하지 않는,

完戰히 根源과 '하나'가 되는 자리 속에서 온전한 休息을 취한다 말입니다. 

 

이번 한생 인간계 몸을 받으면서 스트레스 엄~청 받으면서 살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한 感謝한, 어떤 休息의 時間이 주어지는 겁니다. 놀라운 休息의 時間이.

그래서 죽었다가 죽음의 境界를 잠시 맛보고 다시 돌아왔던,

臨死體驗을 했던  이런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자식과 남편과 아내가 다 나를 보고 울고불고 울고 있는데,

나는 정말 딴 것은 다 필요 없고 그 한마디를 하고 싶었다는 거예요.

 

“왜 이렇게 너희들이 울고 있니. 여보, 왜 이렇게 울고 있어요?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幸福한 건 지금이 처음인데,

이렇게 平和롭고 이렇게 고요할 수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이렇게 놀라운,

전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데  왜 당신들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된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한다는 거죠.

 

그런데 너무 심하게 울고불고 執着을 하게 되면, 그 영가에게 울고불고 집착을 하게 되면

그 영가는 점점 이게  실체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야, 이거 내가 안 되겠구나. 되돌아가야겠구나. 얘네들 옆에 있어야 되겠구나.’

자신의 영혼이 갈 수 있는 놀라운 어떤 행복의 가능성으로 한 발 넘어가다가, 느끼다가 말고,

人間界에서 살고 있었던 習이 남아있어 가지고 산 사람들이 人間界로 자꾸 끌어당기는데,

거기다가 울고불고 하게 되면, 곡을 하게 되면 저승으로 가야 되는데 가지 못하고 돌아온단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臨死體驗을 하고 다시 살아났으면 괜찮은데 다시 살아나느냐? 안 살아난단 말이죠.

이미 영가의 마음은 意識은 이쪽 人間界에 執着이 되어 가지고, 내 因緣들에게 執着이 되어 가지고

마음이 여기 인간계에 와 있는데, 나의 意識은  이미 저쪽으로 또 못 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영가는 살아나지도 못하고 중음신으로 鬼神이 되서 世上을 떠도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러니까 나에게 눈물 흘리고 나에게 집착했던 사람들 옆에

계속 붙어 있는 겁니다. 옆에 붙어있는 것이 그것이 그들을 도와주는 건줄 錯覺하고,

사실은 그들을 괴롭히는 건데 어리석으니까 그걸 모르는 겁니다.

자꾸 안 좋은 일이 생기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단 말이죠.

그래서 執着하지 말고, 돌아가신 영가분 앞에서 너무 울고불고 하지 말아야 되겠죠.

 

곡을 하는 건 유교식입니다. 유교에서는 잡아들여야 되니까, 영가들을, 귀신을 잡아들여서

‘우리 옆에 계시다가 우리를 돌봐 주십시오, 내가 자주 자주 밥을 드릴 테니까.’

그래서 삼년상도 하고 영가를 오래도록 붙잡아 놓는 거예요. 못 가게.

그래서 자꾸 밥도 주고, 천도도 하고, 제사도 자꾸 지내고 하는 거예요. 그래야 안가니까.

삼년상을 길게 하고 이런다고 效果 있는 게 사실은 아닙니다.

이게 뭐냐 하면, 어떤 하나의 특정한 문화가 가져온 집단적인 어리석음, 무명의 결과에요.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집착을 탁 떨어뜨려 주는 것만이 돌아가신 그 영가분을 위한 길이다.

그래서 49재를 딱 하고 나면 그냥 탁! 털어 버리는 겁니다. ‘온전히 좋은 데 가셨구나.’ 하고.

 

그렇게 됐을 때 이제 영가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영가들은

根源으로 돌아가서 그렇게 根源과 合一되어서 休息을 취한단 말이죠.

비로소 정말 한 80년, 90년의 人間界에서 어떤 힘들었던 旅程을 끝내고,

힘들었던, 그러나 놀라운 깨달음이 있었던 그런 旅程을 끝내고 休息을 취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휴식을 취할 때는 根源과 '하나'가 되어서,

그 어떤 本質的인 자리와 '하나'가 되어서 休息을 취한단 말이에요.

그러고 나서 이제 또 다른 어떤 生覺을 일으킵니다.

‘내가 다시 인간계로 가서, 혹은 어딘가로 가서 다시 輪廻의 길을 가야 될 때가 왔구나.

나의 깨달음을 위해서 나의 어떤 '歸依'라고 하는 숭고한 깨달음의 어떤 여정을 밟기 위해서

또 다시 이제 여정을 떠나야 될 때구나.’라고  판단이 설 수 있단 말이죠.

 

그러면 이제 根源과 合一된  狀況 속에서 生覺하는 거죠.

내가 그러면 어떻게 輪廻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가장 나의 깨달음에 최적화된, 가장 아름다운 큰 놀라운 깨달음을  나에게 줄 수 있는 상황일까를

이제 나의 業 전체를 둘러보면서, 業鏡臺라고 해서 前生을 보는 業도 있지만, 그 根源의 次元에서는

나의 數 億劫이나 되는 모든 業의 次元에서의 業도 다 보고 있고, 알고 있고,

그때 만났던 수 없이 많은 사람들도 다 알고 있고 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과 交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테면 내가 이 수많은 業을 녹이면서 또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있어서

뜬금없이 아무 因緣도, 나와 아무 因緣도 없는 사람을

특별히 필요할 때가 아니고서는 어지간하면 붙잡아 들이지 않겠죠.

 

그러면 내가 다음 생에 갈 때 나에게 큰 깨달음이 오려면 내가 과거에

나와 因緣 있던 사람들 가운데 因緣 있는 사람들을 選擇을 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겠어요?

 

그 因緣 있는 사람과 나와 어차피 業으로써 서로 얽혀 있으니까,

으로써 얽혀 있으니까, 에너지적으로 얽혀 있으니까 에너지는 어차피 풀어야 되고,

어차피 풀어야 될 그 인연에너지들을 나름대로의 어떤 因緣으로써 組合해서 만나는 거죠.

부부로서, 자식으로서, 아니면 친구로서, 아니면 직장 상사가 되어서.

‘너는 직장상사가 되어서 한 몇 년간 나를 괴롭혀라.

그럼으로써 내가 前生에 누군가를 괴롭혔던 그 果報도 消滅시킬 겸

내가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를 막 소홀히 하고 괴롭히고 이러는 내 습(習)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어라’ 하고 영가끼리 서로 約束하는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은,

‘그래, 네가 힘들겠지만, 네가 나로 인해서 괴롭힘을 당하느라고 직장생활이 힘들겠지만

내가 그것을,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해 줄게.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해 줄게’ 하고 다음 생에 가서 괴롭히는 거예요.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이 여러분이 미워서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여러분과 이 根源에서, 어떤 靈魂의 次元에서 同意를 했단 말이죠.

 

부부도, 자식도 마찬가지로 이런 어떤 깊은 因緣關係를 맺기로 서로 同意하고,

그 어떤 根源的인 靈的인 次元에서 서로 合意를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흡족하게 同意를 한단 말이죠.

‘그래 이생에 우리가 함께 夫婦의 因緣으로 만나서

어떤 아름다운, 어떤 깨달음의 여정의 길을 한번 가보자.‘

자식과의 동의도 마찬가지고. 모든 존재가 그러한 커다란 어떤 대략적인 줄거리를 가지고

이생에 나온단 말이죠. 그게 '業'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제 사주팔자를 보고 하는 이유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은 너무 전혀 뜬금없는 일들은 사실은 잘 없어요.

사주팔자를 보고 이러는 것도 얼추는 뭔가 그래도 이유가 있기 때문에 보는 거예요.

이렇게 얘기하면 또 사주 보러 간단 말이죠. 이래서 제가 이런 얘기를 잘 안하는데,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큰 줄거리는 잡아온단 말이죠. 보통은 큰 줄거리를 잡고 온단 말이죠.

큰 줄거리는 잡고 온다. 근데 그 큰 줄거리는 어지간하면 깨달음을 이르게하기 위한 最適化된

條件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냥 어떤 일종의 통계처럼 스쳐지나가면서 조금 조금씩 힐끗힐끗 보는 사람이 있을지언정

온전히 볼 수가 없죠.

 

그리고 제가 말한 것처럼, 예를 들면 어떤 깨달음을 위해서 어떤 괴로움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修行을 하고 精進을 하고 工夫하는 理由는 뭐겠습니까?

우리의 어차피 根源的인 旅程은 깨달음으로 가는 거예요. '歸依'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길을 좀 빨리 가자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께서 그러셨죠?

‘우리 중생들은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도 괴로울 게 없는데,

意識 스스로 錯覺해 가지고 괴로운 줄 錯覺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괴로운 것이 아닌데.

우리가, 중생들이 하도 괴로운 줄 錯覺하니까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法을 설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근데 범천이 와서 요청을 했습니다.

범천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니에요. 情에 얽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중생들이 괴로워하는 게 진짜인 걸로 錯覺하는 거예요.

범천도 아직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니까.

 

부처님은 탁 깨닫고 보니까

’중생들이 아무도 괴로운 사람이 없다‘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꿈을 꾸고 있는 거구나. 그런데 지금 미리 꿈을 깨워 줄 필요가 굳이 뭐가 있느냐,

그 꿈도 필요해서 있는 건데‘ 그렇게 알고 계셨단 말이죠.

 

그런데 범천은  “그래도 부처님! 그래도 이 사람이 지금 괴로워하는데,

이게 꿈이라는 건 부처님 말씀하시니까 알겠는데, 그래도 이 사람은  꿈인 줄 모릅니다.

이 중생들은 어리석어서 자기가 꿈꾸는 줄도 모르고 진짜 괴로움인 걸로 錯覺하고 삽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비심을 발하셔서 이 중생들의 錯覺을, 錯覺이 아무리 꿈이지만 그 錯覺을 조금 더 깨줘서

그 錯覺 속에 너무 깊이 빠져 있지 않게 좀 도와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권청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위대하지 않고, 범천은 위대했다? 그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자비롭지 않아서 그렇게 안하려고 했고,

범천은 자비로워서 그렇게 하려고 한 게 아니란 말이죠.

부처님은 根源의 本質을 보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래, 좋다. 그렇다면 내가 범천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

 

그러니까 불교는요, 깨달음을 얻으려고 미친 듯이 執着할 必要가 없다.

깨달음 거기에도 과도하게 執着할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우리는 根源과 合一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처가 되게 돼있어요.

조금 더딜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修行하고, 祈禱하고 精進하는 理由는 뭐겠습니까?

그 더딘 것을 좀 당겨보자. 즉, 사실은 괴로운 게 아닌데,

우리 意識은 괴롭다고 실체적으로 괴롭다고 錯覺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錯覺을 깨보자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난 괴롭다고 錯覺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수행할 필요가 없죠.

괴롭지 않은 사람은 수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核心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에서 왜 修行을 하느냐?

'중생이 괴로워하니까.' 고성제(苦聖諦)라고 얘기하셨단 말이에요.

그럼 괴로움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된다.

그럼 괴로움의 原因을 알아야 된다. 原因을 알고 나니 '멸()했다'

부처님께서 먼저 깨닫고 보니까 原因을 滅한, 卽 ‘ 괴로움이 완전히 打破된 世界’가 있다는 것을

부처님이 몸소 보여주고 알려준 겁니다. 涅槃의 멸성제(滅聖諦)를 통해서.

 

그리고 具體的인 方法, 가는 길까지 알려 줬어요. 도성제(道聖諦)를 통해서.

이와 같이 괴로워하니까 괴로움을 消滅시켜 주는 方法을 알려주고,

그 구체적인 수행법을 알려주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러한 깨달음의 旅程을 걷고는 있지만 우리는 기도, 수행을 통해서 그 길을 좀 앞당기고,

지금 虛妄한 虛想의 괴로움이 우리의 意識이 實相이라고 錯覺하고 있으니까

그 錯覺을 깨보기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수행하고 정진하는 것이죠.

 

아까로 다시 돌아가서요. 그렇게 어떤 根源에서 나의 깨달음에 있어서

가장 어떤 좋은 시나리오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고, 同意한 채 이생에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 꿈과도 같은 괴로움을

實際인 것처럼 錯覺하면서 당해봐야지만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演劇을 해봐야지만 깨달을 수 있는 거예요.

즉, 돈을 벌어 봐야지만, 벌고 한번 누려보고 써 봐야지만 나중에 가서

 ‘야. 이 돈 별거 아니구나.’하고 탁 놓을 수도 있는 겁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이 정말 원수 같기도 하고, 참 이거 정말 깝깝한 것이구나' 하지만

‘執着의 實體가 이런 것이구나’를 알고 나면 더 깨닫기가 쉬워질 수 있고,

집착을 놓기도 쉬워질 수 있단 말이죠.

 

전에 제가 그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 대학교 1학년 때 누구를 좋아했었단 말이죠.

한 1년 가까이를 누구를, 그 여인을 좋아했는데, 1학년 마치고 나서 그 친구가 딴 사람을 사귀어가지고

저는 말 한 마디 못 해보고 혼자서 좋아하다 혼자서 차여버린 거죠. 혼자 마음속에서...

1학년 내내 괴롭더란 말이죠.

 

근데 1학년 마치고나서 걔가 어차피 딴 사람한테 가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잖습니까?

그래서 마음을, 탁 집착을 놓고 났더니 어휴, 깜짝 놀랐어요.

우리 학교에, 우리 과에, 우리 동아리에 이렇게 예쁘고, 이렇게 성격도 좋고,

이렇게 괜찮은 여자 친구들이 이렇게 많았었구나.

그 가능성이 어떤 한 가지에 집착하고 있으니까 전혀 보이지 않더라는 거죠.

 

그런데 집착을 내려놓고 났더니

또 다른 ‘엄청난 가능성들이 내 삶 속에 있구나.’ 라는 것을 알았다는 거죠.

‘아.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집착을 했기 때문에 1년 동안 완전히 사로잡혀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제한된 상태 속에서 1년을 보냈구나.’

 

그럼 그 시간은 쓸모없는 버리는 시간이었냐? 그것이 아니라는 거죠.

그것을 통해서 '執着의 實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죠.

 

이와 마찬가지로 이생을 살고 있는, 이 괴로움을 감당하고 있는 것도 필요는 합니다.

그런데 그 필요한 것이 깨닫기 위해 필요한 거지 必須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結論은 뭐예요?  깨닫기 위해서 그 괴로움을 십년을 내가 시나리오로 정하고 왔는데,

깨닫기만 한다면 십년동안 괴로워하지 않고 1년 만에 끝낼 수도 있단 말이죠. 먼저 깨닫는다면.

 

그래서 우리가 修行을 하고 精進을 하고 복을 지으면, 복과 지혜를 증장시키면

그것을 빨리 끝내고 빨리 깨달을 수 있는 겁니다. 빨리 끝내고 빨리 깨달을 수 있다면

이번 생에 내가 부처님에게로 한 발 다가서려고 시나리오를 잡았는데,

우리가 수행을 하고 기도 정진하다 보니까, 복을 짓고 하다 보니까

두 발, 세 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삶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원래는 한 두생, 세생 와서 이백년, 삼백년 고생하다 돌아가야 되는데,

이번 한생 만에 그렇게 몇 백세 동안 해야 될 工夫를 끝내고 갈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러면 그만큼 더 행복하고, 그만큼 더 다음 생에도 덜 괴로워할 수 있는 공부가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修行하고 祈禱하고 精進하고 복 짓는 사람은 사주팔자를 봐봐야 소용이 없는 거예요.

내 意識이 그렇게 복과 지혜를 증장함과 同時에 나의 시나리오는 瞬間瞬間 바뀌고 있으니까.

 

우리의 意識은  뭐랄까요, 多樣한 意識 次元들을 가지고 있는 存在입니다.

우리는 이 겉모습에서 지금 이 肉身을 가진 이 存在만 나라고 生覺하잖아요.

우리 意識 內部에는 佛性과 거의 合一이 되어있는 意識의 나라는 또다른 어떤 意識次元이 있단 말이죠.

그것을 우리는 참나니, 대아(大我)니, 진아(眞我)니,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니 그렇게 얘기하지만,

그런 어 떤 意識 次元의 또 다른 나의 意識도 우리 意識 內部에 있단 말이죠.

 

지금의 意識 이 狀況보다 더 깨달음에 앞서간 나의 意識도 지금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意識보다 더 어리석은 나의 意識, 저 중생의 意識,

저 짐승의 意識 정도의 意識밖에 안 되는 過去의 나의 意識도

지금 이 瞬間에 사실은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過去, 現在와 未來는 事實은 '지금 이 瞬間'에 同時에 存在합니다.

과거 현재재 미래라는 시간은 없고 그것은 단지 意識이 꾸는 幻想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수행하고 공부하고 정진하면

過去가 解脫이 되고, 未來가 解脫이 되고 全切  生涯에 影響을 준단 말이죠.

 

그리고 그 전체 생에 영향을 주고 있는 모든 多次元的인 宇宙意識 속에서의,

우리가 科學에서 多重宇宙라고 하는 그런 수많은 어떤 다중우주 속에서의

수없이 많은 또 다른 意識 次元의 어떤 나의 意識의 無限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그 의식들이 꼭 또 다른 輪廻의 삶속에서의 어떤, 윤회의 도상 속에서의 '나의 의식'일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단 말이죠.

 

즉, '너'라고 알 고 있었던 수많은 또 다른 '나'

'여러분'이라고 알고 있었던 수많은 또 다른 '나'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단 말이죠.

우리 意識이 生覺하는 것보다 우리의 意識은 더 깊고, 더 넓고,

想像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無限한 根源의 存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方式으로 부부의 因緣도 맺어지고, 부모, 자식 간의 因緣도 맺어집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나와 因緣 맺은 모든 사람을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면 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 世上을 中道的으로 보라고 한 거예요.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싫어하지 마라. 그것은 너의 偏見일 뿐이지, 너의 生覺일 뿐이지

根源의 智慧에서 본다면 모든 存在는 道伴으로서, 우리를 깨닫게 해 주기 위한 貴한 存在로서,

나를 살려 주기 위해서 자비로운 마음으로써 나에게 등장한 사람들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또한 나를 돕기 위해서 나타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등장하는 모든 因緣들은 全部 다 '貴人'들이고,

나에게 貴하고 고맙고 感謝한 存在들입니다.

 

그래서 이 世上 모든 存在를 향해서 盲目的인 無限한 受容,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는 거예요.

거부하지 않고, ‘아, 이게 모두 내 어떤 意識의 깨달음의 過程에서 다 必要한 사람들이구나.

필요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구나.’ 하고 ‘수용합니다’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내 意識이 錯覺해가지고 미워했던 사람, ‘아, 이 사람이 나와 根源的 次元에서 約束을 하고,

내가 전생에 이 사람을 괴롭혔기 때문에 業에너지의 均衡도 이룰 겸, 내 깨달음도 얻을 겸

이 사람에게 내가 부탁을 해서 이 사람이 나를 괴롭혀주기로 約束했는데, 그래서

이 사람이 날 괴롭혀 주는 건데 내가 그것도 모르고 그 사람을 증오하고 원망하고 미워했구나.

그래서 이 증오와 원망심이 아직도 내 意識 안에 쌓여 있었구나. 이걸 내려놓아야 되겠구나.’하고

 ‘용서합니다’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까지 잘못 錯覺했던 모든 나의 意識을 다 容恕해주겠습니다.'

'내가 미워했던 모든 他人을 다 容恕해주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存在가 고마운 存在니까.

어때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根源的으로 ‘당신이 나를 당신의 방법으로,

나를 괴롭혀주는 방식이 되었든 사랑해 주는 방식이 되었든

신의 방법으로 나를 자비롭게 사랑해 주는 만큼 저 또한 당신을,

나와 因緣된 모든 存在를 사랑합니다. 자비로써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말한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말의 波動이 이 宇宙的인, 根源的인 삶의 理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부처님 가르침의 엑기스를 담고 있는, 어떤 眞言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실천이 잘 안 되니까 그냥 이 말을,

네 가지 말을 반복하면서 가슴으로 막 느끼면서 반복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할 때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眞心으로 感謝한 마음으로, 모든 存在에게 感謝한 마음으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다는 거죠.

이렇게 '수용 · 용서 · 감사 · 사랑'을 반복을 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因緣이 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잠시 하겠습니다.

“業의 障碍가 너무 큽니다.

어떻게 하면 이 業을 좀 없앨 수 있을까요? 혹은 낮출 수 있을까요?

즉, 지금 이 瞬間의 生覺, 말, 行動이 그동안 쌓였던 業識 대로만 가는 것인지요?

즉,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만 가는 것인지요.

즉, 마음에, 좀 쉽게 말해서 머리에 똥만 들어서 그런지

지금 이 瞬間에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다 똥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합니다.

이를 부처님 가르침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어떻게 하면 자유로운 마음, 지혜롭고 원만한 마음,

탁 트인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이것도 이렇게 質問을 하신 분은 내 머릿속에서 生覺하는 것도

나쁜 生覺이 자꾸 일어나고, 나쁜 말이 자꾸 일어나고,

나쁜 행동이 자꾸 일어나니까 내 의식 스스로가 자꾸 원망스러운 거예요.

난 어떻게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지? 난 왜 이렇게 못난 사람이지? 하고 있는 겁니다.

근데 먼저 그걸 容恕해 줘야 합니다. 그걸 참회해야 된다.

내 의식이 나 自身에 대해서 내가 정말 얼마나 偉大한 存在인지를 모르는,

그 사실을  빨리 알아야 되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저, 오늘 안 오셨나요?

우리 거사님 한 분께서 지난주 법회 끝나고 ‘수상한 그녀’라는 영화를 봤는데

너무 재미있고, 너무 감동스러웠다고 막 극찬을 하셔서 저도 가서 봤습니다.

가서 봤는데, 아, 정말 감동스러웠고, 끝나고 나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러면서도 너무 즐겁고 재미있고 유쾌한 이런 영화였어요.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영화였는데, 거기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 자신이 음악을 작곡도 못 하고, 잘 못 한다고 막 스스로를 이렇게 못났다고 生覺하는

그 손자에게, 아니 오빠에게, 네, 영화 보시면 압니다.^^

손자에게 “네가 가장 모르는 것은 네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네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모르는 것 그게 너의 가장 큰 단점이다.”

그런 말을 하던데, 이게 바로 우리 모두의 의식의  단점입니다.

 

우리 의식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 우리 의식이 얼마나 위대하고,

정말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지혜가 우리 의식 안에 살아 숨 쉬는,

우리 의식 모두가 그런 존재인지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우리 의식의 잘못이고,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 의식이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 意識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 자체, 이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 의식이 머릿속에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고 이기적인 생각이 드는 거?

그것은 내 의식이 못돼서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我相의 特性’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그냥 我相의 屬性이에요.

我相이 있는 이상, 卽 부처가 되기 前에는 누구나 利己的인 生覺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나만 생각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이 더 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거예요.

 

나의 의식을 의식 스스로 자책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나의 의식을 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한 거니까. 그건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의식 자신에게  ‘괜찮아, 괜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의식은 내 의식을 사랑한다,

나의 의식은 너를 용서한다. 넌 아무 잘못이 없어'.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너는 죄가 없어’ 라고 自己 意識  自身의 意識에게 먼저 얘기해줘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자책하고, ‘넌 이것밖에 안 되니? 머리에 똥만 들었니?’

이렇게 얘기를 하면 점점 더 나의 의식은 그런 사람의 의식이 되어 버립니다.

‘아, 나의 의식은 정말 그런 사람의 의식이구나’ 하고

 

왜? 이 세상은 언제나 自己規定입니다.

내 意識이 規定하는 대로 그대로 내 意識世界는 現實로 펼쳐지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意識의 無限한 可能性이 언제나 우리 앞에 완전히 펼쳐저 있으니까요.

 

나를 나쁜 놈이라고 生覺으로 規定할 건지,

나를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규정할 건지

그건 내 마음 내 의식에 달려있습니. 내 의식이 規定하는 대로 내 世上이 規定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자꾸 生覺하지 마시고 이런 生覺을 먼저 내려 놓으셔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단순합니다. 아주 쉽고 단순합니다.

내 의식이 자꾸 나쁜 生覺만  든다? 그럼 意識的으로 人爲的으로 生覺을 바꾸면 되는 거예요.

좋은 生覺을 하고,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은 의식을 갖고 말씀드린 대로

수용 ·용서· 감사 ·사랑을 계속해서 반복을 하고.

 

우리가 그냥 無心코, 無意識的으로 그냥 이렇게 世上을 살면 이걸 바꾸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修行을 하고 自己觀察을 하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그냥 意識이 깨어 있지 않은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면요,

똑같은  業의 反應만이 나옵니다. 我相에 입각한 反應만이 나옵니다.

 

내 意識이 깨어있지 못할 때 누가 나한테 욕을 해요,

그럼 無意識的  自動反射的으로 ‘욱’하고 화가 납니다. 욕을 합니다.

내 意識이 깨어있지 못할 때 자식이 옆에서 막 시끄럽게 떠들어요,

그럼 無意識的으로 習慣的으로 ‘욱’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내 意識이 깨어있지 못할 때 자식이 공부는 안 하고 티브이만 보고 게임만 하고 있어요,

그럼 無意識的으로 習慣的으로  ‘욱’하고 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런데 내 意識이 확연하게 깨어 있어서 全切的인 狀況을 보고 있을 때,

意識이 깨어 있을 때, 내 마음이 활짝 열렸을 때, 그랬을 때는요,

자식이 좀 막 뛰고 장난치고 노는 것도 아름다워 보이구요.

아이가 게임을 해도 ‘아,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볼 수 있는 마음이 열린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 意識이 깨어 있지 못하면 恒常 거기 그 狀況에 휘청거려가지고

막 싸우고, 화를 내고 한단 말이죠.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이렇게 業대로 反應하는, 無意識的으로 사는, 意識이 깨어 있지 않은 狀態로 사는

그런 삶을 살게 되면 계속 그 業대로 그대로 갑니다. 業대로 갑니다.

 

그래서 이 業이 일어날 때, 卽 어떤 境界가 생겼을 때

‘잠시 멈춤’하고 봐주는, 바라봐주는, 멈추고 보는 것, 그게 '지관(止觀)'이고요,

그게 부처님 가르침의 核心입니다. 정정(正定), 정념(正念)이고,

그게 바로 중도(中道)이고, 分別없이 보는 게 바로 中道고요,

사념처(四念處), 부처님 가르침에 도성제(道聖諦)라는 修行의 核心이

中道와 팔정도(八正道), 四念處 아니겠어요?

中道가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고, 팔정도와 사념처가 ‘보라’는 겁니다.

즉, 中道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中道의 核心은 ‘分別없이 보라는 것’ 이것 외에 딴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業대로 휘청거리면서 사는 삶을 멈춰서 분별없이 보는 삶으로 자꾸 자꾸 바꿔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無意識的으로 ‘욱’하고 누구랑 갑자기 싸워가지고

마음이 훅! 올라올 때가 되면 意識이 거기서 멈춰서 보게 안 되지 않습니까?

 

意識이 멈춰지지 않으면 ‘오케이, 잠깐!!’하고 내가 잠시 자리를 이탈하란 말이죠.

다른 방으로 가서 잠시 마음을 의식을 바라보고 멈추고,

잠깐 이렇게 그 사람과 싸우는 것을 잠깐 멈추고, 떨어져서 조금 생각하고

그 다음에 다시 만나서 얘기해야 된다는 말이죠.

 

싸우고 있는데, 니가 맞니, 내가 맞니 막 싸우고 있는데,

계속 논리적으로 싸워 이기려고 하면, 이 사람은 이 사람 논리가 맞고, 저 사람도 저 사람 논리가 맞아요.

아무리 해도 답은 안 나오면서, 조금만 얘가 약간 좋은 논리, 올바른 논리로 탁 덤비면

이쪽에서는 논리로 좀 질 것 같다, 이러면 어떻게 해요?

과거에 상대가 잘못했던 것들 다 끄집어냅니다. 다 끄집어내가지고 결과적으로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막 그냥 남편에게, 아내에게 결과적으로 절대 이 얘기까지는 해서 안 되는 그런 얘기까지 막 나와

가면서 과거 얘기 들먹여가면서 별거 아니었든,  이건 뭐 아무 문제도 아닌 것 가지고

나중에 가서는 너 죽네 나 죽네, 이혼을 하네, 이런 얘기까지 오고간단 말이죠.

 

이게 意識이 깨어 있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두 가지입니다. 좋은 方便은 뭐냐 하면,

자꾸 좋은 生覺을 하고, 좋은 意識을 가지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고,

수용· 용서· 감사· 사랑을 계속 반복하고, 그렇게 깨어 있는 좋은 의식으로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 좋은 것들을 보고, 듣고 하는 겁니다.

 

영화도 폭력적인 영화, 이런 것 딱 끊고, 술, 담배 끊듯이 폭력적인 드라마, 영화 이런 거 딱 끊고,

감동적인 것, 이런 것 자꾸 찾아서 보시고 그러는 것이 

그게 나의 신구의 삼업을 나도 모르게 이렇게 자극시키는 거예요.

안 좋은 무슨 다큐 같은 거 나오면 딱 끊고, 될 수 있으면 좋은 쪽으로 자꾸 좀 보려고 노력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의식이 조금 점점 더 意識的으로 肯定的으로 이렇게 바뀌고,

 

의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면 이게 피드백을 합니다. 우주법계와 내 의식이

내 의식이 긍정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우주법계가 내 마음을 보기 때문에

긍정적인 일들을 자꾸 보내줘요.

 

그러면 긍정적인 일이 생기니까  의식은 자꾸 긍정적인 생각을 더 하게 되고,

‘아, 내 의식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니까 더 좋은 일이 생기는구나.’ 하니까

내 의식이 점점 더 긍정적인 일을 하게 돼요. 베풀기 시작하면 찬탄을 받게 되고,

좀 더 부자가 되고, 점점 더 베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첫째는, 방편으로는 깨어 있는 의식으로 자꾸 좋은 생각하고, 긍정적인 생각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감사· 사랑· 수용· 용서'를 자꾸 반복을 한단 말이죠.

그리고 이제 本質에 가서는 좋은 생각을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執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方便으로 어느 정도 잡혔다 싶으면 이제는 좋고 나쁜 分別心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지켜봐 주는 것, 바라보는 것, 잠깐 멈춰서 지켜보는 것,

내 意識이  어떤 내 화를 지켜보고, 내 이기심을 지켜보고,

마음을 지켜보고 이렇게 살아야 된단 말이죠.

 

이것만이 그동안 내 意識이 살아왔던 어떤 삶의 業의 끊임없는 어떤 再反復을,

계속 同一한 피드백을 탁! 멈추고 새로운 어떤 좋은 피드백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수행이  業, 業障 消滅에도 演習이 필요한 거예요.

마음 연습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 오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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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두화 (佛頭花)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생명들은

                                             존귀하고 소중하도다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을

                                             내 마땅히

                                             평안케 하리라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

 

 

 

 

 

 

 

 

 

 

 

 

 

 

 

 

 

 

 

 

 

 

 

 

 

 

 

 

 

 

 

 

 

 

 

 

 

 

 

 

 

 

 

 

 

 

 

 

 

 

 

 

 

 

 

 

 

 

 

 

 

 

 

 

 

 

 

 

 

 

 

 

 

 

 

 

 

 

 

 

 

 

 

 

 

 

 

 

 

 

 

 

 

 

 

 

 

 

 

 

 

 

 

 

 

 

 

 

 

 

 

 

 

 

 

 

 

 

 

                                             기  도 (11)

 

 

                        기도의 응답은 기도하는 사람의 간절한 마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그 응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다. 기도는 결코 물러서지 않는 신앙의 힘을 주는 것이다.  과감한

                        실천력과 두려움 없는 용기, 순간에 번득이는 지혜,  그에 따른 판단력

                        과 합리적인 사고로부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진리에 대한 확

                        고부동한 믿음과 간절한 마음의 염원으로부터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ㅡ 통도사 홍매화 ㅡ

 

 

 

                                          기  도 (1)

 

 

                                                  기도는

                                                  하루를 여는 아침의 열쇠다

                                                  기도는

                                                  하루를 마감하는 저녘의 빗장이다

                                                  기도는

                                                  인간의 마지막 자산이다

                                                  기도는

                                                  인간의 간절한 소망이다

                                                  기도는

                                                  영혼의 양식이다.

 

                                                                                ㅡ 法頂 ㅡ

 

 

 

                                              가치있는 삶

 

 

                                                      가치있는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내게 허락된 인생이

                                                      내 삶의 잔고가

                                                      이제 얼마나 남아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삶이다

                                                      그 삶에는

                                                      잔잔한 충만의 여유가

                                                      날마다 소리없이 넘실거린다.

 

                                                                                  ㅡ 法頂 ㅡ

 

 

기  도 (10)

 

 

                         기도는 평상의 마음가짐으로는 성취될 수 없다. 자신이 다겁생래로

                         지어온 업장에 대하여 잘못되었음을 뼈져리게 느끼고 다시는 그 업

                         장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절실한 참회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이

                         에는  가치관의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즉 무소유에 의한

                         오계(五戒)의 가치가 우리들을 불세계로 인도하는 진리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철저한 확

                         신이 있어야 한다. 이 확신은 올바른 삶의 실현에 대한 확신, 진리는

                         반드시 이길 수 밖에 없다는 확신,  현재 나의 고통이 반드시 극복될

                         것이라는 확신, 이것만이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