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인식과 절대적 인식

2014. 5. 7. 17:3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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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悟

白雲守端禪師

跟隨楊岐方會禪師學道,多年不得開悟。楊岐方會問他:「你師父當年是如何開悟的呢?」「我師父茶陵郁禪師有一次在橋上摔了一跤,因而大悟!」「你怎麼知道?」「因為師父摔跤大悟後,寫下一偈:『我有明珠一顆,久被塵勞關鎖;今朝塵盡光生,照破山河萬朵!』」
楊岐方會禪師聽了以後,露出怪異的表情,哼哼笑著離開了。白雲守端不知道這種冷笑的原因是什麼,心裡一直七上八下,一連數日,飯也吃不下,覺也睡不著。最後,忍不住去問楊岐方會禪師為何發笑,楊岐方會說:「你連我們寺院門口玩猴把戲的都不如!玩猴把戲的人,為了博君一笑,不惜做種種表演,賣弄辛苦的動作。我現在只不過一笑,你就飯也吃不下,覺也睡不著,實在一點功夫也沒有!」白雲守端終於言下大悟。
是呀!為什麼別人一笑,自己就不自在了呢?為了別人的一句話,就痛苦難過呢?「悟處還同病著錐」,你覺悟的關鍵,還須在你的病症上,下針服藥呢!
「鳥窠拈起布毛吹」,鳥窠禪師有位徒弟,在他座下十幾年了,都沒有開悟,有一天向鳥窠禪師告假下山,鳥窠禪師問:「為什麼?」「我要去參禪聽佛法。」「我這裡不是也有佛法嗎?」「老師都不曾教導我,怎會有佛法?」鳥窠禪師順手抓起身上的布毛一吹,說:「這不就是佛法嗎?」這位弟子當下就開悟了。
「一箇機關無兩用」,開悟的關鍵不在布毛,重要的是十幾年歲月的修持,機緣一會,功道自然熟成,否則,就算你拿起整件衣服來甩,也不能開悟呀

 

 

 

    상대적 인식과 절대적 인식  / 일붕 서경보 큰스님

 

  

우주의 모든 만상은 상대적인 면과 절대적적인 면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누구든지 자연현상을 좀더 관심을 갖고 보는사람이면  다 알수있는 일이다.

 예컨대 '털' 하나를 예로 들더라도 비록 그것은 하나의 털에 지나지 않지만

 적어도 털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나 기타 일체의 만상과 그의 입장을

달리한 하나의 엄연한 차별의 존재로써 사람은 하나의 털끝이 아니고

털이 만상이 아님을 알수있겠다 .

 

그러나 이러한 관점 역시 그 외모만 본 피상적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禪에서는 사람이건 털이건 모든만상은 無로 돌아간다고 보기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사람이건 만상이건 하나의 털이건 본질상으로 다를바 없다고

생각하는것이다.사물을 관찰할때 , 차별관으로만은 불충분하여 평등성을 내다보는

 평등관을 필요로 한다.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것은 늘 차별관과

대립적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평등관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들의 지식은 인식의 조직적단체로서 그 인식은 주관과 객관에 걸쳐서 움직인다.

지식이 지식으로서의 직분과 기능을 충분히 발휘함에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

주관과 객관이 예상 되어야 한다.즉 , 주관과 객관의 세계인 일체 망상 가운데

그 어느쪽이 결여되어도 지식은 성립될수 없는 것이다 .

 

우리들은 이 상대적 인식에 의해 사상의 상대적인 일면을 인식할수는 있어도

유감스럼게도 절대적인 면은 인식치 못한다.즉, 사상의 전모를 파악치 못하므로

사상의 진상을 철저히 봤다고 할수 없겠다.따라서  차별에 치우쳐서 상대적인 것에만

사로잡힌 지식은 참다운 지식이라고 볼수없다.

 

절대적 초월의 지식이란 마치 의사가 진찰할 때 상대바인 환자 와 한몸이 되어서

진찰하지 않고 털끝만큼이라도 두 사람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 오진을

범하는 경우와 같다 .요즘은 빈번히일어나는 운전자의 접속사고 등은

 운전자와 자동차가 한몸이 되지 않고 그 사이 간격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물과 한몸이 되었을때는 그 사물도 없어지고 자기 자신 마저 망각하여 잊고 

있는 것과 같이 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사상의 절대적인 면을 인식한다고

함을 이해키 위해 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여기 한그류의 소나무가 서있다면 그 소나무 줄기의 생김새, 가지의 뻗어진 모양,

나무 표피의 구열 ,나뭇잎의 생김새와 빛깔과 성질등에 대하여 여러모로

관찰하여 경험을 얻어 소나무를 인식하게 된다.

 

이 인식에는 인식의 주체인 자신이 있어 보통 일반의 인식 즉, 상대적 인식

이라고 하는데 이때 소나무를 대할때 소나무 라는 관념도 떠오르지 않고

더욱 소나무를 바라본 자신도 없어지게 된다.다시 말하면 주관도 없고

객관도 없이 일체가 空이요 무아無我 의 경지에 들게 된다.

 

이 경우를 소나무와 자신이 한 몸이 되었다고 선 에서는 표현한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 인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 세계나 자연으로서의

소나무의 모양새 ,빛깔이 눈에 비치지 않는다는것이 아니고

바람에 스치는 소나무의 묘음이 들리지 않는다는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도 들리지만 그것을 사유 판단하는 마음의 작용만이 없을 뿐이다.

바꿔말하면 외계 자극에 대하여 정신은 절대 무저항 이므로 정신적으로

보는한 평등계가 전개된다는 뜻이다.이것이 사상의 절대적 의식이며 ,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지만  누구나 체험하는 일이다.

 

모델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앞의 대상이 발가벗은 묘령의 여성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세필로 화조의 깃털을 그리는 동양 화가도

자신이 그림을 그린다는 인식마저 갖지 아니할 때 이다.

 

이들이 만일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 이때가 곧

절대적 인식이라고 볼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보통 인식과는 전혀 달라서

초월한 절대적 존재 이므로 우리에게 가장 혜택이 있는 인식중에서도

사상의 진상을 가장 잘 구명 한 인식이다.

 

그래서 이를 절대적 인식과 구별하기는 하지만 , 사실은 상대적 인식임을 알아야 한다.

<반야심경> 에서 이를 "색즉시공 공즉시색 ' 이라고 표현했다 .

공안에서  ' 서서히 걸어가 흐르는 물줄기의 소리를 끊는다 ' 는 말이 있다.

어떻게 서서히 걸어가 흐르는 물줄기의 소리를 끊는다는 말인가?  

 

참으로 기막히고 얼토당토 않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선에서는

이것이 가능 하다. 어떻개 가능한가? 그것은 간단하다 .흐르는 물소리를 절대적으로

인식하면 우선 자신을 망각하게 되어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게된다.

 

선은 자기를 망각하는 힘을 기르는 훈련이며 ,사물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훈련이다,

절대적 인식에 있어서는 인식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소나무 이고,

소나무가 자신으로 자신과 소나무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이 관계를 가르켜 <금강경>에서는 상인相人이라 표현했다.

이처럼 만유는 절대적 인식앞에서는 절대 일여 一如 로 상대성을 완전히

잃고 있으므로 절대적 인식을 사유 판단함을 허락치 않는다.

 

이것은 불가사의 하고 불가설한 경계로  사람의 이지관념 (理知觀念)

 이 경애에 있는 것이 절대적 인식이다. 이 인식만은  어떠한 언설로도

표현할길이 없는 것이다 . 왜냐하면 절대적 인식을 사유하고 논의 하는 일은

그 자체가 절대의 상대화 이고 평등의 차별이어서 진실한 의미의

절대적 인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절대적 인식에서는 사유하고 논의 하는 주체인 주관을 보지않는다.주관이 없이

홀로 그 대상인 객관만이 있을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 주객합일의 입장에 있는것이

절대적 인식이다. 과학이 보편적 인식을  주안主眼 으로 하는것은 물론이지만

사상의 차별적인 면만을 인식하므로 상대적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자체는 차별에 사로잡혀 상대에 국한된 일면적 인식으로 협애 하고

융통성이 적어 갈등과 모순을 일으키기 싶다 이것도 역시 지식이 있기 때문에

입는 피해의 하나이다 .이 피해를 피하기 위해 사상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즉 열반에서 등한시하는 평등성의 인식을 필요로 한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사람과 사물이 한 몸이 될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선을 하면 사물의 전모를 완전히 파악하는 경지에 이를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은 절대적 인식을 최고의 목적 , 최종의 현상으로 삼는다 .

절대적 인식을 도외시 하고는  그의 본질적 사명을 이룰수 없는 때문이다 ,

 

선에서 때때로 진리의체험또는 해탈  , 견성이라고 하는 의미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해탈을 얻음에는 8만4천의 법문이 있는데

이는 일상생활을 말한다 . 다시 말하여 해탈의 길이 따로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리 문제에 있어서 일상생활 그자체를 떠난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도 아니요 ,

해탈도 아니다 . 걸어다니거나 머물러 있거나 누워있거나 앉아 있는것 ,

이 모든것이 다 진리 즉 각覺의 당체當體 이다 .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끈기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게 마련인데

 

끈기가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끈기가 없으면 의혹을 끊고

깨달음을 얻을수 없기때문에 좌선 이라는 수단을 써서 절대적

인식 覺 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피상적인 명예와  부와 권력에 매달려 있는 현실에 인간의 본체는

무엇이며 ,왜 이세상에 왔는가를 올바르게 알아 행하기 위해 선禪 은

더욱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

 

 

 

     원공법계제중생자타일시성불도 ()...

     

 <불교명저)(서음미디어 발행) 제2권 

 "선이란무엇인가 "에서 발췌

 

 

욕구는 장작불과 같습니다 / 법륜스님

사람들은 욕구가 만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욕구가 만족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이 행복과 불행은
모두 욕구로부터 파생된 것이죠.

먹고 싶은 욕구, 입고 싶은 욕구,
가지고 싶은 욕구, 이기고 싶은 욕구
욕구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욕구는 마치 장작불과 같습니다.
장작불은 타면서
더 많은 장작을 필요로 합니다.
장작을 집어넣으면 불이 더 커지고
불이 커지면 장작을 더 필요로 하죠.

우리 욕구도 만족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점점 커집니다.
그것이 욕구의 성질입니다.

그래서 욕구를 채워서 얻은 행복은
금세 더 큰 욕구가 생겨서 사라집니다.

그러니 진정한 행복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