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철학(哲學)은 무엇인가?/청화큰스님

2014. 5. 14. 08: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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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철학(哲學)은 무엇인가?

 

 

청화 선사 (삼년결사 대중들에게)

 

 

달마(達磨)스님의 관심론(觀心論)에 보면, 지금은 돈황(敦煌) 문서들이 발견된 뒤로 달마스님이 쓰신  관심론이 아니라 신수(神秀)대사가 썼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관심론에 보면 약능요심수도(若能了心修道)면 즉생공이이성(則省功而易成)이요, 깨달을 요(了)자, 마음 심(心)자, 마음을 깨닫고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닦으면 생공이이성이요. 생략할 생(省)자, 공들일 공(功)자, 공을 별로 들이지 않고 이성이요. 쉴 이(易)자, 이룰 성(成)자, 쉽게 이룰 수가 있는 것이고, 그 반대로 약불요심수도(若不了心修道)면 내비공이무익(乃費功而無益)이라. 그 반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닦으면 헛수고만 할 뿐 이익이 없느니라. 그런 법문이 달마스님 관심론에 있습니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닦으면  증사작반(烝砂作飯)이라.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꼭 요심수도하는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하여야 이제 공부도 더 쉽고 또 성취도 빠른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간에 먼저 이론적인 체계가 서야합니다. 그 「아인슈타인이 자기 제자인 「하이젠베르그」에게 한 말도 실험을 하려고 하면 정확한 이론(理論)이 먼저 앞서야 실험이 제대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참선(參禪) 공부, 우리 불도(佛道)를 찾는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팔정도(八正道) 가운데도 정견(正見)이 앞선단 말입니다. 정견이 먼저 앞서지 않으면 바른 공부가 못되는 것입니다. 정견만 명확히 확립이 된다고 생각할 때는 자동적으로 말도 여법(如法)히 해지는 것이고 생각도 바르게 해지는 것입니다. 몸으로 하는 행동 생활도 여법하게 바르게 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불법(佛法)의 대요(大要)라는 것은 공부해 보면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내용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정견 자리에 가서 우리 공부의 갈림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불교(根本佛敎) 쪽으로 정견을 생각할 때는, 정견을 그냥 사제법문(四諦法門)으로나 말하고 인생고(人生苦)의 원인과 또는 고의 소멸과 고를 해탈하는 방법이 팔정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근본불교 소승적인 팔정도의 해석이지만 대승불법(大乘佛法)으로 생각할 때는 차원이 그렇지가 않습니다. 정견 자리에서 본래시불(本來是佛) 자리, 본래 바로 부처의 자리를 우리가 느껴야 합니다. 본래시불 자리, 본래 바로 부처라! 닦은 뒤에 부처가 아니라, 본래 바로 부처라! 이렇게 느껴버려야 이른바 참다운 대승적인 정견이 됩니다.


따라서 본래 부처니까. 무한의 불성공덕(佛性功德)을 우리가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한테 대한 자기 공덕이, 가사 보조(普照) 어록대로 말하면 과불공덕(果佛功德)이 분호불수(分毫不殊)라. 과불공덕이 분호불류(分毫不謬)란 말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께서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성취하신 불과(佛果) 그런 공덕이 우리 중생과 더불어서 분호불수라, 조금도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하고 무량한 신통(神通)을 갖춘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도 호리불차(毫釐不差)라, 호리도 차이가 없이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과불공덕이 분호불수라. 불과를 성취한 그런 공덕이 만중생(萬衆生)과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버려야 응당 정신(正信)이라. 신심(信心)도 참다운 믿음이란 말입니다. <방성신야(方成信也)> 따라서 참다운 믿음도 바른 견해, 정견이 있어야 참다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삼년결사三年結社를 하신 스님들이 계신다기에 감동한 나머지 말씀을 좀 드리고자 들어 왔습니다. 저도 삼년결사를 몇 번이나 해 보았습니다. 태안사(泰安寺)에 들어와서 정식으로 대중과 더불어서 한 적도 있고, 그 전에는 혼자 묵언정진(黙言精進)을 여러 해를 했습니다.

  

더욱더 가깝고 친밀한 감동을 느낍니다. 참선(參禪)할 때는 바른 믿음이 앞서야 하고, 또 용맹심(勇猛心)과 참구(參究)하는 마음이 곁들어야 하는 것인데, 바른 믿음이 전제가 되기 위해서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바른 견해 바른 가치관 바른 철학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철학(哲學)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한 본래시불 자리,  당래(當來)부처가 되는 당래성불(當來成佛)이 아니라, 본래 바로 부처가 되어 있다는 자리, 그 자리를 분명히 느껴버려야 이른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됩니다. 그 자리를 느끼지 못하면 돈오(頓悟)도 못되고 돈수(頓修)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히 삼년동안이나 공부하시는 스님들은 그때그때 선지식(善知識)들  한데서 법문(法門)을 많이 들으시겠지만 그래도 자기 공부하는 길에 관해서 확연히 견해와 신(信)이 차있어야 합니다. <신해(信解)> 그래서 선행적으로 본래시불 자리를 느낀 다음에는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그 다음에는 우리 범부 중생이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자기 숙세 누겁(累劫)의 숙업(宿業) 때문에 습기(習氣)가 우리한테 끼어 있으니까 습기를 녹여서 성불(成佛)까지 가는 길목<修道의 位次>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길목을 잘 모르면 공부하는 경계가 많기 때문에 더러는 자기 몸뚱아리가 텅텅 비어 오기도 하고 , 더러는 공중으로 떠올라가는 듯한 경쾌한 마음도 느끼는 것이고, 가지 자지 경계가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 같은 모양이 나오기도 하고, 또는 빛이 훤히 이렇게 밝아서 나오기도 하고, 방안도 훤하고, 벽을 뚫고서 저편도 보인단 말입니다. 그런 때가 있는 것인데 그런 때를 당할 때 기분이 나쁠 때는 모르거니와 쾌적하고 그렇게 상쾌하고 자기 몸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그런 때는 아! 견성오도(見性悟道)가 이런 자리가  아닌가?  이렇게 우리가 혼동(混同)을 느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공부하는 경계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이른바 암중모색(暗中摸索)이 안 되고 동시에 증상만(增上慢)이라,  못 통하고 통했다하고, 또 못 증(證)하고 증했다하는 그런 증상만을 안 내는 것입니다.


증상만을 한번 내버리면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수도(修道)의 과정, 수도의 위차가 그것이 비록 한번 깨달으면 다 된다. 이렇게 하더라도 깨닫기 자체도, 앞서 말씀과 같이 깨닫는 과정에 경계가 많아서 참다운 깨달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점검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설사 초견성(初見性)을 했다 하더라도 성불까지 가는 길은 또 요원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본래시불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돈오(頓悟)이지만 우리가 부처까지 간다고 생각할 때는 습기를 녹이는 과정을 생각할 때는 또 역시 점수(漸修)란 말도 옳단 말입니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돈오돈수(頓悟頓修)나 돈오점수(頓悟漸修)가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부처와 더불어서 본래로 성불되어 있다. 이런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돈오인데 그렇다고 그 자리를 분명히 좀 느끼고 안다고 해서 그것이 끝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른바 해오(解悟)라, 풀 해(解)자, 깨달을 오(悟)자.  해오로 해서는 이치로는 안다 하더라도, 자기가 정작 자기 자성(自性)을 증명 못한 경우에는 불공덕(佛功德)은 안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 명호(名號) 가운데,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명행족(明行足)이란 것이 있습니다. 밝을 명(明)자, 행할 행(行)자, 족할 족(足)자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밝음’ 이것은 바로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그런 지혜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지혜를 다 갖추고 있다는 것 이것이 명행족입니다. 따라서 참말로 깨달으면 그때는 그런 모든 지혜를 완벽하게 갖추어야 합니다.


마음만 좀 개운하고 무엇에 막힘이 없고 그 정도가 참다운 깨달음이 아니라 명행족이 되어야 합니다.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불하는 길이 본래의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본래 부처가 되어 있지만 습기를 녹여서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요원(遙遠)한 길입니다.


그러기에 십지명(十地名)에서 보살초지(菩薩初地), 이지(二地), 삼지(三地), 사지(四地) 그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 도리(道理)를 잘 모른 사람들은 그것은 교(敎)가 아닌가? 선법(禪法)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 없지 않는가? 선(禪)과 교(敎)가 원래 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앞서 허두에서 말씀드린 요심수도,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이 본래 부처인 것을 깨닫고 닦으면 생공이이성(省功而易成)이라, 본래 공(功)을 많이 안 드리고도 성불(成佛)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와 나와 나누어 생각하고, 마음 밖에서 도(道)를 구하고 진리(眞理)를 구하고 부처를 구한다고 생각하면 공부가 굉장히 더딘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요심수도(不了心修道)면 증사(烝砂)가 작반(作飯)이라. 다만 자기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암중모색(暗中摸索)으로 애쓰고 닦는 것은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밥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응당 본래시불 자리를 분명히 느끼고, 느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를 여의지 않고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선 공부나 일반 공부나 한말로 말하면, 육조단경(六祖壇經)의 맨 나중에가 있습니다만 무슨 경(經)이나 부촉품(咐囑品)이 경의 결론(結論)인데, 부촉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대들이 만약 여래(如來)의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하고자 하면 마땅히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증(證)할 지니라. 4조(四祖) 도신(道信)대사의 법문이나, 또는 5조 홍인(弘忍)대사의 법문이나, 6조혜능(六祖慧能)대사의 법문이나, 그와 같이 일관되어 왔던 것입니다. 일상일행(一相一行)이란 말입니다.


일상삼매(一相三昧)는 무엇인가 하면 천지우주(天地宇宙) 모두를 진여불성(眞如佛性)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에는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불성 일원론(一元論)입니다. 물(物)과 신(神)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부처와 나와 따로 둘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천지 우주를 하나의 불성(佛性)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보고 일상삼매라고 하고, 그렇게 분명히 느끼는 것보고 해오(解悟)라고 하는 것입니다. 풀 해(解)자, 해오입니다. 그래가지고서 그런 자리 일체 존재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다. 그런 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염념상속(念念相續)으로 공부를 이어간단 말입니다. 그래야 참다운 참구(參究)가 됩니다.

 

                                                           

 

 

인생은
긴 여행과도 같습니다,
생명이 탄생하여 죽음으로 끝이 나는
약 7-80년의 유한한 여행,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나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얼마동안 머무르다가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한때의 여인숙입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육체의 장막은
나의 영원한 몸이 아닙니다.
얼마 후에는 벗어 놓아야 할
일시의 육의 옷이요
죽으면 썩어버리는
물질의 그릇에 볼과 합니다,
우리는 지상의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 앞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에서 도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순례의 길에 어떤 이는
고독한 여행을 하고,
어떤 이는 행복한 여행을 하고,
어떤 이는 괴로운 여행을 하는가하면
어떤 이는 즐거운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짐승은 사람의 길을 갈 수 없고
사람은 짐승의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인간의 양심과 체면과
도리를 저버리고 짐승처럼
추잡하고 잔악한 행동을 할 때
그는 짐승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춘하추동의 네 계절의 순서는
절대로 착오가 없고 거짓이 없습니다.
봄 다음에 갑자기 겨울이오고
겨울다음에 갑자기 여름이 오는 일은 없습니다.

우주의 대 법칙,
대자연의 질서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고 부조리가 없습니다.
옷이 나의 몸에 맞듯이
인[仁]이 나의 몸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인은 덕 중에 덕이요,
남을 사랑하는 것이며,
참되고 거짓이 없는 것이요
진실무망 한 것이며 사리사욕을 버리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며
꾸밈이 없이 소박하며 굳센 것입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설자리를 알고,
나의 나아갈 길을 알고,
나의 분수를 알며,
나의 실력을 알고,
나의 형편과 처지를 알고,
나의책임과 본분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안병욱 명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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