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불(念佛) / 청화스님

2014. 5. 28. 17:5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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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念佛) / 청화스님


이제 염불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아래 염불에 대한 개요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염불(念佛) :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念)함을 의미함.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요, 둘이 아닌 불이불(不二佛)이기 때문에
언제나 부처를 여의지 않는 불리불(不離佛)이다.

염불이라는 것이
부처를 우리 마음 밖에다 두고 할 때는 방편염불에 그치고 맙니다.
부처님은 저 멀리 극락세계에 계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방편이 되겠지요.
기독교도 역시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 안 계시는 곳이 없이 다 계시니까
내 마음 속에나 공기 속에나 다 계신다고 봐야지요.
따라서 불교도 마찬가지로 내 마음 이른바

'부처님은 우주의 생명으로 계신다, 우주에 두루 계신다'
이렇게 생각해야 참다운 부처님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순선법문 맨 처음에도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부처란 결국 우주를 몸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 어디에나 안 들어 있는 곳이 없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 그대로
부처님의 무량공덕 32상 80수형호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4조 도신(道信)스님도

“부처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부처고,
분별시비하면 중생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본래부처인지라 부처를 생각하면 결국 부처지요.
그것이 우리가 부처인지를 모르고 사니까 그런 것이지요. 

염불이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닦은 뒤에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본래 부처인데 부처인 줄을 모를 뿐입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말을 듣고서도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완전히 믿지를 못하니까 항시 의심합니다.
항시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아무런 힘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순식간에 우리한테서도 위대한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하게 믿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신앙이란 의심 없이 온전히 믿는 것,
믿어야 부처님 공덕(功德)이 발휘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마음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우리 마음이 본래는 청정심입니다.
우리가 설사 나쁜 생각을 하고 남을 미워도 하지만
우리 본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나쁜 생각도 많이 하면
우리 마음이 오염되어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근본성품에서 볼 때는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오염이 된다거나 크고 작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하더라도
우리마음 자체, 성품으로 볼 때는
조금도 오염이 안 되는 청정심인 것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니,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염불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을 저 밖에다 두고,
부르고 외우면 복을 주고 도움도 준다는 식은 방편염불입니다.
이런 것은 참선이 못 됩니다.

오로지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요, 우주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해야 진정한 염불선(念佛禪)이나 참선이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 주여!”를 외친다 해도 역시 하나님은 저 하늘 위에 계신다,
이렇게 소박하게 믿어버리면
참선은커녕 참다운 신앙도 못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내 마음 속에나 우주 어디에나 두루 계신다,
이렇게 믿으면 그 때는 “오! 주여!” 를 해도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본성품 본래 본바탕의 체(體)를 여의지 않으면 참선이 되는 것이고
근본성품, 근본바탕을 떠나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가 부처와 다르지 않는 불이불(不異佛)이라,
우리 중생들이 잘못 생각해서 부처는 부처고, 나는 나다,
이렇게 불신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부처로 환원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화두나 다른 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사, 티벳에서 하는 ‘옴마니반메훔’도
실제의 주문 뜻을 그대로 풀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영생불멸하는 진리의 보배 꽃’이라는 뜻입니다.
그네들은 다른 것 없이 ‘옴마니반메훔’만 합니다.
그것도 ‘옴마니반메훔’의 ‘옴’ 자체가 영생불멸한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심으로 하다보면
본래 성품인 부처님께로 가까워지겠지요

 

 

   1. 염불(念佛)의 의의(意義)

 

念者人人現前一念也  佛者人人本覺之眞性也  現前一念覺悟本覺眞性
염자인인현전일념야  불자인인본각지진성야  현전일념각오본각진성

卽是可謂上根人念佛也  是與佛不二 與佛不離之行也
즉시가위상근인염불야  시여불불이 여불불리지행야     
                                                                <지도론(智度論)>

공부가 익어져서 한 고비를 넘어서면
염불이고 화두고 다 초월해버립니다.
그러나 화두나 염불이나 묵조나 모두가 다
한 고비를 넘어서기 전에 습인(習忍)을 익혀서
마음이 딱 자성(自性) 곧, 불성(佛性) 한 자리에 머물기 전에 하는 것이지
익은 사람들한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부질없는 시비논쟁은 말아야 합니다.

염불이라 할 때의 염(念)이란,
사람 사람마다 마음에 나타나는 생각을 염이라 하고
불(佛)은 사람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깨달은 근본 성품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 아는 소식 아닙니까?
염불 공부란 우리 눈앞에 좋다 궂다 시비 분별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우리 본각(本覺)의 참 성품임을 각오(覺悟)하는 것이요.
이것이 곧 참다운 염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재확인하는 공부입니다.
생각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부처도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본각진성(本覺眞性)인데
생각생각에 부처를 여의지 않고서 염(念)하는 것이
참다운 상근인(上根人)의 염불인 것입니다.

이러한 염불은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떠날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업장 때문에 자꾸만 떠나버리니까
우리가 떠나지 않기 위해서,
내가 부처임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다 부처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도 부처요, 좋아하는 사람도 부처라고 깨달으면
미워도 미운 사람에 집착하지 않고
좋아도 좋아하는 사람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한테나 남한테나
이런 도리를 역설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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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과 빛의 조화 
 

네 명의 아내를 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첫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나깨나
늘 곁에 두고 살아갑니다.



둘째는 아주 힘겹게 얻은 아내입니다.
사람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면서 쟁취한 아내이니 만큼
사랑 또한 극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둘째는 든든하기 그지없는 성과도 같습니다.

 

셋째와 그는 특히 마음이 잘 맞아 늘 같이 어울려 다니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넷째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늘 하녀 취급을 받았으며,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했지만 싫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의 뜻에 순종하기만 합니다.



어느 때 그가 머나먼 나라로 떠나게 되어 첫째에게 같이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첫째는 냉정히 거절합니다.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둘째를 가자고 했지만 둘째 역시 거절합니다.
첫째도 안 따라가는데 자기가 왜 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셋째에게 같이 가자고 합니다.
셋째는 말합니다.
"성문 밖까지 배웅해줄 수는 있지만 같이 갈 수 없습니다." 라고



그는 넷째에게 같이 가자고 합니다.
넷째는 말합니다.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넷째 부인만을 데리고 머나먼 나라로 떠나갑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의 "머나먼 나라"는 죽음의 길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살면서 아내처럼 버릴 수 없는 네 가지"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내는 육체를 비유합니다.
육체가 곧 나라고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지만 죽게 되면 우리는 이 육신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면서 얻은 둘째 아내는 재물을 의미합니다.
든든하기가 성과 같았던 재물도 우리와 함께 가지 못합니다.



셋째 아내는 일가 친척, 친구들입니다.
마음이 맞아 늘 같이 어울려 다니던 이들도 문 밖까지는 따라와 주지만
끝까지 함께 가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를 잊어버릴 것이니까요.




넷째 아내는 바로 마음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별 관심도 보여주지 않고 궂은 일만 도맡아 하게 했지만
죽을 때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마음뿐입니다.



어두운 땅속 밑이든 환한 신작로든 지옥의 끓는 불 속이든
마음이 앞장서서 나를 데리고 갈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마음이 자주 다니던 길이
음습하고 추잡한 악행의 자갈길이었으면
늘 다니던 그 자갈길로 나를 데리고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덕을 쌓으며 걸어 다니던 밝고 환한 길이면
늘 다니던 그 환한 길로 나를 데리고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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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어떤 마음으로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가
죽고 난 뒤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봄날을 위한 연주곡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