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완전하다, 바로 지금 행복을 누려라 / 법상스님

2014. 6. 4. 08: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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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6월의 절경 / 사진,남광진

삶은 완전하다, 바로 지금 행복을 누려라  /  법상스님

 

삶은 완전하다, 바로 지금 행복을 누려라 / 법상스님

 

불성(佛性), 신성(神性) 이라는 말은 곧 나와 부처, 나와 '하나'란 뜻이며,

더나아가 우리 모두가 이요 부처로써 '하나'란 뜻이다.

一切 모든 存在'하나'로써 부처요 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것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중생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完全하고 完璧한 부처로써, 으로써 完全'하나'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人間自然이 둘이 아니라는, 人間이 둘이 아니라는,

너와 내가 바로 신이고 부처고 자연으로써의 '하나'라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

思想이야말로 인류의 오랜 성자, 현자, 선각자들과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이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부처로써 신으로써 하나이기에

내가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부처와 신에게 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도울 때 사실은 나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상대를 도우면서도 도왔다는 을 낼 필요가 없는 이유가

상대방과 내가 둘이 아닌 하나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으면서 내가 나에게 밥을 보시했다고 하지 않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한 것은 사실은 내가 나에게 한 보시와 다르지 않다.

 

없이 보시하라, 無住相 보시하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는,

理由가 바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기 때문이다.

억지로 無住相 보시를 해야만 한다는 윤리적인 지침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自覺이 있다면 당연히 아무런 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佛性神性이란 말은 부처의 性稟, 性稟 自體라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이나 은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꽉 차 있고,

완전하며, 온전한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佛性神性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라는 存在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둘이 아닌 하나기 때문에 그렇기에 사실은 보시해도 보시한 것이 아니다.

너도 완전하고 나도 완전하며, 너도 풍요롭고 나도 풍요로운데

무엇을 주고 받을 것이 있는가!

주고 받았다고 한들 그것은 그저 單純히 에너지의 移動일 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거나, 주어서 대단하거나 주지 못해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보시하는 그 行爲에 아무런 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가르침은 이렇게 하라는 윤리 규정이거나, 명령이 아니라

그저 眞理가 부처가 이 그러하기 때문에 나온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佛性이 있다, 神性이 있다는 말은 곧 完全性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부처가 신이 불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하고 충만하다.

 

그렇기에 佛性, 神性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 世上 모든 存在

自體로써 더없이 完璧하고 完全存在이다.

世上 모든 存在이고 붓다로써 완전하고 완벽하다.

이것은 다른 말로, 世上 自體가 이미 完全하고 완벽하다는 意味.

이 세상 모든 것의 텅~빈 본바탕, 根源은 이러한 完全性根據하고 있다.

그리고 그 完全性을 이루고 있는 힘이 바로 慈悲와 사랑의 에너지다.

, 世上 모든 存在完全한 사랑의 에너지,

 

둘이 아닌 '하나'完全慈悲, 同體大悲 自體인 것이다.

이 말은 抽想的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란 희망의 약속이 아니다.

지금 있는 이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의 생생한 現實 狀況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어떻게 내가 완전한 부처란 말인가?

내가 어찌 완전한 이란 말인가? 그건 너무 엄청난 이야기이며,

또한 너무 불경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眞實은 그렇다.

眞實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眞實로 말씀해 주셨고,

  人類의 수많은 聖人들도 똑같은 말을 해 왔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이 세상 모두가 부처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제해야 할 중생이 따로 없다고 하셨다.

 

그러한 眞實된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自身이 부처고 임을 왜 믿지 못할까?

왜일까?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내 앞에 펼쳐진 現實에 대해 내 生覺이 개입되어  

스스로를 부처가 아니고 이 아니라고 判斷하고 解釋하기 때문이다.

生覺判斷分別하는 마음의 作用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無分別中立的

現實에 대해 끊임없이 是非 分別 比較 判斷하고 있기 때문이다.

現實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生覺하는 나의 마음이 있을 뿐이다.

 

現實本來完全慈悲佛性이고, 完全한 사랑의 神性 自體일 뿐이다.

그런데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의 마음을 괴롭고 두렵게 만드는 악마, 사탄, 마왕 파순이가

우리를 꼬셔서 地獄으로 빠뜨린다고? 그렇지 않다. 악마도 사탄도 마왕도 없다.

사랑밖에 없는 完全宇宙법계에서 그 어느 곳에 마왕이나 악마, 사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과 사탄이 싸운다는 것은 순전한 象徵일 뿐이고, 부처와 마왕 파순이의 싸움 또한

內面에서 이루어지는 自己 自身과의 싸움을 象徵한 것일 뿐이다.

 

사랑의 에너지 自體世上創造根源이라면 어찌 사탄이나 악마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순전한 人間想像이거나, 象徵일 뿐이다.

내 바깥에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악마나 사탄은 없다. 그것은 완전한 虛構일 뿐이다.

 

악마 사탄 마왕 그것은 다만 우리 內面生覺일 뿐이며, 我相, 에고라는 虛想象徵하는

것일 뿐이다.

, 內面煩惱, 欲望, 執着, , 어리석음, 에고,我相, 妄想일 뿐인 것이다.

악마는 바로 我相이며 에고다. 사탄은 바로 우리 내면에 있는 어리석은 生覺妄想判斷이다.

마왕은 바로 貪欲煩惱, 執着이다.

, 내 바깥에 있는 어떤 存在, 狀況이 우리 마음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을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외부적인 힘인 악마 사탄 마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내 生覺으로 스스로 만든 幻想인 것이다.

나의 生覺判斷解釋이 그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왔을 뿐이다.

 

남부러워하는 한 좋은 직장의 중역 간부가 찾아와 말한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조금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자니 진급을

못 할 것 같고, 진급을 하자니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다르게 질문을 드렸다.

지금 이 瞬間 幸福하시냐고. 지금 自身의 삶이 대체적으로 幸福한가 라고.

過去生覺했던 幸福을 지금 이루었는가 라고 여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그러고 보니 자신은 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처음에 오르고자 했던 자리에 지금은 이미 와 있고, 벌고자 했던 정도의 경제력을 지금 누리고 있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 하며 행복해 하고, 자식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적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행복의 삶이 어느 샌가 벌써

實現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다. 왜 몰랐을까?

여전히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진급도 더 해야 하고,

자식들도 더 잘 뒷바라지 해야 한다는 生覺 때문이다.

幸福한 삶이 實現되어 있음에도 不足하고 더 必要하고 滿足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瞬間에서 조차 여전히 이루어진 그 幸福

누리기는 커녕 더 높은, 더 많은, 더 큰 목적을 향해 내달리고자 하는 欲心欲望 執着

때문에 이미 찾아 온 幸福을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곤 하는 것이다.

 

幸福은 지금 이 瞬間을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幸福 추구는 죽을 때 까지 끝없이 계속되지만 幸福

누리고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만 할 수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걷어 차면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누리는 것을 더 많이 누릴 때 世上은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이 누리도록 해 준다.

반대로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만 할 때 世上은 우리에게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준다.

 

眞實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할 것인가?

행복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추구할 것인가?

 

삶이란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누리고 느끼며 만끽해야 할 무엇이다.

지금 이 瞬間에 주어진 完全한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삶의 完全性이 드러난다.

삶은 본래부터 완벽했고, 완전했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추구하고 빌고 욕망할 때 存在 本然完全性은 사라지고 결핍과 부족과 실패가

창조되고 만다.

사실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生覺했을 뿐이다.

사실은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필요하다고 欲望했을 뿐이다.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다고 判斷했을 뿐이다.

 

幸福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행복을 누리고 느낄 때 바로 그 瞬間幸福完璧狀況創造 된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幻想일 뿐이다.

지금 여기 이대로 행복하다. 행복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다.

행복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조건이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보라.

 

행복해지기 위해서 부처는 어떤 條件도 필요치 않고 은 어떤 것도 원치 않는다.

만약 무언가를 얻어야지만 어떤 조건이 갖춰져야지만 그 때 가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佛性神性, 宇宙法界, 그리고 우리 自身完全性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부처도, 신도, 우주법계도 언제나 完全하다.

우주법계의 모든 존재 또한 完全하고 完璧하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완전하고 완벽하다면 굳이 더 많은 것들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고,

또한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는 이유가 없으며, 실패로 인한 괴로움도 없고, 실패 자체도 없다.

 

성공으로 인한 기쁨도 없고 성공 자체도 없다.

 

무언가를 더 필요로 하는 理由는 단지 自身不完全하다고 生覺하기 때문이고,

돈을 더 벌어야 하는 理由는 아직은 덜 충분하다고 生覺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生覺, 自身에 대해서 不完全하고 不足하며 어리석다고 生覺하고 判斷하는

바로 그런 生覺이 우리에게 모든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生覺이 그 문제에 대해서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렇게 문제라고 生覺하면 그러한 문제의 現實創造된다.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生覺한 대로 現實創造된다는 화엄경의 준엄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畵家 그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고 生覺이다.

그리고 나의 마음 生覺이 바로 부처요 이다.

또한 내 마음이 바로 당신 마음이고, 宇宙이며, 存在 自體이다.

 

마음으로 그리면 그린대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土臺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土臺가 되는 生覺들을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실패할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나는 근기 낮은 수행자다라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완전하다’ ‘나는 풍요롭다’ ‘나는 행복 그 자체다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실패라는 것은 없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고 성공적이다라는 데 둘 것인가.

 

前者,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음의 토대가 되는 生覺에서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성공해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現實을 그려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곧 反對結果를 현실로 가져온다.

 

왜냐하면 더 필요하다는 나의 生覺本質에는 아직은 부족하다는 生覺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生覺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운 生覺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 生覺現實創造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그 두려워 하고 부족해 하는 토대의 生覺을 우리 마음이 現實로 그려내는 것이다.

生覺과 마음으로 부족하고 가난하고 불행하고 어리석은 現實 世上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後者의 토대가 되는 生覺은 어떤가?

완전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하고 삶의 모든 순간이 그대로 성공적이며

나와 너가 모두 부처요 신이라면 어떨까?

 

完全存在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많이 벌 것도, 바랄 것도, 욕망할 것도 없다.

完全存在에게는 언제나 充滿幸福滿足과 풍요로움과 平和가 넘쳐 흐를 뿐이다.

完全存在는 넘쳐 흐르는 그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 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운 生覺도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운 生覺도 없으며,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幻想도 없다. 그저 그냥 每 瞬間 瞬間 完全性을 누릴 뿐이다.

 

그러한 토대의 生覺 위에서는 언제나 完全性創造된다.

아니 創造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完全했으며 完璧했다는 바로 그 完全性이 드러나는 것이고,

바로 그 完全性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存在 本然故鄕完全性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歸依, 歸鄕!

 

이 표현은 상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뜬구름 잡는 말이거나, 비현실적이거나 이론적이기만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이 瞬間에서 우리 自身完璧하게 變化시키는 通路에 대한

 直接的部分連結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완전하다고 외쳐라. 지금 이 자리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라.

自身이 완전하고 무한하게 풍요로운 存在라면 내 돈이 아까워서 상대방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한한 풍요로움이란 宇宙 全切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풍요다.

내가 아까워하고, 축적하고, 적다고 生覺하면 바로 그런 궁핍과 결핍의 結果가 만들어질 뿐이다.

넉넉하고 풍요롭다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모든 이를 아무 두려움 없이 도와라.

그런 마음에 宇宙 根源의 에너지인 자비와 사랑 풍요의 完全性이 깃들게 될 것이다.

두려운 生覺 없이 풍요라는 토대의 生覺 위에서 모든 이들을 돕게 된다면

도우면 도울수록 더 많은 完全性의 풍요가 당신에게 찾아 올 것이다.

 

完全하게 幸福하다면 무언가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未來에 오게 될 幸福을 꿈꿀 필요도 없다. 지금 이 瞬間完全無缺幸福이라고 외쳐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것이 바로 完全幸福임을 알아차려라.

넘치는 幸福 自體인 사람은 언제나 世上幸福을 흩뿌릴 수밖에 없다.

나처럼 타인도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복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내 삶에 失敗란 없다. 스스로 失敗라고 生覺할 뿐 언제나 삶은 完全하며 成功的이다.

실패라고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실 또한 사실은 성공이고,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 또한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성공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내 삶과 결부시키지 말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패가 곧 성공이다.

내 삶은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한 성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라.

현실 상황에 대해 성공 혹은 실패라고 生覺으로 판단하고 해석하지 말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는 실패를 두렵게 生覺하지 않으며, 미래를 두렵게 生覺하지 않음으로써

두렵다는 生覺으로 두려운 現實創造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언제나 성공적인 삶만을 창조해 낸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법상스님 글 / 목탁소리 홈피에서 옮김)

 


6월 / 황금찬


6월은
녹색 분말을 뿌리며
하늘 날개를 타고 왔으니

맑은 아침


뜰 앞에 날아와 앉은
산새 한 마리
낭랑한 목소리
신록에 젖어




허공으로 날개 치듯 뿜어 올리는 분수
풀잎에 맺힌 물방울에서도
6월의 하늘을 본다




신록은
꽃보다 아름다워라
마음에 하늘을 담고
푸름의 파도를 걷는다




창을 열면
6월은 액자 속의 그림이 되어
벽 저만한 위치에
바람 없이 걸려있다



지금은 이 하늘에
6월에 가져온 풍경화를
나는 이만한 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다


 

 

 

 

* 황금찬(호: 后白)
1918 강원도 속초 출생
1956 현대문학에 시 [여운]이 추천되어 등단
1965 시문학상 수상
1973 시집 <오후의 한강> 발간하여 월탄문학상 수상
1980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A Festival In ThForest (숲속의 축제):Ralf Ba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