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알고 바로 보십시오 /청화큰스님

2014. 6. 4. 09: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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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알고 바로 보십시오

청화 큰스님

 

 

  인연 따라 잠시 만나서

  제가 법회를 하면 거사님들이나 젊은 불자님들은 별로 없고 보살님들이 삼분의 이쯤 되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젊은 불자님들을 위해서 한마디 해보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깊고도 오묘해서 한마디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소승과 대승이 있고 또 우리 중생들이 보는 차원의 현교(顯敎)도 있고, 우리 중생이 볼 수 없는 차원의 밀교(密敎)도 있습니다. 이러한 소ㆍ대승의 관계와 현ㆍ밀교의 관계를 바로 알고자 하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젊은 불자님들은 기초교육이 튼튼한 분들이기 때문에 앞으로 정진을 하신다면 잘 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를 마음 심(心)자 마루 종(宗)자를 써서 심종(心宗)이라 합니다. 물질도 있고,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적인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불교는 어째서 마음뿐이라고 하는가? 왜 마음의 종교라고 하는가?


이런 중요한 문제를 우리 젊은 불자님들은 꼭 푸셔야 합니다. 모든 물질과 사물들이 엄연히 현존해 있는데도 왜 심종이라고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견해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른바 반야의 지혜가 나옵니다.


사실상 마음뿐이기 때문에 심종이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사상에서 볼 때, 절대물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성도, 공간성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분명히 내 눈앞에 있고, 물질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공간성이 있으므로 존재가 있고, 또 시간도 있을 터인데 왜 그런가?


그 해답은 모든 존재가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물질이 없습니다.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다는 말은 모두가 조건부라서 인연을 떠나서는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기초를 다 아시는 분들에게는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우선 '자기'라고 하는 존재를 본다 하더라도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입니다. 오온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 아닙니까? 오온이 잠시 동안 가짜로 화합되었단 말입니다. 색은 물질이므로 산소, 수소, 질소 등 각각의 원소들이 결합된 것에 불과하며, 수상행식은 우리들의 관념 활동입니다.


내 몸뚱이를 비롯한 일체 물질과 우리가 느끼고, 의혹하고, 분별 시비하는 정신활동과 같은 것들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있다고 한다면《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말이 거짓말이 되겠지요.


분석한 뒤에 공인 것이 아니라, 내 몸 구성이 바로 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반야심경》의 색이 곧 공이라고 할 때, 색이라는 것, 즉 물질은 분석하면 끝에 가서는 에너지가 되는 것이므로 공 아닌가? 하는 식으로 분석적인 입장에서 생각합니다만,《반야심경》의 '즉공(卽空)'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즉공'은 색 그대로 공, 다시 말해서 물질 그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이대로 공입니다. 다이아몬드도 그대로 공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라 하더라도 결국 탄소의 결정체일 뿐입니다. 아무리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도 그것은 결국 원소의 결합체일 뿐입니다. 더 추궁해 들어가면 각 원소라는 것은 결국 원자핵과 그 주위를 회전하고 있는 전자가 몇 개 있는가, 양성자, 중성자가 몇 개 있는가에 따라서 구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성자, 중성자, 전자 등의 소립자들을 떠나서 다른 것은 없습니다.


저는 법문을 할 때마다 서투른 물리학 풀이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의미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공만 알아버리면 사실 불교는 참답게 대승(大乘)으로 입문되는 것입니다. 공을 모르면 대승이 못 되는 것입니다. 반야지혜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대승이 되고 못 되고 하는 것입니다. 반야지혜가 있어야 대승이 됩니다. 대승이 되어야 참다운 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 부처님 법문입니다. 즉 방편설을 떠난 진실한 법문이 됩니다. 따라서 어렵더라도 과학적으로, 또는 다른 방법으로라도 이것저것 모두를 유추해서 인용하고 원용해 가지고 공도리(空道理)를 알아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토굴생활을 무던히 했습니다. 한번은 백장암 저 위쪽 1000미터 이상 되는 고지에다 조그마한 토굴을 마련해서 한 철을 지냈습니다. 삼동이 임박해서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겨우 들어갔습니다. 방이라야 사방 일곱 자 정도의 협소한 공간인데도 추운 겨울에 따뜻하게 하려면 장작이 하루에 여남은 개비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나무 준비를 충분히 안 했습니다. 그래서 장작을 절약하기 위해 하루에 세 개비씩 뗐습니다. 마음을 못 통하면 방에서 죽을 각오로, 나오지 않으려고 지붕도 천년만년 간다는 참나무 굴피로 이었습니다. 참나무 껍질도 부족해서 촘촘히 올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해 비가 억수로 쏟아져 그 사이로 빗물이 새어들어 와도 우산이 없어서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방바닥에 물이 흥건해져서 할 수 없이 나무토막을 놓고 그 위에 앉아서 빗물을 퍼내면서 지냈습니다. 그때는 또 생식을 했습니다. 지리산 쪽이기 때문에 이곳보다 훨씬 추운 지방인지라 계곡물이 전부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생식을 하므로 따뜻한 물은 필요 없으나, 찬물마저 얼어붙어서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음을 깨서 양푼에다 넣고 불을 때서 녹인 물을 좀 마셨습니다. 생식도 콩가루나 깻가루를 섞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쌀만 불려서 그냥 먹었습니다. 찬물에다 쌀만 불려 그냥 먹었으니 소화가 잘 될 수가 있겠습니까? 설사도 하고 여간한 고통을 겪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무아'라고 하는 소식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미운 사람 밉고, 고운사람 곱단 말입니다. 나한테 좋게 한 사람은 분명히 보고도 싶고, 나한테 짓궂게 군사람은 또 밉단 말입니다. 내가 보란 듯이 무얼 좀 해야 하겠구나, 그런 관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것저것 다 버리고 이 목숨 다 바치겠다는 각오로 들어갔지만 그런 속에서도 나라는 관념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모두가 비었다'는《금강경》도 수백 번 읽었고,《반야심경》이야 중 된 지 12년이 되었을 때이니 몇 천 번은 읽었겠지요. 그래도 제법공(諸法空) 도리가 와 닿지 않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불자님들한테 모두가 공이다, 본래가 공이고, 마음뿐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저 양반들이 지금 알아먹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대는 지극히 총명한 세대입니다. 다행히 물리학적으로도 물질 자체가 종당에 가서는 에너지가 되어 버린다는 것쯤은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사가 다 공이라는 즉공(卽空)을 알 듯 말 듯 할 때입니다.



  아함경과 반야경

  부처님은 성도 후 49년 설법에서《아함경》을 12년 동안 설법하셨습니다. 아함경은 부처님의 근본교리입니다. 아함경의 대요는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유루지(有漏智)의 차원인 우리 중생의 상식 차원에서 설하신 가르침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때까지의 가르침은 이른바 유교(有敎)라 할 수 있습니다. '있다' '없다' 하는 차원을 중심으로 설법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본뜻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보실 때는 그렇게 안 보입니다. '모두가 다 비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다'라고 말씀을 하셔도 중생이 잘 못 알아듣습니다. 2천 5백 년 전 그때는 물리학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12년 동안이나 우리 중생들의 마음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공부를 해보셔서 짐작이 되시겠습니다만, 가령 우리가 업장(業障)이 무거워 욕심이 많고 자기밖에 몰라도 몇 백 일 동안 애쓰고 기도를 모셔 보면 차근차근 자기라는 아상(我相)이 떨어집니다. 차근차근 자기라는 모서리가 무디어집니다. 그래서 공부가 익어지면 그때는 '나'라는 것이 몽땅 빠져 버립니다.


부처님께서는 12년 동안이나 '있다' '없다'고 하는 소식을 말씀하신 후에, 이만큼 되었으면 '공(空) 도리'를 말해도 알아듣겠구나, 생각하셨습니다. 실제로 업장이 가벼워지면 알아듣습니다. 같은 법문도 업장이 무거운 때 듣는 것과 기도나 참선을 해서 업장이 가벼운 때 듣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참선도 한 철 공부할 때, 두 철 공부할 때 다르고, 같은《반야심경》풀이도 똑같은 사람이 하더라도 듣는 수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12년 지난 다음에는 반야경의 공도리를 22년 동안이나 설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부처님 설법이 가장 고구정녕(苦口叮嚀)하게 하신 설법이십니다.


12인연법을 다 배우셨지요? 아무런 자취도 없는 과거 전생의 무명 때문에 우리 의식에는 번뇌가 쌓여 있습니다. 무명이란 사물을 바르게 못 보는 것을 말합니다. 검으면 검다고 보고, 희면 희다고 보아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못 보는 것이 무명입니다. 오직 성자만이 무명이 없습니다. 성자는 사물을 사실 그대로 봅니다. 이른바 실상을 봅니다. 우리 중생은 가상(假相)밖에는 못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의 무명 때문에 행(行)이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도 무명 때문에 음욕의 행이 있었기에,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영(靈), 즉 식(識)도 또한 무명식(無明識)이므로 부모님의 연(緣) 따라서 끌려갑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태(胎) 속에 안착하여 커 나왔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몸뚱이입니다만, 과거 전생에 이와 똑같은 몸뚱이는 없었지 않습니까? 과거 전생에는 없었습니다. 한동안 살다가 교통사고를 만나서 죽든, 또는 80세에 죽든, 어떻게 죽든 결국은 죽는 것인데, 죽은 다음 이런 몸뚱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금생에는 몇 십 년 동안 모양이 이렇게 존재합니다. 그러면 모양, 그것은 실존이겠습니까? 잠시 동안 금생에 존재하는 모양일 뿐 이것도 역시 실존은 아닙니다.


우리의 관점이 중생 차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분별을 합니다. 따라서 잘생겼다거나 못생겼다고 분별을 합니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은 일초의 몇 억 분의 일 동안도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적으로 보더라도 일 초의 몇 억 분의 일도 그 한순간 한순간이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젊은 사람을 10년이나 20년 있다가 만나면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매일매일 만나서는 잘 모릅니다. 분명히 변화하는데도 잘 모른단 말입니다. 일 초 전과 일 초 후의 우리 몸뚱이가 같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자기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일 초 전의 자기와 일 초 후의 자기, 또 일 초의 몇 억 분의 일 전의 자기와 그 후의 자기가 같지 않은데도 우리는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고 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하게 과학적입니다. 어느 한순간도 같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무아입니다.


아무리 무아라고 하지만 우리는 나를 구성하는 산소가 있고 수소가 있으며, 산소나 수소를 구성하는 양자나 전자나 중성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가장 미세한 소립자로 쪼개지고, 소립자도 종당에 가서는 마음의 파동인 염파(念波)만 존재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그런 것이 모두가 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 간에 있는 어떠한 존재 물질도, 태양계나 은하계나 그러한 존재마저도 모두가 다 마음의 파동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파동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마음의 파동은 좋아하고[貪] 싫어하는[瞋] 마음에서, 무명심[癡]에서 일어납니다. 무명이란 우리가 사태를 잘못 보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모두가 다 진여불성인데 일심인 진여일 뿐인데, 오직 비할 바 없이 깨끗한 마음뿐인데 잘못 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아(我)가 생기는 것입니다. 아가 생기면 나한테 좋으면 탐심, 나한테 싫으면 진심(瞋心)이 됩니다. 따라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무명심이 파동을 일으키고, 그 파동이 전자가 되고 양성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전기가 되고 자기(磁氣)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보면 모두가 본래는 마음뿐입니다. 마음이 파동을 일으켜서 전자가 되고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마음 자체는 조금도 변동이 없습니다. 금으로 안경테를 만드나 시곗줄을 만드나 금의 순도는 조금도 변질이 없듯이 진여불성, 일심진여의 자리는 이렇게 변동하고 저렇게 변동해서 사람 같은 모양이 되나 별 같은 모양이 되나, 또는 금 같은 모양이 되나 '일심진여'라는 그 마음의 순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여불성은 생사를 초월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나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모두가 다 어제도 오늘도 진여불성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반야의 도리를 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비어 있습니다.《반야심경》한 편만 가지고도 성불이 되는 것입니다.《반야심경》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꿈같은 견해, 즉 우리는 지금 잠꼬대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로 못 보는 견해를《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몽상을 멀리 떠난다는 의미에서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

  우리 젊은 불자님들이 불교운동 하는 것은 굉장히 갸륵합니다. 갸륵하지만 바른 견해[正見]에 입각해야 합니다. 정견은 팔정도 가운데 가장 처음 나옵니다. 정견이 되어야 바른 사고인 정사유(正思惟)가 되고, 바른 말인 정어(正語)가 되며, 바른 생활인 정업(正業)이 되고, 정명(正命)이 되며,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견이 바로 못 서면 전부가 빗나가고 맙니다. 윗단추 하나 잘못 끼우면 그 밑의 전체가 잘못 끼워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정견은 무엇인가? 반야바라밀이 있어야 정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도 정견입니다. 사성제(四聖諦)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이지요. 고집멸도의 멸(滅)이란 바로 불성입니다. 즉 진여불성만이 사실인 것이고, 그것만이 검은 것을 검게 보고, 흰 것은 희게 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무명심 때문에 그렇게 보지 못합니다.


교행증(敎行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교(敎)만 있고 수행이 없으면 증(證)은 고사하고 그야말로 말법(末法)인 것입니다.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 해석을 여러 가지로 하고 있으나, 그래도 부처님 법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정견에 의한 바른 이해와 바른 가르침,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바른 수행과 바른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법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분명히 그렇게 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시는 곳이고, 부처님과 과거 전생에 인연이 깊은 훌륭한 도인들이 많이 나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부처님같이 신통자재를 갖추어 타심통(他心通)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딱 알맞은 법문을 하신다고 하면 깨달은 도인이 많이 나올 터인데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이 가신 뒤에는 상법 천년이라 했습니다. 즉 증명을 못하고 마음으로 도인이 된 사람들만 조금 있을 뿐 그저 가르침만 있고 수행만 있단 말입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어떠합니까? 오늘날의 불교는 교와 수행과 증의 세 가지 가운데 수행이나 증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행도 증도 거의 없고 교만 있습니다. 교도 제대로 모릅니다. 반야사상도 미처 모르면서 불법을 안다고 합니다. 무아의 증명은 고사하고, 무아의 도리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는 분명히 말법입니다. 말법으로는 생사를 건너지 못합니다. 불교의 마지막 구제는 생사해탈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도 좋습니다. 다 좋지만 불법이 불법인 점, 즉 불법이 불법인 까닭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주의 본질을 본다는 데 있습니다.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모든 중생과 더불어 우리 생명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란 말입니다.


설사 못살아서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기왕 태어났으면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우주만유의 본바탕을 알아 모든 중생과 더불어 깨닫도록, 해탈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법입니다.


우리가 하는 불교운동은 마땅히 정법시대로 돌이켜야 합니다. 정법시대가 안 되면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 단체의 행복도 없습니다. 바른 부모도 못 되고 바른 스승도 못 됩니다. 바른 정치인도 못 됩니다. '나'라는 인간이 무엇인지, 혹은 자기 본래면목이 무엇인가를 모른단 말입니다. 인간은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의미도 모른단 말입니다. 또는 감투는 무엇이고 내 몸뚱이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명명백백하게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합니다. 제법공의 도리, 오온개공의 도리, 즉 모양도 소리도 향기도 맛도 촉감도 모두가 다 공이므로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라고 하는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업장 때문입니다. 무명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못 느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절실하고 허심탄회하게 기도나 명상, 혹은 참선을 한다면 틀림없이 그때는 그야말로 텅텅 비어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비어 옵니다. 내 몸뚱이가 오십 몇 킬로, 육십 몇 킬로라고 하지만, 무게란 본래 있지 않습니다. 저 자기권(磁氣圈)에 올라가면 거의 무게가 없습니다. 따라서 위로 올라갈수록 가벼워집니다. 이 대류권 내에서만 몇 킬로라고 무게를 따지는 것이지 본래 고유한 무게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리학적인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상식 차원에서 말씀하신 유교(有敎)가 있고, 만법이 사실은 다 비었다고 말씀하신 공교(空敎)가 있으며, 만법이 다 비었다고 하여 진실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닌, 즉 허무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중도교(中道敎)가 있습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보아서 허망한 것이지, 우주는 진여불성이 가득합니다. 이와 같이 우주가 진여불성뿐이라고 파악하는 가르침이 중도교(中道敎)입니다. 중교(中敎)란 유교와 공교의 중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주라는 것은 중도라고 하는 실상, 즉 진여불성만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중도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상식을 못 벗어나면 속물입니다. 불교운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식을 못 넘으면 그것은 속화운동이 되고 맙니다. 불교를 속화시키면 안 됩니다. 응당 대중화를 시킨다 하더라도 속화해서는 안 됩니다. 꼭 반야사상을 기조로 해야 합니다.


반야사상은 모든 철학의 기조가 됩니다. 그것을 무(無)철학이라고도 합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무(無)의 자각적 한정'이라고 합니다. 즉 모두가 원래 없던 것인데 인연 따라서 현상으로 나타나 보인단 말입니다. 이렇게 모습[相]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 너, 밉다, 곱다, 그런 상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상의 실상은 본래 공(空)입니다. 즉공(卽空)입니다. 분석한 뒤에 아는 공이 아닙니다. 이 자체로 공인 것을 성자는 명명백백하게 봅니다. 우리 중생은 명명백백히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전도몽상입니다. 전도몽상이란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즉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몽상을 타파하는 것이 반야가 아니겠습니까? 전도몽상을 타파하고 꼭 행(行)과 증(證)을 갖추어 정법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공부

  부처님 공부는 출가한 스님들이나 할 수 있지 재가불자가 하기란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별로 못 배우고 업장이 많아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도 역시 과거 전생에 무던히 오계(五戒) 정도는 지켰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본성품에서 본다면 석가모니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또는 내 앞에 있는 독사같이 징그러운 것도 역시 본성품은 석가모니와 비교하여 터럭 끝만큼의 차이도 없습니다. 모습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남을 죽인 강도 역시 본성품은 석가모니와 똑같습니다.


성경에, 베드로가 예수한테 가서 "상대편이 잘못할 경우 일곱 번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 말씀이 "일곱 번씩 일곱 번도 더 용서하여라"라고 합니다.


반야를 모르는 사람들은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한 번 미운 사람은 밉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번뇌가 멸해서 실상을 바로 보게 되면, 모두가 비할 바 없이 청정한 부처님의 광명으로 빛납니다. 그런데 우리 무명의 눈으로는 바로 못 보기 때문에 미운 사람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따라서 죄는 밉게 보는 '나'에게 있습니다.


왜 남을 용서 못합니까? 우리가 늘 하는 말이 동체대비(同體大悲) 아닙니까? 동체대비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만 가지 모습으로 다르게 보일지라도 본질에서는, 본성품에서는 모두가 다 한 몸인 부처란 말입니다. 모두가 다 부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대비(大悲), 큰 자비라고 합니다. 그냥 약삭빠른 인정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견은 우주의 두두물물(頭頭物物)을 자타시비(自他是非) 없이 일여평등한 진여불성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진여불성 아닌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정견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사유입니다. 이런 견해로 남이 듣기 싫은 말을 하겠습니까? "누구한테나 베풀어라" "말을 바르게 해라" "남을 용서해라"는 등의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견만 굳건히 갖는다면 그렇게 말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그대가 자기 마음의 본체를 깨닫는다면 만 가지 덕이 다 갖추어 온다'고 하여 "약명요심(若明了心) 만행구비(萬行具備)"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고기 잡는 그물의 코가 천코만코 있다고 하더라도 양쪽 길이를 쭉 잡아당기면 모든 코가 따라오듯이, '우주는 모두가 다 청정무비한 마음뿐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화두를 들거나 염불을 하고, 또는 주문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화두입니다. 간혹 화두를 의심하는 것만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달마스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없습니다. 화두를 들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는 소리는 중국 북송 때 임제 일파에서 한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 오백 년 동안 중국에서 청신(淸新)한 불교 기풍이 못 들어올 때 나온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화두를 의심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전도몽상입니다. 그야말로 법집(法執)인 것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 법문은 주문으로 가는 문이나 염불로 가는 문이나 경(經)을 보는 문이나 다 문입니다. 심지어 복숭아꽃을 보고도 깨닫고, 길 가다가 맑은 물을 보고 깨닫기도 합니다. 그런데 염불이나 경론(經論)이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 마음이 상대 유한적인 상에 걸리지 않고,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정견을 갖는다면 어떠한 공부나 다 참선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나 알라신을 부르나 다 참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는 앞으로 틀림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하나인데 종교가 하나가 안 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의 성경이나 알라신의《코란》이나 여러분들이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보시면, 다시 말씀드리면 불교의 반야바라밀로 조명하면 모두가 다 진리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 때입니다. 재가불자나 출가불자나 모두 마음을 열 때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연다는 것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은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수자상(壽者相)ㆍ중생상(衆生相)이 없음을 말합니다. 아상이라는 것은 '나'라고 하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요, 인상이란 '너'라고 하는 생각을 말합니다. 수자상이란 시간이 짧고 길고, 또는 내 생명이 짧고 길고 하는 분별을 말하고, 중생상이란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풀이며, 이것은 자연이라고 구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相)을 떠나면 자연히 공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 한 방울도 오염시킬 수가 없습니다. 땅도 살아 있고, 돌멩이 하나도 모두가 다 살아 있습니다. 법계 모두가 다 부처님의 광명으로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중중무진으로 오직 부처님 생명뿐인 것입니다.


요즈음 한마음 운동, 한 몸 운동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카톨릭에서 한마음 운동을 합니다만 정말로 우리가 한 몸 운동, 한마음 운동을 해야 합니다. 보통은 기껏해야 사람과 사람끼리만 한 몸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지우주가 곧 한 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는 참 쉬운 것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하므로 쉽습니다. 우주는 부처님의 본원인 우주 자체의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모두가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무량법문을 다 알게 하소서!" 등의 사홍서원을 외우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이 우주의 본뜻입니다. 우주의 목적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부처님의 본원이라 합니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 본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불교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현대과학을 안 믿을 수가 없듯이, 불교는 진리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련한 사람들은 불교를 더디 믿을 것이고, 더러는 금생에 못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총명한 사람들은 금생에 믿고 닦아서 성불하실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에 따른 것입니다. 아주 과학적이고 아주 철학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대로 따르면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가령 부처님 말씀을 따라 음식을 적게 먹으면 더없이 좋습니다. 낭비나 과소비를 하지 않고 절약하면 그 또한 그렇게 좋단 말입니다. 자기도 가볍고 생활도 좋고 남도 숭상하게 됩니다. 고기도 먹는 것보다도 안 먹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고기 안 먹는 사람이 고기 먹어 보십시오. 얼마나 느끼한가 말입니다. 그런 것 많이 먹고서 군살 붙어 보았자 그것은 우리 생명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우리가 먹는 고기도 역시 우리와 생명이 같단 말입니다. 우리가 먹음으로 해서 더 많이 죽여야 하겠지요. 많이 먹으니까 외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겠지요. 내가 먹은 고기 한 점이 과거 어느 생에 내 부모님 살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은 우리보다 더 업장이 무겁지 않습니까? 그런 짐승들은 과거세에 오계를 못 지켜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그놈의 세포가 나한테 온다고 생각할 때, 내 몸의 세포가 오염이 안 되겠습니까? 오염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많이 먹어 놓으면 현대 문명병에 걸리게 마련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철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서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대중화시키는 것이 불법이라는 식으로 믿어서는 말법의 상식 차원, 속물 차원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남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파스칼도 말했듯이, 세계를 움직이려면 자기를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부터 부처님의 정견을 바로 세워 두고 바른 수행을 하여 증명을 해야 합니다. 증명만 해버리면 그 이후는 굳이 말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향기가 풍깁니다. 사향을 지니고 있으면 사향의 향내가 풍기게 됩니다. 사향을 가지고 있다면 몸에다 구태여 향을 바르고 치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향기가 풍겨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법을 믿고 법대로 수행하는 것 보고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합니다. 부처님 이름 한 번 외고, 화두도 한 번 참구하면, 한 번 한 만큼 우리한테는 우리 생명의 향기가 그만큼 플러스가 됩니다. 치장하지 않더라도 그만큼 빛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후광을 보십시오. 본래 우리한테는 그런 광명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살아서 그런 후광을 인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직 외길로 천지우주의 진리인 부처님 길을 따라가는 그 길 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선택은 우리가 궤도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한테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苦)의 인(因)을 지었기 때문에 고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의 인을 안 지었다면, 전생에 탐심과 진심, 그리고 무명의 업을 짓지 않았다면, 인간으로 나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극락에서 영생을 구가했겠지요.



  달라집시다

  우리는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달라져야 합니다. 부처님 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영생의 길로 걸음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이뭣고 화두나 무자 화두나 모두가 다 성불의 공부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린 정견을 확고부동하게 마음에 두고서 해야 참선입니다. 그러면 다 참선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나 어머니를 부르나 어떻게 부르나 이름을 안 부르고 명상을 하나 그냥 호흡법을 하나 모두가 참선인 것입니다. 호흡법도 그냥 호흡만 해서는 참선이 못 되는 것입니다. 정견과 더불어서 해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한사코 정견을 가지고 거기에 따르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 따르는 수행은 부처님 계행을 지키는 것입니다. 정말로 적게 먹고 적게 쓰셔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것이 나그네 길에서 우리를 가볍게 하고 공부를 쉽게 하는 것입니다.


한 달에, 음력으로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 이렇게 육재일(六齋日)이 있는데 육재일 정도는 꼭 출가수행자같이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청정한 생활을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오늘 내일 다르고 차근차근 맑아져야 합니다.


부끄러운 것은 우리 절도 낭비를 많이 합니다. 앞으로는 우리도 더욱더 검소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저희들 출가불자나 재가불자나 정말로 부처님 법대로 따르셔서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꼭 말법을 떠나고 상법을 떠나서 정법을 따라야 합니다. 정법이 아니고서는 우리나라도 절대로 훌륭한 나라가 못 됩니다. 세계평화도 절대로 안 옵니다. 진리와 함께할 때만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 참다운 해탈이 있습니다.


부처님 교법에 따라서 바른 수행, 바른 수행에 따라서 증명을 꼭 하시기를 바랍니다. 증명에 들어가면 그렇게 몸도 마음도 가벼운 것입니다. 계행 지키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욕도 하기보다 않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담배도 피우기보다 안 피우기가 더 쉽습니다. 술도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매서운 결단을 하십시오. 그래서 부처님 법 아닌 것은 단연코 안 한다는 각오로 수행을 하여야 합니다.


하이데거의 말과 같이 철학은 결단의 가르침입니다. 종교는 더욱 그러합니다. 종교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범부가 바뀌어 성자가 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와 같이 정법의 방향으로 불교를 전환시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산승의 말을 마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36년 8월, 금륜회관 광주청년불자회 초청 특별법회>  

 


비 오는날에 듣는 노래모음

01.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74) - 이장희

02. 찬 비 ('78) - 윤정하

03.그사람이름은 잊었지만 - 박 건

04. 빗 물 ('76) - 채은옥

05. 찻 잔 ('79) - 노고지리

06. 아쉬움 ('76) - 김미성

07. 고목나무 ('76) -장욱조

08. 당신의 마음 ('73) - 방주연

09. 석 별 ('74) - 홍 민

10. 못잊어 ('78) - 패티김

11. 조약돌 ('75) - 박상규

12. 새끼손가락 ('79) - 정종숙

13. 그림자 ('78) - 서유석

14. 눈물속에 피는 꽃 ('79) - 한영애

15. 마른잎 ('72) - 장 현

16. 봄 비 ('79) - 이은하

17. 옛생각 ('77) - 조영남

18. 당신만을 사랑해 ('77) - 혜은이

19.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76) - 최백호

20 내 님의 사랑은 ('74) - 양희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