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도 중생도 없다

2014. 6. 4. 09:0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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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佛無衆生 (무불무중생)

問(문), 如何是佛魔(여하시불마)오

師云(사운), 儞一念心疑處(이일념심의처)가 是箇魔(시개마)니
儞若達得萬法無生(이약달득만법무생)하면 心如幻化(심여환화)하야
更無一塵一法(갱무일진일법)하야 處處淸淨是佛(처처청정시불)이니라.
然佛與魔(연불여마)는 是染淨二境(시염정이경)이라.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하며
無古無今(무고무금)하야 得者便得(득자변득)하야 不歷時節(불역시절)이요
無修無證(무수무증)하며 無得無失(무득무실)하야
一切時中(일체시중)에 更無別法(갱무별법)하니
設有一法過此者(설유일법과차자)라도 我說如夢如化(아설여몽여화)하노니
山僧所說(산승소설)이 皆是(개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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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佛無衆生 (무불무중생)’.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다.
그저 이름을 지어서 붙였을 뿐입니다. 

‘問(문)’, 어떤 이가 물었어요.
‘如何是佛魔(여하시불마)오’, 어떤 것이 부처인 마구니인가.

‘師云(사운), 儞一念心疑處(이일념심의처)가’,
그대 일념심, 한 마음 한 생각 그 마음이 의심하는 그것.
예를 들어서 임제스님이 앞에 와 같이 말씀하신 그 사상이나 주장에
조금이라도 의혹을 내는 그것이,
‘是箇魔(시개마)니’, 곧 마구니다.

‘儞若達得萬法無生(이약달득만법무생)하면’,
그대들이 만약에 萬法無生, 만법은 그냥 그대로 있어요.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라 그냥 그대로인데
마치 우리 눈에 생기는 것처럼 보이고 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걸 좀 더 가깝게 끌어다가 생각해 보기로 하면
앞에서 예를 들었던 물결과 같습니다.
물결이 일어났을 때는 生이라 그러고
물결이 잦아들었을 때는 滅이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 生과 死도 똑같습니다.
만물의 생과 사도 똑같아요.

그 물결 보십시오.
어디에 生이 있고 어디에 死가 있습니까.
그런데 아주 짧은 시간을 탁 잘라서 이야기하면
파도가 출렁해서 위로 올라왔을 때는 生이라 그러고
싹 내려갔을 때는 死라고 그런다고.
아주 짧게 시간 단위를 쪼개서 보면 그렇다고요.
우리 생사도 그렇죠.

우리는 어지간히 오래 사는 것 같고
그래서 生이 상당히 긴 거 같지.
死는 오리무중이고.
아무도 모르잖아요, 死.
오리무중인 거야.
그런 거 같지만 사실은 물결이 올라왔다 내려왔다
올라왔다 내려왔다 하지만
하나의 물이라고 하는 사실,
때로는 얼음도 되고 흙탕물도 되기도 하고
맑은 물도 되기도 하고 별의별 물의 모습을 짓지만
사실은 물 그 자체라고 하는 것.
결국은 따지고 보면 우리의 생과 사도 그렇고
저 동물의 식물의 생과 사도 똑같습니다.
나무가 잎을 나면은 생이고 잎이 떨어지면 멸이 아닌가,
짧게 생각하면은 그렇죠.
그거 한 생각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만법무생이여.

‘心如幻化(심여환화)하야’, 만물의 마음은 환화와 같애.
이 생각 일어났다 저 생각 일어났다,
아무리 마술사가 별별 마술을 다 부린다 한들
우리 마음의 마술과 같이 능수능란한 마술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 마술 같은 게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그야말로 환화와 같아요.

‘更無一塵一法(갱무일진일법)하야’,
그냥 마음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지만
그 마음 그 자체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먼지도 한 법도 없어서 更無一塵一法이야.

‘處處淸淨是佛(처처청정시불)이니라’,
청정한 처처가 부처다 이거지.
그 자리가 부처야.
물로 보면 부처요, 물결로 보면 마구니다.
그렇게도 나누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然佛與魔(연불여마)는’, 그러나 부처와 마는,
‘是染淨二境(시염정이경)이라’, 染과 淨의 두 가지 경계다.

‘約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산승의 견처에 의지한다면은,
내 견해에다가 비추어 보자면,
‘無佛無衆生(무불무중생)하며’,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無古無今(무고무금)하야’, 古도 없고 今도 없어서,
‘得者便得(득자변득)하야’, 얻는 것은 곧 얻어서.
이건 무슨 말인고 하면,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순간순간 우리에게 다가 오는 것을 得이라 그래요.
득자변득, 보게 되면 곧 보고 듣게 되면 곧 듣고.
느끼게 되면 곧 느끼고 알게 되면 곧 알고.

그렇게 해서 ‘不歷時節(불역시절)이요’.
거기에 무슨 시절이 있어요? 아무 시절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우리의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사의하고 신출귀몰한 거죠.
천리 만리 가는데 무슨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미국이고 유럽이고 0.01초 만에 오고 가고 마음대로 해 버리잖아요.

그래서 그 자리는 ‘無修無證(무수무증)하며’.
그것은 닦을 것도 없고 닦을 수도 없어요.
그런데 공연히 닦는다고 해요.
어쩌다가 닦는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와 가지고
오늘날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닦는다 증득한다 하는데
전부 그 올가미에 걸려있어.
한번 생각해 봐요.
우리 마음 그거 어떻게 닦아지겠어요?

그동안 마음에 대해서 우리 불자들은 연구 많이 돼 있잖아요.
마음이라는 게 어디 어떻게 뭘 닦아.
마룻바닥 같으면 닦아지겠는데
이것은 마룻바닥처럼 생긴 게 아니기 때문에 닦아지는 게 아니야.
證이라고 하는 것은 증득한다 하는 뜻인데 증득은 뭐요?
예를 들어서 내가 가질 것이 있으면 내 손아귀에 딱 넣는 게 증득이여.

이거는 이미 자기야.
이 증이라는 게 이미 자기이기 때문에
달리 내가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게 돼 있어.
너무 나하고 가까이 있어서 탈이야.
나와 가까이 있다면 그건 벌써 간격이 있지만 곧 나야.
본래의 나인 것이 탈이야.
좀 떨어져 있다면, 나하고 좀 떨어져 있다면
몇 발이라도 걸어가 그것을 쟁취해서 내 품에 끌고 올 텐데,
이것은 본래의 나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그래 無修無證이란 말이 그런 뜻입니다.

아무리 참선 아니라 어떤 용맹 정진을 한다 하더라도
이 마음의 도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나 동일하게
그런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경을 많이 보고
아무리 참선을 많이 하고 명상을 많이 해도 마음의 속성은 똑같습니다.
그냥 그대로야.
여러분들 쓰고 있는 그 마음 그대로라.
하나도 다를 바 없어요.

그러니까 수행을 해서 어느 지위에 올랐느니 올랐느니 하는데,
그러면 나 쯤 되면 상당한 데 올랐을 거 아냐? 안 그래요.
그냥 사람일 뿐이야.
사람이고 사람의 마음일 뿐이야.
그 위에 올라가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큰스님들이나
옛날 조사 스님들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그냥 그 마음 가지고 그렇게 쓰는 거지
어느 계단으로 올라가서 어느 위치에 딱 있어 가지고 내려다보고...
그거 아녜요.
없습니다.

왜 내가 이런 말을 자꾸 많이 하는고 하면
내가 상당히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라.
거기에 관심있다 보니까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등각, 묘각,
또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또 십팔주 등등
수행 계기가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 뭐 큰스님, 작은 스님, 우리가 나눠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은사스님, 노스님, 노노스님,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 뭐가 다른 게 있습니까?
다를 거 아무 것도 없어요.
달라지면 안 되는 거야 이건.
달라질 수도 없고 다르지도 않습니다.
無修無證이라는 게 그게 맞는 말이야.

부처님도 역시 無修無證이예요.
부처님이 6년간 고행한 것으로서 부처된 거 아냐.
그거 하곤 관계없어요.
육조 혜능 대사가 6년 고행하고 9년 면벽해서
견성한 겁니까, 성불한 겁니까? 아니잖아요.
이 사람은 부처 佛자도 몰랐던 사람이라.
불교가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 순간 금강경 한 구절 듣고 그냥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는데
그게 견성성불인지도 몰랐어.
왜냐하면 이 사람은 그런 용어를 몰랐으니까.
그냥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을 뿐이야.

그 당시 사회의 어떤 관습, 그것은
지상 최고의 어떤 가치라고 생각했던 충성과 효도,
충효 이 두 가지거든요.
거기에 목을 매고 산거야.
그런데 ‘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
우리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머무는 것이 아니다, 머물 수도 없다.
그러니 머물려고 하지 마라, 이런 뜻이잖아요.
필연적으로 무소주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동안 사회의 통념에 의해서
벼슬하는 사람은 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고
보통 사람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콱 매여 살았거든.
그런데 응무소주 이생기심 들으니까
그러면 그렇지, 우리 마음이 그런 게 아닌데.
그 괜히 정해 놓은 거 아닙니까.
충이니 효니 하는 것도 정해 놓은 거거든요.
그래서 그냥 확 깨어나 버린 거요, 거기서.
그 올가미에서 확 벗어나 버린 거지.
올가미고 뭐고 없어져 버렸어 그 순간에.
툭 터져 버린 거죠.

수행 점차가 있다고 하는 것에 착각했어요.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큰스님, 작은 스님, 높은 스님, 아주 도가 높은 스님,
그래서 성인이 있고 범부가 있고
이런 차별이 실지로 있는 줄로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었어.
워낙 그것이 세뇌가 돼 있었으니까.
어려서 출가해 가지고 듣고 보고 하는 것이 전부 그런 거,
사람들이 본래 없는 자리에다가 만들어 놓은 그런 명구,
그런 명구에 너무너무 세뇌가 되다 보니까
그래서 거기에 그만 착각을 한 거지.
실지로 그런 것이 그런 차제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런 뜻입니다.

'큰스님' 하는 게 뭘 가지고 큰스님이야?
키가 커서 큰스님이야?
키가 커서 큰스님이라면 그건 맞는 말이라.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 키 크다고 큰스님이 아니잖아.
修證, 닦고 증득한다고 하는 이 사실은 그런 것으로
아주 가까이 우리가 이끌어다가 이야기하자면 그런 거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데서 벗어나면 정말 당당해져요.
사람이 당당해지고 자신감이 넘치고
그렇다고 윤리 도덕도 없이 마음대로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고
아니면서도 정말 당당하게 인간의 본래 갖춘 그런 권능을
한껏 누린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거요.
어느 누구든지 상관없이 본래 가지고 있는 그 권능을
한껏 누리고 사는 것, 바로 불교는 그런 역할을 하는 거죠.
특히 선불교에 있어서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 아주 주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불법 물으러 갔다가
세 번 얻어맞고는 대우스님에게 가 가지고
대우스님이 한 말에 마음이 열렸잖아요.
아이고 황벽불법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이러니까
대우스님이 네가 뭘 안다고 그따위 소릴 하느냐, 하니까
그 때 새파란 임제스님이
자기 법사스님 황벽스님하고 동급인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콱콱 세 번 쥐어박은 거.
거기에 무슨 어른이 있고 아이가 있어요.
법에 있어서, 법을 거량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는 닦고 증득하는 일이 없어요.
無得無失(무득무실)이라, 본래 우리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새롭게 얻는다고 하는 일도 우스운 일이죠.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거야.
이거는 어떤 유능한 도둑이 와서 훔쳐간다 하더라도 훔쳐갈 수가 없어.
다 훔쳐가더라도 그것만은 훔쳐 가지지가 않는 거야.
무실(無失)이야.
아무리 멍청이라도 잃어버리지 않아.
그건 그대로 달려있어 그 자리에.
참 대단한 이야기 아닙니까?
이거 사실 알고 보면 정말 더 이상 어떻게 나아갈 데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무수무증, 무득무실. 얻을 게 없어요.

그래서 반야심경을 도표를 그려놓고 보면
以無所得(이무소득)이라고 하는 것이 딱 중앙에 옵니다.
반야심경은 같은 글 형식이 많잖아요.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죽 이렇게 도표로 그려져요.
그리고 나서 이무소득, 그게 딱 중앙에 와요.
그리고는 또 그 다음에 故 보리살타는 어떻게 하고
삼세제불은 어떻게 하고 두 기둥이 밑으로 이렇게 딱 세워져요.
그 無明이 같거든요.
무소득이야, 무소득이라고.
무소득의 이치 때문에 보리살타는 그렇게 되고 삼세제불은 그렇게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무득무실해서,
‘一切時中(일체시중)에 更無別法(갱무별법)하니’,
더 이상 특별한 법이 없다.
아무런 특별한 것이 없다.

‘設有一法過此者(설유일법과차자)라도’,
설사 어떤 한 법이 있어 가지고 이것을 지나간다 하더라도.
이것이 뭐겠어요? 견문각지 하는 것.
지금 보고 듣고 할 줄 아는 바로 그 당체,
이것이 지나는 게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보다 훨씬 뛰어난 게 어떤 법이 어떤 도리가 있다 하더라도,
‘我說如夢如化(아설여몽여화)하노니’, 나는 꿈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이것 외에는 그건 전부 꿈과 같은 것이고
뭐 부처 아니라 부처, 우부처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견문각지 한다고 하는 이 사실,
지금 말하고 보고 듣고 한다고 하는 이 능력,
이 사실을 백배 천배 지나가는 어떤 우부처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건 꿈과 같은 것이고 허깨비와 같은 것이고
만들어 놓은 거, 우정 만들어 놓은 거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山僧所說(산승소설)은 皆是(개시)니라’,
내가 말한 것은 전부 이것뿐이다 이 말이여.
이게 내 종지다.
皆是, 다 이것이다.

참 하여튼 임제스님의 가르침은 이와 같이 명쾌합니다.
글도 짧막짧막 하면서 글도 천하에 쉽죠.

無修無證, 無得無失, 一切時中 更無別法,
設有一法過此者, 我說如夢如化.

山僧所說은, 내가 이야기할 것은 皆是다, 다 이것이다.
내 종지가 이것이다 말여.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비록 확 깨달아지는 그런 계기는 아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을 의식으로 또는 사량분별로라도 많이 사유해 놓으면
이게 우리의 살림살이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