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치고 나면 아무 것도 없어 / 지유스님

2014. 8. 6. 17:4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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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치고 나면 아무 것도 없어 / 지유스님

 

 

 

 

여러분은 무엇을 궁금해 합니까.

 

여러 스님들이 온갖 좋은 말씀을 통해 인생을 어떻게 정하고

수행하며 공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곧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문제입니다.

‘잘 산다’,‘못 산다’하는 것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릅니다.

잘 먹고, 재물을 갖고, 편안한 것을 잘산다 할 것이고,

가난하고 가진 것 없고,

불편한 자리에 거처하면 못산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못산다는 개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뜻대로 안되고, 중병에 걸려도 잘사는 사람이 있고

아무런 부족함이 없어도 못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잘 살고 못 산다는 기준이 뭡니까?

우리는 법회 때마다‘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이라고

삼귀의례를 합니다. 양족(兩足)이란 복덕과 지혜 두가지를

구족했다는 뜻으로 부처님은 이 두 가지를 구족하신 어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델로 삼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까하며 ‘성불합시다’ 합니다.

그러면 복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복이라 하고

갖추지 못하면 박복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가진 것이라고는 발우와 가사 한 벌 뿐이었습니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지요. 그런 분을 우리는 복이 많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안하고 불평스러워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속에서

부처님은 과연 행복하게 살았을까?

혹시 정신이 모자라는 바보는 아닌가?

이렇게 의심이 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쳤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깨치지 않고서는 그렇게 불편하고 불안한 환경 속에서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럼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성불합시다’,

 

‘부처님이 됩시다’하고 인사를 합니다.

부처님하면 32상 80종호를 갖추고 신통광명으로

범인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뛰어난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는 깨친 사람이란 뜻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궁금한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궁금해 하냐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신다면 머리만 복잡해 질 뿐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골치를 해결하고자

여러 종교들 가운데서 불교를 선택했습니다.

마음의 편안과 의지처를 찾아 불교를 선택했는데

여러분은 더 불편하고 골치가 아플 것입니다.

먹고 살기도 복잡한데 불교 공부까지 하라고 하니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생길 것입니다.

머릿속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불문에 들어왔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불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크게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한 걸음씩 부처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불(成佛)’이란 꿈같은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과거 부처님도 몇 생에 걸쳐 육바라밀을 닦고

수행을 다해 마침내 성불을 이뤘습니다.

‘범부인 내가 감히 성불이라니’

이렇게 생각하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 부처님도 그렇게 노력해왔는데

나라고 못할게 뭐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성불을 향해 가야 합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러한 희망을 보고 계십니까?

무술을 배우면 한 달 전과 한 달 후가 틀리고

일 년 전과 일 년 후가 확연히 다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문에 들어와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

좌선하는 모습이나 움직임 하나하나가 남이 볼 때

저절로 존경심이 나게 됩니다.

 

부처님이 출가하신 것은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입니다.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답을 찾아

출가를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죽게 됩니다.

인간은 결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결국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재물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편하게 사느냐 편치 못하게 사느냐는 그 다음의 일입니다.

이 근본적인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고민하던 중 한 바라문을 만나 출가를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한줄기 빛과 같은

실마리를 듣고 용기를 내 출가를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정진 끝에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생사의 문제를 무엇으로 해결했습니까?

그것은 깨달음입니다.

무엇으로 깨달았습니까?

마음을 깨친 것입니다.

깨닫고 보니 생사를 초월한

본래의 모습(眞我)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짜인 나와 가짜인 나가 구별이 됩니까?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나입니까? 가짜인 나입니까?

두 모습 모두 나입니다.

여러분은 벌써 이런 말들에 현혹되고 있습니다.

진짜 나, 가짜 나 모두 나이지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진아라고 이름을 붙였을까요.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생사는 본래 없었습니다.

불교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일체중생 모두가 불생불멸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행동과 생각에

붙잡혀 자기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과 생각을 망상,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 망상과 집착은 자기를 잊어버리게 하는 근본 원인으로

이 원인만 제거하면 진아는 찾을 것도 없이 바로 있습니다.

부처님은 깨닫고 난 후에 입으로

이 사실을 그대로 일러주려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불이었다.

공부해서 성불한 것이 아니다’고 일러주려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입을 다물고

혼자 성불한 것으로 끝낼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오래도록 고행한 것은

혼자만 누리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생각 끝에 진짜를 감춰놓고 가짜를 내놓았습니다.

이것을 방편이라 합니다.

8만4000 경전 모두가 가짜입니다. 간혹 진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말 미묘해서 보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은 49년간 진짜를 감춰놓고 콩을 팥이라 해도 믿을 만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후에야 진짜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마음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는

‘위빠사나’,‘선’ 등 다양한 수행법이 유행합니다.

선도 대승선, 조사선, 여래선, 간화선 등 수없이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까?

일찍이 서산대사는 “선은 불심이고 교는 불설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래의 마음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래’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얻어지는 것에는 본래라고 이름붙이지 않습니다.

 

달마대사도 불심법(佛心法),

마음을 바로 보는 법을 강조했습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자기의 마음을 바로 보고 성불하게 한 것입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깨닫고 보면 선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모든 행동이 공부고 선입니다.

그런데 같은 행동을 해도 어떤 것은 선이고

어떤 것은 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옛날 선사들은 혼자 고심고심 하다가 종소리에,

활짝 핀 꽃의 모습에서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종소리를 수없이 듣고, 꽃피는 모습을 봤지만

깨달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무슨 차이인가요?

똑같은 소리를 듣고도 누구는 깨닫고

누구는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선이라 하면 두 눈을 지긋이 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선은 아닙니다.

조금 전 언급한 것처럼 행주좌와 어묵동정,

서고, 걷고, 뛰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고요하고 즉 일상의 모든 생활이 선입니다.

여기서 선을 찾으란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일상에서 선을 찾아 봤습니까?

.

.

육조 스님이 도명 스님에게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도 악도 아닌, 차가운 것은 오로지 차가울 뿐이고

뜨거운 것은 오직 뜨거울 뿐입니다.

선이다, 악이다, 좋다, 나쁘다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 있었던 것을 모르고 밖에서 ‘진리다’, ‘도다’,

‘선이다’ 하면서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사들은 어떻게 할까요.

불자들은 선사라 하면 가사, 장삼을 갖추고 점잖게 앉아서

조용히 참선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사 중에서는 지게지고 거름주고, 나무하고 하는

선사도 아주 많았습니다.

 

젊은 납자들이 큰스님에게 공부를 배우러 왔다고 하면

그저 묵묵히 일만합니다.

그러면 큰스님이 일하는데

젊은 사람이 그냥 있을 수는 없잖아요.

가만히 일을 하다가 문득 의심이 납니다.

그리고 도대체 어떻게 공부해야 하냐고 물어봅니다.

그럼 스님은 그런 것 없다고 합니다.

옛날 경허선사는 나의 살림살이를 물어본다면

털어도 털어도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왜 복잡한 보따리를 머리에 짊어지고 있느냐 이겁니다.

심중무일물(心中無一物)이로다.

마음속에 한 물건도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속에 한 물건도 없기에 차를 마시면 오로지 차요,

일할 때는 오로지 일이고,

밥을 하거나 청소를 할 때도

오직 그러할 뿐입니다.

죽비를 보여주면 죽비를 봐야지 왜 다른 것을 보려고 합니까.

그 짓을 언제까지 할 것입니까?

깨칠 때까지 하려고 합니까?

깨치고 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상상하지 마십시오.

깨달은 사람을 직접 찾아가 물어보면 바로 알려 줍니다.

그러나 아무한테나 알려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야 솔직히 일러줍니다.

 

- 범어사방장 지유스님

사주팔자 - 인간관계

 

 

인생은 사주와 팔자

 

[ 몸과 우주]

 

 

 

아이고, 내 팔자야!”

“무슨 팔자가 그렇게 사나워?”

 많은 이가

이런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한다.

그만큼 상용화된 언어다.

 

팔자란 무엇일까?

태어난 연월일시를 육십갑자로 뽑으면

네 개의 기둥

(예를 들면 임진·정미·병자·기축)이 나오고

그 글자를 합치면 팔자가 된다.

요컨대

사주팔자란 의역학의 전문용어인 셈이다.


다시보는 사주팔자 시


태아 적엔

엄마와 심장이 연결되어 있어서 단전호흡을 한다.

그런데 엄마 배 속을 나오면서,

선천(先天)에서 후천(後天)의 세계로 넘어오는 순간

폐호흡으로 바뀐다.

 

태어나자마자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는데,

그때 우주의 기운이

호흡을 통해 아기의 신체에 각인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주팔자다.

 

존재와 우주 사이의 첫 번째 마주침,

그 ‘인증 샷’이라고나 할까.

하늘에서

태양이 움직이는 길을 황도라 한다.

황도 360도를 15도씩 나누면

24개의 마디가 생긴다.

24절기가

바로 이 마디에 붙인 이름이다.

 

절기의 변화에 따라

천지의 기운 혹은 물리적 배치가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특히 태양과 달,

그리고

지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다섯 개의 별이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이다.

 

이들의

밀고 당기는 역학적 배치가

팔자의 구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다.

 

“탯줄을 자르는 순간에

우주의 기운이 몸으로 들어온다고 본다.

우주의 기운이란 바로 별들의 기운이다.

 

인간은 별의 영향을 받는다는 전제가

서양 점성술이나 동양의 명리학이나 같다.”

(조용헌 ‘한국의 역학’)



말하자면

천지의 기운은 반드시 존재의 생리와 상응한다.

그런 점에서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은 하나다.

 

물론

상응이 곧 상생을 뜻하는 건 아니다.

서로 어울릴 수도 있고,

어깃장이 날 수도 있다.

 

이것을 일러

상생과 상극의 파노라마라고 한다.

자연의 영향력에 맞서

문명을 구축한 토대 역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문명이 발달한다 한들

존재 자체의

우주적 원천을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사주 팔자 속의 운세,

우주가

곧 모태고 또 귀향처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주에 사계절이 있듯이

모든 존재는 생로병사한다.

 

생로병사의 리듬이 곧 팔자다.

이 리듬

자체를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그 리듬을

어떻게 밟아갈 것인가?’는

개별 주체마다 다 다르다.

그 지혜와 기술을

익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덟 개의 카드 가운데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건 온도다.

즉 어떤 계절,

어떤 시간에 태어났는가가 결정적 단서다.

 

예를 들어

한여름의 정오에 태어난 사람의 경우

몸 안에

엄청난 불기운이 이글거릴 수밖에 없다.

반대로

한겨울 새벽에 태어난 경우는?

차가운 물기운으로 충만하다.

 

불기운이 세면

자신을 외부로 드러내는 기운이 강하고

물기운이 강하면

속으로 갈무리하는 성향이 강하다.

 

달리 말하면

◑전자는 벌여놓고

   뒷수습을 잘 못하는 대신 뒤끝이 없고,

◑후자는

   마무리를 잘하는 편이지만 대신 뒤끝이 길다.

 

물론

이 사이에 위계나 서열은 없다.

다만

다를 뿐이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이걸 바탕으로

몸의 구조와 생리,성격과 인생관 등

다양한 항목이 계열화된다.

그것이

관계를 만들고

사건을 일으키고

인연을 불러온다.

 

관계와 사건과 인연,

그 접속과 변이가 바로 인생,

아니 팔자다.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