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신 보신 화신 형성사

2014. 8. 6. 18:3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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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 보신 화신 형성사

 

실론섬 법사 2014.07.30

 

 

정말 얼굴이 다른 것 만큼 사람들의 생각도 다른가 봅니다. 하지만 바닷물이 오직 짠맛을 가지듯이 불교의 진리 또한 오직 하나일 뿐 입니다. 방편이라는 것도 진리에 좀더 쉽게 다가가게 하고 이해를 하기 위한 수단일 뿐 방편이라는 허울 뒤집어 쓰고 바닷물이 짠물인데도 불구하고 달다느니 쓰다느니 하면서 이게 방편이다라고 한다면 망발이며 외도일 뿐입니다.


붓다의 죽음을 사망(死亡)이라고 하지 않고 열반에 들다라고 한다. 

붓다의 죽음을 왜 사망했다고 하지 않는가? 붓다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위대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붓다의 죽음은 단순한 사망이 아니라 열반이라고 했을 때 우리들은 이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부파불교인들이 풀어야 할 숙제중의 하나였다. 


붓다께서 살아 계실때는 사부대중들은 붓다께서 돌아가시면 큰일이다, 붓다께서 영원히 살아계셨으면 하고 바랬다. 중생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고 소박한 소원이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80세에 돌아 가셨다. 제행무상을 붓다 스스로 실천해 보이신 것이다. 하지만 붓다께서 열반에 드실 때 자신이 남긴 가르침을 의지하라고 유언하셨다. 즉 붓다라는 육신을 가진 분은 죽어서 없어져도 45년동안 설법한 가르침 즉 진리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이 말을 다시 되새겨보면 붓다라는 존재는 무상의 존재이다. 그 대신에 영원한 것은 법(진리)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부파불교 시대에 들어오면서 법 즉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완전히 굳어지게 된다. 


법신(法身)이란 무엇인가?

법신이란 원음에 충실하게 번역하자면 "법의 집합"이란 의미이다. 이 법의 집합이 상주하며 영원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죽어서 없어졌지만 법은 영원하다라는 것이다. 이런 이론적 개념이 부파불교시대에 와서 완성이 된다. 다시말해서 제행은 무상이다. 제행은 무상이지만 제행무상이라는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개념이 완벽하게 정립이 된 것이다.


한편으로 법신을 말할 때 '신(身)'은 신체 즉 몸을 말한다. 이 말은 부처님의 법의 육신이라는 의미이다. 부처님은 육신을 가지고 계셨지만 동시에 깨달음을 설법하셨던 분이다. 따라서 그분의 육신은 우리들의 육신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깨달은 법이 그대로 신체에 육화(肉化)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법과 일체가 된 것이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론이 완성되면서 부처님은 법(진리)를 육체로 하고 있는 분이라는 개념이 성립이 된다. 곧 법신인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부처님은 육신과 법신이 있다는 이론이 나왔다. 열반에 이르러 우리들 눈에서 화장되어 사라진 몸은 육신이고 대신에 법은 사라지지 않고 멸하지 않으며 그쪽이 진짜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육신은 우리들 눈에 보이지만 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그 법신을 우리들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당연히 생긴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보이고 보는 것이라고 주장되었다. 우리들은 육신의 부처님은 돌아가시고 이제 부처님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부처님은 영원히 존재한다. 법신은 항상 있으며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계속하여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이것이 법신불이다.


화신(化身)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법신이 정말 부처님이라는 법신불 사상을 펼쳐나가다 보면 그럼 도대체 고따마 붓다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분이 부처님이라면 왜 사라쌍수 나무아래에서 돌아 가셨을까? 즉 법신불의 이론이 논리적으로 펼쳐질려면 실제 육신을 가지고 태어나시고 80세에 열반에 드신 고따마 붓다라는 분에 대해서도 그게 걸맞는 적절한 이론이 필요한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80세에 열반에 드신 것은 부처님의 화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법 그자체인 법신불이 거짓으로 우리들처럼 몸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몸을 나타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빌려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야부인은 평범하게 임신을 하고 평범하게 출산을 한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부처님은 마야부인의 자궁을 통해서 출생한게 아니고 옆구리를 통해서 나왔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즉 법신이 몸을 빌려서 화신으로 모습을 나투시다보니 정상적인 분만이 아닌 옆구리로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계속해 펴나가면 마침내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는 임무 즉 45년동안 설법을 모두다 하셨으니 이 세상에서 하직했다는 이론이 성립이 된다. 몸을 빌려 태어나신 화신은 없어지고 법신은 영원히 존재하고 상주한다는 이론이 앞뒤로 딱 들어 맞는 것이다.


부처님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은 일찍부터 사부대중에게 폭넓게 이해되어 왔다. 그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부처님이 돌아 가시고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열반뒤에 남겨놓은 가르침을 믿어라는 그 유언을 어떤 형태로든 손에 잡힐 듯 이론화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신관이 대승불교에서 더욱더 발전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법신은 모습도 형태도 없지만 시방세계의 제불(諸佛.모든 부처님)로 모습을 여러 정토에 나타내시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한편으로 여러 정토에 계신 부처님을 '보신(報身)'이고 이와 반대로 사바세계에 몸을 나타내신 분을 '화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불사상

이렇게 대승불교에 와서 완성된 법신이라는 불신관은 더이상 몸을 가진 고따마 붓다라는 한 존재에 의미를 국한되어야 할 필요가 없었고 이런저런 갖가지 모습으로 상상된 법신불을 만들어 낸다. 법신 사상에 따라 상상력을 펼친 사상은 부처님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는데 더이상 역사적으로 존재했거나 화신불로써 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신 그분 한분으로 국한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번 둑이 터져 물이 쏟아지면 겁잡을 수 없이 쏟아지듯 법신이라는 사상 아래서 부처님은 수억 수백억 부처님으로 나타나는 다불사상이 펼쳐졌던 것이다.


화엄사상은 비로자나불을 법화경은 법신불로써 석가모니불을 정토삼부경은 아미타불등등의 부처님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또한 수백억 불국토에 계시는 수백억 부처님들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우리들이 흔히 암송하는 천수경에만 몇분의 부처님이 나올까? 

 

섬진강 편지

 

1 두곡나루

 

 

2 너구리가 그린 섬진강 풍경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모든 생명체는 지금까지 자신을 뛰어넘어 무엇인가를 창출해 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위대한 조류를 거슬러 썰물이기를 원하며

인간을 뛰어넘기보다는 오히려 동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는가?”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중에서>

 

 

구해줄테니 얌전하게 기다리라더니ᆢ침몰 백일 째,

우리는 이대로 가라앉을 것인가, 

우리는 이대로 초인을 기다리고만 있을 것인가,

 

 

 

 

 

 

서울 나들이로 며칠 비웠던 강으로 돌아오는 길,

 

구례에서 하동까지 내내 목을 빼고 차창 너머 강 풍경을 내다봅니다.

마른장마라지만 강물은 많이 불었고 흐립니다.

 

누렇게 지친 강물들이 피아골 계곡과 만나는 피아골 입구,

화개 계곡과 만나는 화개장터 부근에서 지리산에서 흘러온 맑은 물들과

만나 조금씩 맑은 기운을 되찾아갑니다.

 

그렇듯 그대가 지칠 때는 나의 맑은 마음을 내고

내가 지칠 때면 그대 푸름을 내어 우리 생도 저 강물처럼 흘러야겠지요.

 

 

3 뉘기세요?

 

 

뉘기세요?

 

어머니 만나러 가는 길, 배롱나무꽃이 홍설기떡이다.

고향 창계천이 광주댐에 수몰되기 전, 어머니 아직 고울 때,

친구들과 제법 굵어진 풋감을 물속에 던져놓고 누가 빨리찾나 놀이하며

멱감고 돌아오다 밑동을 살살 긁어주면 간지럼을 타는 아이처럼

까르르 까르르 잘도 웃던,

 

그래서 간지밥나무라 부르던 배롱꽃, 올해도 저리 환한데

어머니는 내가 누구냐고 묻는 나에게 뉘기세요? 묻는구나.

 

* 뉘기세요 ᆢ누구세요?

 

 

- 섬진강 / 김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