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본질은 끊어진 자리에 있습니다 / 대행스님

2014. 8. 6. 18:2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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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본질은 끊어진 자리에 있습니다 / 대행스님

 

 

존재의 본질은 끊어진 자리에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선 금강좌라고도 하고 구경(究境)이라고도 합니다.

유식학에선 제8식 아뢰야식을 넘어선 아뢰야식의 근본 자리라고도 하고요.

기독교에선 모든 것의 터전이 되며 영원한 하나님 자리인

만세반석이라고도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지금 무엇 위에 있습니까?
이 무거운 지구가 왜 허공성의 우주 위에 둥둥 떠있나요?

과학자들 말처럼 인력 때문에?  아닙니다.

그럼 하늘에서 두사람이 서로 잡아당기고 있으면 안떨어지나요?  아니잖아요.

 

이 우주는 바로 끊어진 자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인과와 원칙을 초월해 있는 그 자리 위에

이처럼 떡 벌어진 것이지요.

 근데 그 속에 이 처럼 세상 만물과 우리들이 들어있지만

또한 동시에 우리들 속에 그 자리가 또 들어있습니다. 왜냐?

그것을 인식하고 찾을 수 있는 의식을 가진 자 안에 그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그 자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런 것으로도(공으로도 안된다) 묘사되거나 형용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기에

비로소 모든 것이 거기서 다 나오고 거기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여러분, 여기 항아리가 하나 있다 합시다.
그 항아린 분명 그 안에 뭘 담기 위해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늘 자기 안에 공간(허공)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그 항아리 안에 뭘(물이라든지)가득 담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항아리의 본래성은 허공성이지요.

뭐든지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데 그항아리밖에 있는 허공과 안허공이 다른 것일까요?
아니지요.

                                       

이제 여기에 의식을 하나 첨가합시다. 

의식은 사실 영원히 출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의식이 가진 활동 능력의 흔적인 마음이

그 몸인 항아리 안에 갇혀 그것 만이 자기 몸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게 우리들의 일반 의식이요, 개체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물은 언제든지 버려지고 또 새 것으로 교체될 수 있지요.

 

그래서 이 몸과 마음을

스스로 벗어버린 자는 바깥 허공과 안 허공이 하나가 됩니다.

그 허공이 의식에 의지하여 스스로 자각될 때 이것을 법신불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이게 말이 허공이지 실은 허공도 넘어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게 없어요. 

 

아이디어나 생각에 무슨 모습이나 형상이 있습니까?

그게 공(空)한 형상이 있습니까?

아무 모습이나 형상이 없지만 그게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갑니까?

그냥 제자리에서 그렇게 일어나고 사라지지 않습니까?

 

우린 눈에 속고 감각에 속아 空이라 해도

물질의 상대 여백에 있는 공이나 상상하지만 진짜 공은 그런게 아니에요.

그런 공은 물질의 상대형상이지 空이 아니라. 

딱 끊어진 자리, 일체 상상으로의 접근을 불허하지만

그 안에 아무리 어마 어마한 것도 다 들어가는 그 배경 자리가

바로 진짜 공자리입니다.

그래서 무한이라.

 

그래서 모든 유형 무형의 것들이

그 위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며 한판 잘노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이미 그런 것이죠.

 

그러니 끊어진 자리를 자각하라한대서

자꾸 이것저것 상상하고 찾아서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미 이 몸과 마음 조차 일어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그 무한의 관문임을 알아야하고

일체가 딱 끊어진 초월의 배경그자체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 구경(마자막 궁극의 자리)이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눈을 감으면 거기 뭐가 있어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세상 만물의 형상에 끌려다닌 어두운 눈에

보이는 것이고  실제론 거기에 이 끊어진 자리가 떡 벌어져 있는겁니다.

 

근데 이게 눈뜬자만 보이니 그게 문제지만요.

여러분이 끊어진 자리를 찾으라하니까 자꾸 생각으로나

마음으로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찾아집니까?

그건 다 끊어진 자리입장에서 보면 그림자요, 망상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될까요?
그런 행위를 다 그만두라 이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개체마음의 잔영이 남아

이 세상만물을 실제로 있다고 착각하는 힘도 넘어서  

그것들을 환상으로 보기시작하면 서서히 그 자리가 열리어

초감각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우리의 형상이라면 형상입니다.

 

성경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었다하는 말은

본질적인 것을 표현하는 말이라 바로 이자릴 말하는 것이지요.

그자리에 자기가 들어가야(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합니다.
거기에 들어가 하나가 되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 세상 삼라만상이 다 무한한 자기 안에 떠있고

다 여러가지 다양한 마음이 벌이는 환상쑈임을 보게되며

일체가 다 자기품안에 한바탕 벌어져 있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마음수련에서는 자꾸 자길 죽이고 버리다보면

일체 자기몸과 마음이 다 사라지고

다만 맑은 두 눈만 이 세상속에 둥둥 허공에 떠있는 것 같은 때가 옵니다.  

이때 거기서 그 바라보는 자를 또 한번 죽이고 넘어서서

이 세상을 뚫고 그 이면으로 확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

(이때부턴 이 세상을 죽이고 버린다고 할수 있지요.)

그래야 온우주가 제안에 삼켜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아일여이고 거기서 더나아가 근본우주와 하나된 宇我一如가 되는 것입니다.

 

이리되면 끊어진자리에 드는 것이죠.
달리말해 끊어진 자리란 제가 완전히 없는 자리요,

그래야 비로소 이세상이 자기가 되어버리는 자리입니다.  

여기까지가 무정도(無情道)의 완성이라.

그 다음은 보신불공부 즉 유정도(有情道) 공부의 시작이고요.

  

그러니 끊어진 자리를 자각한다함은

 곧 자기가 일체를 다쉬고 이세상에 태어나오기 이전자리,

그 근본의식자리로 돌아가 그 근원자리에서

고요히 관하는 의식 그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공부는 그 자리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개체마음도

쓰기 따라서는 하나의 진리이니(여기서 번뇌무명이 곧보리란 말이 성립된다) 

곧 보신불자리임을 알고 스스로 또 체험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정도(有情道)의 시작이요,

사후 세계에 영생 속에서 보살 활동을 하기위한 연습의 장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끊어진 자리가 이 세상에 이미 환하게 드러나 있음에도

삼라만상의 형상에 속아 눈이 착각 속에 빠져 닫힌 사람들 만이

이 몸만이 전부인 줄 알고 여러가지 망상을 갖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나타난 것이 바로 <지금여기>의 느낌입니다.

 <지금여기>를 고요히 한번 관해보세요.   

그 이면에 바로 끊어진 자리가 떡 벌어지며 그 안에 삼세가

한 권의 책처럼 들어있으며 다양한 의식계와 물질계가

온통 지금처럼 다채롭게 한판 잘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누구 안에 들어있습니까?
이것이 있어야 저것도 인식되고 의미 지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체인 그대가 전체인 이 근본우주자리 위에 출현한 것입니다.

 

끊어진자리는

하나님의 능력인 창조의 자리라 모든 것을 다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마륵果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나타나는 관문이 바로 그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대가 곧 창조주(이것이 부담스러우면 손발이라거나 자녀라도 괜찮다)요,

그대가 그대 안에서 자신을 부정하여 죽고 소멸했다가

오히려 큰나로서 부활하여 되살아나는

오묘한 진리가 바로 그대의 <내>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 대행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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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이
이 몸과 마음 조차 일어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그 무한의 관문임을 알아야하고 

일체가 딱 끊어진 초월의 배경 그 자체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 구경(마지막 궁극의 자리)이라. "

"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개체 마음의 잔영이 남아 이 세상 만물을 실제로 있다고 착각하는 힘도 넘어서
그것들을 환상으로 보기시작하면 서서히 그 자리가 열리어
초감각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우리의 형상이라면 형상입니다. "

" 끊어진 자리를 자각한다함은
곧 자기가 일체를 다쉬고
이 세상에 태어나오기 이전 자리,
그 근본의식 자리로 돌아가
그 근원자리에서
고요히 관하는 의식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

 


 

엄니와 부지깽이

 

 

엄니, 아직은 종아리에 닿는 초겨울의 날씨가 차가워요

그곳은 따뜻하신가요?

부지깽이로 이리 저리 나무를 헤치며 군불을 지펴 주시던

엄니가 그립군요.

아무리 군불을 지펴도 새벽이면 싸늘하게 식은 방

새벽이면 우리 삼남매는 벌레처럼 몸을 오그리고 이불속으로

파고 들었지요.

이불 한 채에 발만 넣고 둥그렇게 누워자도 행복했던 우리 가족!

따뜻한 아랫목은 우리들 차지 엄니 아부지는

늘 윗목에서 주무셨지요.


 

새벽이면 다시 군불을 지피러 일어나시던 엄니

그 때 어려운 살림 꾸리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엄니를 연상하는 낱말들은 오롯이 내 가슴에 살아있어

수시로 그리움을 터트리지요.

부지깽이, 그 부지깽이란 낱말이 얼마나

엄니를 생각나게 하는지....

초가집 처마에 낙숫물 그치면 솔솔 피어 오르던 고향의 아지랑이

난 오늘도 그리움 속 부지갱이를 찾아 고향에 내려 갑니다.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며

엄니 얼굴 그려 보지요

 산에 올라가 생솔가지 꺽어다 불을 지피며

매운 연기에 엄니도 나도 많이 울었었는데..

지금은 나 혼자 엄니 그리며 꺼억꺼억 소리내어 운답니다.

. 

 

아가야 눈 맵다 들어가거라 마구 등을 더밀던 엄니

엄니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쪼그리고 앉았던 아가는 이젠 70 이 넘은 할미가 되어

그 시절 엄니가 보고싶어 부지깽이 손에 들고

엄니와의 추억을 헤치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빠가 말을 듣지 않으면 혼내 준다고 부지깽이 들고

오빠 뒤를 쫓으시던 엄니

도망치는 오빠를 못 따라 잡는 척 그대로 돌아 오시던

그 마음 이젠 저도 알고 있답니다

오빠도 그 시절 기억하며 엄니를 그리워 하겠지요.

고향집 부억 아궁이 앞에서

콧등에 새까맣게 그을음 묻히며 행복했던 아가의

행복했던 그 시절의 나른 함이여!

 



삐거덕 싸립문 밀치고 들어서면

누구여? 엄니 나야

에그머니 니가 이 눈오는 밤에 웬일이냐?

엄마 보고 싶어 왔지

행주치마 달큰한 냄새로 품에 안아 주시던 엄니

엄니의 그 음성이 아직도 그립습니다.

 

 

엄니가 외가 가신날은 너무 심심해 하다가

사립문 앞에서 왼종일 서성대다 지쳐

 엄마 볼인 양 따뜻한 부뚜막에 볼을 대고

궁둥이를 치켜 올린 채 잠들어 버리지요

외가에서 돌아오신 엄마가 불끈 안아다 방에다 뉘이며

에그 내 새끼 내 새끼

하시던 엄마 음성을 들으면 얼마나 행복햇던지

지금도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내 고향집 어귀에 들어서면

눈물이 나서 하늘 먼저 바라 봅니다.

 


 

추억속 고향집 찾아 텃밭에서 고추를 따시던 엄니는

계시지 않아도

엄니가 맛있게 끓여 주시던 구수한 냉잇국 냄새를 맡으며

엄니 생각하고 왔어요

엄니 내년 봄에 다시 찾아와 봄 나물 뜯어 엄니 좋아하는

냉잇국 끓여 드릴게요

엄니의 부지깽이 여기에 놓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