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은 작용하는 곳에 있다

2014. 9. 3. 18:1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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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은 작용하는 곳에 있다

 

 

[본문]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존자가 답했다.

“성품을 보는 것[見性]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렇다면 스님은 성품을 보셨습니까?”

“예,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성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도대체 이것(불성)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입니까?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작용하고 있는데 왕께서 보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러한 작용이 있습니까?”

“왕께서 만약 작용한다면 그것 아닌 것이 없을 것이나,

왕께서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 본체 조차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것이 작용할 때에는 몇 가지로 나타납니까?”

“그것이 작용하여 나타날 때에는 여덟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여덟 가지로 나타나는 것을 나에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태(胎)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머물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고 하고,

코에 있으면 향기를 구별하고, 혀에 있으면 대화를 나누고,

손에 있으면 사물을 집거나 붙잡고, 발에 있으면 돌아다니거나 달립니다.

널리 드러내면 항하사와 같은 세계에 두루 차지만,

거두어들이면 티끌 하나 속에 들어갑니다.

지혜로운 이는 이것이 불성인 줄 알지만

모르는 이는 이것을 정혼(精魂)이라고 합니다.”

 

이견왕은 게송을 듣고 마음이 곧 열려 깨달음을 얻었다.

 

 

[사족]

 

이견왕은 남인도 향지왕의 아들로 월정다라의 장자로서 처음에는 불교를 탄압했지만,

나중에는 달마 스님에게 교화를 받아서 불교를 외호하게 됩니다.

달마 대사가 중국에 오시기 전에 벌써 왕은 깨달음을 이룬 제자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일반 불자님들께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을 한다면 역사적으로 출현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시는 부처님은 이미

형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우리 본래마음을 깨달으면 부처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있지만 형상이나 이름을 떠난 자리입니다.

이론적으로 ‘마음이 부처’라는 것을 이해한다고 해도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체험이 되지 않으면 어려운 부분입니다. 바라제 존자나 달마 스님께서는

우주의 근본 실상을 깨달아 일체를 하나로 보며 행을 하셨던 분입니다.

 

바라제 존자가 답했습니다.

“성품을 보는 것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성품은 본래마음[本心]을 말합니다. 본래자리에서 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이 우주가 하나로 열리게 됩니다. 우주이 근본 실상인 하나의 도리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나 자신이나 상대를 분별하는 생각이고, 근본 실상인 하나의 자리는

‘이 마음(성품)’이라고 해야 됩니다. 하나의 마음자리를 닦고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서 업이 맑아지면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스님은 성품을 보셨습니까?”

“예,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불성은 모양이 아니니까 사실은 볼 수가 없는데, 대화에서는 조카인 이견왕의

근기에 맞게 바라제 존자께서 불성을 보았다고 하시는 겁니다.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성과 마음은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르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면 일체가 마음인데, 불성이라는 것도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불성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마음차원이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님들께서 선문답을 하실 때는 우주를 하나로 보는 차원에서 선문답이 오고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견왕을 교화하기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 차원에서 불성을 표현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불성)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입니까?

 

마음의 작용을 묻고 계십니다.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작용한다고 하지만 마음은 볼 수 없습니다.

 

“지금도 작용하고 있는데 왕께서 보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도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이 생각하는대로 손발도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을 신통(神通)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작용할 때에는 몇 가지로 나타납니까?”

 

“그것이 작용하여 나타날 때에는 여덟 가지로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이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는 ‘태’라고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을 뿐입니다. ‘본다’는 것은 마음이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고,

마음이 빠져 나가면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눈은 기능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이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말을 하며, 손과 발을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불자님들이 정진을 통해서 탁한 기운인 업이 정화가 된다면 마음은 육안의 눈이

아니라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우주와 같은 큰 마음이기 때문에 제대로 마음을 쓴다면 항하사와

같이 큰 마음이지만, 작다고 하면 겨자씨보다도 작은 마음밖에 쓰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이 위대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대해서 집착을 한다면

바늘구멍보다도 작은 마음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정진을 통해 일체가 하나라는 사상차원에서 마음을 쓸 때 위대한 마음을

쓸 수 있게 됩니다.

 

바라제 존자가 말합니다.

 

“지혜로운 이는 이것이 불성인 줄 알지만, 모르는 이는 이것을 정혼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위대한 마음이고, 모든 것이 마음으로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마음을 정신이나 혼백이라고 한답니다.

혼백(魂魄)은 유교에서 쓰는 말인데,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육신과 더불어 땅에 묻힌다고 하며 둘로 보았는데, 절대 둘이 아닙니다.

 

이견왕은 바라제 존자의 ‘마음의 작용’에 대한 법문을 듣고는 그 순간 눈이 열렸답니다.

 

 

- <자유인의 길 직지심경> 중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저 비는
누굴 위해 저토록 오는걸까!






솟구치도록
마음속의 그리움
떨치지 못함때문일까!





너무나 보고싶어
너무나 그리워
목소리 듣고 싶어
몇번이나 망설이는 바보






미치도록

이 슬픔을 함께 하지 못할땐
지금 내리는 비처럼
쉽게 씻겨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슴엔 늘 그리움의

도화지만 그려질뿐
아무도 이 슬픔 대신할 수 없음을...






혼자만의

슬픔으로 빈 허공에 뜬채
왠지 무거운 마음
지니기 너무 벅차기만 하다.






가끔은 그대도

슬픈비를 맞아 본적 있나요!






사랑하면
마음도 슬픈비처럼
슬퍼지는가봐요!






슬픈비 빨랑 그쳐

내 마음의 환하게 웃는
보라빛 포도알 맺히는 예쁜 사랑으로...

모셔온글






                                             
가을이 깊어 감을 알리는  비 가오는 수요일입니다..!

 

그리움님들...!

1년 365일 마음으로 우정을 나누는

여러분과의 만남이 제게는 가장 행복한 기다림입니다.

 

또 하나는

건강하고 행복한 일상 속에서

언제나 서로를 위하여 응원해주는 

진실한 사랑과 우정이랍니다. 

 

아침 저녁으로 기온이 많이 내려갓습니다 ..

기온 차가 많이 나는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빗길 안전 운행들 하시고

오늘 하루도  

여유롭고 보람있는 시간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