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닦는 법(돈오와 점수)

2014. 9. 17. 09:1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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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닦는 법(돈오와  점수)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이 모든 성인의 길이라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이

 

이미 단박 깨달음이었다면 왜 점수를 빌리며, 닦음이 점차 닦는 것이라면 어째

 

서 돈오라 합니까?

 

돈과 점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씀하여 의심을 풀어 주십시오.“

 

 

 

 

 

 

“범부가 미(迷)했을 때는 사대(四大)로 몸을 삼고 망상으로 마음을 삼아, 자성

 

(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

 

가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한 생각에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보

 

게 된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가 없는 지혜 성품(無漏智性)이 저절로 갖추

 

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그러나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름 없음을 깨달았으나, 끝없이 익혀 온 습기(濕氣)

 

를 갑자기 없애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아 점점 훈습하여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母

 

胎)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聖)을 이루게 되므로 점수라 한다.

 

이를테면, 어린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든 기관이 갖추어 있음은 어른과 다

 

름이 없지만, 그 힘이 충실치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

 

로소 어른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다만 네 자심(自心)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을 쓰겠는가.

 

만일 방편을 써 앎을 구한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면서 다시 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어떻게 다시 보겠는가.

 

없어지지 않은 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하려 또 앎을 구할 것

 

인가.

 

만약 앎을 구하고자 한다면 문득 알지 못할 것이다.

 

다만 알지 못한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見性)이다.“

 

 

 

 

 

[普照 修心訣]

 

 

 

 

 

- 동국역경원 간 ‘불교성전’에서 발췌

 

수심결의 오늘 이 부분은 보조지눌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화엄5대종사 규봉종밀의 견해이기도 하지오. 오늘 말씀의 '문득 선지식의 가르침을 만나, 한 생각에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보게 된다'는 부분을 주목하시도록. 이런 말씀을 보면 보조스님의 견성은 '奇緣'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보편'이 아닌 것이지요. 깨침으로 인도하실 만한 법력 지닌 선지식 만나기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따라서 이런 부분이 제가 보기에 보조스님의 뛰어난 점이기도 하지만 한계이기도 합니다.기연을 만나면 바로 깨치지만, 기연을 만나지 못하면 영영 깨칠 기회가 없으니까요...
   
보조스님은 참으로 밝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화엄의 중요성도 보신 분이지요. 그러니 화엄과 선을 회통하려 하셨겠지요. 보조선은 '화엄선'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는 결정적 문제점은, 보현행원을 간과하셨다는 겁니다. 이는 아마 보조스님의 화엄이 화엄경을 직접 읽은데 유래하지 않고, 이통현 장자의 '신화엄론'만 보신 데 기인하지 않나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즉, 교과서 대신 참고서만 보신 것이지요. 스님같이 밝은 분이 화엄경을 직접 통달하셨다면, 이미 40화엄이 나온 고려 중기에 보현행원을 간과하실 리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을 간과(?)하셨기에, 마음의 불성을 보는데 그렇게 어려운 듯..
            
보조스님은 '우리가 바로 부처라는 걸 믿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 믿기에 견성도 못하고 범부를 못 벗어나고 있다'며 한탄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데!~하는 이 부분이 바로 보조불교의 한계인 겁니다. 보조스님의 분상에서야 우리가 부처인 게 쉽게 이해가 가겠지만, 중생의 분상에서야 믿기지 않는 게 당연하지요. 믿기지 않는 걸 믿어라 하니, 보조불교가 벽에 부딪치는 겁니다. 만약 스님이 보현행원을 아셨다면, 믿어라! 하고 말씀하는 대신에, 보현행원을 하라!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원효불교가 화엄, 보현행원불교임에도 그 시대엔 40화엄이 없기에 원효스님이 그 부분을 놓치셨는데, 보조스님도 그만 놓치셨으니..
            
보조스님이 그토록 한탄하셨던 '우리가 바로 부처!'라는 외침은, 20세기에 와서 광덕큰스님의 반야활구 선언으로 바로 한 마디로 집약되지요. '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이 바로 그겁니다. 이게 바로 보조스님이 그토록 알려주고 싶어하셨던, 그러나 실패하셨던 불교의 요체요 핵심입니다. 그런 일을 우리 큰스님이 하신 거에요! 그리고 그런 부처선언 후, 우리는 부처자리에서 마하반야를 펼쳐나가는 겁니다. 광덕불교가 이렇게 뛰어난 불교이고, 큰스님도 이런 당신의 견처를 불광제자분들에게 말씀하실 있음을 늘 흐뭇해 하셨어요. 그런데 이런 뛰어난 가르침을, 불광 불자님들도 모르고 계시니..._()_